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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채씨의 글
【沔川卜氏激動二十年】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문중(門中)에 관한 글은 사실(事實) 있었던 일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문헌적(文獻的) 전거(典據)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문헉적 근거가 없는 글은 헛소리에 불과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먼저 2014년 5월 24일 익채씨께서 대종회 명의를 도용(盜用)하여 임의로 남발한 문서(면천복씨 격동 20년 )는 어떤 고증(考證)이나 심지어는 야사에도 언급하지 않은 출전(出典)의 전거가 없는 황당(荒唐)한 소설 같은 글로서 전연 언급할 가치가 없는 글이라 사료(思料)됩니다만,
1. 익채(益采)씨 글 新任會長前 當付辭중 6번에 보면 【성원(姓源)에 왈가왈부 하는데 중국에서 왔으면 떠난 곳이 있어야 한다. 아직까지 없다. 그러면 사성(賜姓)성씨이다. 복학사는 실명(實名)이 없다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다. 백제 8대성 사씨(沙氏) 혹은 사씨(砂氏) 정확한 사귀(沙貴) 사괴(砂瑰) 더 이상 거론(擧論)할 수 없다】고 사씨 문제를 재론 하였고, 익채씨 글 沔川卜氏 宗史錄 修譜를 要함이란 제목 상단(上段) 부분을 보면 “【복문(卜門)에서 중요한 복성(卜姓)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중국에서 바다로 떠 내려와 당진에 도착하여 주민을 돌보고 복지겸을 낳다고 했는데 중국에서 한국 복씨와 중국 복씨와는 틀린다고 한다. 그러면 차라리 사씨(沙氏)인데 고려를 개국하여 복씨 성을 받았다라고 하면 복씨 성은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 가서 복씨 성을 찾다가 못 찾으면 성도 못 찾을 것으로 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찬(官撰)인 동국여지승람이란 문헌까지 묵살(默殺)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누가 한국 복씨와 중국 복씨가 다르다 말한 중국 사람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익채씨가 사씨(沙氏)문제를 거론하고 있는데 이 사건은 이렇습니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소 연구사였던 양승권(梁承權)씨가 익채씨에 접근하여 돈을 뜯어낼까 하고 술수를 부린 사건이고, 양승권씨는 그 당시 서울종 친회 회장이었던 명순씨에 까지 접근 하여 세미나라도 하자고 백여만원 을 받아 챙긴 뒤 종적(蹤迹)을 감춘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익채씨께서 양승권씨가 쓴 망설(妄說)과 괴설(怪說)을 담은 소설과 같은 논문을 받아 면천 향교지에 게재(揭載)함으로서 문중 종친들로부터 망신(亡身)을 크게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문중에서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서도 아직 까지 사씨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의 망령(亡靈 : 혐오스러웠던 과거의 잔재를 비유한 말)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양승권씨의 사씨에 관한 론문 사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2000년 10월 30일 면천향교가 우리 문중의 성원(姓源)과 시조에 대하여 왜곡(歪曲)된 내용을 증거도 없이 면천향교지에 게재함으로써 우리 문중의 명예를 손상시킨 일에 대하여 대종회 명의로 항의(抗議) 문서를 낸 일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면천향교에 원고를 제공한 사람은 복익채씨였고, 원고 제공자 복익채씨는 이를 연세대 국학연구회의 학술 연구팀에서 연구한 결과를 인용(引用)하였다 하였으나 이는 허구(虛構)의 거짓말이었습니다. 우리 문중에서 연세대학교 국학 연구회를 직접 방문 확인 하였던 바, 이러한 논문을 연세대 국학 연구소 명의로 발표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복익채씨란 분이 문중의 합의(合議)도 없이 개인적으로 연세대 국학 연구소 연구사였던 양승권씨에게 부탁하여 만든 양승권씨 개인의 연구 논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 보니 “【서기 660년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8대성(八大姓)(沙.면.협.진.국.묘.부여씨등)을 가진 백제 유민(流民)들이 당나라로 망명(亡命)을 하였는데 그 후 당나라 말기에 황소(黃巢)의 난을 피해 다시 8대성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후백제(後百濟)로 귀환(歸還)하게 되었는데 면천지역의 호족(豪族)이었던 복지겸의 선대(先代)가 망명해온 백제 유민인 8대성중의 하나인 사씨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복지겸의 초명(初名)이 사귀(사귀) 또는 사괴(沙瑰)라는 공통성 때문에 복씨 가문의 선대의 성이 사씨의 가능성을 짙게 한다】”라고 추리(推理)식으로 역어 놓은 논문이었습니다.
