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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삭 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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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말씀 나눔 스크랩 어 성경이 읽어지네 7/부터 신약
이루리 추천 0 조회 19 10.04.11 00: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6. 신구약중간시대를 알아야 신약이 열립니다.

라기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신이 감동되어 말씀이 임한 이후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계시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 그 흔했던 수 많은 선지자들의 활동이 더 이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약200년 간의 포로귀환의 역사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그 이후 침묵하십니다. 마치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70 식구 이야기가 있은 이후 모세가 등장하기까지 약 4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성경이 침묵하는 것처럼 말라기 이후 예수님이 등장하기까지 약400년 동안 성경은 역시 침묵합니다 . 그래서 이 400년의 기간을 암흑시대. 또는 신·구약 중간시대라고 일컫습니다 .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져서 암흑시대라 일컫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도 이 시대에 대해서는 글로 기록된 자료가 가장 빈약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경책에서 구약과 신약 차이는 한 장차이지만 그 사이 숨겨져 있는 400년의 역사 는 구약을 읽던 우리의 관점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웬지 신약은 구약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어쨌든 구약보다는 좀 수월한 느낌이 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복잡한 역사이야기가 없어서 좋고. 읽으면 그래도 깨달아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어서 친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읽는 신약은 겉으로 그냥 읽어서 얻는 깨달음의 한계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구약을 역사적인 배경과 연결해서 원치 않으면 윤리와 도덕률을 깨닫는 수준 정도의 교훈밖에는 얻기 힘들고. 눈에 안보이게 깔려있는 수 많은 신약의 사건들과 예수님의 교훈은 그래서 읽어도 읽어도 어려울 때가 많은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신약의 배경이 되는 정치구조. 사회구조. 영적인 상황을 모른다는 사실 입니다. 역사는 연결된 것이고 흘러온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약에 나타나는 기원 후의 역사, 소위 A.D. 원년이라 불리우는 예수탄생의 역사도 과거에 끈이 매달려 있다는 것 입니다. 이 끈은 바로 구약 이후 400년 동안 성경이 침묵한 그 기간 동안의 것입니다.

구약은 구약인가보다 하고, 신약은 신약인가보다 하지만. 신.·구약 그 사이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배울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구약의 선지서 부분처럼 바로 이 신.구약 중간부분도 안개에 싸여 있는 동네처럼 늘 뿌연 느낌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도 우리가 조금 투자해서 공부해 놓으면 신.구약이 뻥 뚫리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지 않고 있는 이 기간 동안의 역사를 이스라엘이 소장하고 있는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기록, 세계역사들, 또 역사가들이 기록한 책들을 통해서라도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전복 따러 갑시다♣)

신약시대에 나타난 성경의 주인공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각 을 가져야 합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했다는 것은 이제 국가가 사라졌다는 것 입니다. 국가가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그 국가를 이루고 있던 제도나 조직도 이젠 옛날 같은 형태로는 재조직될 수 없다 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잡혀가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유다의 지도층 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들에 의해서 이 전의 국가조직처럼은 못 돼도, ‘새로운 공동체’ 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데 혁혁한 활동을 한 사람이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 였다는 것은 이미 공부했습니다.

이제 중간기 시대를 공부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려놓아야 할 그림이 있습니다. 지금 이 중간기 시대의 사람들이 어디 어디에 흩어져 있는 중 인가를 염두에 두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에 들어가서 나타나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지역뿐만 아니라 그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들이기 때문 입니다. 신약의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아니라 이 중간기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주 옛날에 앗수르에 망했던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얘기를 보면. 그 당시 그들의 예배장소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분명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남방 유다가 포로귀환해서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같이 하고 싶어했지만 단호히 거절하는 얘기가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이 산’ (요4:20 이라고 표현된 그리심산) 에 예배처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폐허가 되어있던 세겜 (그리심산) 을 복구해서 그들 나름의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키워나간 것입니다. 마치 남방유다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던 것처럼. 그들도 바사제국 말기 즈음에 건설 허가를 받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이 중간시대를 세겜 중심의 종교문화 를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또한 성경의 사본 중에는 사마리아사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모세오경을 읽으며 하나님을 섬겨온 흔적이 이렇게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이후 성경은 유다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기록이 없어 우리가 알수 없지만 신약에 와보니 예수님이 자라나신 땅은 북방이스라엘의 갈릴리입니다 . 갈릴리는 팔레스타인 땅 북부지역의 한 도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과는 상종을 안하고 돌아다니는 유대인들이 북부 갈릴리 지역에는 살고있더라 이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구약을 공부한 것으로 보면 북방의 10 지파들이 살고 있던 땅에는 북이스라엘 사람만 살 것 같았는데, 막상 신약에 오니까 북방땅에도 유다지파 요셉과 마리아가 살고 있는 겁니다 . 분명 어느 때 부터인지 이 북부 갈릴리쪽에도 정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바사에서 귀환한 백성 들은 나름대로 살 곳을 찾아 여기저기 흩어진 것 같습니다. 에스라서 명단에 나타나는 귀환백성들은 주로 레위지파 중심의 지도급 인물과 예루살렘 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들인데 이들의 후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북쪽지역으로도 퍼저나가 정착한 것입니다 . 사마리아 땅에 살고 있거나 북방이스라엘에 살고있거나, 남방 유다지역을 중심으로 흩어져 살고있거나. 이 사람들은 모두 다 팔레스타인 땅 덩어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들입니다. 그들에게서 후손이 퍼져나와 계속해서 신약까지 흘러간 것 입니다. 또, 팔레스타인 땅, 가까이로는 요단동편 베레아지역 (모압) , 데가볼리 (갈릴리 동북쪽 이방땅) , 지중해 연안의 두로와 시돈 지역에도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3개월 간은 베레아 지역에서 사역하시는데 회당에서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눅13:10).

그런데 이 사람들 말고 또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들입니다. 즉 포로로 잡혀갔거나 일찍이 팔레스타인 땅을 벗어나 외국에 흩어져서 계속 거기에 정착해 살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애굽으로도 흩어졌고. 또 우리가 아는 대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나름대로 살게 됐고, 에스더서에 있는대로 바사(이란)의 수사성에도 유대인 무리들이 살았습니다. 바벨론. 바사의 세력이 지나고 그리스, 로마로 이어지면서 터키 지역(소아시아, 에베소), 유럽 (첫 성 빌립보. 데살로니가, 마게도냐, 아테네. 고린도지역등), 그리고 이탈리아 로마 에도 유대인들이 살았습니다. 물론 러시아 쪽으로도 흘러가 산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 심지어는 일본에도 유대인들이 흘러들어 갔다는 사실을 전시해 놓은 사진을 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이방을 전도할 때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도한 것을 보면 . 위에서 설명한 세계 여러 지역에 흩어지게된 유대인들 그들 나름대로 회당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

자, 그럼 이렇게 온 세상에 흩어지게 된 400년 동안 유다는 어떤 나라에 종살이를 하면서 흘러 가게되는지 그 역사 를 자세히 훑어봅시다. 우리의 목적지인 신약시대 에 오면 로마가 주인 으로 앉아있습니다. 그러면 400년 동안 어떤 나라들이 이 유다의 주인으로 행세했는지 그 역사를 살피면서 그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이 유대 공동체는 어떻게 몸살을 하면서 살아남는지 보십시다. 이 공부를 하면서 또한 예수님 시대에 나타나는 헤롯. 분봉왕. 대제사장. 바리새파, 사두개파, 가이사등등 수많은 시대적 배경들도 간단하게나마 살펴봅시다.

