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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신학』 2019년 9월호, pp.38-44 게재 원고
장로는 어떤 직분인가?
변 종 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한국 교회는 ‘장로들’이 많이 있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중세를 지나는 동안 ‘장로’ 직분은 교회 역사에서 사라졌다. 가톨릭교회에서 ‘장로’는 ‘제사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이처럼 역사상 사라진 ‘장로’ 직분을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이 회복하였으나, 처음에는 완전한 회복이 아니라 제네바 시의회 의원들 중에서 ‘장로’를 선출하는 타협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거치면서 장로회 정치제도가 정립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발전되고 한국에 들어와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직’이 유교적 문화와 접목되면서 하나의 벼슬처럼 여겨지고 권세와 명예직으로 이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의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아 장로는 ‘교인의 대표’라는 생각이 많이 퍼져 있다. 목사는 고용된 사장이요 장로는 교회의 주인이라는 비성경적 사상이 만연해 있다. 이로 인하여 당회 안에서의 갈등이 심각하며 한국 교회 내의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당회 운영의 성패가 목회의 성패를 좌우하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장로회 제도에 대해 여러 가지로 대안 모색이 시도되고 있다. 장로임기제와 시무투표제, 목양장로제, 가정교회, 무장로제 등 여러 가지가 모색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제도는 불완전하며, 자칫하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서 먼저 이런 논의의 기초로서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에 대해 간략히 서술해 보도록 하겠다.
I. 고대 중동의 장로들
‘장로’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나이든 사람이 마을에서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래서 장로 직의 기원은 아주 오랜 옛날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나이든 자’란 뜻의 원로(元老)였다. 나이든 원로들이 마을이나 그 사회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 관습은 중동 지역에 아직도 남아 있다.
구약 성경에서는 제일 먼저 창세기 50장 7절에 ‘애굽의 장로(원로)들’이 나타난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가 함께 올라갔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애굽 땅에 이미 장로(원로)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디안에도 ‘장로들’이 있었고(민 22:4), 모압에도 ‘장로들’이 있었다(민 22:7).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출애굽기 3장 16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처음 나타난다.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 이 말씀대로 모세와 아론이 애굽에 돌아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였다(출 4:29-31).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장로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II. 구약 시대의 장로들
출애굽 후에도 ‘장로들’의 존재는 없어지지 않았다. 40년 동안 광야를 지날 때에는 하나의 군사 조직으로서 열두 지파의 우두머리와 각 지파 안의 가족들의 우두머리가 있었으며, 또한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가르쳐 준 바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의 조직도 새로 생겨서 이스라엘 백성을 재판하였다(출 18:21-26).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장로들’은 계속 존재하였으며, 어떤 마을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거나 결정할 때(룻 4:2; 신 19:12 등), 또는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에도 장로들이 모여서 의논하였다(삿 21:16; 삼상 4:3 등). 그런데 중요한 사실 하나는 ‘장로’는 혼자 나타나지 않고 항상 여러 장로들이 함께 나타나서 함께 결정한다는 것이다.
III. 유대교 회당의 장로
바벨론 포로 후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회당(會堂)’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회당은 단지 종교적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대인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 후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본토에서도 회당을 중심으로 생활하였다.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율법을 배웠으며, 회당은 그 마을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런데 각 지역의 회당을 운영하는 조직으로 7명의 장로들이 ‘장로회’(산헤드린)를 이루어 회당을 운영하였다. 이 7명의 장로회는 또한 그 마을(성읍)을 운영하였다. 그러니 마을 운영기구와 회당 운영기구의 조직이 일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섞여 사는 도시의 경우에는 이것이 곤란했다. 이 경우에는 유대인 장로들로 구성된 회당 운영위원 3명을 따로 선출하였다고 한다(cf. A. van Ginkel, De ouderling, Amsterdam: Ton Bolland, 1973, p.16).
예루살렘에는 ‘예루살렘 대공회’가 있었는데, 의장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합하여 총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예루살렘 공회’는 유대 나라 전체의 일들을 담당하였다. 종교 문제뿐만 아니라 입법, 행정, 사법의 권한을 가진 막강한 기구였다. 이 예루살렘 공회의 회원인 ‘장로들’은 상당한 능력을 가진 자들로 생각된다(cf. 눅 23:50-51).
