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南正脈이란 경기도 안성시 칠장산(七長山)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김포시의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는
한강 이남으로 형성된 13정맥중에 하나다 백두대간상의 속리산 천황봉에서 가지를 쳐나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끝나는 칠장산에서
북서로 해발고도 200m 내외의 낮은 산들이 이어져 한강 본류와 남한강 남부유역의 분수령을 이룬다
이 산줄기를 이루는 산들은 도덕산·국사봉·상봉·달기봉·무너미고개·함박산(函朴山)·학고개·부아산 (負兒山)·메주고개·할미성·응봉(鷹峰)·형제봉·광교산(光敎山)·백운산·수리산(修理山)·소래산(蘇來山)· 성주산(聖住山)·철마산·계양산(桂陽山)·가현봉(歌弦峰)·필봉산(筆峰山)·학운산(鶴雲山)·것고개·문수산
백두대간을 완주한지 2년이 되었다. 문득 정맥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까운 거리부터 우선 시작해 보자.
따뜻한 봄이 오고 그러다 보면 새싹이 터 올 테고 나무에 물이 오르고 잎이 돋아 날 그 날을 생각하면서 걷는데로 걸어
가 보자.
이제 우리는 움추렸던 추운 겨울을 보내고 움트고 매화, 개나리, 진달래 순서대로 피고 지는 뭇 꽃들이 줄줄이 기다리
고 있을 세상을 산에서 보며 산새들의 종종대는 노래소리 귓전에 울리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레이고 화창한 봄날이
벌써 이 앞에 와 있는것 같다.
상록수님과 부평에서 강화행 버스를 타고 왔다. 강화대교에서 내려 걷는데로 걷다 버스를 타고 가든 손을 들어 힛치
를 하든 보구곶리까지 가야되지 않겠는가. 철조망이 강가에 쳐진 길을 따라 걸었다. 이 길을 걸어 보는 건 두 번
째라 어슬프지가 않았는데 괜한 으시시한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
어느 아줌씨의 차를 얻어타고 다행히 걸어 마을회관까지 편히 올 수 있었다. 그래서 세상은 살 맛 난단말야. 산에
서는..
임도를 따라가면 부대정문까지 가야 하는 환경의 조건을 누가 거역할 수 있을까,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이 하얀 경고판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190km의 여정에 첫 발을 딛었다. 난 상록수님에게 칠장산까지 갈 수 있는데까지 한 번 같이 가 보지
않겠냐고 했더만 선뜩 나서준다. 그래서 이번에 걷게 되는 정맥길이 심심치는 않을꺼라.
고마움에 이증표를 한 장 남기며 출발한다.
문수산에 자주 와 봤다는 상록수님이 가지 못하는 마루금 갈림길에 발길을 멈춘다. 새삼 북녘땅 개풍군을 쳐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쟁이란 아픔을 겪어 보지 않았다. 우리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 반공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 땐 아픔의 상처가 너무 컷기에 전쟁을 겪은 우리의 선
배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익히 알 수 있으련만.
우리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지금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한강 너머 바로 북녘땅이니 엎어지면 코닿을 그런 가까운 거리를 두고 발가벗은 민둥산만 먼
발치로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보구곶리 북쪽으로 유도가 있다. 누가 하늘까지 아픈 지상의 일을 유도는 알까,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의 물이 유도를
가로질러 서해로 가고 염하로 흘러 가는 것을.
행정구역상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1번지란 유도인데 출입이 통제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다. 유도는 물론 농경지도
없고 보구곶리와 가장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철주야 북한의 감시하는 곳으로 이번에 알았다.
강화대교를 건너면 강화읍이다. 강화는 우리나라에서 4번 째 큰섬이라고 하니 얼마나 큰지 그 순위만으로 짐작이 가지요.
인천광역시 강화읍에는 마니산, 고려산이 유명한 산으로 꼽힌다. 진달래꽃 필 때면 인산인해를 이루는 고려산과 혈구산,
퇴모산, 진강산. 길상산은 강을 넘지 못하네요.
눈이 쌓인 흰 산이 문수산으로 소나무 사이로 들어 온다. 완만한 흙길을 덮은 하얀 눈이 아직 남아 있다.
아이젠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냥 걸었는데 자꾸 뒤로 미끄러진다.
강화대교에서 성동리 마을이 눈 덮힌 전경이 강과 함께 멋지다. 역시 겨울 산행은 눈 덮힌 산하가 최고일 것이다.