1. 바뀌고 바뀌는 팔레스타인 땅의 패권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70년 간 바벨론에 종살이 를 합니다. 그 후 구약이 끝날 때는 바사의 통치 를 받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바사통치를 받은 총 연수는 약 200년 입니다. 그러다가 B.C. 336 년경 그리스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바사를 점령해서 약30년 간 지배권이 넘어갑니다. 그후 알렉산더의 부하였던 프툴레미가 이집트지역을 점령하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어 100년 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나서 역시 알렉산더의 부하 중 한 사람이었던 셀레우코스 (♣ 프톨레미와 맞수 였음♣) 가 팔레스타인 땅을 프톨레미에게서 빼앗는 바람에 이번에는 셀레우코스 왕조 에게 넘어갑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셀주크 왕국) 왕조가 약 34년 간 지배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유다의 마카비가B.C. 165년에 셀레우코스에 대항하는 독립전쟁 을 일으켜 성공합니다. 그 후 약 100 년간을 유대는 독립국가로 있다가 B,C. 63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에게 예루살렘을 점령당하므로 그 유명한 로마제국의 수하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벨론(70년)⇒ 바사(200년)⇒ 헬라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30년)⇒ 이집트의 프톨레미왕조 (100년)⇒ 앗수르 바벨론 통치자 셀레우코스왕조(34년)⇒ 유다가 독립함(100년)⇒ 로마 의 점령(B.C. 63년)⇒ 예수탄생 (B.C.4년)(별지부록, 성경역사와 세계역사 대조표를 참고 하십시오)

1)첫째주인:바벨 (70년)

바벨론은 70년 동안 유다를 지배 합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 (벨사살) 는 혜성처럼 나타난 페르시아 고레스 에게 패합니다.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은 근근히 그저 개인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이지 특별한 집단이나 공동체 운동도 없습니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고급 인력들은 나름대로 왕궁에 등극되기도 합니다. 이때 다니엘과 에스겔 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이곳에 잡혀온 레위인, 제사장을 중심으로 율법이 가르쳐지고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을 통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의식 을 고수합니다.

2) 둘째 주인 : 바사 (페르시아) (200년)

성경에 나타나는 포로시대의 주인공들은 주로 바사. 즉 페르시아의 왕들을 많이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포로에게 자유령을 내렸던 고레스 를 비롯해서 다리오 1세 , 아하수에로 , 아닥사스다 1세, 다리오 2세, 아닥사스다 2세 를 거쳐 다리오3세 에 이릅니다. 이 왕들 사이에 함께 살았던 유대지도자들은 다니엘, 스룹바벨, 예수아, 학개, 스가랴,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등 입니다. 그러니까 포로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바사의 영향력 밑에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는 이 동 안에 일어났던 성경의 사건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의 포로귀환. 성전재건, 성곽재건, 개혁운동 등을 통해 새로운 포로귀환 공동체가 생기는 기간입니다.

후대에 이르러 역사는 이 공동체를 ‘유대교’ 라고 명명합니다. 구약의 왕국시대까지는 ‘유대교’ 라는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나라가 없어진 이후 과거 왕국의 조직이 아닌 새 공동체 그룹이 형성되면서 ‘유대교’ 라는 이름으로 일반 역사속에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이렇게 명명되게된 가장 큰 중심인물은 에스라 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띄고 애써 등장하게 된 다윗의 후손, 유대인 입니다. 에스라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했나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외적인 그들의 생활도 점점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페르시아 말기(에스라 후 100년) 즈음부터는 유다는 자체의 화폐를 찍어내고 내국세를 징수하는 정도의 권한이 허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의 제사장 가문 이름의 인(印)들이 찍힌 항아리 손잡이가 발견된 것을 보면 이미 이 때부터 제사장들이 바사의 총독으로서 행정관 역할도 한 것이 아닌가 보입니다. 또한 이 때는 이미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대신 그 당시 공용어였던 아람어를 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상적 공용어로는 아람어를 썼지만 히브리어도 기독교 초기까지 계속해서 쓰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헬라문화도 주변을 공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페르시아와 헬라는 자주접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아직 헬라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전이라 해도 이미 문물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인. 군인. 학자 등이 오고 갔고, 헬라의 공예품들과 그릇들이 뵈니게 항구를 거쳐 유다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이제 유대인들이 헬라문화에 접속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3) 셋째 주인 : 그리스 (헬라) (30년)

사실 바사의 마지막 왕인 다리우스 3세와, 그리스 마게도냐의 알렉산더는 같은 시기에 왕으로 즉위 했습니다. 각각 자기 나라에서 왕이었지요. 그런데 이제 그 패권이 알렉산더에게로 넘어갑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알렉산더는 어렸을 때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운 사람 입니다. 학문과 문화, 철학에 일찍 눈을 떴던 알렉산더는 온 세상을 헬라화시켜야 한다는 분명한 꿈을 갖고 대단한 열정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갔던 사람이었습니다. B.C. 333년 이수스 전투로 페르시아군을 패주시킨 후. 뵈니게. 두로, 이집트가 차례로 그의 지배에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유다)도 그의 수하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 그의 정복은 동방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바벨론 지역을 공격해서 수산 (에스더 궁이 있던 곳) 까지 접령했고 멀리 인더스강까지 건녔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병에 걸려 서른 세 살이 채 못되어서 죽었습니다 (B.C. 323) . 정말 짧고 거창하게 산 사람입니다. 그의 저돌적인 공격은 동방지역에 새로운 획 을 그었습니다. 헬리화 입니다. 당시로서는 온 세상을 완전히 헬라화하는 바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비록 그는 갔어도 그의 부하들이 이 빼앗은 땅들을 맡아서 다스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4) 넷째 주인 : 프롤레미 왕조 (100년)

