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회 산행일지 : 맘껏 맞은 겨울바람
(경남 합천군 황매산)
일시 : 2008년 2월 16(토)
날씨 : 맑고 차가운 날씨
지난 10일 밤 숭례문이 불탔다. 저녁 늦은 뉴스에서는 화재가 거의 진압되었다는 속보를 보았으나 아침 조간엔 큼지막한 글씨와 컬러 사진으로 ‘국보1호 남대문이 불타 무너졌다’는 헤드라인을 뽑고 있었다.
TV화면에서 양녕대군이 썼다는 현판이 철거되며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지는 모습과 2층 지붕과 누각들이 불타면서 무너져 내리는 모습에 마음이 많이도 아팠다.
지난 년 말 정말이지 우연한 기회에 버스로 남대문시장에 내려 그간 서울을 오가며 먼발치에서나 지켜보던 숭례문이 개방되어 있어 한 바퀴 돌며 그 아래로 지나본 적이 있었는데 나로서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전 국민의 가슴 아픔이 매우 크다. 범인이 곧 잡혔는데 토지보상비 문제로 화가 나서 방화한 70대 노인이란다.
더욱이 남대문은 야간이면 노숙자의 숙소가 되기도 했다니 우리 모두의 잘못이 크다.
왜란과 호란, 일제강점기와 동란 속에서도 이어온 610년을 4시간 만에 태워버렸다. 성취는 어렵지만 파괴는 찰나이다.
2002년 6월 말경 정말 우연한 기회로 김생곤과 함께 황매산을 오르면서 ‘가끔 산에 오자’고 한 것이 두어 달 후 등고선의 시작이 되었으니 황매산은 등고선을 잉태한 어머니 산임에 틀림없다.
당시 점심 후 목장 위 능선에서 맘껏 산딸기에 취해있던 중 금도현이 전화를 걸어와 함께 없음을 아쉬워했고 그 다음에 함께 산행을 한 것이 등고선의 제1회 정기산행인 황석산 산행이 되었다.
모든 등고선 멤버들은 이미 황매산을 오른 바 있으나 등고선의 이름으로 오르지는 않았고 다행이도 다들 영암사-모산재 방향에서 산행을 한 지라 이번에는 황매산 종주코스인 대병면에서 시작되는 코스로 잡았다.
대병중학교 입구에 주차를 하고 10시 출발하다.
학교를 우측에 두고 시멘트 길을 따르면 보림사가 나오는데 절 안으로 들어가서 가로지르는 것이 가까운 길이다.
보림사 윗 편에 조성된 체육공원에는 고르지 않은 7-8개의 돌을 얹어 쌓은 돌탑이 하나 있는데 자연스런 모습이 보기에 괜찮다.
임도를 따라 20분 이상 오르면 삼거리를 만나고 우측 산으로 접어들면 본격적인 등산로이다.
입구에는 경첩이 달린 기둥이 대문처럼 양쪽으로 서 있다.
귀농한 철학자 최성현의 ‘바보이반의 산 이야기(2003, 도솔)에는 ’산은 빈집이 아니니 입구에서 초인종을 눌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다.
’수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는 산에 들어가며 나름의 예절을 갖추되 내집처럼 아끼고 소중히 여기라‘고 권한다.
대문을 들어서며 아직 잠결에 있을 동식물들에게 노크 대신 헛기침을 두어 번 해본다.
다소 넓은 길을 5분여 오르다 황매산 정상(지름길)의 이정표를 따라 좌측 산으로 접어든다.
잔솔들과 잡목들이 우거져 있고 게다가 눈까지 쌓여있어 길의 분간이 쉽지 않다.
싸리나무와 진달래 등의 잔가지들이 아프도록 얼굴을 스친다.
20여분 진행한 후 휴식, 사과를 한 알씩 먹고 11시 재출발. 30여분 땀을 쏟으면 시그널이 많은 갈림길에 도착하게 되는데 본 등산로와 우리가 온 지름길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합천호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도해 같다”는 총무의 표현이 가장 적절한 듯하다.
호수의 색과 하늘의 색이 산을 경계로 나누어지긴 하였지만 동일하게 짙푸르다.
다시 마음을 다잡아 조금만 오르면 햇살이 비껴 비치는 눈덮힌 웅장한 모습의 황매산 정상-사실은 정상이 아니나 이곳에서는 정상처럼 보임-이 보인다.
능선 길을 따라 좀 더 오르면 삼거리에 이르는데 이곳이 993고지이다. 정상방향으로 표시만 있지 각 이정표에는 거리가 없음이 조금은 불만스럽다.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눈길이어서 정말 힘들다.
식사 준비를 하면서 하산 길에 대한 논의가 있다. 원래는 황매산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돌아오는 왕복형 산행을 예정하였는데 눈길이고, 재미없는 길이고, 힘들게 빡시고 게다가 왕복형은 우리의 적성에 맞지도 않는다는 여러 이유를 들어 목장방향으로 하산하여 히치하이킹으로 돌아오자고 결론을 쉽게 내렸다.
