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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 사도직의 주안점(교본 제39장:408 - 462면)
최경용(베드로)신부님
교본에서 제시하는 레지오 사도직의 서른다섯 가지 주안점(主眼點)은 레지오 단원이 사도직 활동을 할 때 명심하고 지켜야 할 규범과 행동 지침이다. 레지오의 사도직 활동은 주로 이웃의 구원을 위한 선교 활동과 봉사 활동이다. 그런데 활동 대상자로서 '영혼'(soul)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단순히 '영혼'보다는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인간'이나 '사람'이라는 단어가 훨씬 나을 것이다. 영혼만 구하려는 자세는 옳지 않기 때문이다.
1) 성모님과 함께 가지 않으면 영혼들에게 접근할 수 없다(교본 408 - 420면)
레지오 사도직은 구세주의 모친이며 인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모님은 사도들의 모후로서 레지오 사도직에 반드시 계셔야 할 필수적인 분이다. 레지오 창설자 프랭크 더프는 성모님과 함께 사람들에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레지오 단원들이 성모님의 모성애로써 활동 대상자들에게 접근하도록 하였다. 그는 협조 단원들에게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 계획에 필수적인 고리'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는데 그 내용을 발췌하여 교본 본문에 실어 놓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11개 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1)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마음속에 두고 계셨다.
(2) 마리아는 예언을 통하여 생생하고 확실하게 계시되었다.
(3) '천사의 아룀'은 성모님의 막중한 지위를 나타낸다.
(4) 성부께서는 구원 사업이 마리아에게 매이도록 하셨다.
(5) 성모님 없이는 참 그리스도교가 없다.
(6) 성자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어머니와 함께 계신다.
(7) 예수님과 아담, 성모님과 하와, 십자가와 나무.
(8) 성령께서는 항상 성모님과 함께 일하신다.
(9) 우리는 성모님께 어떤 지위를 드려야 하는가?
(10) 모든 행실은 성모님의 '피앗'(Fiat:그대로 이루어지소서)의 정신으로 해야 한다.
(11) 성모님과 더불어 주님을 찬미하라.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구원 계획의 중심에 계신 분이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한낱 피조물이지만 하느님의 자유 의지로 구원 사업에 중추적인 인물로 선택되었다. 마리아는 천주 성자의 강생과 함께 구세주의 어머니로 예정되었고 새 하와로서 구세사에 깊이 관여하였다.
마리아를 가장 먼저 하와와 비교 대조한 사람은 165년에 순교한 성 유스티노이고 그 다음이 성 이레네오이다.
십자 나무로써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성모님은 생명 나무로써 인류를 죽게 한 아담과 하와와 대조된다. 예수님은 새 아담(로마 5,12-21; 1코린 15,45-47 참조)이시고 성모님은 새 하와이시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함으로 생명 나무에서 죽음을 가져왔다면 새 아담과 새 하와는 성부께의 순종함으로 십자 나무에서 생명을 가져왔다. 이것은 '첫 복음'(창세 3,15)에서 예언되었듯이 여인과 그 후손에 연관되어 있다.
구약성서 안에 마리아가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예언을 통해 생생하고 확실하게 계시되었다(이사 7,14; 미가5,2; 창세 3,15; 1열왕 2,19 참조)마리아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모셔 왔기 때문에 마리아 없이는 참 그리스도교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참 그리스도교를 가져오게 한 성모 마리아를 '복되다 일컫고' 그분께 감사드려야 한다. 성탄 전야에 마리아를 문전에서 박대한 사람들은 마리아가 잉태한 구세주 예수님을 박대한 것이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의 어머니와 함께 계신다.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의 경배 때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계셨고 성전에서의 봉헌식, 가나의 혼인잔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성모님과 함께 계셨다. 이처럼 성자께서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언제나 당신의 어머니와 함께 계셨다.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대천사가 나타나 주님 탄생을 예고하면서 동정 잉태, 천주 강생, 천주의 모친이 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마리아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대답하며 그 내용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이 대답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항구하게 실천하고 봉사하겠다는 결단이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응답을 통하여 구세주를 인류에게 보내 주셨다. 우리 역시 성모님의 '피앗' 정신으로 행동하고 활동해야 한다.
