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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교회 엘예슈아 교회
들어가는 말
기독교 시대에서 교회가 풀어야했던 과제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을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고 Eddie Gibbs는 그의 저서 Church Morph에서 말하고 있다. 비단 이 말은 Christendom 시대 뿐아니라, Post Christendom
시대인 오늘 날에도 동일한 과제이다.
이 시대는 넓은 문화의 스펙트럼에 맞게, 다양한 매스미디어의 도구들을 접목하여, 수 많은 예배들을 기획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에 따라 교회를 선택하고, 관계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현대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책임지는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불편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서로를 책임지는 공동체에 참여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며,
예배공동체, 사역공동체, 운명공동체로서의 삶을 실천적으로 살아내는 일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기성의 교회는 이것에 대하여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앞에서, 이 시대에 교회에 모핑(morphing)이 필요한 이유를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예배와 교회 형태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하며,
가정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엘예슈아 교회”를 살펴봄으로, 기존의 기준에 얽메이지 않는,
재이미지화(reimaging)의 모델로 제시하고자 한다.
본론
Ⅰ. 교회에 모핑이 필요한 이유
오늘날 5가지 메가 트랜드가 서구 교회를 뒤흔들고 있다. 다섯 개의 메가트렌드는 근대(modernity)에서
포스트모던(post modernity)으로의 전환, 산업시대에서 정보시대로의 전환, 기독교 시대(Christendom)에서
후기-기독교시대(post- Christendom) 환경으로의 전환, 생산자 주도에서 소비자 중심으로의 전환,
그리고 종교적 동질성(religious identity)에서 영성 탐구로의 전환이다.
오늘 날 자본주의 정신은 기업 뿐아니라, 교회 내에서까지 할 수 있다는 긍정적 믿음을 기반으로,
수많은 교단과 종교운동을 탄생시키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는 기업과 같은 수직적 구조와 통제적 리더쉽을 통해, 대형기업처럼 운영되고 있다.
인터넷의 무한 보급과 발전된 검색 기능은 정보화 시대의 도래를 알렸으며,
지식의 대중화는 정보를 독점하고 관리했던, 엘리트 집단을 무력화 시켰다.
더 이상 리더쉽이 정보를 독점하여, 사람들을 좌지우지할 수 없게 되었다.
유동적이고 급변하는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조직과, 네트워크의 사용은,
좀 더 단순한 조직을 필요로 할 뿐아니라, 함께 일하는 이들을 신뢰하고, 확장되는 네트워크 속에서,
통제가 아닌 영향력을 통해 일할 수 있는 신세대 지도자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와같은 때에 교회의 모핑(morphing)도 필수불가결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은 수직적 관리구조를 비롯하여, 자본주의와 소비주의가 추구하는
마케팅과 유사한 기법의 도입으로교회 내의 결과물을 양산하고 있다.
마치 대형마트, 대형 백화점을 선호하는 사람들처럼 큰 교회를 지향하고,
교회는 교회대로 성장주의에 입각한 프로그램들이 홍수를 이루며, 물질적 번영을 추구한다.
사람을 끌어 모으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모인 사람들을 회심시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하며,
실제적인 양육시스템의 부재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마땅한 삶의 태도를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예배자로 참여해야 할 예배가, 마치 극장에서 쇼를 보듯 관람하는 형태의 예배가 되었으며,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있다.
교회가 빛과 소금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며, 세대 간의 소통의 부재 또한 매우 심각한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현실은 동성애를 비롯하여, 스마트폰의 확대로,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음란물에 노출되어 있으며, 물질 만능주의와, 성공 지향주의의 가치관은
초등학생조차 자살로 내몰고 있는 위기의 상황이다.
가장 기본인 가정공동체가 매우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이혼률 1위,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자녀 세대들은 이미 교회에 흥미를 잃었으며, 기성세대의 출석률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기독교 인구는 감소 추세에 있으며, 세상으로부터도 지탄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도덕과 양심은
전도의 문을 닫기에 충분하다. 세계에서 제일 큰 대형교회가 절반이나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이대로는 안되며, 보다 근본적인 교회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변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Ⅱ.엘 예슈아 교회
1. 가정을 교회로 세우기
앞서 기술한 문제들 속에서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바로 가장 기초가 되는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위치와 역할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공동체의 본래 목적과 기능을 교회가 제대로 가르치고,
각자 가족 구성원으로서 주어진 역할의 중요성을 심도 있게 훈육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교회가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명이다.
