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세 연속기획)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략사.
"일본의 아시아 침략"은 "태평양 전쟁"과 "대동아전쟁"을 포함하는 거대한 지역 전쟁을 동반했고, 전체적으로는 유럽에서의 전쟁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의 양대 국면 중 한 축을 구성했다. 또한 그 범위도 식민지였던 한국의 인적 자원 징용과 수탈 등을 포함하여, 중국과 벌인 "중일전쟁", 인도차이나 각국의 침공, 도서부 동남아시아 각국 및 오세아니아 지역에의 침공, 그리고 미국에 대한 진주만 공격 등 광범위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각국 침략은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후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크메르의 세계"는 이러한 일본의 침략사에 대해 온라인 상에서 대중적으로 이용할만한 상세한 자료가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본의 침략과 관련하여 인도차이나를 포함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범위를 국한시킨 연속 시리즈물을 공개키로 한다.
제1편의 원서는 "위키피디아 영문판"으로서, 관련된 여러 항목들을 "크메르의 세계"가 수집하여 하나의 글로 편집한 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
연속기획 :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략사 제1편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략
Japanese Invasion of French Indochina
제1부 :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Japanese Invasion of French Indochina, 仏印進駐)은 "베트남 원정"(Vietnam Expedition)이라고도 부르는데, "제2차 중일전쟁"(the 2nd Sino-Japanese War) 기간 중에 중국으로 보급되던 군수물자와 연료, 그리고 미국이 하이퐁(Haiphong)과 쿤밍(Kunming, 곤명) 사이의 철도를 통해, 중화민국에 대해 매달 1만톤 규모로 지원하던 보급선 차단을 목적으로 일본군이 프랑스 치하에 있던 베트남을 침공했던 사건을 말한다.(주1)
당시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후 수립된 괴뢰정권 "비시 프랑스"(Vichy France 혹은 État Français)가 통제하고 있었다.
1. 배 경
일본군이 중국과 "남-광시전투"(Battle of South Guangxi, 桂南會戰)를 벌이는 과정에서 롱조우(Longzhou, 龍州縣) 장악을 위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프랑스에서는 비시 프랑스 정부 수립 세력이 1940년 6월 22일 프랑스 수도권을 장악한 나찌 독일과 휴전을 했다. 비시 프랑스 정권은 인도차이나를 포함한 해외의 프랑스 영토들도 대부분 통제했다.
당시 인도차이나는 외부세계가 중국으로 접근할 수 있던 마지막 통로였다. 일본군이 롱조우를 함락시키자 도로는 폐쇄됐지만, 일본군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운남성-베트남 연결철도는 여전히 하이퐁에서 쿤밍으로 물자를 실어나르고 있었다.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략
Invasion of French Indochina |
비고: 제2차 중일전쟁의 한 부분임. |

사이공에 입성하는 일본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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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간 |
1940년 9월 22~26일 |
장 소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
결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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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승리
일본의 베트남 북부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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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상대국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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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 프랑스 정권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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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나카무라 아키히토
니시무라 타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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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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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병력 |
36,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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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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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 및 인명손실 |
알려지지 않음 |
900명 | |
일본은 비시 프랑스 정권에 대해 해당 철도를 폐쇄토록 압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일본 남지나방면군"(Japanese South China Area Army, 南支那方面軍)은 향후 인도차이나에 사령부를 두게 될 육해군 합동의 "인도차이나 파견군"(Indochina Expeditionary Army (印度支那派遣軍)을 1940년 9월 5일에 조직했다. "인도차이나 파견군" 사령관은 니시무라 타쿠마(西村琢磨, Takuma Nishimura) 소장이었고[12월 2일 부로 중장으로 진급], "일본 제국 해군"으로부터 소규모 함대와 항공모함을 통한 항공기 지원, 그리고 하이난 섬(해남도)에 있던 비행장 등의 부분적 지원을 받았다.
1940년 9월 22일, 일본과 비시 프랑스 정권은 협정을 체결하여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주둔과 이동권을 보장했지만, 인도차이나 주둔군의 병력을 6,000명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또한 인도차이나를 경유하여 중국으로 파견되는 병력도 어떤 경우에라도 25,000명을 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 협정의 마지막 조항에는 일본의 육해공군 중 어떠한 병력도 협정에 의거하지 않고는 인도차이나 영토로 진입할 수 없도록 하고 있었다.
2. 전투 진행상황
9월 22일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나카무라 아키히토(Akihito Nakamura) 중장이 지휘하던 "일본군 보병 제5사단"은 3곳의 지점에서 동시다발로 공격을 개시하여, 불과 몇시간만에 랑선(Lang Son)에 위치해있던 철도종착점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이것은 양측간에 맺어진 새로운 협정의 위반이었고, 그 결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군의 1개 여단 및 외인부대(Foreign Legionaires)와의 교전이 발생하게 됐다. 이 전투는 일본군이 9월 25일에 랑손을 함락시키면서 끝이 났다.
