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에 가족과 함께 中國여행을 떠났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 형우와 함께 온 가족이 이렇게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은 처음이다. 또 아빠 친구 가족인 지원이네.동훈이네와 아빠 후배이기도 한 지원이 삼촌 가족(규리네)과 함께 한 오붓한 해외 나들이여서 더욱 뜻깊은 일이었다. 동준이네가 함께 오지 못해서 좀 섭섭했지만....
대구공항에서 중국민항기를 타고 中國 靑島에 내려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北京으로 향했다. 비행기를 처음 탄 동생 형우는 신이났다. 아빠 옆 자리에 앉아 있던 형우는 기내에서 금방 中國語 한마디를 배웠다. 승무원 누나들에게 "시원한 물 한잔 주세요"라고 했으나, 중국인 스튜어디스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我 氷水'(워 삥쉐이)라는 중국말을 아빠에게 배운 것이다.
형우는 그때부터 비행기안에서 승무원들만 나타나면 '워 삥쉐이'를 외쳤고, 식당에 가서도 같을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마다 '니 하오마'와 '짜이찌엔'(再見)이란 중국말로 승무원들에게 인사를 해 귀여움을 받았다.
북경공항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正初여서 중국사람들이 좋아하는 폭죽을 많이 터트려서인지 메케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하늘에 걸린 반달은 우리나라와 같은데 드넓은 대륙국가에 왔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황량한 들판에 선 느낌이라고 아빠가 말했다.
출국심사를 마치고 공항로비로 나가니 북경에 사는 아빠 친구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에서 큰 사업을 하는 분인데 몇해전 대구에서 국회의원에도 출마를 했던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오늘 저녁은 아빠 친구분이 한턱 낸다고 했다.
우리는 미니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여행기간 동안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 선생이 신년인사를 하며 우리를 맞아 주었다. 가이드 선생은 교포3세로 이름이 김태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中國과 北京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중국은 우리나라 남북한 면적의 44배나 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큰 나라였다. 그리고 3천년 역사의 古都인 北京(베이징)은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이다. 中國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이자, 萬里長城(만리장성)을 비롯한 紫禁城.(자금성), 이화원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적들이 무궁무진해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보다 67배나 크다는 北京은 外國人 여행객이 반드시 다녀가는 도시인 것은 물론이며, 地方에 사는 中國人들도 평생에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기도 하다. '날씨만 제외하고는 중국에서 가장 좋은 것은 모두 북경에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北京에는 中國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 모여 있다.
人口 약 1천700만명의 北京에는 中國 최고의 호텔과 식당이 있고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이 구비되어 있다. 自然 風光만 따진다면 중국에서 北京보다 뛰어난 곳이 많지만, 역사적인 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은 역시 北京이다.
그 중에서도 중국 정부에서 공포한 '北京 十六景'(북경 16경)은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 문화유적지이자 관광지이다. '北京 16景'이란 (1)八達嶺 萬里長城(팔달령 만리장성), (2)明 十三陵(명 십삼릉), (3)天安門 廣場(천안문광장), (4)故宮(고궁.紫禁城), (5)이和園(이화원), (6)天壇公園(천단공원), (7)北海公園(북해공원), (8)香山(향산), (9)十渡(십도), (10)周口店 北京人遺址(주구점 북경인유지), (11)龍慶峽(용경협), (12)大鐘寺(대종사), (13)白龍潭(백룡담), (14)蘆溝橋(노구교), (15)慕田谷長城(모전곡 만리장성), (16)大觀園(대관원)을 말한다. 우리는 그 중 6개의 명소를 둘러볼 예정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도시 北京의 휘황찬란한 야경(夜景)에 취해 있다보니 버스가 어느새 시내 王井街(왕정가)에 위치한 '今日海鮮城'이란 해물요리집에 도착했다. 식당 규모도 엄청나게 컸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근 탁자 위에 여러가지 해물 요리가 나왔다.
아빠 친구들은 독한 중국 술로 몇번이고 건배를 외쳤다. 나는 여섯살 짜리인 중국에 사는 아빠 친구 아들이 중국말을 능숙하게 하는 것이 신기했다. 나도 중국에서 산다면 저렇게 중국어를 잘 할 수 있을텐데... 우리들의 숙소인 新大都飯店(신대도호텔)로 가는 길에 유명한 王府井(왕푸징) 거리를 지났다.
