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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이야기 스크랩 조선 최고의 신데렐라 신빈김씨...
성헌 추천 0 조회 27 13.07.18 04: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소녀 때 백마 탄 왕자님을 꿈꿔 보지 않은 여성들은 별로 없으리라. 잘 생긴 데다 백마를 탈 정도로 돈과 권력을 가진 왕자님은 모든 소원을 이루어 주는 구세주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인간은 소망하는 존재인 만큼 구세주를 갈망하고, 그러기에 신데렐라 이야기는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들의 호기심을 끈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성립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로 마음씨 곱고 예쁜 신데렐라가 있어야 한다. 그냥 마음씨 곱고 예쁜 신데렐라가 아니라 아무 잘못도 없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한 고난과 핍박을 받는 신데렐라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신데렐라를 구하는 백마 탄 왕자가 등장해야 한다. 마지막은 물론 백마 탄 왕자와 신데렐라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조선 시대에 이런 행운을 만난 최고의 신데렐라는 누구였을까?

대답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조선 시대에 최고로 고난받고 핍박받은 여성은 누구였을까? 당연히 여자 노비다. 여자 종들……. 아무 잘못도 없이 부모가 노비라는 이유만으로 노비가 된 여자 종들이 가장 불행하며 가장 고난받은 여성들이었다.

게다가 여자 종이 예쁘고 마음씨까지 착하다면 핍박받는 신데렐라의 조건을 충분히 갖춘 셈이다. 예쁜 데다가 착하기만 한 여자 종이라면 남자주인은 좋아할지 모르지만. 안방 마님은 철천지 원수처럼 미워하기 십상이다. 공노비라면 잘해야 기생으로 풀린다.

그러면 조선 시대의 백마 탄 왕자님은 누구였을까? 물론 돈도 많고 권력도 있어야 한다. 조선 시대에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양반이거나 왕족이었다.

 

따라서 신데렐라 이야기를 조선판으로 각색한다면 노비 출신의 신데렐라와 양반 이상의 왕자님이 적격이다. 예컨대 춘향전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구도를 가지고 있다. 기생의 딸로 태어난 춘향이와 양반, 그 중에서도 과거에 합격하여 왕권을 대해하는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은 조선판으로 각색된 고난받는 신데렐라와 백마 탄 왕자님으로 너무나 잘 어울린다. 변사또는 악랄한 계모 역할을 완벽하게 대행한다.

 

그런데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아니라 실제 왕이라면 어땠을까?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겠는가. 춘향이는 노비 출신인데, 암행어사가 아닌 실제 왕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더더욱 실감나는 조선판 신데렐라 이야기가 될 것이다.

 

조선시대의 많은 왕 중에서도 최고의 왕은 단연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조선 시대만 대표하는 위인이 아니라 한국사 5,000년을 대표하는 최고의 위인이기도 하다. 이런 세종대왕이 노비 출신의 여성과 혼인하여 아들 낳고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면 이보다 더 멋있는 조선판 신데렐라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세종대왕과 신빈 김씨는 실제 신데렐라 이야기 같은 역사를 남기고 있다.

신빈 김씨는 내자시(內資시)의 종이었다. 공노비였던 것이다. 이런 신빈 김씨가 궁녀로 입궁한 계기는 젊은 세종의 즉위였다. 신빈 김씨가 열세살 되던 해에 세종이 스물두 살의 나이로 조선의 4대 왕이 되었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으므로 세자가 아니었다.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불신을 받아 폐세자됨으로써 세자가 되었고, 갑자기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궁녀 충원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황후 민씨가 살아 있는 데다 폐세자가 되었다고 해도 양녕대군을 모시던 궁녀들을 세종과 왕비의 궁녀로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많은 궁녀들을 들이기로 했는데, 내자시의 여종이었던 신빈 김씨도 이때 궁녀로 선발되어 궁궐에 들어왔다. 그리고 신빈 김씨는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지밀 나인이 되었다.

 

세종은 역사상 길이 남을 무수한 업적들을 세웠지만, 그것은 즉위한 지 4년이 지난 후의 일들이었다. 그 전에는 아버지 태종이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며 섭정했다. 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젊은 세종이 외척에게 휘둘릴 것을 염려하여 철저하게 외척들을 숙청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태종의 처가인 여흥 민씨와 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씨가 멸문하다시피 했고, 당연히 소헌왕후를 폐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세종은 소헌왕후를 매우 사랑하여 폐위를 반대했으며, 태종이 죽고 3년 상이 끝나던 세종 7년부터 소헌왕후와의 사이에서 매년 아들을 보았다. 1425년(세종 7)에는 광평대군, 26년에는 금성대군, 27년에는 평원대군을 연이어 낳았던 것이다. 세종이 30대를 바라보는 한창 나이였다.