교회의 비밀에 대하여 설명할 때,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의 비유로 설명하신다.(엡5: 22~32절)
남편과 아내가 사랑하지 못하고, 가정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교회의 비밀과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가정이 깨어지고, 왜곡된 가족 관계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들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이루말 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야기시키며, 사회문제로 확대된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순종을 배울 수 있는 첫 걸음도 가정 안에서 시작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취해야할 도덕적이며, 선한 바른 양심을 잉태케 하는 곳도, 바로 가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며, 이것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다.(엡5:32)
엘예슈아 교회는 바로 이와같은 가르침에 따라 각 가정을,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로 세우는 일에 우선권을 둔다.
먼저 가족 구성원 개인이,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는 몸된 교회로 세워지고,
각 사람이 성전된 지체로 세워지는 것을 말한다.
만약 가족 구성원 중 어떤 한 사람에게 문제가 발생하였다면, 그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자 자신을 점검하고, 돌이키는 시간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기 성찰의 시간 속으로 이끈다.
특별히 가정을 교회로 세우는 일에, 홈스쿨링이라는 도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인도하심에 합당한 통로로 사용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실제적인 내려놓음을 삶에서 실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홈스쿨링을 통해 부모들의 경우, 자녀들에 대한 기대, 욕심, 대리만족, 등에 관한 부분을 내려놓고,
자녀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고 살았던 것을 내려놓게 된다.
아내와 남편이 예수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그 일 역시 우선순위를 다시 세운다. 각자의 우상을 내려놓는 결단과 헌신은,
매우 실제적이며 세밀한 인도하심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데, 단순히 지식적인 프로그램 안에서,
회개하고, 깨닫고 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 일어난다.
이 때부터 성령께서 본격적으로 일하시기 시작하시며, 자신의 삶에서 죄와 대면하게 하시며,
죄를 끊으려는 싸움과, 자아를 포기하는 훈련 안으로 이끄신다.
이러한 일은 소그룹으로 삶을 실제적으로 나누며, 깊이 있게 도울 때 가능한 일이다.
단순히 몇 주간의 프로그램, 몇 차례의 상담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 많은 부부학교, 치유세미나, 아버지학교, 어머니학교 등의 가정사역 프로그램들이 있지만,
친밀한 공동체 안에서 실제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 함께 나누고, 교정할 때,
강력하고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가정의 회복은, 곧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며, 이 시대에 가장 급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이다.
2. 함께 드리는 예배.
오늘날 교회의 세대 간의 구분된 예배는, 현대인들의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의 사람들에게 소통의 단절을 더욱 가속화 한다.
요즘처럼 문화적 환경의 변화가 급속히 변해가는 때에 각 세대 간의 차이는, 더욱 크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소비주의와 관계된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마치 마케팅의 기법처럼 상품을 더 팔기 위해, 세대 간의 개성을 더욱 차별화시켜,
특정 그룹을 타겟으로 공략하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각 세대가 드리는 예배의 이질감은, 다음 세대의 예배에 올라가는 것을 머뭇거리게 하며,
다른 세대가 드리는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세대구분의 예배는, 교회가 한 몸이 되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며,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 환경과,
각자의 선호를 중시하는 문화적 경향의 결과가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엘 예슈아 교회에서는 어린이(6세)에서부터 아동, 청소년, 장년에 이르기까지 주일에 함께 예배를 드린다.
찬양, 기도, 말씀선포의 시간은 보통 4~5시간 정도 소요된다.
예배가 끝나면 간증의 시간을 갖는데, 이 때는 어린이들도 나와서 간증을 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삶이 예배이며 기도여야 한다는 명제가, 매일 매일의 삶에서 실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예배당에 나와서 정해진 프로그램 속에서 참석하는 예배가 아니라,
매일 매일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말과 행동, 생각을 정결하게 하는 노력과 열심이,
안식일의 예배로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산 성전이며, 각자가 산 제물이 되어야함을 생각한다면(롬12:1),
나의 삶을 예배의 대상이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나의 몸을 거룩한 성령이 거하시는
산 성전임을 깊이 자각해야 한다.
만일 삶이 구별되어있지 않다면,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 또는 어떤 특정한 형식과 예식이 시작될 때,
비로소 예배가 시작되는 것이라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배란 우리들의 삶 전체이다.
생각, 말, 언행, 이 모두가 예배의 영역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 10:31)”하신
말씀이 가능한 것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전 5:17)”는 말씀을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것도,
삶의 전 영역이 예배임을 깊이 깨닫는 통찰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예배적 삶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시간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
내면의 훈련으로부터 영적 반사작용으로 확립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긴 예배시간에 함께 참석하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도,
가정에서 가르침과 실천이 있고, 예배의 기름부음이 가정 안에서부터 풀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엘예슈아 교회는 가정교회로부터 시작된 공동체이다.
