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과 강압수사가 시민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1986년 6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통해서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문이 사회 문제화 되면서 인간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억압적인 국가권력에 시민들은 분노하게 되었다1). 서울대 제적학생으로 주식회사 ‘성신’에 취업했던 권인숙양은 통장의 신고로 부천경찰서 형사들에게 불법 연행 되었다. 이튿날 밤까지 주민등록증 위조 등의 경위와 인천사태 수배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조사를 받으면서 문귀동 경장으로부터 성고문을 당하게 된 것이다. 권인숙양은 인천 교도소로 송치된 후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70여 명의 양심수와 함께 문귀동의 구속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구속자 가족들이 부천경찰서를 찾아가 항의농성을 벌이고 권인숙양의 변호인단2)이 문귀동에 대한 고발을 제기하고 나섬으로써 이 사건은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권력에 의한 여성의 수치심 자극은 국민의 인권을 옹호해야 하는 공권력이 그러한 고문을 행했다는 사실과 ‘성적모독’을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인권의 의미를 다시금 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당시 ‘보도지침’3) 등을 통한 언론통제로 이 문제가 전반적인 인권침해 문제로 부각되지는 못하였다4). 오히려 정권은 이를 불법 취업한 운동권 여학생의 사회혼란 문제로 왜곡시켰다. 권인숙씨의 성고문에 대한 보도지침은 다음과 같다.
‘부천경찰서 성폭행 사건은 부천사건으로 쓰라’, ‘부천 성고문 관계 기사는 일체 자제할 것’, ‘고문관계는 일체 쓰지 말 것’, ‘성고문 고소장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성고문 사건 폭로대회는 보도하지 말 것’(월간『말』1986.9.6).
85년 봄,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권인숙은 경기 부천시 소재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허명숙’이라는 친지의 이름으로 취업한다. 이른바 위장취업이다.
이듬해 6월 4일 권인숙은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혐의로 경기 부천경찰서에 연행된다. 관련 사실을 시인했으므로 그 다음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6일 새벽과 7일 심야 두 번에 걸쳐 조사계 형사 문귀동은 뜻밖에서 5.3 인천사태 관련자의 행방을 추구하면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행과 고문을 자행했다. 자신의 성기를 고문의 도구로 쓰면서 뒷수갑이 채워진 저항불능 상태의 여성을 모독하고 유린하고 협박했던 것이다.
조영래․홍성우․이상수 등 변호사들이 접견을 하러 찾아왔을 때 권인숙은 이 사실을 알렸고, 조영래 등이 작성한 고발장을 통해 공권력의 추악한 타락상이 삽시간에 전국에 알려졌다. (그녀는 사건 진상이 외부에 알려진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이름 없이 ‘궈냥’으로만 불렸다.)
7월 3일 권인숙은 문귀동을 고소하면서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바로 이날 그녀는 공․사문서 위조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다. 문귀동은 이를 틈타 곧바로 명예훼손과 무고 혐의로 권인숙을 맞고소했다.
뒤늦게 수사에 나선 검찰은 7월 16일 수사결과 발표에서 권인숙이 성적불량자, 가출자이며 급진좌경 사상에 물들어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이용’하는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다. 아울러 고소․고발장에 나타난 문귀동의 협의는 인정되지 않아 기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국의 보도지침에 따라 각 신문의 1면은 ‘성적 모욕은 없었고, 폭언․폭행만 있었다’라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이에 변호인단은 “권양의 모든 주장은 단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다. 이 전대미문의 만행의 진상이 백일하에 공개되고 그 관련자들이 남김없이 의법처단되기 전까지는 이 나라의 모든 국민과 산천초목까지도 결코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비장하게 선언했다.
한편 야당과 재야가 연대해 결성한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는 토요일인 7월 19일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고문․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를 개최했다. 명동은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 사이의 격렬한 몸싸움과 자욱한 최루탄 연기에 휩싸였다.
7월 27일 서울 성공회 집회를 시작으로 청주․익산․부산․대전․광주로 이어졌다.
8월 25일 대한변협은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대해 변호사 166명으로 재정신청 대리인단을 구성하고 법원에 재정신청을 냈다. 이 재정신청을 심리한 서울고법은 10월 31일 ‘이유없다’며 기각했다.