이곳은 우리나라 서울의 명동이나 대구의 동성로에 해당되는 번화가로 유서깊은 상가거리였다고 한다. 王府井이란 지명은 옛날 紫禁城에 살던 황제가 자신의 형제나 아들들을 王으로 봉해 황궁 밖에 살게 했는데 이곳에 좋은 우물(井)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중국은 황제와 황후가 거리 구경을 했고 왕들의 내왕이 잦았던 이 거리를 인민공화국 건국 50주년을 기념해 지금의 모습으로 개발했다고 가이드 선생이 말했다. TV에서 본 유명한 포장마차 먹자골목도 보였다. 다만 시간이 너무 늦어 장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북적대지는 않았다.
★天壇公園 새해 초이튿날 아침 중국에서 눈을 뜬 우리는 일찌감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첫 관광지인 天壇公園(천단공원)으로 향했다. 드넓고 평평한 도시의 아침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시민들로 가득했다. 차량도 엄청나게 많았다.
天壇(천단)은 이름 그대로 明.淸나라 때 皇帝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현재 중국에서 보존되고 있는 최대 규모의 제단 건축군이다. 천단은 건축 배치가 回자형을 이루며 2개 단벽에 의해 내단과 외단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천단의 주요 건축물은 내단의 중간 축선을 따라 남북으로 집중되어 있는데 남으로 부터 북으로 원구단.황궁우(皇穹宇).기년전.환건전 등과 그밖의 신주축.재성정.재궁 등의 건물과 고적이 늘어서 있었다.
그 중에서도 祈年殿(기년전)은 천단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한다. 기곡전이라고도 부르며 봄에 황제가 풍년을 기원하던 곳이다. 건축 구조가 위쪽은 집이고 아래는 단이며 3층 처마는 층층이 작아지면서 우산형태를 이루었다.
꼭 영화에서 본 청나라 황제나 대신들의 모자를 닮았다. 가이드 선생은 건물의 기와 크기와 기와 골 간격이 위쪽으로 갈수록 작아지며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우산같은 모양을 나타내는게 참으로 특이하고 건축학적으로도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소개했다.
기년전을 축소해 놓은 듯한 황궁우(皇穹宇)도 신주를 모셔놓는 사당으로 예술성 높은 건축물이라고 한다. 특히 황궁우의 담은 원형으로 둘레가 193.2m인데 두사람이 각각 동쪽과 서쪽 벽안에 서서 얼굴을 북쪽으로 두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면 마치 전화로 통화하는 것처럼 들리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 회음벽(回音壁)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같은 현상은 둥근 회음벽이 벽돌을 가지런히 이어 붙여 벽면이 매우 매끄럽고 벽 위에는 기와를 얹은 처마가 있어서 소리가 분산되지 않고 둥근 벽을 타고 반사되어 전달되기 때문이라는 과학적인 분석도 있다. 어쨋거나 실제 한번 실험을 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지나치고 말았다.
흰 옥석으로 둘러싼 3층의 원구단(圓丘壇)은 정말 하늘과 맞닿은 듯한 천단(天壇)이었다. 明.淸 나라 황제가 매년 동짓날 이곳에 친히 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원구단의 위층 중앙에는 圓心石이 있는데 천심석이라고도 부르며 옛날 황제들이 이곳에 서서 하늘의 신과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가이드 선생님이 이 둥근돌 위에 올라서서 하느님과 이야기를 한번 해보라기에 올라섰지만 막상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많이 찍었다. 서울의 파고다공원에 비교될 만큼 이곳 天壇公園에도 많은 노인들과 시민들이 갖가지 취미활동을 하며 소일을 하고 있었다. 네모진 벽돌 바닥에 물을 먹인 큰 분으로 멋지게 漢字를 쓰는 노인, 우리나라의 배트민턴과 탁구를 혼합한 듯한 운동을 즐기는 부부, 제기차기를 하는 남녀 가족들, 에어로빅 춤을 추는 여자들, 카드를 치는 남자들, 장기두는 노인들, 음악에 맞춰 부루스를 추는 남녀 등등....