이 사건은 일본에 대해 하노이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비시 프랑스 정부는 여전히 베트남 북부와 남부를 방어하고 있었고, 랑선에서 하노이로 통하는 길은 새롭게 배치된 대대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9월 23일, 비시 프랑스 정권은 도쿄 당국에 대해 일본군의 협정위반에 저항할 것임을 통보했다. 한편 통킹 만의 하이퐁에 배치된 일본 해군의 태스크포스 소속 항공기들은 9월 24일 아침에 출격을 개시했다. 비시 정권은 외교사절단을 통해 협상을 시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에 대해 어떠한 영토 침략에 대해서도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다.
9월 26일, 일본군은 하이퐁의 남쪽인 동탁(Dong Tac) 해안에도 상륙해, 항구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2번째로 상륙한 병력에는 전차들이 투입됐고, 하이퐁은 공습을 받아 약간의 사상자들도 발생했다. 이른 오후가 되자 약 4,500명 규모의 일본군 병력과 10여대의 전차들이 하이퐁 외곽에 모습을 보였다.
저녘 무렵에 전투는 끝났다. 일본은 하노이 외곽의 자람 비행장(Gia Lam airfield)을 장악했고, 운남성과 국경 인근의 라오까이(Lao Cai)와 푸랑투옹(Phu Lang Thuong: 현재의 Bắc Giang)의 철도조차장을 장악하여 하노이에서 랑손으로 비스듬이 가로지르는 철도를 장악했다. 일본군은 하이퐁 항구에 9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하노이에도 600명을 주둔시켰다. 이후 일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인도차이나에 병력을 주둔시키게 된다.
(참고문헌)
Hsu Long-hsuen and Chang Ming-kai, History of The Sino-Japanese War (1937–1945) 2nd Ed. ,1971. Translated by Wen Ha-hsiung, Chung Wu Publishing; 33, 140th Lane, Tung-hwa Street, Taipei, Taiwan Republic of China. Pg. 317. |
3. 양측 군대의 진영
3.1. 일본 인도차이나 파견군
보병 제5사단 - 지휘관 : 나카무라 아키히토 중장
- 제9 보병여단
- 제21 보병여단
- 제5 산악포병연대
- 제5 기갑연대
- 제5 공병연대
- 제5 수송연대
인도차이나 파견군 - 지휘관 : 니시무라 타쿠마 소장
- 인도차이나 파견 보병단 : 지휘-사쿠라다 타케시(Takeshi Sakurada) 소장
- 제2 제국 근위보병연대 : 오소노데 쿠니오(Kunio Osonoe) 대령
- 인도차이나 파견 전차단 (제14 전차연대)
- 인도차이나 파견 기관총 지원단(AA Gun Unit)
- 통신단 및 여타 부대
IJAAF
- 제1 비행단 사령부
- 제59 전대
- 제90 전대
- 여타 지상 지원부대들
- 제3 비행지단 사령부
- 제18 I F 중대
- 제60 전대
- 지상 지원부대들
해군
제5 함대전단 - ?
IJN 항공대
- 항공모함 Hiryū
- 전투기 대대 - Mitsubishi A5M
- 폭격기 대대 - Aichi D1A2
- 공격기 대대 - Yokosuka B4Y1
- Kamikawa Maru 해상보급기(Seaplane tender)
- 4 Type 94 Kawanishi E7K2 “Alf” 정찰 수상비행기
- 8 Type 95 Nakajima E8N2 “Dave” 정찰 수상비행기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지원하던 일본군 전함들과 보급로는 통킹만의 하이퐁 항구에 의존했다. |
3.2.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군
하노이 - Maurice Martin 중장
하노이
랑손 지역
- 제2 여단 - Mennerat 장군
- 보병대대 5개:
- 제I-3 연대 Tirailleurs Tonkinois (RTT)
- 제II-5 연대 Etrangere d'Infanterie (REI)
- 제I-9 연대 d'Infanterie Coloniale (RIC)
- ?
- ?
- 전차 일부
- 75 mm 포병 일부
- 155 mm 포병 1개 중대
That Khe 지역 - 제II-3 연대 Tirailleurs Tonkinois (RTT) 소속 1개 중대
Nam Quam 지역 - 제II-3연대 d'Infanterie Coloniale (RIC) 소속 2개 중대
Chima 지역 - 제II-3 연대 Tirailleurs Tonkinois (RTT) 소속 1개 소대
Loc Binh 지역 - 제II-3 연대 Tirailleurs Tonkinois (RTT) 소속 1개 중대의 주병력
Na Dzuong 지역 - 제9 연대 d'Infanterie Coloniale (RIC) 소속 일부 병력
제3 통킹만 연대(RTT), 제9 식민지 보병 연대(RIC), 제5 외인 연대(REI)의 총병력은 약 5,000명 정도였다.
예비전력:
- 제IV-3 연대 Tirailleurs Tonkinois (RTT) 소속 - Dong Dang 지역 반격용
- "신입 대대들" - 랑선에서 하노이로 통하는 Lang Giai 및 Lang Nac 차단용 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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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 일본군 제32군 (인도차이나 주둔군)
Thirty-Eighth Army (Japan)
일본군 제38군 |
활동 |
1942-9-9 ~ 1945-8-15 |
국가 |
일본제국 |
상급부대 |
제국 일본군 |
형태 |
보병 |
임무 |
군 |
사령부 |
하노이 |
별명 |
신 (信) | |
일본군 제38군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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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부대 |
남방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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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하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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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 보병사단
- 제21 보병사단
- 제37 보병사단
- 제52 보병사단
- 제34 독립보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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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38군"(第38軍: 인도차이나 주둔군)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제국 일본군"의 예하부대였다.