IV.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
오순절 날에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의 신약 교회로서 유대 교회와 이방 교회의 모체 교회가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에 열두 사도가 중심이 되어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성전에서 전체 모임을 가지고 성도의 가정에서 소규모 모임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행 2:46; 3:11; 5:42).
그러나 교회가 계속 성장함에 따라 조직 정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특히 가난한 자들 구제에 힘쓰면서 구제 사역과 관련하여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행 6:1). 그래서 열두 사도와 제자들이 의논하여 세운 것이 ‘일곱 사람’(the Seven)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보통 ‘집사’로 보지만 ‘장로’로 보기도 하고 또는 ‘사도들의 보좌하는 특별 집행부’로 보기도 한다. 이들이 맡은 사역을 보면 ‘재정 출납하는 일에 있어서 섬기는 것’이다(행 6:2). 예루살렘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아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교회가 식사를 제공했는데(오늘날의 ‘무료 급식 사역’ 같은 것), 이에 필요한 양식과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서는 재정이 필요하였다. 물건을 살 때마다 재정을 지출해 주어야 하고 장부에 기록하여야 했다. 처음에는 사도들이 이 일을 맡아서 봉사했으나 일이 많아지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접대(재정출납)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고 하여(행 6:2),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일곱 사람을 선출한 것이다. 따라서 그 맡은 일을 보면 ‘집사(執事)’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들 ‘일곱’은 예루살렘 교회의 상황과 관련된 특수한 직분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스데반은 구제 사역의 일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회당에서 전도하고 대중 앞에서 연설하기도 하였다(행 7장). 빌립 같은 경우는 후에 가이사랴에서 활동했는데 ‘일곱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이라고 말한다(행 21:8). 성경 원문에는 ‘집사’란 말은 없고 ‘전도자’란 말이 나타난다. 빌립은 원래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곱’ 중 하나로 구제 사역을 감독하고 재정 출납하는 일을 맡아 봉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많은 성도들이 흩어질 때에 빌립도 예루살렘을 떠나 가이사랴로 왔을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식사로 돕는 ‘구제 사역’은 예루살렘 외 지역에서는 아마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그의 ‘구제 사역’은 자연히 종료되고 ‘전도 사역’만 감당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선출된 ‘일곱’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들이었기 때문에(행 6:3) 복음 전하는 일을 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프레스뷔테로스, presbu,teroj)가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것이 의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기록이 없다. 11장 30절에 그냥 ‘부조’(扶助, 구제물품)를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보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15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여 주요한 문제에 대해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은 ‘기독교 장로’요 ‘교회 장로’인데 어떻게 선출되었는가 하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사람이 믿고 교회에 들어왔을 때 그 중에는 ‘유대교의 장로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교회의 장로’로 인정받고 사역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호칭도 ‘장로’ 그대로이고, 유대교나 기독교나 처음에는 외견상 큰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유대교 회당의 장로가 기독교회의 장로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별도의 절차 없이 자연스럽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V. 이방 교회의 장로들
그러나 바울이 설립한 이방 교회의 장로들에 대해서는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였다”고 말한다(행 14:23). 바울 일행이 각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나서 떠나갈 때에 그 교회를 지도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아직 신학교도 없었고 교역자도 없었기 때문에 그때 바울이 택한 방법은 교회 성도들 가운데 ‘장로들을 택하여’ 세우는 것이었다. 이때 바울 일행은 금식 기도하였다고 한다(행 14:23).