공산주의 국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천단공원에 모인 북경 시민들은 자유분방하고 여유로운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관광 첫날 날씨가 너무 좋았다. 외투를 벗고 다닐 만큼 날씨가 푸근했다. 아빠 선배인 여행사 사장 아저씨는 "올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을 예고하는 것"이라며 '행운'이라고 했다. 아빠는 중국말로 '天氣 好'(티엔치 하오)를 거듭 외치며 즐거운 표정이다.
★天安門 廣場 天安門(천안문)은 明.淸나라 황궁의 정문으로 황제가 칙서를 내리던 곳이었다고 한다. 1988년 1월 1일부터 정식으로 관광객에게 개방됐는데, 아빠가 萬里長城과 함께 가장 와보고 싶어 하시던 北京의 명소이다.
웅대하고 장려한 天安門은 위대한 중국의 상징이요, 500여년의 유래를 가진 역사적 현장이기 때문이다. 천안문은 南京에서 北京으로 도읍을 옮긴 명나라 영락제가 1417년에 세우기 시작해 승천문이라 불렀으며, 청나라 순치 8년(1651년)에 현재와 같은 형태로 개축돼 天安門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아빠는 성벽에 내걸린 대형 초상화를 가리키며 중국을 다시 통일한 毛澤東(모택동) 主席(주석)이 1949년 10월 1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한 곳이 바로 이곳 천안문 성루라고 했다.
아빠는 毛澤東이나 周恩來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이곳에서 수십만 군중들을 내려다 보며 연설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고 했다. 붉은 성벽, 흰 대리석 난간, 황색 유리기와로 장식한 장중한 규모를 자랑하는 天安門 앞에 서니 중국에 왔다는 실감이 절로 난다.
天安門 앞에 펼쳐져 있는 광장은 천안문에서 정양문(正陽門)까지 남북 880m, 인민대회당에서 박물관까지 동서 500m 규모이다. 중국 최대의 광장인 이 天安門 廣場은 中華人民共和國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중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졌다. 1919년 우리나라의 3.1운동과 비슷한 5.4운동이 시작되었던 곳도, 문화대혁명이 전개되던 곳도, 1966년 100만명이 넘는 홍위병이 운집한 곳도, 1976년 4인방과 주은래 양편의 지지 세력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던 곳도 이 천안문 광장이다. 1989년 유명한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천안문 광장은 1949년 건국 식전행사를 위해 정비되었으며, 인민영웅기념비(1958년).인민대회당(1959년).중국혁명박물관.중국역사박물관 등이 잇따라 세워졌다. 人民大會堂은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全國人民代表大會(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代)의 청사이다.
특히 인민영웅기념비 남쪽에 건립된 毛主席記念堂(모주석기념당)에는 1976년 9월 서거한 毛澤東의 시신이 수정으로 된 투명한 유리관 안에 잠자듯 누워있다고 했다. 나는 3년전 프랑스에 갔을 때의 콩코르드 광장과 나폴레옹이 떠올랐다.
천안문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중국의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과 우리처럼 관광을 온 외국인들, 그리고 아침부터 마라톤을 하는 사람, 태극권을 하는 사람,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 연을 날리는 사람, 산보를 하는 사람 등등.... 12억 인구를 가진 중국답게 사람들도 각양각색이고 자유분방해 보였다. 天安門을 배경으로 우리는 여러장의 사진을 찍었다.
★故宮 天安門을 들어서니 웅장한 규모의 궁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故宮은 明.淸대 500년간 황제가 살던 황성으로 紫禁城(자금성) 또는 皇宮(황궁)으로도 불린다. 자금성은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중국 최대의 고건축물이자 세계 최대의 박물관이기도 하다.
동서 750m, 남북 960m 넓이의 장병형 모양인 이 자금성 안에는 모두 800여채의 건물에 9천999칸반의 방이 있다고 한다. 명나라때 축조된 이후 明.淸대의 왕조가 이 자금성에서 최후의 날을 맞았는데, 명나라 때는 이 궁안에 9천명의 시녀와 1만여명의 환관이 있었다고 한다.
자금성은 明나라 永樂帝가 1406년부터 14년간에 걸쳐 세웠으며 그후 여러차례 고쳐 짓거나 확장됐다. 故宮의 기와는 황색인데 옛날에는 궁궐에만 황색 기와를 쓸고 있었다고 한다. 이 황궁을 짓는데 10만여명의 장인과 100만명의 일꾼이 동원됐다.