성령은 항상 성모님과 함께 일하신다. 마리아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성령의 배필이다. 구세주는 성령의 힘으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 주님 탄생은 오로지 성령의 힘과 마리아의 자유로운 동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주님 탄생은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고 그분의 힘이 마리아를 감싸 주신 덕분이다. 또한 마리아가 생명을 바칠 각오로써 성령께 전적으로 협력한 덕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 강림 때에도 성모님께서 함께 계심으로써 교회가 탄생하였으니 성령과 마리아는 늘 함께 일하시는 분들이다.
우리는 마리아께 어떤 지위를 드려야 하는가? 우리는 마리아를 믿음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결코 안 되지만 하느님의 어머니이므로 피조물 가운데 으뜸가는 지위를 드려야 한다. 성모님의 지위는 무엇보다도 구세주의 어머니요 인류의 어머니이다. 성모님은 혈연 관계뿐 아니라 신앙 공동체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구세주의 어머니시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는 도중에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그리고 군중 속의 어떤 여인이 성모님을 복되다고 외쳤을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고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 3,35; 루카 11,27-28 참조)라고 대답하셨다. 이것은 구원 문제에서 혈연 관계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성모님보다 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한 분은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행복한 여인'이 되셨고 초대 교회로부터 "온 백성이 칭송하는 복된 분"이 되셨다.
성모님은 인류의 어머니로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은총의 중개자 역할을 하신다. 성모님이 결정적으로 인류의 어머니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성모님과 사랑하는 제자를 모자(母子) 관계로 맺어 주셨기 때문이다(요한 19,26-27 참조). 성모님은 은총의 중개자, 은총의 수로(水路) 역할을 하신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의 첫 기적도 성모님의 중개 덕분이었다. 성모님께서 중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도 기도한다.
마리아는 인류의 어머니로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 기도할 때에도, 찬미할 때에도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주님을 찬미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을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마리아께 바치는 것이 곧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다. 우리가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 바치는 신심을 지닐 때 구원 사업에서 성모님의 역할을 올바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도직 활동을 할 때 레지오 마리애의 취지는 사람들에게 "마리아를 거울처럼 비추는 것"이다. 단원들은 늘 마리아와 함께 활동 대상자들에게 접근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무한히 값진 영혼들을 끝없는 인내와 친절로 돌보아야 한다(교본 421-424면);
13) 하나하나의 영혼을 찾아서 이야기를 나누자(교본 440-441면)
레지오 단원이 사도직 활동을 할 때 사용하는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따뜻한 마음씨와 다정한 태도이다. 따뜻한 마음씨와 다정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지 않고서는 활동에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버림받은 사람들, 난폭한 사람들을 만날 때 더욱 자비로운 태도를 보여야 한다. 단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 방법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성모님께 자비의 왕국만을 주시고 정의의 왕국은 당신 스스로 간직하고 계신다는 말이 있다. 세계 최초의 쁘레시디움 명칭도 '자비의 모후'였다. 그렇게 이름을 정한 것은 이 쁘레시디움에서 처음 착수한 활동이 자비의 수녀회가 운영하는 병원을 방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단원들은 자신들이 쁘레시디움의 이름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 성모님께서 그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성모님은 레지오가 지향해야 할 자비와 친절의 특성을 처음부터 밝혀 주셨다.