가정에서 지속적으로 예배적 삶을 살며, 그 연장선에서,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인 예배로 나아올 때, 참예배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가정에서 삶으로 드리는 예배적 흐름이, 주일 날 세대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함께 드리는 예배를 가능하게 한다.
최승근 교수는 예배를 세상이라고 하는 문화들과 교회라고 하는 문화사이의 경계선에 있으며,
세상에서 교회로 들어오는 문지방(threshold)과도 같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악이 창궐해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삶이 세상과 구별되어 있지 못한 것을 보면,
예배에 나아올 때 경계선의 의미는 필요하다. 만약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나아올 때,
세상의 옷을 그대로 입고 나아오며, 교회 안에서조차 '문화적 유사물'의 영향을 받으며 예배에 참석한다면,
필경 문지방은 높아야 할 것이다.
요즘과 같이 다양한 문화의 범람시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삶의 전 영역에서 예배자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문지방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세상 속에 있을 때의 나의 마음과, 교회 안에 있을 때의 나의 마음의 태도를, 직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승근 교수가 말한 문지방이라는 의미를,
조금 다른 각도로, 마음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체크해 볼 수 있는,
바로미터로 생각해 보았다.
3. 교제와 섬김.
엘예슈아 공동체는 홈스쿨링이라는 교육을 통로삼아, 체험적인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홈스쿨링과 연관된 많은 수업과정 중, 한 달에 한번 경작수업을 실시하는데,
교회공동체가 함께 식물을 심고, 씨앗을 파종하고, 모종을 옮겨 심는 일을 한다.
지난 5월에는 안성에 있는 300평가량의 땅에 고구마 순과 조, 수수, 옥수수 등을 심는 행사를 가졌다.
씨앗 및, 모종에 관한 비용은, 가정형편이 허락되는 분들에 한해서 나누어 분담하고,
식사는 각 가정에서 한 가지씩 음식을 준비해서 함께 나누어 먹었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차원의 교제가 아니라, 목적과 목표가 분명한 교제와 나눔이 엘예슈아 공동체의 모습이다.
심방을 가야할 때에는 어린이들을 청년들이 맡아서 돌보아준다.
각 가정교회로 초대해서 함께 놀아주고, 식사를 준비하여, 어린이들을 먹인다.
청년들은 이러한 실제적인 훈련을 통하여 섬김을 몸으로 배우고,
어린이들이지만 성도간의 교제를 즐긴다.
특별히 어린이들은 청년들을 비롯하여 어른들을 선생님으로 부르고 있다.
교회가 전원에 위치해 있어, 교회를 정리하고 정돈하는데 많은 돌봄을 필요로 한다.
가을에는 낙엽, 겨울에는 눈을 쓰는 일이 만만치 않다.
교회를 단장하기 위해 봄이면, 썩은 낙엽을 걷어내고,
장마를 대비해 물길을 내고, 화단을 조성한다.
툇마루도 만들고, 합판과 시멘트를 이용하여 조형물도 설치하고,
산에서 부러진 통나무를 주워 와서, 장식을 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창의적인 일을 할 때면, 각자에게 허락하신 재능들이 드러나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명을 발견하기도 한다.
밭을 일구고 씨앗을 심고, 수확하는 모든 과정은,
모두에게 노동이 주는, 안식 가운데로 들어가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공통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각 세대에 대한 이해와 교제를 풍성히 일어나게 한다.
단순히 이론적인 프로그램들로 교육하며, 교회 안에서 먹고 마시거나,
연중 행사로 진행되는 수련회와는 달리, 삶 자체가 나눔이며,
섬김으로 나아가는 실제적인 일상들이, 세대 간의 이해를 넒히고,
마치 가족같은 친밀한 관계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며, 서로를 향한 신뢰와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더욱 단단히 결속시키는 것이다.
교회에 필요한 모든 것은 자원함으로 섬기며, 누가누구에게 이것을 저것을 하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교회의 비품과 물품이 떨어지면, 감동을 받은 사람이 채워 놓으며,
각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오직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헌신으로 올려드린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거나, 인정받기 위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심령으로, 성령의 운행하심에 순종하며, 서로를 존중하며 섬긴다.
목적과 목표가 분명한 교제야말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하는 가르침을 주며,
실제적인 훈련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4. 복음증거
경작수업 때, 함께 경작수업에 참석하기 원하는 가족이나 사람들을 초대한다.
또 가을이나 겨울에 교회 앞길을 쓸거나 눈을 치울 때, 동네 주민들과 함께 한다.