아빠는 유명한 영화 '마지막 황제'에 역사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궁전이 바로 이곳이라고 이야기해 줬다. 그리고 자금성은 중국 고대 건축예술의 우수한 전통과 독창성을 지니 진귀한 문화유산이라고 했다.
고궁 내부는 外朝(외조)와 內廷(내정)으로 나뉘는데, 外朝는 황제가 정무를 보고 의식을 행한 곳이며 內廷은 황제가 일상생활을 하던 곳이다. 天安門에서 端門을 거쳐 午門을 지나면 外朝인 太和殿(태화전).中和殿(중화전).保和殿(보화전) 등의 건물이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다.
이 3대 건물이 자금성의 중추인데 太和殿은 황유리 기와의 큰 지붕을 가진 중국 최대의 목조건축물이다. 이곳에서 황제의 즉위식과 천자의 탄생축하.조칙의 공포 등 중대한 국가적 식적을 거행했다.
안을 들여다 보니 오색의 격자 무늬로 된 천장과 금박을 입힌 큰 기둥, 크고 작은 청동제 솥과 촛대 등 호화로운 장식들이 황제의 권위와 영화를 상징하고 있었다. 아빠는 영화에서 본 淸나라의 마지막 황제(末代皇帝) 푸이(溥儀)가 세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곳도 바로 이 太和殿이라고 했다.
푸이는 3세에 帝位(황제의 자리)에 올라 3년간 황제로 있다가 辛亥革命(신해혁명)으로 물러난 후 일본에 의해 滿洲國(만주국) 황제가 됐지만 포로로 잡혀 10년간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自由의 몸이 된 것은 53세나 되어서였다고 한다. 그것도 平民의 신분으로, 이곳 자금성을 떠난지 34년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56세에 간호사인 새 아내를 맞아 식물원과 기계수리 상점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내다 5원짜리 관 속에서 지게송장으로 묻혔다니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가이드 선생은 푸이가 황제 즉위식을 할 때 수만은 문무백관이 도열한 가운데 거행된 엄청난 규모의 행사에 놀라 울음을 터트리자, 옆에 있던 그의 아버지가 "곧 끝난다"며 달랬는데, 그 말이 씨가 되었는지 청나라는 마잖아 망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해 줬다.
中和殿은 황제가 식전을 거행하기 전에 잠시 기다리던 대기실이라고 한다. 保和殿 북쪽은 內廷인데 후삼궁이라고 불리는 건청궁(乾淸宮).교태전(交泰殿).곤녕궁(坤寧宮)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은 황제의 일족이 일상생활을 영위한 궁전으로 황제와 황후의 침실이기도 하다.
양쪽에 딸린 각 6개의 궁전은 后妃(후비)가 살던 후궁이다. 아빠와 아빠 친구분들은 황제의 침실을 들여다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제와 황후가 놀던 정원인 어화원(御花園) 입구 쪽에는 큰 고목 두그루가 부둥켜 안고 있는 모습으로 서있었는데 가이드 선생이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百年偕老(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아빠와 아빠 친구 내외분들이 앞다투어 사진을 찍었다.
天安門에서 북쪽 끝 문인 신무문(神武門)까지 外朝와 內廷을 거치면서 일직선으로만 줄곳 걸어왔는데도 한나절이나 걸렸다. 과연 중국의 황제가 살던 궁전답게 규모가 웅대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른이고 아이고를 불문하고 모두가 다리와 허리가 아프다고 야단들이다.
황제가 살던 궁전을 왜 紫禁城이라고 부르는지 궁금하다는 내 질문에 아빠는 자주색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이라며, 황제가 거주하는 궁을 제외하고는 자주색을 금(禁)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자금성의 벽은 자주색이지만, 지붕은 황금색을 사용했다. 神武門을 나서 버스로 가는 도로 옆에는 수많은 장사꾼들과 걸인들이 관광객들에게 물건 사기와 적선을 강요하며 따라 붙었다.
아빠는 이 사람들이 자금성 관광의 감흥을 망치고 있다며, 아직도 중국이 후진국이라는 증거라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버스에 올라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은 정통 중국식 요리라고 했다. 많이 걸었던 탓인지 배가 고픈 터이라 입안에 벌써 군침이 돈다.
* 富國海底世界 점심을 먹고나니 신나는 여행 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는 수족관인 富國海底世界(부국해저세계). 이곳은 1997년 11월 문을 연 이래 새로운 관광명소로 등장했다고 한다. 특히 동생 형우같은 어린이들에게는 인기 짱이다.
