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한하여서 동쪽은 우리 나라 강토로 분할하여 주셨습니다...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고사를 활용하여 장려하게 수식하는 중세 외교문서의
전형적인 기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천황학주의 성'은 고사의 인용으로 문맥으로 볼 때 요의 승천황후의 영토를 압록강 서안까지로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요동성으로 해석한 근거가 어디에 나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자별교지수'에서 '일자'는 주몽을 의미합니다. 즉, 이는 주몽설화에서 나온것으로 주몽이 건넜다는 엄호수(혹은 엄리대수)를 의미합니다. 압록강변의 각장설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표문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이는 압록강을 가리키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서 글쓴이가 좀더 알려진 엄리대수라는 말을 쓰지않고 '개사수'라는 단어를 집어넣어 해석한 것은, 바로 엄리대수가 압록강의 옛 이름으로 추정되기도 하기 때문에 압록강이라는 해석을 피하기 위해서로 보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도 인용했으나 삼국사기에서 개사수는 압록강 지류 중 하나로 대강의 위치만 알려져 있을뿐 고려시대에 구체적인 위치를 알 수 없는 이른바 '미상지명'의 하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글쓴이가 자신의 추론과정을 생략한체 이를 사서의 내용인 듯 호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글쓴이가 인용한 다른 기록들을 살펴보면,
12월 계사일에 요나라에서 야율사제(耶律思齊), 이상(李湘) 등을 시켜 왕에게 옥책(玉冊), 옥인(玉印), 면류관, 수례, 장복(章服), 안마(鞍馬), 피륙 등등 물품을 보내왔다. 책문(冊文)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하늘의 도움과 조상의 유훈으로 천하를 통치한 지가 이미 43년이나 되었다. 안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밖으로 제후(諸侯)를 무마하여 다 옳은 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귀국은 동방에 사직(社稷)을 세워 그 지역이 북쪽으로 용천(龍泉)에 다다르고 서쪽으로 압록강에 접하여 있다. 우리의 연호를 물어 가고 공물을 보내왔다. ......"
라고 해서 고려의 북쪽국경이 발해의 상경용천부에 다다른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사 원문을 보면
"짐(遼 道宗)이 하늘의 권우眷祐와 祖宗의 남긴 규범으로 천하를 통치한지 43년인지라 (그동안) 밖으로 백성을 평안케 하고 안으로 제후를 회무懷撫하여 모두 道에 이르게 하였도다. 海隅에 社를 세우게 하니 北은 용천에 닿고 西는 鴨綠江에 이르렀도다..."
朕以昊蒼眷祐祖宗貽範統臨天下四十有三載矣 外康百姓內撫諸侯咸底于道 而海隅立社北抵龍泉西極鴨綠
라고 되어 있으니 이는 노골적인 왜곡입니다.
덧붙여 고려 성종조의 기사는 해석상의 문제는 없어보이지만 기사자체가 전혀 상관없는 다른 기사들 가운데 삽입되어 있으며 전말도 자세하게 나와있지 않으니 신빙성이 의심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성종연간의 다른 기록에서 고려의 영역이 압록강에 이르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무수한 반증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고려의 영역이 상당히 북진한 후인 인종대의 기사를 근거로 제시하는 것도 설득력을 가진다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이정도만 살펴봐도 상당한 논리적인 비약이 숨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약간 과격한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겠습니다만 글 자체는 상당한 수정을 필요로 한다고 보여집니다.
첫댓글 그럼 해우(海隅)를 뭐로 해석하죠? 뭘 노골적으로 왜곡하고 비약하였는지? 고려의 영역이 압록강에 이르지 않았다는 무수한 반증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시길, 역시 국토축소주의 사관주의자들은 고려의 경계선을 한강이남으로 하면 절대로 반론펼치지 않을듯
천황학주의 성과 일자별교의 수의 해석은 시중에 나온 고려왕조실록에서도 요동성과 개사수로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글구 개사수가 압록강과 별개의 강이 아니라 동북쪽(송화강 하류?)에서 합류하는 지류로 압록강의 일부입니다. 다만 현재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압록강 지류와는 다르다는 것이죠.
또 개사수가 고려시대에 구체적인 위치를 알 수 없는 지명이라 하셨는데 그럼 그 근거는 어디에 있죠? 글구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김부식(신라관료출신)이 쓴 것인데 그들이 고구려본기 동명왕 설화에 이 개사수라는 이름을 쓴 것은 그 만큼 그 곳이 잘 알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왜 여기에 엄리대수를 안 쓰고
개사수를 썼겠어요? 또 북으로 용천에 닿았다는 건 님이 주장하신 근거 자료에도 써 있던데 그럼 여기서 용천은 어디를 뜻하는 것인가요? 알고 싶네요...
천황학주의 성과 일자별교의 수의 해석은 시중에 나온 고려왕조실록에서도 요동성과 개사수로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이 부분은 가능하면 내용을 소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而海隅立社北抵龍泉西極鴨綠부분은 제가 문맥을 잘못해석했군요. 사과합니다.
그렇지만 용천을 발해의 상경으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책문이나 표문 같이 은유와 과장이 많은 외교문서가 영역을 밝히는데 어느정도 도움을 줄지는 여전히 회의적입니다. 가령 "...하공진을 안문按門에 보내어 압록의 구당사를 삼아..."라는 구절에서 안문은 고려의 지명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는 중국고사에서 나온 은유이기 때문에 고려의 북쪽국경을 의미합니다. 개사수의 구체적인 위치가 고려시대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으셨는데 개사수는 삼국사기에서 '유명미상지명'이라하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던 지명입니다.
주몽이 건넜다는 엄호수는 엄호수=엄체수=엄리대수=개사수라고도 하며 압록강 지류인 어떤강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압록강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입니다. 여기서는 문맥상 압록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지며, 설령 개사수로 추정한다고 하더라도 원문을 제시하고 이유를 밝혀야지
사서에 개사수라고 돼 있다라는 식은 곤란합니다.
박영규님의 고려왕조실록 선종 편에 자세히 나와있으니 직접 보셨으면 합니다. 분명히 요동성 서부는 거란에 붙이고 개사수 동부는 고려가 관할한다고 명시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