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여고를 졸업한 그 해 겨울 마리포사를 찾았다. 친구와의 저녁식사로 마리포사를 택한 이유는 단하나. 그곳은 부산 서면에서 가장 중심이었으며 한번은 꼭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분위기에 어린 나는 이미 기가 죽어있었다. 그리고 겨우 20살 성년이 되었을 때 가장 친했던 친구 사촌오빠의 저녁 초대로 처음으로 마리포사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 당시에 가장 인기있던 와인 마주앙을 앞에 놓고 성년으로 술잔을 높이 들었다. 그때 마리포사에서 마셨던 조금은 삽싸름하게 혀끝을 타고 목구멍 깊숙이 흘러가던 화이트 와인은 내게 20살 성인의 자유와 기쁨을 선사했다. 그러나 혼자 술잔을 들고 마시는 행위는 성인의 자유에는 반드시 절제와 책임이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했다.
1936년, 스페인의 평화로운 작은 마을, 가르시아 그곳에는 아름다운 나무와 숲, 그리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8살 소년 몬초가 살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 정국의 현실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공화주의 정부와 교회를 주축으로 정부에 반기를 든 극우 보수 세력이 팽팽히 맞서 곧 내전이 일어날 것이란 위기감과 극도의 긴장감에 싸여있다.
몸이 약해 집에서만 지내던 여덟 살 꼬마 몬초가 학교에 입학한다. 매를 때리는 무서운 선생님을 상상하며 겁에 질려있던 몬초는 등교 첫날부터 바지에 오줌을 싸고 학교에서 도망쳐버리지만, 자상하고 따뜻한 돈 그레고리오 선생님은 집으로 직접 찾아와 학교에 나올 것을 설득을 계기로 어린 제자와 늙은 스승은 나이를 뛰어넘은 진솔한 우정을 나눈다.
그리고 따뜻한 봄날 노(老)선생님은 야외 수업을 하며 몬초와 그의 친구들에게 참새들이 구애하는 방법과, 완벽한 나선형인 나비의 혀에 대하여 설명하며 달콤한 꿀을 취하며 꽃가루를 퍼트리듯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속에서 자유를 보여주고 이제 막 둥지를 벗어난 소년들에게 불안한 현실 속에서 꿈과 희망을 지닐 수 있는 법을 알려준다.
공화주의자인 몬초의 아빠는 말할 것도 없고, 독실한 신자인 엄마는 그레고리오 선생이 이념에는 상관없이 선생님의 인품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곧 정년을 맞이하고 퇴임식에서 의지가 강한 자만이 자유를 찾으며 한번 맛본 자유는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보물이라는 역설로 자유주의를 갈망하며 지향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그러던 어느 날, 불안하던 정국은 결국 스페인 내전으로 이어지고, 평화롭던 마을사람들은 갑자기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궁지에 몰리게 된 공화주의자들은 자신의 신념과 극우세력에게 숙청당하는 어느 한 쪽을 이념을 강요당한다. 몬초의 엄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남편과 아이들에게 공화주의를 철저히 부정하게 다짐시킨다.
그러나 마을의 공화주의자들이 파시스트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인파 속에서 몬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던 선생님이 아버지가 선물한 양복을 입은 그레고리오 선생님을 발견한다. 그리고 몬초와 아이들은 어른들의 낯선 이념의 대립에서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떠나는 차를 향해 돌을 던지며 빨갱이라고 소리친다.
같은 제목을 가진 마리포사라는 스페인 영화의 줄거리다. 마리포사란(mari-do +es-posa= mari-posa로 나비가 꽃을 향해 날아든다 또는 접붙인다의 뜻으로 mariposa[마리뽀사]) 나비의 혀를 뜻하는 스페인 단어다. 아이러니하게도 20년이 가까운 과거에 성년의 자유를 알려 준 곳이자 동시에 내전으로 인한 참된 자유를 의미하는 뜻으로 그려진 같은 제목의 영화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때만 해도 마리포사는 함부로 근접할 수 없는 성역 같은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낯선 이질감으로 다가왔던 그 곳은 한번으로 내게 이상(理想)을 실현시켜 준 곳이기도 했다. 때가 되면 새는 둥지를 떠나듯 나 역시 보고 싶은 곳을 본 만족 그 하나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그곳을 찾지는 않았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한동안 내가 힘들 때마다 마리포사를 떠 올린 건 우연의 일치였을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나의 성년의 추억과 내가 추구하는 현실과 다른 또 하나의 꿈을 묻어둔 도피처로 마리포사를 택했다. 아니, 희망을 숨겨두고 싶었다. 비록 내가 현실에서는 마주칠 수 없는 꿈과 희망일지라도 내 가슴에 귀하게 품고 사는 미래처럼 말이다.
마리포사 영화를 보는 내내 부산 서면 한 가운데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마리포사를 떠 올렸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맑고 투명한 와인 잔을 부딪치며 마주앙을 홀짝거리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20여년이 가까운 오늘에서야 그날 내가 만들어 두었던 나의 절제와 자유와 인내와 책임을 한꺼번에 모두 마주 대하고 앉은 자부심으로 마리포사의 존재, 그 이상(以上)의 가치는 있었다.
영화에서도 추구하는 것은 8살 몬초의 성장영화이기에 앞서 가장 순수한 아이의 눈을 통해 본 노선생의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변함없는 당당한 모습이다. 무엇보다 그가 남긴 "지옥은 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닌 증오와 잔인함이 남긴 흔적"이며 "자유는 자신의 가슴속에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보물"이라는 명대사만 간직해도 충분한 영화이다.
그리고 아이가 돌을 향해 던지면서 소리쳤던 마지막 장면에 소리쳤던 말도 보르난시스라는 선생님이 알려준 새의 이름이었다. 수컷이 사랑에 빠진 암컷에게 가장 귀한 난(蘭) 꽃을 바치는 새를 부르는 몬초는 돌팔매질을 하면서 가장 사랑하는 선생님께 그 순간만은 돌이 아닌 가장 귀한 난 꽃을 바쳤으리라는 여운이 아직도 뜨겁게 가슴 한 구석에 소중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