삼국사기란 문헌을 보면 「卜沙貴卜智謙小名也」로 명기 되어 있으니 복지겸은 이미 복씨성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란 문헌을 보면 「唐學士公」이란 기록에 당내라에서 학사 벼슬을 한 복공(卜公)의 성씨가 복씨였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사씨 운운(云云)은 말도 되지 않는 괴설인 동시에 망설입니다.
우리 문중에서는 양승권씨를 만나 우리 성원을 크게 왜곡시킨 부분에 대하여 반론(反論)을 제기(提起)하고 잘못된 연구로 인하여 우리 문중에 명예(名譽)를 훼손(毁損)시킨데 대하여 책임을 추궁하였던바 자기로서는 백제 유민들의 망명에 따른 8대성의 흐름을 연구하다 보니 공교롭게도 복지겸의 초명이 사귀 사괴라는 점에서 사씨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推定)한 것이지 복지겸의 상계(上系)가 사씨라고 단정(斷定)하지는 않았고, 이는 문헌에 전거한 논문이 아니었음을 시인(是認) 하였습니다. 자기의 논문이 잘못 인용된데 대하여는 사과(謝過)를 하였습니다. 다만 명예 훼손 부분에 대하여서는 자기 논문이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도 아니고 인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한 일도 없으니 인용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 하였습니다.
익채씨는 양승권씨에게 연구비조로 얼마나 사기를 당하셨는지 모르지만 이젠 연세(76세)도 지긋 하시니 문헌적 전거가 없는 사씨 운운 헛소리는 그만 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돈이면 나라도 팔아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종친들께서 오해(誤解)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종친들로부터 등 돌림을 받게 될 것이고, 왕따(집단 따돌림)를 당하기 쉽습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익채씨의 말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2. 익채씨 글 序文 중단(中段)부분에 보면 【2010년 제향(祭享)시에 제향 순서에 대한 상의도 없었고 상교씨가 가지고 온 제향순서 일부를 수정까지 하면서 진행 하였는데 잘못 진행 하였다고 몰아붙인데 대해 서운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당시를 회상(回想)해 보면 진행자인 익채씨께서 크게 실수를 하였고 잘못 진행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세일사 순서(歲一祀順序)를 보면, (1). 降神禮 (2).參神禮 (3). 初獻禮 (4). 亞獻禮 (5). 終獻禮 (6). 辭神禮 (7). 飮福焚祝禮순으로 진행되는데, 진행자 익채씨께서는 참신예를 올릴 때 헌관에게만 할아버지를 맞이하는 재배를 올리도록 하고 제사에 참여한 모든 종친에게는 할아버지를 맞이하는 재배(큰절)를 시키지 아니 하였습니다. 또한 사신예를 올릴 때도 마찬가지로 헌관에게만 무공공 할아버지를 보내드리는 재배(큰절)을 올리도록 하고 제사에 참여한 종친들께는 재배를 시키지 아니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에 참여한 종친들께서는 1시간 동안 뻣뻣이 서서 절 한번 올리지 못 하고 제사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시제에 참여한 모든 종친들은 이런 시제가 어디 있느냐고 불평하였고 진행자에 대한 불평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대종회장인 상교씨께서 “잘못되었다고” 몰아붙일 수 밖에 없겠지요. 익채씨께서도 진행에 대한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데 불평만을 늘어 놓치 말고, 세일사(歲一祀) 진행을 잘못 진행한데 대한 실수(失手)와 책임(責任)을 종친들께 잘못을 사과 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익채씨께서 큰 실수를 했기 때문에 2011년부터는 현 대종회장인 진을씨께서 세일사 진행을 맡아 보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실수 없이 잘 진행되는 것 아닙니까. 시제 의식에서 이렇게 큰 실수를 하는 것을 보면, 익채씨가 제례 의식에 대해 모르는 것 없는 것처럼 자화자찬(自畵自讚)하지만 이것도 모두 헛소리인가 봅니다.