그런데 평원대군을 본 뒤로 7년 넘도록 묘하게도 왕비 심씨가 아이를 낳지 못했다. 3년에 걸쳐 매년 아들을 봤는데 이렇게 오래도록 왕비에게서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뭔가를 의삼하기에 충분했다.

그 사이에 세종이 신빈 김씨와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세종은 소헌왕후의 지밀 나인인 착하고 예쁜 신빈 김씨를 미리부터 보아 온 터라 마음에 들어 했다.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 첫 아이가 태어난 것은 세종 9년(1427년) 8월 2일이었다. 늦어도 1년 전에는 세종과 신빈 김씨가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다. 세종 9년의 1년 전이면 세종은 서른 살이고 신빈 김씨는 스물한 살이었다.

신빈 김씨는 세종의 아이를 낳은 후 당연히 소헌왕후의 지밀 나인에서 후궁이 되었을 것이다. 애초 공노비였던 신분이 왕비의 지밀 나인에서 왕의 후궁으로 수직 상승한 셈이었다.

세종 9년부터 시작하여 이후 12년 동안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 아들 여섯과 딸 둘이 태어났다. 12년 동안 아이를 여덞이나 낳았으니 신빈 김씨는 내내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던 셈이다. 세종과 신빈 김씨의 의가 얼마나 좋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빈 김씨는 조선 시대의 후궁들 중에서 두번째로 아들을 많이 낳았다. 아들을 가장 많이 낳은 후궁은 성종의 후궁인 숙의(淑儀) 홍씨로 슬하에 일곱이나 두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세종과 신빈 김씨의 결말이 해피 엔딩이라는 사실이다. 비극으로 끝나면 신빈 김씨가 신데렐라가 될 수 없다.

후궁의 만년이 해피 엔딩이 되려면 왕의 사랑뿐 아니라 왕비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왕의 애정을 잃거나 왕비와 사아기 좋지 않은 후궁의 말년은 처참할 정도로 외롭고 쓸쓸하다. 심지어는 비명횡사하는 경우도 있다.

세종과 왕후 심씨, 그리고 신빈 김씨는 놀라울 정도로 의가 좋았다. 이것은 세종이 신빈 김씨를 총애하면서도 본처를 소홀히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처인 소헌왕후 심씨와 신빈 김씨를 똑같이 사랑했던 것 같다. 소헌왕후 심씨와 신빈 김씨 역시 서로 질투하지 않고 존중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예컨대 세종 9년 이후 아이를 낳지 못한 소헌왕후는 7년 만에 임신을 하여 세종 16년(1434년) 4월 15일 막내아들 영응대군을 낳았는데, 왕후는 영응대군의 양육을 다른 사람이 아닌 신빈 김씨에게 맡겼다. 이는 왕후 심씨와 신빈 김씨가 질투와 경쟁 관계가 아닌 신뢰와 애정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 준다. 보통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삼각 관계를 세종, 소헌왕후 신씨, 신빈 김씨는 서로의 신뢰와 애정으로 훌륭하게 극복했던 셈이다.

 

자칫하면 신데렐라의 계모 같은 악역을 맡았을지도 모를 소헌왕후 심씨가 이렇듯 질투심을 초월했다는 사실이 놀랍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런지 소헌왕후 심씨는 끝까지 세종의 사랑을 받았다. 소헌왕후 심씨는 아들 여덞에 딸 둘까지 해서 자녀를 열이나 낳았는데, 조선 시대의 왕비 중에서는 가장 많은 자녀를 낳은 왕비이다. 조선 시대의 관념으로 본다면 소헌왕후 심씨나 신빈 김씨는 그야말로 아들 낳고 딸 낳고 다복하게 살았다.

 

세종은 신빈 김씨가 궁녀로 입궁한 지 21년 만에 귀인(貴人)으로 삼았다가 오래지 않아 빈(嬪)으로 올려 주었다. 김씨는 공노비에서 왕의 후궁중에서도 최고 자리인 빈까지 오른 것이다. 신빈 김씨를 향한 세종의 애정과 신뢰가 각별했기에 가능한일이었다.『실록』의 다음 기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임금이 도승지 김돈(金墩)에게 이르기를 "소의(昭儀)는 본래 내자시의 여종이

          었으나, 무술년(1418년, 세종 즉위년)에 내가 처음으로 즉위했을 때 모후(母后,

          원경왕후 민씨)께서 뽑아 중궁으로 보냈다. 그때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소

          의는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 양궁(兩宮)을 섬기는데 오직 삼가고 근신했다.