여기서 ‘택하여’(케이로토네산테스, ceirotonh,santej)란 단어의 원형은 ‘케이로토네오’(ceirotone,w)이고 그 뜻은 ‘손을 들다’이다. 옛날 그리스에서 손을 들어 투표한 데서 온 단어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후에 일반적으로 ‘선택하다, 선출하다’(choose, elect)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 나아가서 ‘임명하다, 세우다’(appoint, install)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Bauer). 그런데 여기 사도행전 14:23에서는 (바나바와 바울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케이로토네산테스(택하여)”라고 하였기 때문에 ‘임직하다, 세우다’의 의미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Bauer, Keulers). KJV은 “had ordained”로, NKJV, NRSV, NIV와 ESV는 “(had) appointed”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바나바와 바울이 장로들을 ‘세웠다’는 말은 그들이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투표해서 선출하게 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고린도후서 8장 19절에서는 구제 사역을 위해 바울과 동행하는 한 형제는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라고 말한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케이로토네떼이스’(ceirotonhqei,j)인데 ‘택함받아, 선출되어’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화란개혁교회의 성경인 화란국역(SV, 1637)은 사도행전 14장 23절에서 ‘손을 들어 선출하였다’로 번역하였다(또한 F. W. Grosheide, De handelingen der apostelen, I,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42, p.470f. 참조). 칼빈은 이 구절 주석에서, 모든 사람들의 투표로 장로들을 선출하게 했다. 무질서한 경우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사회자(중재자)로 개입했을 것이라고 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 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울 때에 금식 기도하는 가운데 온 교회를 불러 모아 투표를 통해 세웠을 것이다. 물론 바울과 바나바가 이 모든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겠지만, 그러나 독단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전체 교인의 동의를 얻어(투표를 통해) ‘장로들’을 세웠을 것이다(cf. 고후 8:19; 몬 14절).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 교회에 세운 ‘장로들’은 그들이 떠난 후에 교회를 돌보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치리) 장로들과는 다르게 ‘교역자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사도행전 14:23 주석에서 이들을 줄곧 ‘목자들’(pastors)로 번역하고 있다. 이들 장로들은 아직 ‘교육 장로’와 ‘치리 장로’로 구별되기 이전의 ‘장로’이며 ‘교회 원로’ 또는 ‘교회 지도자’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장로들’은 예배 인도와 설교, 가르침과 심방과 훈계 등의 여러 사역을 감당하였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 중에서도 주된 역할을 하는 장로가 있었을 수 있으며 또 말씀 사역을 잘하는 장로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말씀 사역에 전무하는 ‘목사’와 치리를 담당하는 ‘장로’로 엄격히 구별되지는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야고보서 5장 14절을 이해할 수 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여기서 ‘교회의 장로들’은 오늘날처럼 목사가 아닌 장로란 뜻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를 뜻한다. 오늘날의 목사와 장로를 합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상황에서는 아직 전문 교역자가 배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풀타임 교역자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장로들’은 대개 자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교회를 섬겼으며, 말씀과 교육과 심방과 돌봄 전체를 포괄적으로 담당하였다.
VI.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칼빈은 여기서 ‘두 종류의 장로’가 있다고 보았다. 즉, 다스리면서 가르침의 직무도 가진 장로와 다스리지만 가르침의 직무를 가지지 않은 장로이다. 오늘날 장로교 헌법에서 많이 채택하고 있는 바의 ‘가르치는 장로’(교육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치리 장로)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이처럼 분명히 구별된 ‘두 장로’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초대 교회의 장로들은 오늘날처럼 목사(교육 장로)와 장로(치리 장로)로 명확하게 구분된 것이 아니었으며 이 둘의 직무가 통합된 형태의 직분이었다. 그 증거로 디모데전서 3장 2절에 보면 감독은 “... 가르치기를 잘하며”라고 하였다. 여기서 ‘감독’(에피스코포스, evpi,skopoj)은 ‘장로’(프레스뷔테로스, presbu,teroj)와 같은 직분을 가리킨다. 우리는 사도행전 20장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청하였는데(17절), 성령께서 그들을 ‘감독자’로 삼아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다고 한다(28절). 따라서 ‘장로’와 ‘감독’은 같은 직분임을 알 수 있다. ‘장로’는 유대 지역에서 통용되는 명칭인데 반해, ‘감독’은 헬라-로마 사회에서 많이 사용되던 명칭이다(cf. J. B. Lightfoot, Saint Paul's Epistle to the Philippians, Grand Rapids: Zondervan, 1953, pp.95-99).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항상 ‘장로’로 나타나며, 로마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빌립보 교회에서는 ‘감독’으로 나타난다. 사도행전 20장에서는, 살펴본 바와 같이, ‘장로’와 ‘감독’을 번갈아 사용한다. 디도서 1장에서도 처음에는 ‘장로들’이라고 말했다가(5절), 조금 후에는 같은 직분을 ‘감독’이라고 말하고 있다(7절). 따라서 신약 성경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같은 직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장로’ 또는 ‘감독’의 직무에 대해 “... 가르치기를 잘하며”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딤전 3:2), 또한 “...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라고 말한다(딛 1:9). 따라서 장로의 직무에는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들어 있다. 따라서 ‘가르치는 장로’와 ‘(가르치지 않고) 다스리는 장로’로 이원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장로는 기본적으로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 목사가 아닌 장로의 경우에는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거나 구역 모임에서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라는 명칭도 오해의 소지가 많다. 왜냐하면 목사는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일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말하자면 목사를 ‘가르치며 다스리는 장로’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목사 아닌 장로도 다스리기만 해서는 안 되며 또한 (부분적으로) 가르치기도 해야 한다. 즉, (치리) 장로도 가르치기도 하고 심방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스린다’거나 ‘치리(治理)한다’는 말은 그렇게 좋은 용어가 아니다. 장로는 무슨 관리가 된 것처럼 교회에서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치리한다’는 말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검사나 판사처럼 벌준다는 어감이 강해서 거부감이 든다. 교회는 그런 ‘다스림’과 ‘벌줌’이 지배하는 교권적, 경찰국가적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0장 28절의 ‘보살피다’(개역한글판: 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포이마이네인’(poimai,nein)인데 양을 치는 것, 양을 돌보는 것, 즉 목양(牧羊)을 의미한다. 양이 잘 자라고 있는지, 병든 것은 없는지, 위험에 처해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서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하는 목자(牧者)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곧 ‘장로’요 ‘감독’(돌보는 자)인 것이다.