3. 익채씨 글 序文 중단(中段)에 보면【2009년 무공사 준공식(竣工式)과 영정 봉안식(影幀奉安式)을 하였는데 필수적으로 고유제(告由祭)는 있어야 한다. 고유제가 없었다면 잘못이고 큰 실수이다】라고 하였는데 무엇을 아시는 것처럼 말씀 하시는군요. 준공식과 영정봉안식을 거행했기 때문에 고유제까지 지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유제란 중대한 일을 치르고자 할 때나 그 뒤에 까닭을 사당이나 신명에게 고(告)하는 제사인데, 복중채가 대종회장을 할 때 2007년 8월 29일 사당건립 기공식 때 억수 같이 쏟아지는 여름비 속에 천막을 치고 천막 속에서 이미 고유제을 지냈기 때문입니다. 고유제를 2번 지내지 않은 것은 잘못도 아니고 실수도 아닙니다. 2번 지내야 한다고 우기신다면 제례에 관한 문헌적 전거를 내놓십시오.
홍성 선산에 어은사(漁隱祠) 건립시 적극적으로 관여 하신 줄 아는데, 공사를 시작할 때(起工)와 공사를 마추었을 때(竣工) 2번 고유제를 올리셨습니까.본인이 알기로는 한번도 고유제를 지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유독(唯獨) 무공사에만 2번 지내자는 말은 헛소리 아닙니까.
4. 익채씨의 글 沔川卜氏 激動 二十年의 도표를 보면 문중 일 혼자 도맡아서 했으며 경제적 지원도 많이 했다고 주장하고 일부 대종회장 중에는 도와주기는커녕 방해했다고 낯 간지러운 자화자찬(自畵自讚)을 늘어 놓고 있는데. 종친들께서 그렇게 생각하고 게실까요? 고개가 갸우뚱해지는군요. 그리고 도표 안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과 전연 다릅니다.
1). 면천복씨 1100사는 2006년도에 발간한 것이 아니고, 2003년도에 발 간했으며, 면천복씨 을유보는 2006년도에 발행한 것이 아니고, 2005 년도에 발간했습니다.
2). 부여 옥천산 선조 묘 이장은 2009년도에 이장한 것이 아니고, 2007년 도에 이장했으며 분묘이장적비(墳墓移葬記蹟碑)는 20011년에 건립 한 것이 아니고, 2009년도에 건립했슴니다
3). 2008도에 무공사 건립 비용(도비12억, 군비12억)을 받었다 했는데 사실과 전연 다른 이야기입니다. 무공사 건립비는 3단계에 걸쳐 받았 습니다.
1단계 : 2007년도 사업비 8억 4천만원(도비 4억, 군비4억, 자담4천)
2단계 : 2008년도 사업비 12억 2천만원(도비 6억, 군비 6억 자담2천)
3단계 : 2009년도 사업비 3억7천만원(도비 1억8천, 군비1억8천, 자담 1천만원)을 지원 받아 사당 건
립비 총액 24억 3천만원이 투입 되었습니다.
5. 익채씨 글 新任會長前 當付辭 3번 끝 부분에 보면 【진홍이 문서에 불교 개혁을 했다고 기록했다. 그것은 아니고 장한 선조는 문민관(文民官)이 불교개혁을】라는 기록이 있는데 진홍씨의 어느 문서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장한 선조께서 불교개혁을 했는지 불교개혁을 도와 주었는지는 역사학자의 사관(史觀)에 따라 다르겠는데 이 문제는 익채씨와 진홍씨께서 서로 만나서 토론(討論)을 통해 사관을 정리하면 될 터인데 아무 관계없는 대종회 이사회에 반론(反論)를 제기하는 이유는 무어십니까. 누가 역사지식이 해박(該博)한지 겨루어 보자는 것인지. 역사지식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인지. 이유 없는 반항인지.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군요. 진홍이 문서라고 하는 것 보다 진홍씨 문서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요? 익채의 문서라고 하는 것 보다 익채씨의 문서라고 하는 것이 더 교양이 있고, 점잖아 보이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익채씨께서 상식과 예절이 부족한 분이 아니가 생각도 드는군요.