교회와 다소 떨어진 곳에서 함께 교제하고 있는 가정들이 있는데,
이 분들이 단단한 믿음으로 세워진다면, 그 곳이 다시 포스트가 되어,
그 지역 가정들을 섬기게 될 것을 비젼으로 품고 있다.
이것은 마치 선교지의 CPM전략과 유사한 것이다.
Eddie Gibbs는 그의 저서 Church Morph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교적 교회는 재생산을 하며, 재생산이란 단순히 모교회를 복사하는 의미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신앙공동체를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교회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췄기 때문에 탁월할 수 있었다.
전통적 교단은 상위계급의 사람들만이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행해야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선교의 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비젼을 받은, 아주 평범한 개인이나 작은 그룹이,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엘예슈아 교회 공동체는 작년에 개척한 이제 막 첫걸음을 떼기 시작한 미약하고도 작은 공동체이다.
그러나 크고 넓은 호수라 할지라도 그 호수에 파문을 일게 하는 방법은,
큰 돌덩이를 던졌을 때 보다, 작은 돌맹이를 기술적으로 던졌을 때, 더 넓은 물결을 이루며,
멀리멀리 그 동심원의 물결이 퍼져나간다.
소수의 인원이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실천적으로 살 때,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며, 지역사회에서 자라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 선교적 교회의 모습이며, 작은 돌멩이의 움직임이 멀리까지 퍼지는 운동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나오는 글
Eddie Gibbs는 교회의 모핑(morphing)이란 교회가 선교적 실체로 거듭나도록 하는 작업이다. 라고 했다.
필자는 선교적 실체로 교회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의 참된 의미와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전통적인 교회냐, 현대적인 교회냐 그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 교회라 한다면,
이들이 함께 모여,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예배란 단순히 주일 날 정해진 시간에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이, 다가 아니다.
설교 말씀은 예배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공예배를 돕기 위한 인도자들이 있지만,
실질적인 예배 드림의 행위는, 누군가 앞에서 지도하고, 대신 인도하고 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개인이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몸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마음으로 정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힘을 다해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행위이다.
한 자료조사에 의하면, 서울에만 해도 편의점의 수보다도 더 많은 교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교회의 모습들은 재정적 여유에 따라 차별이 존재할 뿐,
프로그램, 의식, 성도들의 교제 방식, 양육방법, 세미나등의 형식들에 별반 차이가 없다.
세속적인 문화들은 홍수처럼 범람하며,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상황 속에서,
교회의 대안은 세상의 문화와 프로그램을 무분별하게 도입하거나, 완전히 거절하거나,
둘 다를 혼합하거나, 하는 형식적인 변화를 시도할 뿐이다.
필자는 이보다 더 본질에 입각한 창의적이고, 새로운 흐름이 교회 내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필자가 새로운 교회의 모델을 꿈꾸게 된 것은, 전통적 교회의 대한 불만이나,
새롭게 퍼지고 있는 유행의 흐름을 따르고자함이 결코 아니다.
현재의 교회 시스템으로는 회심과 제자로서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삶을 검증하며 교정할 수 있는 방법과, 새로운 삶의 대안적 모델의 제시가 매우 중요함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즉 소명이 일터가 되고, 예배처가 되고, 전도의 현장이 되며, 자녀들이 그 일터에서 함께 일하며,
실질적으로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는 공동체, 새로운 일터를 창출하여,
삶에서 필요로 하는 수입원을 얻고, 자비량으로 교회를 섬기고,
또 소득의 일부는 교회의 사역을 위해 사용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문화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배우는 생각, 감정, 잠재적 행동 패턴으로 정의 한다.
문화는 최소한 부분적이라 하더라도 문화를 습득했던 사회적 환경 안에 있는 사람들과
서로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집단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그래서 집단들 간의 차이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라는
Geert Hofstede의 주장처럼,
부모세대로부터 자녀세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패러다임 안에서, 몸으로 배우며,
가치관과 세계관을 정립한다면 매우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문화를 일생에 걸쳐 배우는 감정, 잠재적 행동 패턴로 정의한다면,
그야말로 삶의 스타일 자체가 모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들의 믿음을 삶의 전 영역에서 표현하고 표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선교적 실체로 거듭나는 일이 될 것이다.
필자는 2010년에 그리샴 홈스쿨링센타를 개원하고, 2011년에 엘예슈아 교회를 창립하였다.
엘예슈아 교회는 현재 10가정이 동역하고 있는 작고 소박한 공동체이다
그러나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추구한다.
이 시대에 새로운 대안적 교회를 꿈꾸며,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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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주님의 교회인 엘 예수아 교회를 세우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주님께 감사와 찬앙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직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