모두 2천350만 달러를 들여 조성한 이 수족관은 20m의 아크릴 지하터널이 설치되어 있어 관광객이 마치 바다세계에 들어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450만리터의 인공소금물로 채운 중앙 탱크에는 수천마리의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6만여종의 해양생물이 살고 있는데 특히 상어와 가오리.산호초.바다가재.불가사리 등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빠 친구들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늘씬한 여자 다이버의 헤엄치는 모습에 더 정신이 팔린듯 하다.
저녁 식사 후에는 북경 서커스를 관람했다. 신비스런 곡예와 다양한 기술이 집대성 된 중국 고유의 전통 예능을 직접 지켜보는 재미가 괜찮았다. 나는 어린 동생들과 어울려 점잖지 못하게 행동을 하다가 아빠에게 혼이 난 다음이라 속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지만.....
접시돌리기.한발 자전거타기.공중 줄타기 등등.... 나이 어린 청소년들도 많았는데, 얼마나 연습을 했으면 저렇게 어려운 동작들은 한치의 실수도 없이 해낼 수 있을까. 가이드 선생은 이 서커스 단원들은 북경에서도 아주 좋은 대접을 받는 선망의 대상이라고 했다.
★明十三陵 중국에서의 이틀째 관광코스. 北京에서 북서쪽으로 50km 지점에 있는 明十三陵(명13릉)은 明나라 황제 13명의 능묘이다. 명나라 3대 永樂帝(영락제) 7년(1409년)부터 마지막 황제인 崇禎帝(숭정제) 17년(1644년)까지 230여년간에 걸쳐 막대한 인력과 물자가 동원된 가운데 만들어진 것이다.
사방 100리에 이르는 산기슭 곳곳에 13개의 능묘가 축조돼 있는데 능마다 여러개의 커다란 건축물이 세워져 있는게 경주의 천마총 등 신라왕릉이나 조선시대 임금의 왕릉과는 달랐다. 그 규모가 참으로 거대한 것도 역시 대륙을 호령하던 황제가 잠든 무덤다웠다.
흔히 13릉이라 하지만 실제 일반에 공개된 것은 定陵(정릉)과 長陵(장릉) 두 곳 뿐이다. 우리가 둘러본 곳은 정릉이다. 명나라 14대 황제인 만력제(萬歷帝)와 황후 2사람의 능으로 1957년에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때 출토된 호화찬란한 부장품과 발굴장면 사진들은 인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만력제는 10세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22세 때(1585년)부터 자신이 죽어서 묻힐 묘를 만들기 시작해 6년간에 걸쳐 나라 재정의 절반을 털어 넣었다고 한다.
800만냥의 은이 소모되었는데 이것을 쌀로 환산하면 100만명이 6년반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능을 축조하는데 인원도 엄청나게 동원돼 하루에 3만명씩 연인원 6천500만명이 투입됐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생을 했을까. 그것도 어리석은 황제의 지하궁전을 만들기 위해....
황제는 죽어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는가. 황제의 유체가 잠들었던 지하의 저승궁전은 대단했다. 커다란 돌기둥과 옥돌로 꾸민 화려한 궁전이지만, 그러나 불빛도 없는 캄캄한 지하궁전에서 황제와 황후의 영혼은 과연 행복했을까.
13릉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크다는 長陵(장릉)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게 아쉬웠다. 장릉은 明 제3대 황제인 永樂帝(영락제)의 능이다. 영락제는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조선시대 6대 임금 세조나 어린 이복동생을 죽이고 등극한 3대 임금 태종과 비슷한 인물이라고 아빠가 설명을 했다.
황제나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렇듯 골육상쟁도 허다하게 일어났다고 아빠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예로 들었다. 그나마 이렇게 자존의 자리에 오른 왕과 황제가 강력한 권력을 기반으로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었다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北京動物園 아직은 시설이 미비하고 개발할 여지가 많았지만, 면적이 50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北京動物園(북경동물원)은 그 느낌이 달랐다. 나는 스위스 바젤에서 둘러봤던 동물원과 대구의 달성공원 동물원과도 비교를 해봤다.