장한 선조와 불교개혁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고려 시대에는 2대 불교 개혁 운동이 있었습니다. 즉 대구 팔공산 정혜사의 지눌(知訥)스님의 정혜결사와 전라도 강진의 백련사 요세(了世) 스님의 백련사결사입니다 이때 남원 태수가 바로 우리 선조인 장한 선조입니다. 불교통사의 기록을 보면 남원 태수의 요청으로 요세가 백련사에 머무르면서 불교개혁운동을 펼쳤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불교개혁 운동에 동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다. 불교개혁을 주도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불교개혁에 적극 협조했다는 뜻입니다.
6. 익채씨 글 新任會長前 當付辭 7번에 규(奎)선조와 기(祺)선조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말미에【규(奎) 선조는 1291년 기(祺) 선조는 1302년】라고 만 언급해 놓았는데 아마도 출생 년도를 규 서조는 1291년 기 선조는 1302으로 보면 부자간이 성립될 수 없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규 선조를 언급한 1921년은 충렬왕 16년으로 이해는 규 선조께서 합단의 난을 방어한 공로로 조정에서 면천을 지면주사로 승격시킨 해이고, 다음 해인 충렬왕 17년은(1292년)에는 규 선조께서 지서경유수로 가신 해입니다 (면천복씨 1100년사 170쪽 참조) 다음 기 선조를 언급한 1302년은 기 선조께서 과거에 급제한 충렬왕 28년입니다.(1100년사 172쪽 참조) 또 기 선조의 기록은 충숙왕 10년(1323년)에도 나옵니다.(1100년사 178쪽 참조) 규(奎) 선조와 기(祺) 선조를 부자간으로 정정한 일에 대하여서는 면천복씨 1100사 179쪽에 자세이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7. 익채씨의 글 新任會長 當付辭 중 11, 12, 13번을 보면 君子亭, 3,000頃1, 300結, 그리고 衢樽臺, 半月樓, 朝雲臺, 康衢亭, 申庵山, 鳳棲山, 蒼澤山, 馬山, 槥山 등은 복문하고는 아무관계 없다고 쾨쾨한 옛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현재 우리 종원 중 이것들이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 누가 있습이까? 답답하군요
8. 익채씨 글 沔川卜氏 歷代 管理者 名單 하단(下段)부분에 보면 【네 번째로는 세대(世代)의 정립(正立)이다. 잠영록(簪纓錄)의 실체(實體)는 신빙성(信憑性)이 떨어진다고 보아진다. 답안지에 조부 명을 쓰지 못한 응시자도 많은데 예자(予字) 선조가 증조 고조 외조를 쓴 것은 너무나 의심(疑心)이 간다. 만약 고조나 증조가 연대(年代)가 사실이라면 고려사를 틀렸다고 하야 할 것이다. 무슨 애기인가 복규(卜奎)선조의 연대는 합단적(哈丹賊) 역사가 있고 복기(卜祺) 선조의 연대가 있는데 을유보에서 복규 선조를 16세로 하고 복기 선조를 17세로 하였으니 수지(守之)성진(成瑨)선조를 몰아내고 여러 종인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철자법(綴字法)은 말할 것도 없고 각 단어가 연결이 아니 되어 무슨 내용인지 뜻을 알 수가 없군요. 글을 배웠다는 분이 어찌 이런 글을 쓰시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여러 사람에게 보라고 돌리는 글은 상대방이 알아볼(理解) 수 있게 글을 쓰셨으면 합니다. 문장의 내용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대충 이런 내용인 것 같습니다. 잠영록이란 문헌(文獻)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고, 을유보(乙酉譜) 수보에서 규(奎)선조, 기(祺)선조, 수지(守之)선조, 성진(成瑨)선조의 상계(上系)를 정립 할 때 종친들에게 물어보지 아니하고 수보(修譜)를 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규선조, 기선조의 수보에 대해선 앞에서 이미 말씀 드렸고, 수지, 성진 선조에 대한 수보는 잠영록에 전거(典據)를 두고 수보를 하였습니다. 잠영록(簪纓錄)이란 옛날 고관들의 인명록으로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국조방목(國朝榜目 :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신상명세서)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급제자의 자(字), 생년월일, 거주지, 응시 당시의 직위, 그의 조상(부,조부,,증조부. 외조부, 4명)을 적도록 되어 있는 문헌입니다. 잠영록이란 문헌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말은 익채씨로부터 처음 듣는 말입니다. 