꽃은 부드럽고 따뜻한 곳에서는 활짝 피어나지만 쌀쌀한 공기 속에서는 움츠러든다. 레지오 단원들이 따뜻한 마음씨를 지니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정성껏 도와주겠다는 자세로 활동한다면 어느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한다. 일반적으로 레지오 단원들은 죄에 물든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 나선다. 그런데 레지오 단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반항심이 강해 부드러움이나 영적 생활의 흔적도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런 사람들을 그냥 팽개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겠지만 단원들은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까지도 매우 소중히 여기셨기에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어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과 함께 있도록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어도 자기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하셨다. 이 말은 한 사람의 구원이 온 세상보다도 더 존귀하고 가치 있다는 뜻이다. 다루기 힘든 사람들은 곧 분노를 터뜨릴 듯한 태도를 보인다. 이들을 더 자극하면 오히려 죄를 짓게 하고 반항심만 키우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끝까지 인내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고 친절하게 대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런 일화가 있다. 미국의 어떤 고아원 원장이 원아들에게 줄 성탄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을 하러 다녔다. 그러다 어느 카페에 들어가 술을 마시며 한창 흥겨워하고 있는 손님들에게 애원하였다. 그들은 귀찮아하면서도 몇 푼씩 도와주었다.
그러는 동안 한가운데 탁자 앞까지 왔다. 그런데 손을 내민 원장에게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술잔을 내던졌다. 술잔은 산산조각이 나고 원장의 얼굴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 광경을 주시하고 있을 때 그는 차분하게 손수건을 꺼내어 피를 닦으면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제게 준 선물로 알고 받겠습니다.
그런데 불쌍한 고아들에게는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하고 응수하였다. 그것을 본 모든 사람들은 감동하여 서로 돈을 더 내어놓았다. 이윽고 험상궂은 사나이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가 있던 탁자 위에는 "이 돈을 고아들의 선물을 사는 데 쓰시오."라는 쪽지와 함께 돈뭉치가 남겨져 있었다. 이처럼 싸움은 손해 아닌 것이 없고 인내와 친절은 이익 아닌 것이 없다. 아무리 완고한 마음이라도 단원들이 끝없는 인내와 친절로 대한다면 마침내 유순하게 펴지고 말 것이다.
3-4) 레지오 단원의 용기, 상징적 행동(교본 425-430면)
선교 활동을 하면서 단원 생활에 익숙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용기가 생긴다. 용기는 단원들이 지녀야 할 필수적인 자질이고 레지오 정신을 드러내는 덕행이다. 용기가 부족한 단원은 군인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고대 로마 군단의 군인들이 황제 영토 확장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면서 용기를 발휘하고 용맹을 떨쳤다면 성모님 군단의 군인들은 그리스도 왕국의 영토 확장을 위해 그와 같은 용기를 보여야 한다.
단원들은 사도직 활동을 수행할 때 체면을 차려서는 안 된다. 체면은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소심한 마음이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게 한다. 단원들은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할 때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먼저 말문을 여는 용기를 보여야 한다. 그리고 병원의 공동 병실을 방문할 때 배당된 활동 대상자뿐만 아니라 다른 환자들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그런 용기가 없기 때문에 활동을 소홀히 하거나 소극적으로 하고 활동 보고 내용이 빈약해진다.
성모님은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예수님께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시도록 할 때 체면을 차리지 않으셨다. 아직 기적을 행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성모님은 망설이지 않고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일렀다(요한 2,4-5 참조). 단원들은 체면에 구애받지 말고 용기의 표본인 성모님을 본받아야 한다.
중국이 공산화될 당시에 보여 준 중국 레지오 단원들의 용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은 공산 정부에게 탄압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고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2만 명 이상이 투옥되고 2천 명 이상이 순교하였다. 그것은 도덕적 용기를 지닌 레지오의 정신 덕분이었다.
활동에 대한 레지오의 기본 원칙은 단원들이 성모님의 정신으로 최대한의 노력을 쏟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활동일지라도 불가능하다고 미리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인간적인 능력에만 의존하게 되면 아예 어려운 활동은 착수조차 못할 것이다. 단원들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활동해야 한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라도 당면한 실제 과제라면 성모님의 군인으로서 용기를 발휘하여 시작부터 해 놓고 볼 일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가 레지오의 정신이다.
