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는 거북이만 보면 놀렸다. 거북이가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얘 느림보야 너는 저기 언덕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기나 하니?” 토끼는 재미로 거북이를 놀리는 것 같았다. “그럼 우리 언덕너머까지 경주해보자” 거북이도 지지 않고 맞섰다. 이렇게 해서 토끼와 거북이는 경주를 하게 되었다. 경주가 시작되자 토끼는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가 거북이를 한참이나 앞질렀다. 거북이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오는 걸 확인한 토끼는 낮잠을 자게 되었고 결국 승리는 거북이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하루 하루를 거북이처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자기 재주만 믿고 성실하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을 이긴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려고 만들어진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토끼처럼 꾀부리지 말고 거북이처럼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다짐했다고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다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그녀 얘기도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의 결과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자고나면 쏟아지는 정보시대를 살아가면서 컴퓨터가 필수품이 된지는 이미 오래지만 그녀에게 컴퓨터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낯선 물건처럼 생각되었다. 며칠 전 걸려온 초등학교 동창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일년에 한두 번 전화를 걸어서는 자식자랑이며 남편자랑을 늘어지게 하고는 할 얘기가 없으면 사돈의 팔촌 얘기며 나중엔 텔런트 누구랑 누가 사귄다더라 누구는 이혼을 했다더라 하는 얘기로 마무리를 하는 숙자는 이번엔 빅뉴스라도 된다는 듯이 목청을 높여 30여년 만에 열리는 초등학교동창회 소식을 전했다. “얘 이번에 열리게 되는 동창회 말이야 어떻게 열리게 된 건지 아니? 인터넷에 ‘아이러브스쿨’ 이라는 사이트가 있는데 거기서 연락이 돼서 동창회를 열게 됐다나봐 참 신기한 일도 다 있지? 컴퓨터가 아니면 그 오래전 친구들을 어떻게 알고 만날 수 있겠니? 세상 참 좋아졌지!” 하면서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동창들 이름을 불러가며 수다에 열을 올렸다. 그 많은 이름 중에 지금도 그녀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는 이름이 끝내 불려지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숙자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기억저편에서 스멀거려 그 이름을 차마 부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주 토요일 시내 음식점에서 동창회 한다니까 꼭 나와”하고 숙자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거실 한 쪽에 놓여있는 컴퓨터를 바라보며 비로소 현대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자신과 아직도 두 달은 더 내야하는 컴퓨터 할부금 고지서가 어른거렸다.
그녀와 정희는 초등학교 6년 내내 함께였다. 그녀의 기억속의 정희는 쌍꺼풀진 눈가에 늘 웃음이 묻어났고 오똑한 콧날과 크지 않은 입은 꼬리가 약간 올라간 듯 보였다. 긴 머리는 두 갈래로 묶어 분홍색 리본을 매고 하늘거리는 원피스에 하얀색 구두까지 맞춰서 신고 다녔으므로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띄었다. 그런 정희는 늘 인기가 많았고, 정희의 그림자처럼 함께였던 그녀는 정희와 함께인 자신이 자랑스럽게까지 여겨졌다. 아니 그녀는 정희가 좋았다. 정희의 가방이 언제나 그녀차지가 되어도, 함께 맡겨진 청소를 그녀혼자 해야 될 때에도, 열심히 한 숙제를 정희가 한 것 인양 선생님께 칭찬을 받을 때에도 그녀는 그 몫이 늘 정희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6학년 가을 교내 사생대회가 열리던 그전까지는... 가을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파랗던 그날도 그녀와 정희는 함께 사생대회에 참가했다. 그리기를 유난히 좋아하던 그녀는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정희는 그림엔 통 관심이 없었고 빈둥거리며 왔다 갔다 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한낮의 해가 기울어 갈 때 쯤 그녀의 그림은 완성되었고, 그녀가 보기에도 마음에 쏘옥 드는 그림을 막 제출하려는데 정희가 나타났다. 정희는 그녀의 그림을 냉큼 낚아채더니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써서 제출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늘 상 있는 일이었지만 그때만큼은 그녀도 화가 났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정희가 제출한 그림이 상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그녀는 그림주인은 자신이며 그동안에 있었던 정희의 이야기를 선생님께 모두 얘기하게 되었고 그 다음일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일을 알게 된 아이들은 정희를 따돌렸고 결국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정희는 그렇게 그녀의 기억 속에 조금은 아픈 기억을 남기고 떠났다.