잠영록이란 문서가 무엇인지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을유보 편찬 과정에서 종친들게 물어보지도 않고 수보를 했다는 부분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을유보 편찬 과정에서 될 수 있으면 많은 종원(宗員)들의 참여와 의견을 수렴하기 위하여 85명의 편찬 위원을 위촉했으며, 수보의 중요 사항인 성원의 정립과 상계의 정립문제, 선조님들의 행장(行狀)등에 관하여서는 문헌적 전거를 첨부 하여 편찬위원회에 상정, 하나하나 심의하여 확정 하였고, 최종적으로 대종회 총회를 개최하여 만장일치(滿場一致)로 통과 하여 간행된 것입니다. 익채씨께서는 편찬 위원회를 개최 할 때 마다 결석한 일이 없었고, 익체씨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 한마디 없다가 1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9. 익채씨의 글 新任會長前 當付辭 21번, 22번 ,23번, 24번 25번에 보면 “성효각 문화재 지정에 관한 경비 지출 및 관리비, 모쟁이 샘에 관한 유래 간판 찬문비(由來看板撰文費)지출, 부여선산 이전 시 풍수가 선임 비(風水家) 지출“등을 지출해야 된다는 【돈타령】이 대부분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익채씨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유적지 관리 보존에 관한 경비 지출은 대종회 총회나 집행부의 이사회에서 결정한 문제인데 익채씨께서 이렇쿵 저렇쿵 시비조의 돈타령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왕에 성효각(誠孝閣) 관리비에 대한 말씀이 나온 김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익채씨께서 전에 성효각을 관리 하던 관리인으로부터 대종회의 허락도 없이 관리인집을 매입 하시고, 대종회의 허락도 없이 7평을 늘여서 대종회 소유 토지위에 증축 하였고, 성효각 주위의 대종회 소유 밭을 경작하고 있으니, 성효각 관리비 일부를 내 놓으셔야 옳타고 생각하고 잇는데, 익채씨께서 대답해 보시지요. 옛날 성효각 관리인은 도지(賭只)도 내 놓았다는데 말입니다.
10. 익채씨의 글 新任會長 前 當付辭중 34 번을 보면 우리 시조의 영정(影幀)이 익선관(翼蟬冠)이 틀리고 용안(容顔)이 틀렸으며, 화면이 세화(細畵)라고 언급하였고 9쪽 중단(中段)부분을 보면 을축보(乙丑譜)에 제영(制影)되었던 용안이 잘 되었데 빠른 시기에 새로운 인물로 영정을 제영하여 현재 있는 영정을 치워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 하고 있는데 그것이 그렇게 쉬울까요. 우리 사당에 봉안한 영정은 우리 시조의 실제(實際)의 얼굴(容顔)도 아니고 사진도 아닙니다. 쉽게 말 하면 진짜가 아닌 가짜의 얼굴을 그린 것 입니다. 그렇다면 가짜 용안을 가지고 익선관이 어떻고 화면이 어떻고 하는 것은 모두 헛소리에 불과 합니다, 무공사에 영정을 제영(制影)하여 봉안(奉安)했다는 것이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이지.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영정을 치워버리겠다 하는, 헛소리는 아니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11. 익채씨의 글 新任會長 前 當付辭중 16번을 보면 “무공사 제향 초헌관을 대종회장이 독주한다 왜 혼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발상을 했는가 여러 종파에서 참여 하면 좋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 문제도 대종회 집행부인 이사회에서 결정할 문제이지 익채씨께서 좋다 나쁘다 참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세일사(歲一祀)의 제주(祭主)는 어디까지나 대종회장이므로 초헌관은 대종회장이 맡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시장, 군수, 원로 고문 중에서 선임 위촉함이 좋을 듯 합니다. 다만 아헌관 종헌관은 지역 종친 회장이 도라 가면서 참여함이 좋을 듯 합니다.
12. 익채씨의 글 沔川卜氏 歷代 管理者 名單 도표 중 10번을 보면
(1). 복중채가 대종회장을 할 때 치적(治績)으로 을유보 발간과 천년사(千年史)를 발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종회에서 천년사라는 책명을 가진 책을 발간한 일이 없습니다. 이 또한 헛소리입니다. 대종회 명의로 발간한 1100년사를 왜 1000년사라고 책명을 바꾸었을까 속된 말로 표시한다면 시건방진 태도(시큰둥하게 건방진 자)라 생각 하는데 어떻습니까?
