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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 19일 일요일에 백두대간 희양산 구간 산행에 나섰습니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 휴게소에서 소고기 국밥을 먹고 나자 날이 밝기 시작하였습니다. 연풍 IC를 벗어 나와 제수리재를 넘어가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설경이 있었습니다.
창 밖을 내다보니 설경의 주인공은 바로 대야산이었습니다. 가까이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대야산 설경이 제수리재에서는 한 장의 커다란 스크린으로 다가왔습니다. 대야산 서북 능선의 설경을 관망하자면 제수리재가 최고인줄 알겠습니다. 제수리재를 넘어 쌍곡 계곡을 지나 버리미기재에 다다랐습니다.
아침 7시 40분에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의 산행은 버리미기재-장성봉-막장봉-악휘봉-은티재-주치봉-구왕봉-지름티재-희양산-시루봉-은티마을로 하산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장성봉으로 오르는 산길에 집채만한 바위가 있었습니다. 살빛이 감도는 빛깔 좋은 밝은 화강암이었는데 80도 가량의 경사각으로 기울어져 있어 비를 맞지도 않았습니다. 석불을 새기는 일에 열중하였던 신라 고려 불자들이 보았다면 마애석불을 조각하였을 법한 바위였습니다.
서북 능선에는 아직 잔설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 동남 능선에는 눈 녹은 얼음만 여기저기 남아 있었습니다.
1시간 쯤 걸어 올라 장성봉(長城峰)에 올랐습니다. 장성봉에서의 전망이 좋았습니다. 유두처럼 봉긋 솟은 대야산 상대봉도 보이고 이마처럼 하얀 희양산 백운대도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곳에서 동편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애기암봉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희양산의 풍경을 정면에서 제대로 보자면 애기암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타야 할 것입니다. 다음 기회에는 이 길을 타고 애기암봉에 올라 희양산의 전경을 관망한 후에 은티재로 넘어가는 산행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대간의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시계가 흐렸습니다. 따뜻한 봄기운이 가득한 산하에는 푸른 이내와 뿌연 운무가 가득하였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하늘 마저 옅은 구름으로 해를 가렸습니다. 봄기운이 가득 찬 산하의 기운을 당해 낼 장사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봄소식을 알리는 새들의 지저귐이 반가왔습니다. 신갈나무를 두드려 먹이를 찾는 딱따구리가 내는 목탁소리가 경쾌하였습니다. 수박을 두드려 경쾌한 소리를 듣고 잘 익은 수박을 고르듯 딱따구리는 신갈나무 죽은 가지를 두드려 먹이를 찾아내는 신통한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딱따구리가 찾는 것은 굼벵이 종류일 것입니다. 신갈나무나 단풍나무 속을 먹고 사는 딱정벌레 애벌레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장수풍뎅이나 하늘소의 애벌레는 이들의 주된 먹잇감입니다.
막장봉에 이르러 홀로 백두대간에 나선 젊은 산꾼을 만났습니다. 막장봉에서 악휘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습니다. 나침반을 꺼내 들고 자북으로 방향을 가늠하여 악휘봉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았습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고향을 물어보니 그는 군산에 산다고 하였습니다. 군산이 고향인 산꾼은 한 눈에 보아도 구릿빛 피부에 건장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흰눈이 쌓인 산길을 걸으면서 그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햇빛에 반사되는 자외선을 많이 받아 더욱 검붉은 얼굴색을 띠는 것 같았습니다.
산길에서 먹고 자며 대간을 걷는 산꾼의 짐이 많았습니다. 간밤에 그는 버리미기재에서 야영을 하고 아침 7시 30분쯤 산행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한 겨울에 산속에서 야영을 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인데도 그는 그렇게 대간을 종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악휘봉에 이르러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잡았습니다. 백두대간과 쌍곡 계곡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간식을 먹었습니다. 약과 두 개와 사과 한 알과 피망 두 개를 이형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악휘봉에서 은티재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쌍곡 계곡과 장성봉의 풍경이 아름다웠습니다. 소나무 암릉으로 이루어진 능선과 눈 내린 설경의 장성봉 줄기는 절경이었습니다.
장성봉에서 은티재로 이르기까지의 구간이 편안하였습니다. 전망 좋은 바위 능선을 타고 가는 길이어서 가다 쉬다 하였습니다. 전망을 감상하느라 쉬다 가다를 반복하였습니다.