숙자의 전화를 받은 후부터 그녀는 내내 한 가지 생각에 붙잡혀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정희의 소식만을 궁금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중학생인 딸아이가 돌아오자, 숙자와의 통화에서 들었던 인터넷사이트 ‘아이러브스쿨’이라는 곳을 찾아볼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녀가 다녔던 초등학교 이름을 입력하자 초등학교와 가입한 회원수가 검색되었다. 회원수가 5000명이 넘은걸 보면 어쩌면 정희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30여년이 지난 세월동안 잊고 지냈던 반가운 이름들이 꽤 여러 명 보였지만 정희의 이름은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 컴퓨터 보기를 원수 보듯이 하지마세요 유익한 정보가 얼마나 많은데요” 딸아이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들여다본 인터넷은 그녀에게 컴퓨터안의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했다. 그날밤 그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학창시절을 떠올리면서 흘러간 세월이 실감났다. 일 이등을 다툴 정도의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늘 노력하는 스타일로 꽤 괜찮은 성적을 받았었다. 그리고 직장생활 몇 년과 거기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올해로 결혼 15년이 지나는 동안 참 열심히 살았다. 평범한 샐러리맨 월급으로 아이 둘을 키우며 서울시내에서 집 한 칸 마련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집살 때 받았던 대출 잔금이 조금 남아있긴 해도 열 번이 넘는 이사 끝에 이젠 내 집을 마련했다는 뿌듯함으로 요즘은 그녀에게 행복한 나날이었다.
초등학교동창회 소식을 전했던 숙자의 전화가 다시 한번 걸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동창회 참석여부를 계속 망설여야 했을 것이다. 그 고민은 숙자의 전화를 받은 후 동창회에 참석하는 걸로 결정되었다. 코흘리개 친구들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을까를 상상하며 또 지금의 그녀를 거울로 들여다보며 며칠을 들뜬 기분으로 지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신기했던지 딸아이는 “엄마 좋아했던 남자친구도 있었어요? 우리엄마 좋겠네” 하고 놀려댔다.
동창회가 열리는 날 아침 하늘은 잔뜩 비구름을 머금은 채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시간은 저녁 6시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지만 그녀는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했다. 오랜만의 외출에 식구들 식사준비며 해야 할 집안일을 서둘러 마치고 동네 미용실에 가서 머리모양도 손질하고 입고 갈 외출복도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토요일 오후라서 복잡한 시내교통상황을 가만해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지하철을 이용하는 편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서둘러 동창회장소로 향했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지하철 안은 복잡했다. 비에 젖은 우산들이 더 골칫거리였다. 오랜만에 차려입은 그녀의 외출복을 사정없이 망가뜨려 놓았기 때문이다. 떠밀리듯이 이리저리 오가며 지하철역을 빠져나올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동창회 장소에 도착해서 흐트러진 머리와 옷차림을 매만지며 들어가기를 조금 망설이고 있는 그녀 옆으로 까만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그리고 운전기사가 열어주는 승용차 뒷문에서 영화에서나 봄직한 세련된 차림의 여자가 내리더니 고인 빗물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도 어떨 결에 식당으로 들어가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숙자의 얼굴이 보였다. 호들갑스럽게 잡아끄는 숙자의 손을 잡고 식당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오래전에 도착한 듯한 숙자는 이 자리 저 자리를 부지런히 오가며 수다에 열을 올렸지만 그녀는 그 자리가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과연 30여년의 세월은 그냥 흘러간 게 아니었다. 철부지 계집애들은 중년의 아줌마들이 되어 아줌마 특유의 입담을 자랑하고 있었고 개구쟁이였던 남자아이들은 듬성듬성 빠진 머리와 인격이라도 되는 듯 나온 배를 내밀고 거드름을 피웠다. ‘내가 올 자리가 아니었구나’ 후회하면서 식탁위에 차려진 음식을 마지못해 먹고 있는데 숙자가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저기 보이는 저 여자 말이야 누군지 알겠니?” 숙자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자 그녀가 들어올 때 멋진 승용차에서 내린 세련된 그 여자가 우아하게 음식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정희 기억나니? 왜 네 그림으로 상 받았다가 들통났던 그 얄미운 계집애 말이야” 갑자기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릴 때부터 예쁘장하게 생겨가지고 미운 짓만 하더니... 멋지게 차려 입었군 사장님 사모님이라나? 근데 쟤 이혼하고 애 딸린 홀아비하고 재혼했다더라 요즘 세상에 재혼이 무슨 흠이라도 되니? 그 덕에 떵떵거리고 잘 산다더라 강남에 빌딩이 몇 채래 하긴 머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니” 숙자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지만 그녀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우산을 두고 나왔지만 그녀는 그냥 빗속을 걸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계속 그녀의 볼을 타고 내렸다. <끝>
첫댓글 엽편소설이란 원고지 20~30매정도의 아주 짧은 소설을 말합니다.
흠.....눈 아픈거 참고 열씨미 읽엇습니다...``-.-
제노님 고마워요 눈아픈것까지 참고 열씨미?? 읽으셨군요. 하나 더 올릴까나?ㅎㅎ
넵...기꺼이~~^^*
넘 길다,,,,,눈아포요,,ㅎㅎ
저한테도 정희같은 친구가 있었는데요...갑자기 궁금해 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