(2). 복중채가 대종회장을 할 때 과적(過績)으로 을유보 일부 오류와 송암리 산지 벌목 과오(山地伐木過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을류보 일부 과오라는 헛소리는 앞에서 언급하였고, 송암리 산지 벌목 사업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송암리 산지 조림사업은 대종회가 보조금을 직접 받아서 대종회 사업으로 추진한 사업이 아니고, 홍성 군청 환경 녹지과 사업으로 추진된 것입니다. 수종(상수리, 해송, 느티)까지 녹지과에서 선정하고 사업 담당 업자(현대 임업 개발-윤보선 사장-01072723131)까지 모두 홍성군 녹지과에서 선정하여 추진한 사업입니다. 사업의 성패(成敗)는 홍성군 녹지과에 가셔서 알아 보심이 좋을 것 같습이다. 그런데 익채씨가 무엇하는 사람인데, 역대 대종회장의 치적까지 평가 하십니까? 대종회 고문도 아니고, 대종회 원로도 아닌데, 천방지축(天方地軸 : 너무 바빠서 두서를 잡지 못함) 여기저기 관여하는 것 아닙니까? 좀 건방지지 않소?
(3). 익채씨 글 沔川卜氏 歷代 管理者 名單 도표 중 11번에 보면 복상교씨께서 대종회장을 할 때 치적(治績)으로 무공사 신축 협조, 어은사 증수, 부여 선산 묘 홍성 송암리 이장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부여 선산 이전은 복중채가 대종회장을 할 때 2007년 10월 15일과 16일 양일 간에 걸쳐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선산으로부터 홍성군 금마면 송암리 선산 어은공 묘소 옆으로 이장을 했는데, 어찌하여 복상교씨가 대종 회장을 할 때 이장을 했다고 복상교씨 치적으로 둔갑(遁甲)을 했는지 모르겠군요. 더욱 가관(可觀)인 것은 2009년 9월에 분묘이장기적비(墳墓移葬紀蹟碑 : 건립추진 위장 복익채)를 홍성 선산에 건립 하였는데, 기적비 내용을 보면, 복상교씨가 대종회장을 할 때 2008년 10월15일에 이장했다고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고, 복상교 대종회장 명의로 건립되어 있습니다. 이장 작업에 참여한 익채씨와 상교씨가 이장 날자를 망각할리 없을 터인데, 상교씨와 익채씨께서 공모(共謀)를 하였는지는 모르나, 분묘이장기적비의 기재 내용이 사실과 다르니 철거(撤去)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기적비라는 것이 후세에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건립하는 것 아닙니까?
(4). 익채씨 글 沔川卜氏 歷代 管理者 名單 중 11번에 보면 복상교씨가 대종회장을 할 때 과적(過績)으로 임원간 불화합(不和合)과 권위적 행동을 자행(恣行)했다고 지적 하고 있는데 누가 불화합을 이르켰는지 구체적 사례를 들지 않는 한 오히려 분란을 일으키는 헛소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종친들 중에서 불화합을 일으키고 있는 소위 추러불 매이커(Tuouble Maker : 늘 싸움만 일으키는 자)가 누군가를 생각해 보면 바로 익채씨가 아닌가 생각 됩니다. 구체적 사례를 들면 크게는 문헌적(文獻的) 전거(典據)도 없이 문중사(門中史)에 대하여 이렇쿵 저렇쿵 말하는 일, 적게는 홍주파를 인정하지 않는다. 홍주파 사람들을 무시한다 등, 양유리 관리비는 600만원이나 주면서 홍성에는 어은사, 성효각, 모쟁이 샘도 있는데 관리비를 생각하지 아니 하는가 등 시비하는 분이 누구 십니까?