온 세상을 다 얻다시피 통일천하를 한 알렉산더는 그 어마어마한 땅들을 정복했지만 갑자기 죽는 바람에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부하장군들 사이에는 서로 권력을 잡으려는 투쟁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 두 사람이 가장 큰 권력을 갖게 되는데. 프롤레미와 셀레우코스였습니다 . 프툴레미는 이집트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셀레우코스는 바벨론 땅을 갖게 됩니다 . 이 두 경쟁자는 팔레스타인과 뵈니게를 탐냈는데 결국 프톨레미 손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은 헬라인이 다스리는 이집트’ 의 속국이 됩니다. 이 왕조는 100년 동안 팔레스타인을 다스립니다. 헬라의 속국이었을때는 팔레스타인에 이렇다할 중요한 사건이나 자료들이 없는데 반해 이 프톨레미 왕조는 유대 공동체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지 않아도 과거 수백년 동안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이집트에 거류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프툴레미 1세가 팔레스타인 원정중에 많은 포로들을 끌고 왔다고 합니다. 그밖에도 생활 터전을 찾아 이민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찍이 프툴레미 l세는 알렉산더 대왕을 기념해서 지중해를 낀 해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개발해서 수도로 삼았습니다 . 이 도시는 오늘날까지도 대도시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도시에만도 약 백 만 명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있었다고 하니 대단히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있었던 셈입니다 .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아볼로라는 사람도 알렉산드리아 출신(행 18:24)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집트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 동안 히브리말로 쓰여진 구약성경을 가지고 그 땅의 공용어인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 을 만들게 됩니다. B.C. 3세기경. 프툴레미 2세의 명령에 의해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최초의 번역본을 ‘칠십인경 혹은 칠십인역’ 이라고 한다 고 앞에서도 말씀드렸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세계를 헬라화시켰기 때문에 유대인의 점유물이었던 구약성경도 헬라어로 번역된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 신약시대에 와서 온 열방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는 예비 작업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접하게 된 이방인들도 직접 헬라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경건한 이방인들이 생기게 된 바탕이 되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 다섯 번쩨 주인 : 셀레우코스 왕조 (34년)

① 선왕들의 호의정책

알렉산더 대왕의 유력한 두 부하 가 있었다고 했지요? 한 사람은 앞에서 얘기한 프툴레미 왕조를 이룬 프툴레미 1세이고 또 한 사람은 셀레우코스 l세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셀레우코스 왕조도 헬라사람의 왕조 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역사의 무대에서 일찍 사라졌지만 그의 부하들이 곧 이어 이집트와 바벨론 두 큰 덩어리 땅들을 차지했기 때문에 알렉산더가 원했던 대로 사실은 헬라화가 된 셈입니다.

자,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에 끼어있는 땅이 바로 팔레스타인이라 그랬지요? 그렇기 때문에, 늘 양쪽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들은 프톨레미 왕조가 팔레스타인 을 ·‘훔친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것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100년이 지나는동안 계속해서 엎치락 뒤치락 이것 때문에 싸워왔는데 드디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가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고. 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 냈습니다 (B.C. 198). 우리가 성경에서 알고 있는 .안디옥교회’ 같은 이름도 사실은 이 안티오쿠스 가문의 이름입니다. 이들은 수리아 안디옥, 비시디아 안디옥등 ·‘안디옥’ 이라는 이름의 도시를 16개나 건설합니다. 어쨌든 이 전쟁으로 셀레우코스 왕조는 팔레스타인을 자기네 영토로 통합해 버립니다

셀레우코스 1세는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갖고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 포로 석방령을 내렸고, 세금도 면제해 주었습니다. 율법을 따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수 있도록 해주었고, 제의 지원을 위한 국가 보조비도 약속 했으며, 제의 종사자들은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지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마련되었던 제단용 땔감(느 10:34)도 면세 대상이 되었습니다. 성전 수리공사비도 보조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 공동체는 역사가 흘러가면서 알렉산더, 프툴레미, 셀레우코스 , 이 세 왕조로부 터 결국 헬레니즘문화의 공격 을 받게 되는 정황이 된 것입니다. 온 세상이 헬라화되는 추세였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알게 모르게 이 문화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땅 안에도 헬라식 도시들이 여러 개 세워졌습니다. 헬라의 문화는 발달된 문화였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섬겨왔습니다 .

② 안티오쿠스 4세 (자칭 제우스신) 의 잔인한 유대교 탄압

그런데 위기가 닥칩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을 잔혹하게 핍박 하는 정책으로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왕들이 정복민들에게 호의적이었는데 이 왕은 태도가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간기 역사 중에 아주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장본인 이 됩니다. 그의 핍박을 대항해서 유대인들이 투쟁 을 하게 되는데 그 결과 유대의 독립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미카비 전쟁 입니다.

이 안티오쿠스4세가 유대인을 핍박한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선왕 안티오쿠스3세 는 그 당시 점점 무서운속도로 세력 이 확장되어 오고 있던 로마와 자꾸 격전 을 했는데 결국은 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막대한 조공을 로마에 바쳐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피정복 국가로부터 세금을 뜯어내고, 갖은 방법으로 돈 되는 것을 갈취할 수밖에 없는 악정을 합니다. 신전들을 습격해서 금붙이를 빼앗아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로마에 조공을 바치게 된 상황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프툴레미 6세도 다시 팔레스타인을 찾고 싶어서 위협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 그러다보니 안티오쿠스 4세는 우선 내정을 정돈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도시국가 같은 정복국들을 ‘헬라’ 라는 구심점으로 통일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우선 종교적으로 헬라의 신들 (그리스 신화 아시죠?) 섬기도록 강권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제우스 신이라고 자칭하며 가시적인 신격화를 합니다 .

이런 정책을 정복민에게 감행할 때, 유대인들의 형편은 어땠는지 아십니까? 순수하게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오히려 유대 공동체는 타락으로 썩고 있었습니다. 헬라화를 은근히 받아들이는 세력도 있었고. 이들은 자연히 셀레우코스 왕실에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썼으며, 그러다 보니 왕실은 돈을 많이 갖다 바치는 사람을 끼고 정치를 하는 겁니다. 대제사장직을 싸고 암투를 벌이는 거지요. 나체로 참석하는 헬라식 운동경기를 열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할례의 표시가 부끄러워 재수술을 받는 헤프닝도 있었다고 합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B.C. 167년 급기야 유대인 양민들을 급습하여 학살 합니다. 그의 부왕이 내렸던 유대인들에 대한 특혜를 폐지하고 유대교의 모든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했습니다. 희생 제사를 금지했고, 안식일과 절기 지키는 것을 금했고, 율법의 사본들을 파기하는 명령을 내렸고, 할례를 금지시켰습니다.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한다고 방을 붙였습니다. 이교의 제단들을 도처에 세웠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숭배하게 했으며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쳤습 니다.