점심은 여느 날과 같이 맛있었는데 오늘 김치는 나로서는 처음 듣는 참기름 무침 김치라는데 맛이 괜찮다. 13:00, 다시 힘을 내어 출발.
바로 보이는 봉이 정상으로 알고 올라서니 정작 정상은 아직도 저만치에 있다.
삼형제봉을 포함하여 몇 개의 봉우리를 지나며 오르내리느라 힘도 많이 들고 바람도 너무 세고 또 차다. 몸이 날려갈 것 같고 귀도 떨어질 것 같다. 바위도 위험하여 내리막에서는 여간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다들 가까운 곳이라서 그리고 한 번씩은 다녀온 곳이라서 마음을 가볍게 가져서인지 몰라도 정상은 생각 외로 멀고 험했다. 떡갈재(상중마을)에서 오는 길을 만나면 곧 정상(1,108m)이다.
오후 2시 10분, 정상에 서지만 비좁고 바람이 강해 대암산에서처럼 움츠려서 사진을 찍어야 했다.
남서 방향으로 우뚝 솟은 지리산 천왕봉이 멀리 보이고 그 뒤로 희미하게 주능선이 노고단을 향하고 있다. 산을 넘다 힘들어 쉬면서 바위가 된 듯한 새 모양의 바위가 우리가 오른 긴 능선을 바라보고 있으며 아래로는 단적비연수, 태극기 휘날리며, 주몽 등의 촬영지가 눈에 들어온다.
900미터나 되는 가파른 길을 내려서면 대평원이다. 봄이면 천상의 화원인데 지금은 마른 억새들만 가득하다. 하늘은 계속해서 짙푸르나 이곳은 바람이 막혀 한결 포근하다.
목장시설들이 군데군데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철거되고 주몽 촬영 당시 해모수가 기거하던 나무집과 주변엔 몇몇 소품들이 놓여 있다. 햇살 가득 들어오는 평상에 앉았다. 말을 탄 주몽이 숨 가쁘게 저쪽에서 아버지를 부르며 나타날 것 같다.
사실 황매산은 영암사지, 국사당, 순결바위 등이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각종 형상의 바위를 품고 있는 거대한 바위산 모산재(767m)를 꼭 보아야 한다. 이미 체력을 소진한 우리는 모산재로 향하는 길을 버리고 목장을 경유하여 하산한다.
합천군 관광사업소에서 황매산 공원도로를 건설하느라 이 높은 곳까지 너무나 너른 새 길을 닦는 공사가 한창이다. 아마도 황매산 영화테마공원, 철쭉제 등과 연계된 관광객 확보를 위한 것 같지만 소중한 산에 시멘트가 떡칠되는 것이 못마땅하다.
얼었던 길이 녹아 질척거리기도 하고 군데군데는 아직도 얼음이 그대로여서 길이 많이 미끄럽다. 길이 생각보다 멀어 오히려 모산재 방향이 가까울 것 같다며 20여분 투덜대며 내려오는데 앞쪽에서 교통사고 같은 큰 소리가 난다.
구비를 돌아오니 화물차가 응달에서 미끄러지면서 뒤로 바위를 받고 몇 사람이 밀며 끌어내고 있었다. 얻어 탈 요량으로 금도현이 앞서 급하게 내려가다가 역시 미끄러져 몸이 떠올랐다가 크게 떨어지고 내 뒤에서는 김이돌도 넘어진다.
하지만 결국 그 차의 짐칸을 얻어 타고 약 10여분, 3km 정도를 내려와 황매산 입구에서 내렸다. 화물차는 영암사지 방향으로 가고 우리는 대병면 방향을 포장된 길을 따르며 다시 히치하이킹을 기대하였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지름길일 것 같은 마을을 지나 다시 큰 길에 이르는 30분 이상을 걸어 버스정류장에 앉았다. 김생곤이 히치하이킹을 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쓴 후 다시 화물칸을 얻어 타고 4-5km 정도를 오는데 차의 속도가 있어 바람이 정말 차다.
야속하게도 대병면 입구에서 다시 화물차는 합천 방향을 가버렸다. 아침에 언덕길을 올라 대병중학교 입구에 주차한 것이 은근히 후회가 된다. 김생곤이 혼자 키를 가지고 먼저 가 차를 가져와 다소 덜 걸었으나 오늘 정말 많이 걷고(약 15km) 겨울바람도 원없이 맞았다.
합천 흑돼지고기를 먹으려 식당을 찾다가 다소 이른 시간이지만 조정지댐 인근의 ‘갈비둥지’에 들었다. 점심을 일찍 먹고 많이 걸은 탓인지 아주 맛있게 6인분을 먹어 치웠다.
오는 길은 새롭게 개통되었다는 지렛재 터널을 지나 빠르게 왔다. 다음 정기 산행엔 봄을 볼 수 있을런지...
오늘의 시그널은 ‘메마른 세상에 사랑의 등불을 밝히리’를 앞면에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내 그리움을 찾으러’를 뒷면에 새긴 경북대병원 대간종주대의 것을 뽑았다.
登.苦.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