270봉의 삼각점이 알수 없는 숫자와 알파벳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문수산성 북문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이다.
문수산성은 경기도 김포시 월곳면 포내리에 위치한 산성으로 사적 제139호로 지정되어있다. 강화의 갑곳진을 마주보는 김포쪽 육지의 문수산에서 해안지대를 연결한 성체이다. 이 성은 갑곳진과 더불어 강화입구를 지키는 성으로 숙종 20년 (1694)에 축성되었고 순조 12년(1812)에 중수되었으며 고종 3년 (1866) 병인양요때에 불란서군과의 격전을 치른 곳이다. 1866년 9월 8일 불란서 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성을 점령한후, 동년 9월 18일 문수산성을 침공하여 올 때 문수산성에는 봉상시사 한성근이 대원군의 명을 받고 성을 수비하여 불란서군과 싸웠으나 결국 무기와 병력의 열세로 후퇴하고 말았다.
문수산이 가까워 지면서 강화가 더 가까이 더 넓은 섬으로 강과 어우러져 있었다.
잘 정돈된 나무테크에 사진 한 방 찍어 남기며 여기서 만난 분들과 막걸리와 간식으로 배를 채웠다.
강과 섬과 북녘땅이 한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문수산 전망대에 앉아 있으니 정원같은 생각이 든다.
많은 길을 가야 하는 우리는 퍼질러 앉아 술술 넘어가는 막걸리 유혹에 시간을 보내고 스틱을 세웠다.
이렇게 가깝고도 낮은 산이어도 산에 있음에 행복하다고 말하리라.
김포에 왔으니 이곳의 유산인 고려왕건 시대의 진상주인 문배주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김포의 문배
주란 우리나라 고유의 재래종 배인 문배의 꽃향기와 과실향이 난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문배나무의 과
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문배와 같은 향을 갖게 되는 것이 큰 특징이다라고 한단다.
같은 증류 주에 속하는 중국의 마오타이 등 고량주는 누룩에서 나는 고유한 이취(異臭)가 나는데, 문배 술은
그러한 이취가 없고 혀에느껴지는 한미가 뛰어나 호평을 받고 있다. 알코올 도수가 높아 영구히 저장이 가능
하다.
문배주는 1986년 11월 1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6-가호로 지정이 되었으며 기능보유자인 이기춘 선생과 그의 아들까지 5대째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문수산]
김포에서 가장 높은 산(376m)으로 사계절 경치가 아름다워 ‘김포의 금강’이라고 불리는 문수산은 동쪽으로는 한강과 서울의 삼각산, 서쪽으로는 멀리 인천 앞바다, 북으로는 개풍군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절경을 자랑한다. 또 산림욕장을 지나면 약4㎞의 문수산성과 연결되어 구한말 외세 침략에 저항했던 민족의 역사를 보여주는 산교육장이라 할 수 있다.
문수봉정상이 단장되고 있었다. 석축을 쌓아 문수산성과 문수산을 조성하는 공사를 하고 있었지만 잘 진행이 되지
않는 듯 했다. 몇 년전 상록수님이 왔다 갔는데 아직도 공사중이라고 하니 많은 시간이 아직도 이렇게 불편한 산정
에서 바라다 보는 정경만은 다른 산 보다 의미가 다르다 하겠다.
임진강물은 북에서 서해로 흘러 내려 오는 문수산 뒤로 보이는 애기봉이 조망된다.
문수산을 내려 오면서 가야할 정맥길에 사진을 담고 쌍용대로를 지나면서 마루금은 사실 무의미한 길이였다.
임도가 이리저리 나 있고
애기봉가는 이정목도 있고 철조망도 계속 정맥길따라 이어져 있는 그냥 지도를 주머니에 넣고 가끔씩
나타나는 표지기와 산줄기의 꼬리를 물고 걸었다.
애기봉 가는길에 애기봉의 전설을 남기고.
○애기봉의 전설○
유유히 흐르는 조강(祖江)물을 굽어보고 수백 길 높이 솟은 애기봉은 애절한 전설을 간직하고있다. 병자호란때에 일이다.