은티재에 이르니 10여 명의 등산객이 요란스레 떠들며 산을 올라왔습니다. 모처럼의 겨울 눈길 산행에 부부 동반으로 나선 일행이었습니다. 그들은 가파른 희양산 암릉 구간을 피하여 악휘봉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은티재에 이르니 수백 년 묵은 엄나무 고목이 은티재를 지키고 서있었습니다. 땅두릅으로도 불리는 엄나무 고목에는 외로 꼰 새끼줄에 하얀 한지를 매단 금줄이 둘러 쳐져 있었습니다. 어려서 많이 보았던 서낭당의 흔적이 아직도 은티 마을의 민간 신앙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은티재에는 희양산 봉암사에서 내건 입산 금지의 입간판도 걸려 있었습니다. 이곳은 밤낮을 잊고 불도를 닦는 스님들의 도량이며 생태계 보존 지역이니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한다는 문구였습니다. 희양산과 봉암사로 향하는 산길에는 나무 울타리의 목책(木柵)으로 외부인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목책을 우회하여 주치봉에 오르니 구왕봉과 희양산이 이마 위에 걸려 있었습니다. 매우 가파른 산길이었습니다.
구왕봉에 오르니 희양산의 장중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 바윗덩어리가 원통형의 희양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해발 998m의 희양산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를 이루는 소백산맥 줄기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산입니다. 새재를 지나 조령산을 일으키고 이화령을 지나 백화산을 일으킨 산맥이 서쪽으로 휘어지면서 일으킨 희양산은 동,서,남의 3면이 화강암 암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산이었습니다. 산 전체가 암벽을 두르고 솟은 모습이 특이하였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산의 장엄한 암벽을 보고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 하였다는군요. 사상의학으로 보아 태음인과 소음인은 이런 바위산을 올라야 기운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군요. 서툰 소견으로 산을 음양으로 구분하는 일 자체가 우매한 일이지만 이곳에 와서 보니 희양산은 양(陽)이며 남성이요, 대야산은 음(陰)이며 여성이었습니다. 두 산을 답사하고 나니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라의 지증대사는 희양산의 지세를 보고 '산이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 처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차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의 물길은 백 겹으로 띠를 둘렀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고 감탄하였다고 하는군요.
희양산 암벽을 제대로 관망하기 위해서 남릉을 타고 5분쯤 내려서니 전망이 좋았습니다. 3면에서 보이는 희양산의 모습이 거의 흡사하였습니다.
구왕봉에서 희양산으로 이어지는 구간에 지름티재가 있었습니다. 지름티재에는 비닐로 쳐진 서너 평의 움막이 있었습니다. 봉암사의 젊은 스님이 이곳에 머물며 외부인을 통제하는 장소였습니다.
지름티재에도 입산금지의 붉은 풀랑카드가 나붙었습니다. 이 곳은 불도를 닦는 스님들의 도량이며 생태계 보존 지역이니 통행을 금지한다는 문구였습니다. 산림청장, 경북지사, 봉암사 주지의 굵직한 이름으로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희양산으로 오르는 산길에는 나무 울타리의 목책으로 외부인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막는 스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한 시간 전 만해도 이 곳을 지키고 있었다던 스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점심을 먹으로 산백련암으로 내려 간 듯 하였습니다.
서둘러 가파른 산길을 ?i기듯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산 중턱에는 초가집을 닮은 커다란 집채 바위가 있었습니다. 돌문을 비집고 들어서니 비를 가릴만한 공간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바위 뒤편에는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앉아 쉴 만한 그루터기를 곁가지로 내어 주고 있었습니다.
희양산으로 오르는 구간이 매우 가파랐습니다. 눈이 내려 쌓인 눈길이어서 안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였습니다. 고갯마루에 올라 희양산 주변 경관을 전망하고자 해발 999M의 백운대로 향하였습니다. 희양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백운대는 단단한 암봉이었습니다.
백운대에서 내려다 보는 전망이 장쾌하였습니다. 하늘의 신선이 지상의 인간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까마득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암릉 아래로는 너른 평전에는 울창한 송림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봉암용골의 하얀 물줄기가 허리띠를 두른 듯 송림을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바위 언덕에 앉아 풍광을 바라보자니 산 아래에 봉암용골의 눈 녹아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메아리로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희양산 백운대 남쪽 자락에는 백련암과 천년 고찰 봉암사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희양산 봉암사는 우리나라에서 1년에 딱 하루만 일반인들의 방문을 허락하는 유일한 청정 수행 도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날이 바로 석가모니의 탄신일인 사월 초파일입니다.
희양산은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에 위치한 산이지만 문경 쪽에서는 오를 수 없습니다. 봉암사 스님들의 정진 수도를 위해 외부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희양산을 오르고자 한다면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3면이 바위 암릉인 희양산을 오르려면 산의 북쪽인 은티마을로 오르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희양산의 전경은 경북 문경 방면에서 보는 것이 일품입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봉이 기운차고 장엄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등산의 아기자기한 감동과 즐거움은 괴산의 은티마을에서 오르는 것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봉암사의 스님들은 때때로 이곳에 올라 바람을 쐬는 듯 하였습니다. 오늘 지름티재를 지키던 당번 스님도 이 곳 백운대에 올라 바람을 쐬고 봉암사로 하산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천년 옛절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년)에 지증대사가 창건했다 하며 구산선문의 하나였다고 하는군요. 봉암사란 이름은 절을 지을 당시 백운곡에 있는 계암에서 닭 한 마리가 매일 새벽에 울었다 하여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아마도 사찰의 계명(誡命)일 것입니다. 미명을 깨우는 새벽닭처럼 여명을 밝히는 승려가 되자는 계명(鷄鳴)일 것입니다.