레지오는 불가능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다. 그것은 상징적 행동이다. 상징적 행동(Symbolic Action)이란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부딪힐 때 그 일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하느님의 은총에 의존하면서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해결해 나가는 행동이다. 이 행동은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격언을 이행하는 레지오의 활동 방식이고 행동 철학이다. 상징적 행동은 반드시 성모님과 일치하여 성모님과 함께 해야 한다. 성모님은 은총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이다.
레지오 창설자 프랭크 더프는 성모님과 일치하여 상징적 행동을 함으로써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예컨대 매음의 소굴을 소탕하고 윤락녀들에게 주말 피정을 실시하는 문제, 노숙자들과 미혼모들을 위한 숙박소 마련 및 운영 등의 문제가 도전적인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켜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사령관인 성모님을 본받아 체면을 없애고 용기를 십분 발휘하여 불가능해 보이는 어려운 활동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상징적 행동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
5)-6) 적극적으로 활동하자. 활동은 쁘레시디움이 주관한다(교본 430-433면);
15) 막연한 사도직은 진정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교본 442-443면)
레지오 마리애는 기도를 중요시하는 신심 단체이면서도 동시에 활동에 치중하는 활동 단체이다. 레지오 주회의 3대 요소는 기도, 활동, 공부이다. 이 중에 활동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레지오 활동의 취지는 성모님의 모성애를 본받아 구세주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에게 모셔다 드리는 것이다.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사도직 활동은 하느님께 영광이 되므로 단원들은 기도를 기초로 삼아 활동에 치중해야 한다.
주회에서 묵주기도를 포함한 기도 시간보다 활동 보고와 활동 배당 시간이 더 짧다면 잘못된 것이다. 주회를 한 시간 이내에 빨리 해치우고 미사 참례하는 쁘레시디움도 잘못된 것이다. 활동 보고 내용이 빈약하다보니 회합 소요 시간을 한 시간도 채우지 못하는 것이다. 활동을 소극적으로 하기 때문에 연중 사업 보고서의 특기 사항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특기 사항란이 아예 공백인 쁘레시디움도 있다. 1년 동안 특기할 만한 활동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그 원인은 단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기 때문이고 단장이 쁘레시디움에서 활동 배당과 활동 보고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레지오의 근본 정신이 결여된 결과이다. 금년(2003년)은 한국 레지오 마리애가 활동을 시작한지 50주년(Golden Jubilee)이 되는 해이다. 이 황금기에 아쉽게도 레지오에 가장 시급한 과제가 단원들의 '레지오 마리애 정신 회복'이다. 쁘레시디움에서 주관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려면 무엇보다도 투철한 레지오 정신 회복과 복무 자세가 요구된다. 단원들은 한 주간의 모든 시간을 복무 시간으로 여겨야 하며 최소한 일주일에 두 시간은 활동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어떤 쁘레시디움은 기도도 활동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러나 기도, 미사 참례 등의 신심 행위는 원칙적으로 사도직 활동으로 간주할 수 없다. 활동은 못하고 기도만 했다고 보고하는 단원에게 '수고했습니다.'라고 단장이 칭찬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활동을 하지 못한 사유를 밝히고 분발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단장 자신이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거나 활동거리를 찾지 않아 활동 배당을 제대로 해 주지 않으면 쁘레시디움에서 권위 있게 활동을 주관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단원들의 자유 활동에 의존하게 된다. 단장의 그러한 처사는 레지오의 조직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레지오의 활동은 쁘레시디움에서 배당한 것이어야 하며 결코 단원 각자의 기호에 따라 선택하는 활동이어서는 안 된다. 물론 우연히 발견하여 수행한 자유 활동도 단장이 인정하면 레지오 활동으로 간주하지만 원칙적으로 단원 각자가 활동을 마음대로 골라서 레지오의 이름으로 수행해서는 안 된다.