높새바람의 기세가 봄기운에 밀려 활기를 못띠던 때, 기생 애기(愛妓)는 봄의 따사로움을 만끽하며 평양감사와의 사랑을 막 피어나는 잔디위에 수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하늘의 시기인가, 노여움인가, 두 사람의 운명을 모질고 슬프게 만든 변란이 일어났다. 북쪽 오랑캐(후의 청나라) 의 침략과 노략질로 감사와 애기는 임금님이 계신 한양으로 피난길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당시는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못했으므로 걸어서 수천리 길을 가야만 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수천리를 걸어가야 하는 일이 힘겨운 노릇이었지만 감사를 따르는 애기는 참고 견디며 개풍군까지 왔으나, 감사는 오랑캐들에게 잡혀 북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감사와 생이별을 한 애기는 혼자 강을 건너 월곶면 조강리에 머물면서 감사가 돌아 오기를 학수고대 했다. 하루하루 더해지는 감사에 대한 그리움으로 날마다 쑥갓머리산(하성면 가금리 소재) 정상에 올라 임 계신 북녘을 향해 눈물로 소리치며 애타게 기다리다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명재경각(命在頃刻)의 애기는 임을 향한 그리움으로 매일 애타게 기다리던 산정(山頂)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했다. 애기의 유언에 따라 동네 사람들은 애기를 쑥갓머리산 꼭대기에 장사하고 그 산을 애기봉(愛妓峰)이라 불러왔다.
지금 애기봉 정상에는 강건너 북녘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서, 실향민들이 향수를 달래려 자주 찾는 망향(望鄕)의 동산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애기봉은 북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한으로 맺힌 곳이라 하겠다
야릇한 곳에서 사진 한 장 박아 남겼다. '슬픔이여 빨리 가거라, 그대 없이 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본다. 벌써 문수산이 저 멀리 있고 걸었던 발자욱 그림자를 따라 사진에 담았다.
산줄기아래 내려앉은 공장지대, 군부대, 임도, 펜스, 지도상 찾을 수 없는 삼각점 등을 이 산줄기에서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남정골고개, 12번 군도]
남정동의 유래
남정동은 통진읍 고정 2리에 있다. 이덕형이 광해군 무오에 폐대비론 (인목대비를 폐서인으로 하고 영창대군을
사사한 사건의 발단)을 반대하다 삭탈관직된 후, 통진의 한산(閑山) 아래 정자를 짓고 조수헌(趙守憲)과 매일 만나 글을 짓고
세월을 소유(消遺)하였는데 그 정자 이름을 남정(南亭)이라 했다. 또 정자의 구지(舊址)에는 늙은 괴목(槐木) 한 그루가 있는데
이상공(李相公)이 친히 심은 것이라 전한다.
남정동(南亭洞)은 이상공의 정자 남정(南亭)에서 유래한 것이라 전한다.
아스팔트길에 오고가는 차량과 같이 걸어야 되고 식당이 표시된 안내판도 수없이 많고 이것이 정맥길이구나.
정말 애궁이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군부대와 철조망은 이어지고 ..
반갑게 맞아주는 지석묘가 발길에 머문다.
대상문화재 : 우저서원, 심연원.심강 신도비, 수안산성, 한재당와 이곳의 고정리지석묘가 있다.
[지석묘]
고정리 지석묘를 지나 산길을 걸어 가던 중 철조망이 가로놓인 산줄기를 만나게 된다.
나무가 가로놓인 산길과 넘어갈 수 없는 철조망 앞에서 길을 찾는다. 큰소리가 들
려온다. '길이 없어요' 난 속으로 '우리가 언제 길이 있는 곳이 여기에 얼마나 되길
래' 쓴 웃음으로 비웃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큰 건물이 있는 길따라 내려온다. 먹다 남은 간식을 양지바른
언덕에서 먹고 차도를 만나고 외국어고등학교가 높은 건물로 방향을 알려주는 듯 내려
왔다. 버스가 지나가는 정류장에 서서 스틱을 접는다. 지나갈 수 없는 산줄기가
낮은 산으로 내 얼굴은 그곳에 있었다. 바로 앞에 저기가 철조망따라 가면 아파트도
있고 해병대가 있는 것고개, 우리가 아침에 버스를 타고 지나간 도로 48번 국도인걸.
아직 문수산에 해가 중천에 떠 있다. 해가 길어진다. 다음에 것고개에 서는 날 그날은 산에서
있을 시간이 더 많을 것 같다. 강화도 동막골의 해가 지는 언덕에 서있던 그 날이 생각났다.
한남정맥 첫발을 끝내고 오른 버스는 달리고 있었다. 부평으로.... 부평에서 상록수님은 요즘 유행하
는 고기 딸린 냉면을, 난 육게장을 먹고 나오니 하루종일 조잘댔던 시간은 벌써 어둠속 네온싸인 불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