6) 마카비 혁명 (100년)

① 하스모니안 왕조와 헤롯왕조

유대인들은 이 잔인한 탄압에 무장을 하고 궐기하게 됩니다. 이 때 율법과 언약에 열심이었던 제사장 가문에 속한 맛다디아 라는 사람은 그의 아들들 (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살. 요나단) 과 함께 이 탄압에 대항하여 투쟁 합니다. 결국 이들의 활동으로 안티오쿠스4세에게서 독립 하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우리는 흔히 마키비운동 이라고 부릅니다. ‘ 마카비’란 맛다디아의 셋째아들 유다의 별명인데 쇠망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승리로 마카비가문은 100년동안 독립 을 합니다. B.C. 166년 유다의 마카비가 앗수르의 안티오쿠스 4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은 후 그 다음 해인 B.C. 165년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케 하는데 바로 이를 기념하는 명절이 신약에도 나오는 수전절 입니다. 그 때 이래로 마카비의 후계자들이 계속해서 유대인들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이 왕조를 하스모니안 왕조 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제4대까지 내려왔을때는 예루살렘 동남쪽의 이두메(에돔지역)까지 정복하게 됩니다. 이 때 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총독을 두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안티파스 (B.C.78년 사망)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에돔을 다스리던 왕 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대헤롯:마2:1-12) 의 할아버지 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다 역사에 등장하게된 헤롯가문 이후에는 점점 로마세력이 커진다는 정세를 파악하고는 자꾸 친 로마 정책을 폅니다. 그러다가 로마를 등에 업고 마카비 왕조 에 반역합니다. 로마와 손을 잡고 출발한 헤롯 왕조 는 후에 유대의 왕자리를 빼앗아 왕 이 됩니다. 그러니 헤롯가문은 유대인이 볼 때는 반역자인데, 그 밑에 복종해야 하는 기가막힌 관계를 갖고 출발합니다. 이렇게해서 예수께서 탄생하시는 그 시각에 유대의 왕으로 에돔 사람 헤룻대왕 이 있었고, 그 위에 로마라는큰 지배세력이 버티고 서 있게 된 것입니 다. 유대인들은 이제부터 ‘이중 지배구조의 압제’ 라는 틀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생장점

이와같이 쎌레우코스 왕국(앗수르 지역)의 안티오쿠스4세(에피파네스)와의 전쟁으로 독립을 얻어낸 유다 마카비 혁명의 역사는 앞으로 전개될 신약시대의 정치 구조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신약에 헤롯가문이 등장하 게 되는지 그 연고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카비 시대와 관련되어 탄생되는 헤롯 왕조의 가문 을 이해해야 신약시대의 정치 판도가보이기 시작합니다.

② 마카비 시대의 유대교 부흥

마카비 운동의 시작은 다섯 형제의 아버지 맛다디아였습니다. 유대 공동체 내에서는 (♣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했지요?♣) 제사장들이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에 늘 신정적 통치가 있었고, 그 사회를 내적으로 이끄는 지도급은 성전중심 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잔인한 안티오쿠스 4세의 학정은 성전을 핍박하는 것 이었기 때문에 그것과 더불어 싸웠다는 것은 성전문화를 고수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유대인들은 그래서 제일 먼저 성전을 청결케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율법과 성전을 중심으로 더욱 더 열심을 내고 부흥하게 되는 문화를 낳게 됩니 다. 지금까지 여러 종주국에 지배를 받아오다가 마카비 자유시대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 마카비 시대’는 소위 ‘유대교가 제도적으로 다져지는시대 ’ 라고 일컬어집니다. 바로 이 마카비 시대 속에서 발전된 유대교가, 에스라시대 이후로, 신약시대 즉 예수님 시대의 영적 배경 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반드시 어떤 특성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율법 중심’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의해 주도된 이 새 공동체 는 ‘토라’ 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지키는 일이 가장 기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개혁 운동의 핵심은 ‘율법’ 이었습니다. 즉 안식일, 할례. 정결의식, 십일조. 성전과 제사규례 등을 강조 함으로써 정화된 ‘새 이스라엘’ 공동체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 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새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재정의되게 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로부터 독립한 이 이스라엘은 이제 어엿 한 국가적 실체 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불려지는 “ 이스라엘” 이라는 말은 “ 율법을 중심 으로 결속한 유다의 남은 자들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은 유일무이한 최고가치 가 된 것입니다. 율법은 그들의 상징 이었습니다.

율법을 높이다보니 그 율법에 나타나는 제사행위 는 당연히 이주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마카비혁명을 주도한 맛다디아 가문은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 혈통 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스모니안 왕조는, 왕 이요. 대제사장 역할을 하는 유대 공동체의 정신적 수장 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역사는 후에 이들 유대 공동체 내에서 ‘ 누가대제사장이냐 ?’가 곧 ‘ 누가권력가냐 ?’로 대치되는 역사를 낳고 맙니다. 우 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 첫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 안에 서 제물을 사고 파는 사람들을 내쫓은 사건을 압니다. 그 때 그 성전도 바로 이 흐름을 타고 흘러내려 가다가 또 부패하기 시작한 대제사장 부류들이 장사를 하고 있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7) 여섯 번째 주인: 로마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사에서 가장 유명한 제국이었던 로마도 처음 B.C. 8세기 경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간 쯤에서 생겨난 작은 도시국가 였습니다. 도시국가 로마는 점점 힘이 강대해져서 B.C. 270년경에는 드디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습 니다. 이러면서 잡아온 노예들을 검투사로 만들어 즐겼는데 이런 노예들을 특별히 ‘스파르타쿠스’ 즉 ‘검노’ 라고 불렀습니다 . (♣ 영화로도 나왔었죠? Gladiator,검투사· 영화였습니다 ♣) 그런데 이 검노들이 반란 을 일으킴니다. 검노들이 뭉쳐서 반란군이 되었고 급기야는 그 수가 10만 이나 이르게 됩니다. 이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원로원은 폼페이. 크랏수스 를 임명했고 이들은 성공리에 검노들의 반란을 진압 합니다· 그후 이 두 사람은 한 사람을 더 가입시켜서 원로원을 누르고 그 유명한 3두정치 ’ 라는 걸 합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케자르, 즉 율리어스 시저 (가이사) 였습니다. 가아사는 이렇게 해서 등장 합니다. 그 후 가이사는 갈리아 (지금의 프랑스 지역, 북이탈리 지역) 지방에 쳐들어가서 엄청난 숫자의 부족들을 평정합니다.

폼페이 장군 역시 여러 지역에 출정해서 나라들을 합병합니다. 그는 특별히 동방으로 진출해서 터키 지역과 수리아 등지를 정복합니다. B.C. 64 년에 다메섹을 점령한 후 수리아 주(州) 를 만들더니 l년 후에는 그 아래로 눈을 돌려 유다를 정복합니다. 이 찬스를 놓치지 않은 에돔 총독이었던 안티파터는 폼페이를 도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데 일조를 합니다 .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전쟁으로 1만 2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마카비 혁명으로 시작된 유다의 독립이 약 100년 후 다시 로마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B.C. 63년에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킨 이 사건을 시작으로 로마통치시대를 연 것 입니다. 마카비 하스모니안 왕조의 힐카누스2세는 항복을 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합니다. 이로 인해 힐카누스는 더 이상 왕으로서가 아니고 “대 제사장”으로서 유다를 다스리게 됩니다. 폼페이가 그렇게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안티파터(안티파스의 아들. 대헤롯의 아버지)는 “집정관”이라는 이름으로 유대지역을 다스리게 해 주었습니다. 이때로부터 마카비 수하에 있었던 헤롯 가문은 공공연히 유다지역의 정치가로 등단하기 시작한 것 이었습니다.