(5). 익채씨 문서 沔川卜氏 宗史錄 修譜를 要함에서 보면 2026년에 병오보(丙午譜)를 발간한다는 것인데, 내용 인즉, 2005년에 수보한 을유보에서 삭제(削除)한 상계 10대(열사람)를 다시 복원(復元) 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절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문헌적 전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1932년에 발간된 임진보(壬辰譜)를 보면 시조 다음의 2세에 규(奎)선조로 수록되어 있던 것을 1962년 임인보(壬寅譜)에 와서 상계 10대(열사람)를 복원(復元) 하였는데 복원 근거가 불분명 하고 문헌적 전거가 없었으므로 2005년에 발간 된 을유보(乙酉譜)에서는 기(旣) 복원 되어있는 10대를 삭제(削除)하고 화벌보(華閥譜)란 무헌에 전거를 두고 화벌보에 수록되어 있는 자손 계보로 대체한 바 있습니다 또한 임인보 수보 때 참여 하셨던 복창규님(면천복씨 한학자)과 복진구님(초대 대종회장)께서 생존해 계실 때 1962년 임인보에서 복원한 10대(열사람)에 대하여 문헌적 전거가 없었으며 작명(作名)에 의한 것이었음을 솔직하게 신인(是認) 하셨기 때문입니다. 익채씨 화벌보란 문헌 가지고 계시지요. 해남 문화원에서 가져온 화벌보 고려지 단본(華閥譜 高麗誌 單本)의 사본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만채님도 가지고 계시구요. 화벌보도 문헌이 아닙니까? 어떤 문헌을 요구하십니까?
익채씨 2026년이면 익채씨가 88세 미수(米壽)가 되는 해입니다. 병오보 수보가 가능 하겠습니까? 하늘에 뜬 흰구름 잡는 헛소리는 그만 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6) 무공사 옆에 있는 숭모제단비(崇慕祭壇碑:추진위원장:복익채)는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드려서 건립 하셨습니까?
또한 무공사 사당이 있는데 사당 안에서 신주(位牌)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면 되지 왜 사당 밖에 별도의 제단을 건립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당이란 조상의 신주(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별도의 제단을 사당 밖에 건립해야 된다는 문헌적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있으면 내 놓아보십시오.
조상의 산소를 실전(失傳)하였을 경우의 제향(祭享)은 우리 시조 복지겸 장군님의 초혼묘(招魂墓 )처럼 제단(祭壇 : 제사를 지내기 위해 주변보다 높게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터)을 쌓은 다음 그 제단 위에 초혼묘를 만들고 그 앞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제향을 올리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초혼묘 앞에 제단 비(祭壇碑)를 세우는데 비의 앞면에는 선조님의 휘자(諱字)를 기록하고 뒷면에는 산소를 실전하게 된 경위와 제단을 설립하게 된 경위 등을 설명하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어느 선조의 제단임을 알리는 비석입니다.
현재 우리 무공사(祠堂) 옆에 세워진 숭모 제단 비(崇慕祭壇碑)는 산소가 실전(失傳)된 19분에 대해 제향을 올리기 위해 제단을 만들었다는 내용을 알리는 제단 비라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제향을 올리기 위해 주변보다 높게 돌이나 흙으로 쌓은 제단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소가 실전된 조상님들의 유품이나 신주를 모신 초혼묘도 없습니다. 또한 제단 비 자체 내에도 신주나 위패를 모신 곳이 없습니다. 신주나 위패가 없는 제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주나 위패 없이 제단 비(돌)를 향해 제사를 지낸다면 무속인(巫俗人)들이 돌이나 바위에 제사를 지내는 것과 무엇이 다름니까? 유교식 제향이 아닙니다. 더욱 이상한 부분은 제단 비 앞면에는 돌아가신 19분의 휘자(諱字)가 기록되어 있고 제단 비 뒷면에는 제단 비 설립 추진위원 6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자와 산자가 앞뒤로 기록되어 있는 비석(돌)을 향해 제사를 지낸다면(再拜를 올린다면), 어딘가 이상(異常)하지 않습니까?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당(武恭祠)을 건립하였으니 산소가 실전된 19분의 조상님들도 무공사(祠堂) 안에 신주(위패)를 마련하여 제향을 울리는 것이 합리적(合理的)이고 합당(合當)하다고 사료되며 또한 수지(守之), 성진(成瑨) 선조님 제향도 무공사(祠堂) 안에 신주(位牌)를 마련하여 제향을 올리는 것이 합당하다 사료됩니다.
2014년 7월 작성자 : 면천복씨 대종회 고문 복 중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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