VII. 양을 치는 목자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 곧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요 22:16).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신 것은 같은 내용을 조금씩 표현을 달리 해서 물으신 것이다. 세 번 반복하신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말씀 곧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절), “내 양을 치라”(16절), “내 양을 먹이라”(17절)는 것도 다 같은 내용이다. 16절의 “내 양을 치라”는 것은 “내 양을 돌보라”는 뜻이다. 여기서 ‘돌보다’는 단어는 원어로 ‘포이마이노’(poimai,nw)인데 ‘양을 돌보는 것, 목양하는 것’을 의미한다(cf. 행 20:28).
그리고 이 명령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나아가서 모든 사도들에게, 그리고 모든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후에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라고 하면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라고 말한다(벧전 5:1-2). 여기에 사용된 ‘치다’는 단어도 ‘포이마이노’(poimai,nw) 동사이다. 즉, 목자(포이멘, poimh,n)로서 양을 돌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장로’의 직무는 ‘양을 치는 것’ 곧 ‘양을 돌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베드로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께 받은 말씀을 훗날 소아시아 반도의 여러 교회 장로들에게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목사’와 ‘장로’의 직분과 직무가 오늘날처럼 구분되어 있지 않고 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또한 에베소서 4장 11절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직분들을 말하고 있는데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말하고 있다. 칼빈은 마지막의 ‘목사’와 ‘교사’를 다른 직분으로 보고 ‘교사’를 당시의 제네바 대학 신학 교수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목사와 교사’(투스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칼루스, tou.j poime,naj kai. didaskalou,j)를 한 관사로 묶어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이 둘을 같은 직분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에 ‘목사와 교사’라고 번역했지만 ‘목자와 교사’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둘을 합쳐서 한 마디로 ‘목사(牧師)’로 부를 수도 있지만, 그러면 왜 ‘장로’가 없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따라서 여기의 ‘목자’란 말도 ‘양을 돌보는 자’ 곧 ‘넓은 의미의 장로’로 볼 수 있다. 곧, 오늘날의 목사와 장로를 합친 개념이다. 신약에서 ‘장로’의 주된 직무는 양들을 돌보는 것이며 또한 가르치는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런 교회 직분들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것이며(엡 4:11), 사람이 뽑은 대표들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의 필요를 위해 친히 세우신 직분들이다. 직분을 주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12절). 따라서 섬김, 봉사가 그 주된 사역이며, 그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마치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장로’의 개념과 직무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중요한 것은 신약 성경에서 ‘장로’는 상당히 넓은 개념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의 목사와 장로를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직무도 오늘날처럼 분화되어 있지 않고 통합적이고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즉, 목사와 장로는 기본적으로 그 기능이 같으며 양들을 돌보는 ‘목양’이 그 중심 사역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섬김과 봉사가 그 핵심 기능이다.
이 모든 것의 궁극 목적은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공동체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가 아니다. 따라서 인간 단체처럼 장로를 ‘교인의 대표’로 본다든지 또는 목사와 교인을 ‘감시하는 직분’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인본주의적 발상인 것이다.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이들은 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해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직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