그 후 폼페이와 가이사는 패권을 놓고 싸움니다. 결국 가이사는 이집트에서 폼페이를 죽임니다. 가이사는 여기서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를 만납니다. 이 일로 이집트 프툴레미왕조의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이 됩니다· 프톨레미 왕조라는 이름으로 흘러오고 있었던 이집트 기억하시죠? 가이사는 그후 아프리카와 스페인싸움에도 승리하여 로마의 영토를 넓혀 나갑니다. 그리고는 최초로 로마를 통일천하하는 주인공이 됩니다. 유대의 힐카누스 2세와 에돔사람 안티파터는 이제 가이사를 섬기게 됩니다. 가이사 는 마카비 가문의 힐카누스 2세를 한 지역의 총독 정도로 임명을 했고, 안티파터를 사실상 유대의 행정관으로 임명을 합니다. 안티파터의 세력이 점점 확장되는 것입니다. 안티파터는 그의 작은아들 헤롯 (이하 나오는 헤롯은 대헤롯)을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던 중 가이사는그의 충신이었던 부루투스에 의해 살해되어 일생을 마감합니다(B.C. 44 년). 가이사는 최초로 천하통일을 하긴 했어도 황제라 칭함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가이사가 죽은 후. 로마의 힘 싸움은 가이사의 양아들이었던 옥타비아누스와 또 역시 가이사의 신하였던 안토니우스 두 사람에게로 옮겨갑니다. 그러는 와중에 안티파터는 살해를 당했고, 그의 아들 대헤롯은 정치적으로 곤궁에 빠집니다. 파르티안들( 바대. 오늘날 이란 북부지역, 오순절 사건 때 여기서 온 사람들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다.행 2:9)이 헤롯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다 마카비 하스모니안 가문 중 한 사람인 안티고누스가 이 파르티안들과 합세를 한 것입니다. 헤롯은 결국 이집트로 도망가 있다가 로마로 들어가 있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유다 마카비 가문의 안티고누스는 다시 하스모니안 왕조로서 유다를 통치하게 됩니다.(♣.B.C.40년 경:너무 복잡하시지요? 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하여든 그렇다는 것입니다.♣)

로마로간 헤롯은 대단한 로비활동을 합니다. 만약 자기를 유대의 왕이 되게 해 주면 돈을 내겠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로마 원로원은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 합니다. 지금 쫓겨온 신세인데 왕으로 임명했다는 말입니다. 현재 유다 땅은 유대인 안티고누스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들은 헤롯 가문을 ‘에돔의 종놈들’ 이라고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로마가 헤롯을 정식 ‘왕’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지금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어도 다시 뺏어라. 뺏을 때 도와주지!” 그런 뜻이겠지요. 헤롯은 다시 싸워서 이 땅을 얻어야 했습니다. 결국 헤롯은 로마군의 지원을 받아 마카비 하스모니안 왕조 계열의 마지막 통치자 안티고누스를 죽이고 예루살렘성을 빼앗습니다. 이 때 헤롯을 도외준 사람이 안토니우스였습니다.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대단한 충성을 맹세했겠죠? 이렇게 해서 헤롯은 명실공히 ‘유대의 왕’으로 등장하는 것 입니다'. B,C, 3년의 일입니다. 이 때부터 에돔사람 헤롯가문은 “유대의 왕”으로 다스리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B.C. 37년부터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B.C.4년까지 유대를 통치합니다. 대헤롯은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입니다.

동부지역 (수리아, 터어키 등지중해 동쪽내륙) 을 장악했던 안토니우스는 그만 이집트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집니다. 가이사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이라는 곳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연협군’ 과 해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므로 명실공히 옥타비이누스는 로마의 대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예수님 탄생시 가의 로마황제입니다. 이때에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가 영을 내려 천하에 있는 사람들은 다 호적을 하라고 하는바람에 요셉과 마리아도 그들의 고향 베들레햄으로내려 갔습니다(녹2:1).

이렇게 황제 명칭을 최초로 가진 사람이 가이사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숭고한 사람’ 이라는 칭호를 나중에 받음)였지만 가이사 라는 이름이 통상 ‘로마황제’ 를 상징하는 칭호로 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가이사 하면’ 황제를 가리킴니다.

2. 신약에 등장하는 주요 직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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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왕? 분봉왕? 총독? 산헤드린 공의회?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 엣센파? ...

생장점

로마 한 나라만 관계되어 있어도 괜찮겠는데 헤롯까지 끼어있어서 이 토록 로마 황제와 헤롯 가문을 공부하는 것이 길었는데 예수님이 활동해던 때에는 황제와 대헤롯만 있었던 것이 아닌게 또 문제입니다. 분봉왕들도 있고. 총독도 있고. 대제사장도 권력자 같고, 산헤드린 공의회도 있었고, 바리새파. 사두개파. 서기관. 열심당 등 수많은 그룹에 정신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성경을 안 읽을거면 몰라도 읽어야 되니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따라가 봅시다! 전복 따야지요!

1) 헤롯

성경에는 예수님이 탄생하는 때 나타났던 대헤롯 (Her,αI Grear, B,C, 37-4) 도 헤롯왕이라고 말하고. 또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30세 어간에 있었던 헤롯 안티파스 (♣ Herod An디pas, B.C. 4 - A.D. 39:대헤롯의 아들. 아켈라오 동생. B.C. 78년에 사망한 최초의 에돔 왕 안티파스와 이름은 같지만 4대째 내려온때임♣) 도 헤롯왕이라고 지칭합니다.