          중궁이 매사를 위임하고 막내아들의 양육을 맡겼으니, 성품이 근신하지 않았다

          면 중궁이 아들을 맡겼겠느냐.

          소의가 6남 2녀를 낳았으나 딸은 다 죽고 아들만 살았는데, 술수하는 자의 말을

          비록 믿을 수는 없지만, 모두가 말하기를 여섯 아들이 다 장수할 것이라고 했다.

          내게 왕비가 낳은 아들이 많으니 소의의 자식을 자랑할 것은 없다. 그러나 여섯

          아들이 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요, 실로 하늘이 시키는

          것이니 소의의 명(命)은 또한 귀하다.

          고금으로 궁인(宮人)의 세계에는 본래 귀천이 없었다. 노래하던 아이를 궁중에

          들인 자도 있고, 일찍이 남을 섬기다가 궁중에 들어온 자도 있었다. 소의의 계보

          는 비록 천하지만 겨우 나이 열셋에 궁중에 들어왔으니 일신의 부덕(婦德)은 바

          른 것이었다. 양가(良家)의 여자는 비록 계보는 귀하지만 여자의 행실을 잃었다

          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빈이나 귀인으로 승격시키고자 하느데 어떻

          겠느냐?" 했다.

          도승지 김돈이 대답하기를 "역대의 역사를 상고해 보면 미천한 자가 정후(正后)

          가 되었으면 붓을 잡은 자가 본래 미천했다고 썼고, 셋째 부인 이하는 계보의 귀

          천을 논하지 않았습니다. 소의가 어진 덕이 있으면 승격시켜 귀인을 삼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겠습니까?" 했다.

          임금이 다시 말하기를 "신개(申鎧)가 춘추관에 출사했거든 네가 가서 가부를 의

          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했다.

          도승지 김돈이 춘추관에 가서 의논하니 신개의 생각도 김돈과 같았다. 단지 "우

          선 귀인으로 승격시켰다가 점차 빈으로 승격시키는 것이 옳겠습니다." 라고 말

          했다. 이에 이런 명령을 내렸다.

          ㅡ 『세종 실록』84, 21년 1월 병오조

 

세종의 사랑을 받은 신빈 김씨는 왕이 승하한 후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자식들도 많았지만 세종의 사랑을 잊지 못해 왕의 명복을 빌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보다 못한 신빈의 아들이 단종에게 요청하여 김씨를 환속시키려고 했고, 실제로 단종이 환속을 명령하기도 했으나, 신빈 김씨는 이를 거절하고 절에서 세종의 명복을 빌었다. 이렇게 여생을 보내다 세조 10년(1464년)에 쉰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빈 김씨는 공노비 출신으로 궁녀가 되어 빈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세종의 사랑을 받아 아들 여섯, 딸 둘을 낳고 천수까지 누렸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 최고의 신데렐라라 할 만하다.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의 자녀

 

계양군(桂陽君) 증, 세종 9년(1427년)8월 12일 출생

의창군(義昌君) 공

밀성군(密城君) 침(琛)

익현군(翼峴君) 관

영해군(寧海君) 당

담양군(潭陽君) 거, 세종 21년(1439년) 1월 8일 출생

 

딸 둘은 일찍 세상을 떠남

 

 

궁녀의 출입증

 

조선 시대의 궁궐은 궁금(宮禁)이라고 하듯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외부인이 궁궐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출입증이 있어야 했는데 이를 신부(信符)라고 했다. 대궐 밖에서 대궐 안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부를 가지고 있었다. 예컨데 상궁이나 나인의 하녀인 무수리는 출입증인 문패(門牌)를 허리에 차고 다녔다.

이에 비해 궁녀는 궁궐 안에 상주하므로 신부가 따로 없었다. 궁녀가 되면 궁적(宮籍)이라는 장부에 궁녀로 기록될 뿐이었다. 만약 궁녀가 일이 있어서 궐 밖으로 나가려면 왕이 '출(出)'이라고 써 준 패를 받아야 했다. 물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출패(出牌)를 반납했다. 뿐만 아니라 나갈 때는 출입 장부에 기록하여 언제 나가고 언제 돌아왔는지 증거를 남겨야 했다. 이는 궁녀의 대궐 밖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 kbs 대왕세종의 한장면 (세종과 신빈) 이랬던 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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