단장이 당면한 실제 활동거리를 찾아 구체적으로 배당을 해주지 않고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선교 활동과 봉사 활동, 자유 활동을 배당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가치가 없다. 단장이 단원들에게 활동 대상자의 인적 사항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어야 적극적으로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단원들이 활동 대상자를 직접 만나지는 않고 전화나 전자 메일(e-mail)로 활동하는 것은 적극적인 활동이라고 볼 수 없다.
단장을 비롯한 모든 레지오 단원들은 교본 본문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명심해야 한다.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수행하지 않는 레지오는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레지오이다. 군대가 전투에 참가하기를 거부한다면 군대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어떤 형태로든 적극적으로 활동을 수행하지 않는 쁘레시디움의 단원들이 있다면 이들은 레지오 단원이라는 이름을 지닐 자격이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영신적 신심 행위만으로는 적극적인 활동을 수행해야 하는 레지오 단원의 의무를 채우지 못한다.”
7) 짝을 지어 방문 활동을 하는 것은 레지오의 규율을 보호한다(교본 433-434면);
9) 집집마다 방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교본 435-436면);
20)공공시설을 방문할 때의 몸가짐(교본 447-448면)
레지오의 영성은 개인 성화에 기반을 둔 공동 영성이다. 공동 영성이란 함께 만나는 형제자매들이 사랑으로 일치함으로써 주님과의 일치에 도달하는 영성이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19-31 참조)에서 알 수 있듯이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레지오는 주회합과 방문 활동을 통해 공동 영성을 실천한다. 가정 방문이나 병원 등의 공공 시설을 방문할 때에 혼자가 아니라 둘씩 또는 셋이서 짝을 이루어 활동한다.
짝을 지어 방문하는 것은 레지오의 규율을 보호하는 장치이다. 2인 1조(二人一組) 활동은 레지오가 초창기부터 실시해 온 규율이다. 이 규율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을 본뜬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를 뽑아 앞으로 찾아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루가 10, 1).
짝을 지어 방문하는 것을 규율로 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여러가지이다.
① 레지오 단원들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함,
② 단원 서로 간에 힘과 용기를 북돋우기 위함,
③ 약속된 방문 활동을 충실히 지키기 위함,
④ 공동 영성을 실천하기 위함,
⑤ 도제 제도(徒弟制度)를 활용하기 위함이다.
2인 1조 중에 한 명이 사정상 활동을 못할 경우 나머지 한 명이 혼자서라도 활동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2인 1조 제도를 아예 무시하거나 형식상 2인 1조로 편성해 놓고 활동은 혼자서 하도록 하는 쁘레시디움이 많아졌다. 물론 낮에 직장 생활을 하는 단원은 어쩔 수 없이 혼자서라도 활동해야 한다. 그러나 레지오가 공동 영성을 추구한다는 점을 단장이나 단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쁘레시디움은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제자들의 숫자 12명을 기준으로 구성된 소공동체이므로 단원들이 공동체 정신을 발휘해야 레지오가 침체되지 않을 것이다.
레지오의 주요 활동은 방문 활동이다. 특히 가정과 병원 방문은 전통적인 레지오 활동으로서 훌륭한 열매를 거두는 방법이다. 레지오에서는 가정 방문을 할 때 집집마다 방문하여 친교의 발판을 마련하도록 권장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이나 환경이라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한 핵가족화와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는 현실을 고려하면 집집마다 방문하는 활동은 부작용이 우려되어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낮에는 비어 있는 집이 많고 저녁에는 가정 방문이 실례가 된다. 낯선 사람들이 집 앞에서 서성거리면 상품 판매원이나 도둑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타종교 단체에서도 귀찮을 정도로 방문하기 때문에 천주교인이라 해서 환영하지는 않는다. 가두 선교를 통해 가가호호 방문을 실시해 보지만 효과는 신통치 않다. 아무리 천주교회에서 왔다고 알리면서 정중하게 인사해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차라리 신자들의 집만 골라 방문 활동을 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예비신자, 예비자 교리 중단자, 새 영세자, 쉬는 교우 등의 신자 가정 방문에 역점을 두면 좋을 것이다.