이 동물원은 미니버스를 타고 투어를 하는 곳인데, 광활한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사파리 투어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반야생 상태의 동물을 버스안에서 바로 내려다보는 재미가 짜릿했다. 버스가 하도 낡아서 오르막길에 시동이 꺼져버릴까 아빠가 걱정을 많이 했지만....
동북호랑이와 사자, 판다곰, 킨시잘(금색 원숭이), 낙타, 당나귀, 공작, 늑대, 기린 등 수많은 동물들이 버스길을 막고 유유히 거니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동물에 호기심이 특히 많은 동생 형우와 동훈이.지원이.규리는 무서운 둘도 모르고 정말 신나는 한때를 보냈다.
★萬里長城 '不到長成非好漢'(장성에 오르지 않은 남자는 사대 대장부가 아니다)이란 중국 속담이 있다. 萬里長城은 그만큼 外國人 뿐만 아니라 中國人들도 平生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라고 한다.
萬里長城은 1만2천700리(약 6천350km)에 이르는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조물이라고 한다. 산꼭데기에 그토록 긴 장성을 쌓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을까. 萬里長城은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도 한다. 성벽을 쌓던 일꾼들이 지쳐 죽으면 그 자리에 묻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은 곳은 長成의 한 부분인 北京에서 북쪽으로 75km쯤 떨어진 산악부에 위치한 八達嶺(팔달령) 長成이다. 八達嶺이란 이곳이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교통요지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새해 첫 토요일인 3일 오후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1천m 고지의 長成에 올랐다. 中國語와 中國文化에 관심이 많은 아빠는 특히 감회가 남다른 모양이다. 나와 동생 형우는 솔직히 케이블카 타기와 長成 정상부의 가파른 계단 오르기에 더 신이 났다.
헌걸찬 산맥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진 長成을 바라보니 中國人들의 대륙적인 기질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빠.엄마는 날씨가 엄청 추울 것에 대비해 방한복을 꼼꼼히 챙겨왔는데 뜻밖에 포근한 날씨가 참으로 행운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성벽과 계단 여기저기에 서서 사진 찍기에 바빴다. 아빠와 나는 萬里長城에 손을 잡고 서서 만세를 불렀다. 나는 속이 시원했다. 아빠는 아빠대로 나는 나대로 새해의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원대한 포부를 품어 보았다.
아빠와 나는 또 이곳 長成에서 남자대 남자로 중요한 약속을 했다. 대륙의 심장부인 北京 인근 長成에서 아빠와 맺은 약속을 꼭 지키리라. 나도 올 3월이면 중학생이 아닌가. 아빠는 땅덩어리가 넓고 호방한 기질이 살아있는 中國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萬里長城하면 진시황(秦始皇)이 떠오른다. 長成은 중국 전국시대 때 趙나라.燕나라 등이 북방 흉노의 침입에 대비해 이미 부분적으로 축성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고 처음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진시황이 변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해 새로 쌓고 연결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그후 역대 왕조들도 계속 長成을 보완했으며, 특히 明나라는 몽고의 재침입을 막기 위해 성을 증축.개축하는데 애를 썼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長成은 대부분 明나라때 완성된 것이다.
★이和園 이和園(이화원)은 天安門 광장에서 북서쪽으로 약 15km 거리에 있는 중국 최대의 황실 정원이다. 정문인 東宮門(동궁문)을 들어서니 西太后(서태후)가 정사를 보았다는 仁壽殿(인수전)과 뒤쪽에 광서황제와 황후가 거주하던 玉蘭堂(옥란당)과 宜藝館(의예관), 서태후가 생활하던 樂壽堂(낙수당) 등이 어둠에 물들고 있었다.
아빠는 北京에서 가장 볼만한 명소 중의 하나인 이화원 관광을 하마터면 놓칠뻔 했다며, 어두워져서라도 들어온게 다행이라고 했다. 이화원은 사람들의 손으로 조성한 인공호수인 昆明湖(곤명호)를 비롯해 둘레가 8km(20리)에 달하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淸朝의 여름 별궁이다.
그래서 한바퀴 돌자면 거의 한나절이 걸린다고 한다. 아빠는 날이 어두운 탓에 昆明湖 바닥을 파서 나온 흙으로 쌓아올린 萬水山(만수산)에 올라 和園의 풍광을 한 눈에 감상하지 못한게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큰 호수를 파고 여기서 나온 흙으로 산까지 만들다니 중국사람들은 정말 통이 크다는 생각을 해봤다. 더구나 원래는 이화원 규모가 이보다 몇배나 더 큰 규모였다고 하니....