대헤롯 은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서 알다시피 소위 헤롯가문을 유다에 튼튼히 ‘왕’으로 자리매김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이후에도 약 30년 이상을 다스린 사람입니다. 마치 남방 유다를 쳐들어온 애굽과 바벨론이 자기 말 잘 듣는 왕을 세워놓고 떠났던 것과 똑같은 그런 식으로 된 왕이지요. 식민 백성은 유대인이요, 꼭뚝각시 왕은 에돔사람이요, 실권 지는로마인 셈입니다. 그는 B.C.37-4년까지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건축도 시작했고, 여러 도시들을 세워 나가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통치 말년에 예수님의 탄생을 둘러싸고 있는 사건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인데, 어떻게 해서 얻은 “유대인의 왕” 자리인데, 자기 말고 누군가 “유대인의 왕”이 난다니, 이 대단한 헤롯이 가만있을 리가 없지요. 유아들을 다 살해하라는 명령까지 냈는데 그만 자기가 죽어버립니다. B.C. 4년 봄에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 년도를 B.C.4년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보다 더 일찍인 B.C.5년 겨울로 잡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이 대헤롯의 죽음이 예수님의 탄생 년도를 계산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참흥미롭습니다.“유대인의 왕” 예수께서 나타나시자마자 “유대인의 왕” 대헤롯 이 죽는다는사실이...♣)

그러니까 예수께서 성인(30세)으로서 활동흩씨는 때는 더 이상 이 대해롯 왕 때가 아닙니다 . 그의 아들들이 다스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여렷이었다는 겁니다. 안티파스. 빌립, 아켈라오입니다. 누구 한 사람을 지명해서 왕을 잇게 했으면 우리도 안 복잡할텐데 대헤롯은 아들셋에게 골고루 나눠주겠다고 유언을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복잡한데 그 쪼그만 땅을 또 조각조각 나눠 따로 다스리게 해 놨으니 우린 여간골치 아픈게 아닙니다. 안티파스 에게는 갈릴리와 베레아지역 (요단 동편)을 줍니다. 빌립 에게는 갈릴리 북동부 지역 을 물려줍니다. 그리고 아켈라오 에게는 유다. 사마리아. 이두메(에돔지역)의 통치권을 줍니다 . 아켈라오에게 반을 주었고 나머지를 두 아들에 게 준 셈입니다. 이렇게 니눠진 땅을 다스리던 왕들을 가리켜서 ‘분봉왕 ’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헤롯이 유언했다고 다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로는 로마의 인가를 받아서 되는 것인데 ·분봉왕’ ethnarch는 ·왕 king' (대헤롯 같은)보다는 낮은 지위입니다. 한국말로는 똑같은 분봉왕이지만 ·분봉왕ethnarch’는 ·분봉왕tetrarch’보다 높은지위로불리던 명칭입니다. 아켈라오 에게는 ethnarch를, 빌립에게는 tetrarch라는 명칭으로 허락합니다.

아켈라오 는 마태복음 2장 22절에서 한 번 성경에 언급됩니다. 이집트에 피난갔던 예수님의 가족이 유대지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갈릴리로 올라가 살게 된 경위를 말 해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대헤롯이겠다는 생각이 나야합니다.♣)을 이어 유대의 임금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 하더니...” 유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에돔지역을 분할받습니다. 유대지역은 아켈라오 영역이었습니다.

빌립 이 다스리던 갈릴리 북동부 지역은 주로 이방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이사랴 빌립보’ 는 그가 세운 도시였습니다. 이것 역시 로마황제 가이사를 기리기 위해서 지은 도시였습니다. 이미 ‘가이사랴 라는 도시 (♣ 건축광 아버지 대헤롯이 세웠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로마에 재판 받으러 가기 전에 2년 동안 억류되어 있던 곳♣) 가 지중해 연안해변에 있었기 때문에, 그 도시와 구분하기 위해 자기 이름도 붙여서 '가이사랴 벌립보 라고 명명했습니다. 북쪽의 헐몬산 자락에 있는 휴양도시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셔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묻기도 하신 그 곳입니다.

헤롯안티파스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던 대해롯의 아들 분봉왕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 삼 년 중에 나오는 헤롯왕은 바로 이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 분봉왕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에 대한 언급이 세 번 있습니다. 그는 헤롯 빌립(분봉왕 빌립은 아님, 다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헤롯왕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이 사건을 질책합니다. 결국은 이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인 장본인 입니다. 세례요한의 참수 이후 예수님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죽었던 요한이 살아난 것 아닌가 싶어서 매우 초조해 하기도 한 사람입니다(눅9:7). 그리고 예수님을 매우 보고 싶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 헤롯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그도 아버지를 닮아 건축광이었습니다. 갈릴리에 디베랴라는 도시도 건설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나타났던 헤롯가문들은 그 후 사도 바울이 선교하는 동안에도 계속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승천이후 사도행전으로 들어가면서부터는 다른 헤롯왕들이 나타나지요. 이 때 나타나는 헤롯왕가의 이름이 바로 아그립바입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아켈라오나 빌립, 안티파스같은 분봉왕들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들의 아버지 대헤롯의 형, 그러니까 그들의 삼촌들 가운데 파사엘이라고 하는 사람의 혈통을 타고 내려온 다른 계열의 사람들입니다.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결국은 충이 먹어 죽은 헤롯왕(행 12장)입니다. 처음으로 아그립바라는 이름으로 성경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그 후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올라 헤롯 아그립바 2세가 됩니다. A.D. 55년경에 이르면 갈릴리와 데가볼리. 베레아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이 되며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으로A.D. 100년 경까지 다스립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것 아시지요? 이미 1,2,3차 선교여행을 다 마치고 예루살렘에 헌금 전달하러 갔다가 체포된 얘기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서. 로마서 편지를 이미 다 쓴 시점 이지요. 바울은 자기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고 해서 일단 가이사랴 감옥에 억류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 (유대총독 관저가 있었다) 에 있는 동안 유대지역의 총독으로 있었던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부임합니다. (♣빌라도 다음에 나타난 총독이겠구나 생각이 나시죠?♣) 이 부임을 축하하기 위해 아그립바 2세가 가이사랴로 방문 오는데 이때 바울이 그들 앞에서 간증을 합니다. 그 유명한 바울의 개인 구원 간증이 이 아그립바 2세 앞에서 한 간증입니다(행25-26장) . 아그립바2세는 ‘내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행 26:28,32)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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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총독

방금 위에서도 총독이 등장했지만. 그럼 총독은 또 뭘까요? 로마지배 아래 있었을 뿐만 아니 라, 헤롯이 왕으로 있었고, 거기다가 또 유대자체에도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약시대의 배경이 이다지도 복잡합니다(y 조금만 더 해봅시다.‘~). 보통 전쟁을 해서 나라를 빼앗으면 그 나 라를 다스리기는 다스려야 하니까 누군가 통치자를 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통상 정복자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통치자(king, ethnarch, tetrarch)로 새로 세운 다음에. 그 사람을 조정하는 것입 니다 우리가 구약을 배울 때 애굽의 바로느고가 백성들이 세운 여호아하스는 잡아가고. 여호야김 을 왕으로 세웠던 것 기억나시지요? 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도 여호야긴은 잡아가고 그 아자비 시드기야를대신 왕으로세웠던 것 생각나시지요? 그것처럼 자기 말잘듣는왕을만들어 놓고원 격조정하는 것이 보통 하는식민정책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세울왕이 없을때는본려l서 시람을 파견합니다. 그사랍을총독이라고불렀습니다. 포로시대 때 느헤미야는총독이었습니다. 예수님 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을 벌라도 총독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왜 분봉왕이 있었는데 또 총독도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런 연유입니다.

