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굴사에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 12개의 석굴이 나 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는 돋을 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이라는 그림에는 목조 전실이 묘사되었고, 숙종 12년(1686)에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 의하면, 이 석굴들이 마을을 이룬 듯하였으며, 법당굴이니 설법굴이니 하는 구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굴은 법당굴뿐이며 다른 굴은 모두 허물어지고 겨우 소나기만 피할 수 있는 형체로 남아 약사굴, 산신당, 지장굴, 라한굴, 신중단으로 불리며 일반 절과 같이 전각으로 이용되고 있다.
풍화작용으로인한 침식 때문에 비가림장치로 보호한모습
산신각
지장굴
신중단
약사굴
관음굴
라한굴
칠성단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여러개의 동굴군으로 형성된 석굴사원은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이 유일하지만 중국이나 티벳인도 등지에서는 고대 석굴사원의 유적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예컨데 인도의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 티벳의 돈황, 중국의 운강석굴과 용문석굴이 그 대표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겠다.
골굴사는 신라시대 불교가 처음 유입될 당시 신라인들의 호국불교 정신과 정토적인 이념을 배양한 정신문화의 산실로서 경주 함월산 유역의 성지로 유서깊은 도량이다.
조선중기의 화가 겸재 정선의 골굴 석굴도에도 여러개의 기와지붕으로 지어진 석굴의 전실이 가람을 이루고 있다.
또한 토함산 산중일기를 쓴 정 시한 선생의 기행문에도 당시 골굴암의 모습을 상세히 전해주고 있는데, "여러채의 목조와가로 지어진 전실을 연결하는 회랑이 있고 단청을 한 석굴사원의 모습은 마치 한폭의 병풍을 보는 것 처람 아름답다."고 표기하고 있다.
일부 사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조선 중후기에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으로 추증되며, 그후 사람이 살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오다가 약 70년 전에 박씨 일가가 상주하면서 태고종에 등록된 사설사암으로 전해왔다.
1989년도에 개인에게 매매된 것을 당시 기림사 주지를 역임한 설적운 스님이 다시 매입하여 대한불교 조계종 11교구 골굴사로 등록하여 등기 이전 됨으로써 현재는 불국사의 말사이다.
주불인 마애아미타불은 보물 5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동해안의 문무대왕수중릉을 향해서 조성되었으며 관음굴, 지장굴, 약사굴, 라한굴, 신중단, 칠성단, 산신당등의 글법당이 있고, 특히 수천년 전부터 전래된 남근바위와 여궁의 음양조화로 득남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이 간직된 설화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