이화원은 원래 金나라 때 行宮으로 건조되었는데 明나라 때도 호수 주변에 여러개의 사원과 정자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昆明湖를 애써 확장하고 萬水山에 여러 건물을 지은 사람은 淸나라의 乾隆 皇帝(1711~1799)이다.
영화에서 보았듯이 阿片戰爭(아편전쟁)에서 패해 淸나라의 위세가 땅에 떨어진 1860년 北京에 침입한 英.佛 연합군이 이곳에 불을 지르고 보물을 약탈해 갔다. 그러자 1888년 西太后가 해군 예산을 유용해 이화원을 크게 개축했다고 한다.
당시 해군을 총괄하던 光緖(광서) 황제의 아버지 순친왕(醇親王)이 한편으로는 서태후의 비위를 맞추고, 한편으로는 아들이 실권을 가진 황제가 되게 하기 위해 해군 예산을 빼돌려 은밀히 공사를 진행했는데, 이것이 훗날 淸日戰爭에서 중국이 패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는 얘기도 있다.
1900년 이화원은 또 한번의 수난을 겪었다. 義和團 事件(의화단 사건)을 빌미로 北京에 침입한 8개국 연합군이 문화재를 약탈하고 건물을 크게 부숴버린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이때 서태후가 西安(서안)으로 피신했다가 북경으로 돌아와서 다시 중건한 것이다.
그래서 이화원은 서태후와의 인연이 깊은 문물이 많이 남아 있다. 낮에 보면 누각과 전당, 소나무와 잣나무 등 노목이 자아내는 풍경이 참으로 아름다운 전형적인 중국풍의 정원이라는데 어두워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東宮門으로 들어가 호숫가를 따라 걷다가 긴 낭하에 들어선 아빠는 이곳을 수많은 궁녀와 신하들을 거느린 서태후가 때때로 지나다녔을 것이라며, 영화 '서태후'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한참동안이나 어둠에 잠긴 곤명호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長廊(장랑)은 중국 회랑 건축 중 가장 크고 제일 길고 최고로 명성이 높은 문화유적이다. 길이가 무려 728m에 이르는데 인물.산수.꽃.새 등을 그린 색채화가 8천여점이나 되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삼국지의 주인공인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桃園結義), 세월을 낚으며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는 강태공(姜太公釣魚), 수호지에 나오는 호랑이를 때려잡는 무송(武松打虎) 등의 유명한 그림이 있다고 하나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아빠가 시키는대로 희미하게 보이는 라마교 건축물 만수산 불향각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곳의 주인공인 서태후는 청나라 제7대 황제 함풍(1851~1861)의 귀비(貴妃)로 황제가 죽은 후 수렴청정(垂簾聽政)의 명분으로 48년 동안이나 권력을 독점한 여걸이자 청나라를 멸망의 길로 재촉한 惡女(악녀)라고 한다.
樂壽堂에 기거했던 서태후는 하루 식사하는데 드는 비용만도 은 60량에 달하는 호화생활을 했다. 은 60량이면 당시에 쌀 45가마 정도를 살 수 있었던 금액으로 요리사만도 84명이었다고 한다. 그밖에 다과나 유제품 등을 만드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무려 120여명이 서태후 입맛 시중을 들었다고 하니 서양 여러나라의 침략으로 나라야 망하든 말든 한평생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리다 간 여인이다.
* 중국의 명물 요리 베이징 카오야(北京 오리구이)로 저녁 식사를 한 우리는 중국여행 중 또 하나의 필수코스인 발마시지를 받으러갔다. 어른들이 시원하게 마사지를 받는 동안, 아빠는 계속 마사지 요원인 중국 누나와 무어라고 중국말을 주고 받았고, 형우를 비롯한 동생들은 발이 간지러워 시종일관 키키덕거리며 웃어댔다.
북경 여행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내일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북경공항을 통해 인천공항으로 날아가야 한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정민이 누나가 고등학생이 되는 것을 기념해서 오게 된 북경여행. 정말 유렵과는 또다른 감흥을 안겨줬다. 중학생이 되면 만리장성에서 아빠와 한 약속을 꼭 지켜야 할텐데... 조 형 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