대헤롯이 아들들에게 땅을 분배하고 죽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중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 마리아와 에돔지역을 통치하는 분봉왕이었는데 그만 정치를 잘 못했습니다. 너무 야만적인 독재 정치를 했습니다.가이사(아우구스투스)는 유화정책으로 다스리라 그랬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이 때 아켈라오는 2,000-3,000명을 죽였습니다. 이 일로 유대는(예루 살렘 지역) 혼란해졌습니다. 폭동은 더 심하게 번져갔고 로마의 개입으로 진정됩니다. 유대지역 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 헤롯가문의 통치를 못 받겠다고 종식시켜달라는 청원을 로마 가이사에게 합니다. 가이사는 아켈라오를 로마로 소환했고. 고올(Gaul 프랑스)이라는 곳으로 추방시컵니다. 정치를 잘 못한 거지요. 그 이후부터 유대 예루살렘 지역만(‘F 갈릴리는 아닙니다. 분봉왕이 있 습니다y)은분몽왕이 다스리지 않고직접 로마의 직영으로들어가게 됩니다. 총독이 파견되는 것 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헤롯의 아들, 분봉왕 아켈라오가 다스리던 유대지역은 첫 로마 총독 코포 니우스(1대)를 시작으로 해서 마르쿠스 양비블루스(2대), 아니우스 루푸스(3대) . 발레라우스 그 리투스(4대)를 거쳐 우리가 잘 아는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5대 , A.D. 26-36)로 이 어집니다. 예수님 당시의 총독입니다. 그러다가 바울 때에 가서 나타나는 총독이 위에서 얘기한 벨릭스와베스도이런사람들입니다.

총독의 관저는 가아사랴(지중해변)에 있었는데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는 마침 유월절이었 기 때문에 소동을 염려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관저에 와 있었고. 헤롯 안티파스도 같은 이유로 성 안에 자기 관저에 있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왔다갔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로랩독들이 7에사랴에 머룹니다. 거기 영채가 있었기 때문에 비-울도 예루랩에서 체포됐지 만 가아사랴로 후송되었습니다.(y 잘 따라오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정치적 를을 간단 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 하고 아닌 것 하고는 성경을 읽을 때 많은 차이를 냄니다. 만일 지금 설명하고 있는 얘기들을 잘 이해하셨다면 사도행전 25-26장에 나타나는 바울 스토리가 다시 재 미있게 읽혀질 것입니다. 한번 그런가자세히 읽어보십시오,y)

3) 산헤드린 공의 회

황제나. 헤롯가문이나. 총독이나 그런 정복지들은 순수 유대인 공동체에서 볼 때는 적들입니 다. 힘이 없어 당하고 있는 것이지 힘만 있다면 들고 일어나서 독립하고 싶은 유대인들입니다. 그 러다보니 바로 이 순수 유대인 공동체 속에는 나름대로그들을대표하는 기관이 있었습니다. 산헤 드린 공의회라는겁니다. 이 말속에 들어있는 ‘공의회’ 라는말이 시사해 주듯이 이것은 ·의화를 가리컵니다. ‘유대인 최고 자치 의결기관’ 입니다. 황제나, 헤롯이나, 총독같은 외부세력 말고. 유대 공동체 속에서는 가장 높은 소위 정치기관’ 이 바로 이 의회였습니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 리새파 사랍 퉁 유대 사회의 지도자급의 사람들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식적인 주권은 비록 로마나 헤롯왕이 갖고 있었으나 산헤드린 공의회는 사법적 기능과 입법적 기능. 그리고행정 i 기능까지 갖고, 어느 선 까지는 자치적으로 정치들 했습니다빌라도가 가로되 저를 데려다가 너회 법대로재판하라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사람을죽이는권이 없나이다(요18:31)"라 단 한가지 예외는 이빚벼l이 석처 아。 문 특어가수= 최록 벅해용 때언니다‘ 물론 모든 법은 융벅첫 단 한가지 예외는 이방언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죄를 범했을 때입니다. 물론 모든 법은 율법정 신에 근거한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 공의회라는 것은 언제부터 있어왔는가? 우리는 이 공의회를 쉽게 이렇게 생각 하면 됩니다. 아주 먼 옛날 모세시대 때 모세를 돕는 백부장. 오십부장 등이 있었지요? 그 사람들 을 장로라고 불러왔습니다(신 27:1). 이들은 그 후 여호수아나 사사시대를 지나오연서도 계속해 서 백성들의 대표로 유대사회에서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장로들귀인들’ , 방백틀 이라는 이름으후 있어오다가 신약에서는 ·산헤드린· 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4) 대제사장

산헤드린이 유대인 자치세력A로서 최고의 기관인데 반해 한 개인으로서도 또 대장(?)이 있는겁니다. 이 대장은 누구였을까요? 이 유대인 공동체는 신앙 공동체였기 때문에 과거 에스라 이래 로 대제사장이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위치라고 볼 수 있는 직책이랴면 대제사.~이었 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대제사장이 산헤드런의 수엌。!컸즙니냐J딘녀I vI를는 등.n!.낳파(신학 적 배경)로 말하자면 사두개파였습니다. 이렇게 외형적 전통으로 볼 때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 대제사장이요. 백성들을 영 적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지. 사실은 로마나 헤롯이나 총독에 붙어서 자기의 권력을 즐기며 백성 들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착취히는 세력으로 쉽게 타락하곤 했습니다. 잘히는 대제사장들도 있었 지만 대부분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 이란흐죄함이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라는 것을 안 정복지들은 아예 이 대제사장까지도 자기네가 다루기 쉬운 사람들을 임명해 버리면 쉽다 는 것을 터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론계열의 레위인이 대제사쟁1 되어야 동}는데도 불구하고 자 격도 없는 사람들을 임명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데 눈이 밝은사람들은돈을갖다주고 이 ‘대제사장권’ 을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 사장안나스같은사람입니다. 물론유대공동체 내에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남은자의 역할을감당 하는 숨어있는 참 이스라엘 경건한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는 나다나엘, 시므 온, 안나, 요셉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대제사장이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 유대 공동체를 대표하는 영적지도자로 자처하지만 속으로는 결국 로마나 헤롯 가문과 결탁해서 그게 그거인 셈이 된 형국입니라. 이런 사람들이 하 나님의 이름을 벌어 성전에서 제물을 팔아서 돈을 버는 장사까지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1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백성들을 대신해서 속죄제사를 드라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 루살렘 성전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5) 서기관, 율법사, 랍비

팔레스타인 땅 본쾌 시는 유대인들은 어쨌거나 이런 성전에라도 출입하며 제^t를 드렸는데 온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흩 어지지 않고 모여서 율법을 배우고 유대정신을 이어갔습니다. 그 모이게 된 장소를 가리켜 회당 이라고 부릅니다. 외국 땅에서 유대정신을 잇게 하는 집회장소인 셈이지요. 이 회당은 후에 팔레 스타인 땅 안에도 수없이 많이 세워져 교육기관이 되었고. 그 후로 바울 시대를 거쳐 오현1 이르 기까지 전 세계에 세워집니다. 회당에서 제λ}를 드린 것은 아니지만 율법을 가르치고, 유대인으로 서의 정체성을갖는교육을한것입니다. 회당은이방땅에서뿐만아니라고국에 포로귀환으로돌 아온 사람들 가운데도 세워졌습니다. 사실 이 운동은 원래 제사장 겸 학사였던 에스라가 했던 일 입니다.

