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당을 떠나 우리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다산초당의 주차장이었는데 바로 유물전시관 앞에 있었다. 버스가 주차되자 우선 유물전시관을 둘러보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정약용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스크린에서 검색해 볼 수 있었는데 군청의 배려라고 생각을 했다. 영상실은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7분 동안 상영되는데 우리들이 영상실에 들어서자 자동으로 상영되어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으나 이 또한 군청의 배려라고 생각이 되었다. 화면을 통해서 강진군의 문화유적을불편 없이 관람할 수 있었는데 화면에서 전날 보지 못했던 영랑생가를 볼 수 있어서 커다란 다행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 곳에서 강진군청에서 발행한 영랑시집을 구입했는데 가격도 무척 쌌다. 영랑이 시를 쓴 그대로를 옮겨놓아 지금의 문법과는 전혀 맞지 않았으나 읽으면서 배꼽을 쥐고 웃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들리고 잇을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五月 어느 날 그 하로 무덥든 날
떠러져누운 꼿닙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뻐처오르든 내보람 서운케 문허졋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말아
三百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들리고잇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위의 시를 현대적인 해석을 보면 아래와 같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다산초당은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유배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5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였던 곳이라 한다. 초당이라는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원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짚이나 억새로 지붕을 이은 조그마한 집채'를 말하고 있는데 기와로 지붕을 얹은 것을 보며 의아해 했는데,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8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가 옛 건물터에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瓦家(와가) 팔작집이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이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유물전시관 앞에 전통찻집이 있었는데 문이 닫혀있어 동료들과 차 한잔을 마시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으나 찻집을 둘러싸고 있던 정원에서 많은 야생화를 만날 수 있어서 큰 수확이 되었다. 할미꽃을 비롯해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꽃을 피워 여행객의 얼굴에 웃음을 머금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