봉암사에는 남해 바닷가에서 운반해 온 돌에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분황사의 혜강선사가 83세 고령에 쓴 지증대사적조탑비, 지증대사적조탑이 있습니다. 또한 고려 초기 봉암사를 중흥시킨 정진대사의 원오탑비, 정진대원오탑, 삼층석탑이 보물f h지정되었으며 그밖에도 하허당득통지탑, 환적당지경지탑, 상봉대선사비, 노주석, 백운대, 마애불좌상 등 지방문화재로 등록 되어 있다고 하는군요.
봉암사에서 지름티재와 은티재로 오르는 백운곡 봉암용골은 무성한 숲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나무 숲 속에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시원한 계류가 넓은 암반을 퍼져 흐르는가 하면, 기암괴석 사이를 휘돌아 흐르기도 하고 폭포가 되어 뛰어 내리기도 한다고 하는군요.
이곳 개울의 옥석대 바위에는 마애불좌상이 새겨져 있고 고운 최치원의 글씨로 전하는 백운대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풍경을 살펴 보자면 장성봉에서 애기암봉을 타고 내려가 계곡을 몰래 답사하는 방법이나 4월 8일 불탄일을 기다려 봉암사와 백운곡을 들어가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는 없겠습니다.
산 아래로 희양산 봉암사의 검은 기와 지붕과 하얀 사찰 뜨락이 성냥곽처럼 반듯하였습니다. 입산금지의 통제로 희양산 구간을 막는 것이 아쉽기는 하였지만 덕분에 오염되지 않은 산하를 지킬 수 있어 이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한 겨울, 눈 내린 다음 날에 이곳을 찾아온다면 더 없는 환상의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면벽 수??의 고행을 하지 않아도 하나의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고향은 바로 아름다운 산천에 있다는 것입니다.
산을 돌아 내려오니 오래된 산성이 능선을 따로 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화령이 개통되기 이전에 산길을 넘어 다니던 옛길이었을 것입니다. 서북 능선에 쌓은 형태로 보아 이 성은 삼국시대 신라의 성책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터에서 은티마을로 하산하는 지름길이 있었습니다.
성터를 지나 시루봉으로 향하였습니다. 시루봉 아래에서 은티마을로 하산하였습니다. 은티마을로 하산하는 산길이 매우 미끄러웠습니다. 눈 녹아 흐르는 물로 진흙길이었습니다. 오늘이 절기 상으로 우수(雨水)인 터에 그 말이 꼭 맞아 떨어지는 포근한 봄 날씨였습니다.
희양산 뒷자락인 은티 마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전나무가 있어 이 곳을 찾는 이들을 반겨주었습니다. 은티 마을은 희양산과 악휘봉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이 만나는 합곡(合谷) 지점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두 골짜기에서 흘러 드는 빗물이 마을을 뚫고 흐르는 개울 때문에 수해를 당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은티 마을 에는 유래비와 서낭당이 서있었습니다. 마을을 뚫고 흐르는 개울 줄기가 마치 여인네의 오줌 줄기 같다 해서 마을에서는 수해의 방패막이로 서낭당에 남근석을 세워 놓고 끔찍이도 위하고 있었습니다. 남근석은 대여섯 개의 바위돌로 둘러 쌓여 있었으며 남근석이 서있는 개울가의 전나무 숲이 산행의 기점이 되고 있었습니다.
은티마을에서 희양산으로 오르는 길은 대체로 세 갈래의 길이 있었습니다. 성터로 오르는 지름길과 지름티재로 오르는 오른쪽 길과 시루봉으로 오르는 왼쪽 길이었습니다.
남근석을 세운 서낭당 어귀에 간이 주점이 있었습니다. 도토리묵, 메밀묵, 두부김치에 시원한 좁쌀 막걸리를 파는 주점이었습니다. 간이 주점을 운영하는 아낙네가 재미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못난이 얼굴에 작은 체구를 가진 이 아낙네는 붙임성이 아주 좋았습니다. 길 가는 나그네를 가게로 불러들이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습니다.
두부 김치를 안주하여 막걸리 두 대포를 들이켰습니다. 시큼텁텁한 좁쌀 막걸리의 맛이 갈증에 좋았습니다. 9시간의 산행 끝에 마시는 막걸리는 목울대를 울리며 도랑물처럼 넘어 갔습니다. 두 평이나 될까 말까하는 목로 주점에는 산행을 다녀간 산 꾼들이 써서 남긴 낙서의 흔적으로 도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막을 나서면서 메밀묵 두 개를 사서 이형과 나누었습니다.
산행이 일찍 끝나 희양산 해넘이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어느 날 희양산 해넘이를 찾아 다시 와야 하겠습니다. 이화령을 넘으면서 다시 한번 기회를 엿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