기각 결정문은 스스로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고발장의 범죄내용 대부분을 인정했지만, ‘문귀동이 손으로 그녀의 음부를 만지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그녀의 음부에 대어 수회 비비는 등 추행하였다’ 라는 권인숙의 진술은 목격한 증인이 없으므로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는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조영래 등은 재정신천 사건과는 별개로 9월 1일 권인숙의 변호를 위해 199명의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법정에서 진실을 가릴 준비에 임한다.
12월 1일 인천지법은 권인숙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다. 이날 선고가 끝나자 부천경찰서 성고문공동대책위는 “싸움은 이제부터다. 성을 도구화하는 자들은 운동권이 아니라 군사독재와 그 하수인임이 드러났다.” 며 방청객과 함께 어용 재판부를 격렬하게 항의했다.
87년 2월 항소심 법정에서 분노는 폭발했다. 민가협 회원 이중주(민정당사 점거사건으로 구속된 서울대생 이기정의 어머니)는 재판장이 권인숙의 진술을 도중에 막는 것을 보고 격분, “성고문 범죄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재판하는 게 사법부냐” 고 고성으로 항의했다. 법원 정리에게 끌려나가던 중 그녀는 교도관의 모자를 벗겨 재판부를 향해 던지며 외쳤다. “이 더러운 군사독재의 시녀들아.”
이틀 후 그녀는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신성한 법정을 모독한 죄였다. 구치소에 입감되는 순간, 그녀는 외쳤다. “우리 딸들, 여기 있느냐. 이 엄마가 너희 곁으로 왔다. 권인숙 재판부 하고 싸우다 들어왔다. 엄마가 왔으니 같이 더욱 힘내서 싸우자.” 복도 양쪽 방에서 함성과 환영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 재판은 거꾸로 된 재판입니다. 여기서 묶여서 재판받아야 할 이는 이 연약하고 순결무구한 처녀가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법질서와 인권과 인륜도덕을 그 근본에까지 남김없이 유린하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성에 대한 마지막 신뢰까지 지닐 수 없게 만든 극악극흉한 문귀동 그 사람입니다. 권양은 우리에게 ‘진실에의 비빌은 용기뿐’ 이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변론 요지서)
대법원은 6월 항쟁 이후인 88년 2월 9일 끝내 재정신청을 받아들였고, 문귀동은 89년 6월 사건 발생 3년 만에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22살의 처녀가 폭력적인 정치권력과 정면으로 대결해 결국 승리한 사건이었다. 군사정권의 총체적 부도덕과 인권유린의 실상을 국내외에 알린 지극히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권력의 수족으로 전락한 검찰과 경찰, 이들을 원격조종하는 정체불명의 공안당국, 당근에 길들여진 언론, 불의한 권력 앞에 한없이 나약한 사법부 등등의 추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민족모순이 먼저냐, 계급모순이 먼저냐는 운동론으로 분열돼 있던 진보진영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여성문제는 격렬한 정치투쟁에 가려져 있었으나, 이 사건은 이후에 활발한 페미니즘 담론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1) 부천 경찰서의 성고문 사건은 우리 사회 인권유린의 모든 측면을 보여주고 한국의 국제적 위신을 크게 실추시킨 사건이며 한 여성이 부도덕한 정치권력에 정면으로 대항한 양심의 투쟁이었다고 평가된다. 대한변호사협회 편,『인권보고서 : 1986』참조.
2) 권인숙씨의 사건에 대해 검찰은 ‘권양의 고소사실 중 성적모욕을 가했다는 부분은 인정할 수 없으나 폭언과 폭행의 사실만은 확인되었다.’고 발표하고 문귀동 경장에 대한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이러한 판정에 의해 166명이라는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대규모의 변호인단이 재정신청을 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재정신청은 기각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부천서사건의 재정신청’ 1986년 9월 2일자 동아일보 참조.
3) 1986년 9월 6일자 ‘말’지 특집호에서는 보도지침의 내용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전두환 정권의 이러한 보도지침은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말지는 보도지침을 폭로하였다는 이유로 폐간되었다. 월간 『말』1986.9.6
4) 1986년 당시 이 사건이 일어난 후 언론에서는 거의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1986년 7월 17일과 9월2일 단 이틀에만 사설에 이 문제가 언급한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86년 동아일보 사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