에스라 이후 중간기를 지나오면서부터는 어떻게 그 당시 사랍들에게 율법을 쉽게 가르철 수 있 을것인가가문제로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해석하고쉽게 풀어주는서기관,율법교사,지 혜교λk 랍비가 생져난 것입니다. 우리들도 요즈음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성경을 본문으로 하고 설교를 하십니다. 성경이 무슨 말씀인지 풀어 해석해 주어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었습 니다. 과거 보세 시절에 기록된 모세오경을 포로시대 후기에는 어떻게 적용해야할지 ‘해석’ 의 문 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결을 수 있는 거리는 2Km다 정결케하는규례로손을씻을때는팔꿈치까지씻는다· 등동율법을연구하고.명상하 고, 또 그것을 구체적A로 삶에 적용하는 일들을 서기관들이나 율법사들이 한 것입니다. 또 공적 인 자료들을 기록하고 필사했던 사람들(왕하 12:10)이 있었듯이 서기관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서 기관들은 법률가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기도 했으며. 그 중 일부는 산헤드련의 회원이기도 했습니 다. 또신학자의 역할을하기도했습니다.

6) 바리새파(The Pharisees)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가장 많이 예수님의 사역에 관계된 사람들은 바리새파 시람들입니 다. 바리새파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명칭인지는 정확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말은 분리되다, 구별 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라는 명칭이 분리된 자들과 관계된 말이라면. 매베 가문의 거룩한 전쟁에 함께 참여한 거룩한 전사들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를 가르키는 것이 아닌 가 보기도 합니다.

이들은 그들 스스로를 거룩하게 생각하며 의식상 부정한 것을 엄격하게 구별했습니다. 정결 예 식과 먹는 법 안식일 계명 둥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이들은 실제적으로 백성들의 인정을 받는 그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 그룹들은 엉터리라는 것을 백성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요세프스기록에 의하면 제사장가문을 욕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 바리새인들은 민중이라는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적으로 보다 종교적인 면에서 더 인정을 받는 그들이었습니 다. 니고데모, 바울 과 같은 바리새인도 있었던 점으로 보아 진지하게 율법을 연구하며 구약을 계 숭하려는 그룹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구약에서 흘러 내려오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이들을 뚱해 명맥이 이어져 내려옹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정통유대교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유대교의 핵심세력이 이들입니다. 사두개파가A.D. 70년 또한번의 예루살렘 멸망과함께 사라 진 것에 비하면 바리새펴야말로 유대교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사두개파{The Sadducess)

사두개파 는 유대교 안에서 제사장적 귀족 집단을 형성하고 있던 종파업니다. 예루살렘에 거 주하는 지주들입니다. 이 명청은 일반적으로 자독’ 에서 유래된 것으로 봅니다. 사독은 다윗시대 에 아비아달과 함께 제사장이었고 솔로몬이 아비아달 대신에 대제사장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그 래서 이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직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카비 혁명을 전 후로 해서 제사장 제도가 재정비되고 재조직될 때 사두개파가 하나의 당파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 니다. 이들은 바리새파와는 반대 입장을 취하며 경쟁관계에 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육체 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천사와 영의 존재를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철 학교사들과 논쟁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했습니다.

8) 열심당(The Zealots)

열심당은 영어의 음역을 따라 ‘셀롯인 시몬’ (녹 6:15)이라 표기된 것과 같이 ‘셀롯당’ 이라고도 합니다. 이 당파는 종교적 당파가 아닙니다. 열성적 민족주의 집단입니다. 이들은 ‘마카비’ 활동 에 그 기원을 둡니다. 그런데 요세푸스같은 역사가는 이들을 ·강도들산적. 으로 불렀습니다. 맹렬한 반로마주의자면서 또한 유대 종교지B}들이나 기득권 세력자들에 대해서도 적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토라(모세율법)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언 제나 칼을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9) 엇센파(The 냥seness)

이밖에도 룸란 공동체로 불리우는 ·엣센파’ 가 있었습니다. 경건한 유대 공동체 중의 하나인데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문서들의 발견으로 이 시대의 많은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바리새 파. 사닦뼈들이 백성들과 접하는 대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띤 이판온 팡버1 온둔하는 수도사 적 성격을 가진 단체였습니다. 이들은 광빼서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세례요한。1 이 엣센 공동체 에 관계된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추정하기도 합니다. 종교 공동체로서 극기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이 주로 거주했던 동굴 속에서 많은 문서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중에 유명한 것 이 ·사해사본· 입니다. 이 사본은 구약성경의 정확성을 증명하는 아주 중요한 증거자료로 공헌을 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땅의 행정구역

생장점

도대체 뭣 땜에 이런 걸 공부해야되나(?) 하고 투정이 나오는 분들도 계시지요? 그런데 중요합니다. 이제 곧 이어 공부하게 될 예수님 시대는 바로 이런 내용들이 그 배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나 서기관들만 하더라도 엄청난 그 들의 역사가 있고. 신학이 있습니다. 정치와 결탁해서 일어난 사건들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있습니다. 여기 기록한 내용들은 바닷가의 모래알 정도만큼의 미미한 내용 들입니다

신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로마시대의 유대 지리는 매우매우 간단합니다. 구약시대처럼 열두 지 파 땅들을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세 도만 알면 됩니다. 북쪽으로 갈릴리도. 중간에 사마리아도. 아래에 유대도. 이렇게 머리에 그려놓고 신약에 많이 등장하는 성읍들만 좀 공부하면 됩니다. 앞으로 신약성경을 읽을 때 거리감각을 가지고 읽으면 좋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 하면 어느 정도 여행길인가를 감 잡으면 좋습니다. 적어도 사흘길입니다. 주로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갈릴리도의 가버나움 사역과 유대도의 예루살렘성에서의 사건이 많으므로 이 정도 지역쯤은 늘 머리에 설정해 놓고 있으면 재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사람들의 땅으로 알려진 위의 세 도 말고도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그 근처의 이방도들이 있습니다. 행정적으로는 이방이지만 그래도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에 섞여 살았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요단 동편으로 알려진 지역인 베레아도, 갈릴리 호수 동남쪽의 이방인들의 땅 데가볼리도, 갈릴리 지방 북쪽의 두로와 시돈(베니게 지역) 지역 등이 그것입니다.

7과 신약속으로 오신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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