공공 기관 예컨대 병원, 교도소, 양로원, 고아원, 기타 사회 복지 시설 등을 방문할 때에는 그 기관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 특히 병원 방문에서는 규정된 시간을 지키고 약품이나 그 밖의 금지된 물품을 환자에게 가져다 주어서는 안 되며 간혹 내부 분규가 있을 때 어느 한 편을 지지해서도 안 된다.
가가호호 방문을 통한 호의와 친교보다는 신자 가정 방문 그리고 사회 복지 시설과 병원 방문에서의 호의와 친교가 좀 더 용이하고 효과도 클 것이다.
8) 레지오 활동의 본질은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교본 434-435면);
14)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다(교본 441-442면);
16)감화의 비결은 사랑이다(교본 443면)
레지오는 신심, 활동 단체이지만 친교도 중요시하는 단체이다. 친교로써 친화력과 결속력을 다지게 된다. 또한 친교를 통해 일치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레지오는 단원들 간의 친교뿐만 아니라 활동 대상자들과의 친교에도 비중을 둔다. 왜냐하면 레지오 방문 활동의 본질은 활동 대상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고 해서 빈 깡통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친근감을 가지고 신중하고 침착하게 개인 접촉을 한다. 상냥하고 친절한 언행과 사랑으로 상대방을 대한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낸다. 고운 말은 고운 마음에서 나오고 거친 말은 거친 마음에서 나온다. 고운 말을 쓰는 사람은 몸가짐도 곱다. 사랑이 있다면 욕설이 나올 수 없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야고보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훈계하고 있다. "우리는 같은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되겠습니다”(3,9-10).
가정 방문이나 개인 접촉 활동을 할 때 상대방의 허물이 발견되더라도 쉽사리 충고해서는 안 된다. 레지오 단원들이 상대방의 결점이나 들추어내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레지오의 방문 활동 자체가 지속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레지오 단원들을 신뢰할 수 있는 친구로서가 아니라 마치 조직을 위해서 정탐 활동을 하는 사람들로 오해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는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도록 힘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도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릴 때 예수님과 예수님을 팔아먹은 제자 유다 이스가리옷의 모델이 될 사람을 찾고 있었다. 마침내 성전에서 기도하며 거룩하게 보이던 청년을 예수님 모델로 삼았고,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술집에서 험상궂은 얼굴로 싸우는 청년을 유다스 이스가리옷 모델로 삼았는데 알고 보니 같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죄인도 성인이 될 수 있고 성인도 악인이 될 수 있다. 단원들은 악인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성인 앞에서 주눅들지 말아야 한다. 단원들은 죄인이건 성인이건 누구를 막론하고 성덕에 더욱 진보하도록 활동해야 한다. 레지오의 마침 기도문에 나오는 내용처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불로써 미지근한 이들을 열정으로 뜨겁게 하고 죄로 죽은 이들을 다시 살아나게 해야 한다.
단원들 중에는 인정머리 없는 사람, 시시콜콜 잘 따지는 사람, 자존심을 내세워 양보를 잘 안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대인 관계에서 자칫 충돌하기 쉽다. 성격이 맞지 않고 싫은 사람이라 하여 친교를 하지 않는다면 레지오 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없다. 친교에는 반드시 사랑이 수반되어야 한다. 사랑은 친교와 감화의 비결이다. 사랑이 있다면 양보하고 이해하고 포용한다. 단원은 하느님 사랑과 성모님 사랑의 전달자이다. 활동 대상자에게 성모님의 모성애를 발휘해야 한다. 사랑은 아무리 퍼올려도 마르지 않는 샘이다. 단원들은 활동의 성패가 사랑과 친교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