1. 역사
"인도차이나 주둔군"(Indochina Garrison Army, 印度支那駐屯軍)은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략한 이후인 1942년 9월 9일, "남방군"(南方軍: 동남아 및 태평양 남서부 관할 군사령부) 예하 부대로서 조직되었다. 이후 연합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재탈환할 가능성이 점점 고조되자, "남방군"은 "인도차이나 주둔군"을 "제38군"으로 명칭을 바꾸어 재조직했다. "제38군"은 명칭 개편 후에도 인도차이나 주둔군으로서의 역할을 그대로 담당했다.
"제38군"은 1945년 3월에 발생한 "제2차 인도차이나 작전"(Second French Indochina Campaign: 일본 쿠테타)에 가담했고, 이 전쟁의 결과로 "베트남 제국"(Empire of Vietnam)이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독립했다. "제38군"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하노이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
2. 지휘부
2.1.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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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
취 임 |
이임 |
1 |
중장 마치지로 카즈모토(町尻量基) 자작 |
1942-11-10 |
1944-11-22 |
인도차이나 주둔군 |
2 |
중장 츠지하시 유이츠(Yuitsu Tsuchihashi) |
1944-11-22 |
1944-12-29 |
인도차이나 주둔군 |
3 |
중장 츠지하시 유이츠 |
1944-12-20 |
1945년 9월 |
제38군 |
2.2. 참모장
|
성 명 |
취 임 |
이 임 |
1 |
중장 카와무라 사부로(Saburo Kawamura) |
1942-12-5 |
1944-11-22 |
인도차이나 주둔군 |
2 |
중장 카와무라 사부로 |
1944-12-20 |
1945-6-2 |
제38군 |
3 |
소장 코우도 테이지(Teiji Koudo) |
1945-6-2 |
1945년 9월 |
제38군 |
참고문헌
Frank, Richard B (1999). Downfall: The End of the Imperial Japanese Empire. New York: Random House.
Madej, Victor (1981). Japanese Armed Forces Order of Battle, 1937-1945. Game Publishing Company. |
외부링크
제3부 : 제2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작전
Second French Indochina Campaign
"제2차 인도차이나 작전"은 "1945년의 일본 쿠테타"로도 불리는 사건으로, 일본군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그리고 베트남에서 벌인 작전을 말한다. 이 작전 지역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서, 그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기 직전 수개월간에 행해졌다.
이 시기의 베트남은 참다운 식민지라고 볼 수 없었다. 참다운 식민지는 소위 "코친차이나"(Cochinchina: 베트남 남부)로 불린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안남(Annam)과 통킹(Tonkin) 역시 문서상으로는 프랑스의 "보호령"(protectorates)이었다.
이 작전의 결과로 베트남 제국과 라오스 왕국, 그리고 캄보디아 왕국이 단기간이나마 독립 상태가 되었고,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 행정력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소규모 게릴라전에 이어 프랑스는 보복조치를 준비했다. 하지만 완전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했다.
1. 쿠테타
1945년, 일본은 연합국이 인도차이나에 대해 공세적으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미 유럽에서는 비시 프랑스 정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장 드쿠(Jean Decoux) 총독이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하곤 있었지만,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프랑스 행정부는 여전히 비시 프랑스 정권의 연장선에서 존재했다.(주2)
일본군은 3월초부터 프랑스군 본부들이 있는 여러 도시들에 병력을 재배치하기 시작했고, 선전포고도 없는 상태에서 3월 9일에 프랑스군의 무장해제에 대한 최후통첩을 보냈다. 거부한 병력은 모두 학살당했다. 사이공에서는 고위급 일본군 장교가 프랑스군 지휘관들을 연회에 초청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프랑스 지휘관들은 모두 체포된 후 거의 다 살해를 당했다. 같은 사이공에서, 비시 정권 관리들인 에밀-르네 르모니에(Emile-René Lemonnier) 장군과 까미유 아우팔레(Camille Auphalle) 상주대표가 항복문서에 조인하는 것을 거부한 후(주3) 참수를 당했다.(주4)
하지만 내륙지방의 프랑스군 본부들은 상황이 좀 더 나았다. 마르셀 알레산드리(Marcel Alessandri) 소장이 지휘 하에, 많은 수의 외인부대 병력을 포함한(주5) 5,700명 규모의 프랑스군 병력은 장개석의 중화민국을 통해 싸움을 이어갈 수 있었다.(주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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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프랑스의 행정력은 효과적으로 붕괴했다. 일본은 베트남제국과 라오스 왕국, 그리고 캄보디아 왕국에 대해 독립을 선포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베트남의 바오 다이(保大, Bảo Đại) 황제는 이에 따르고 일본에 협력했다.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캄보디아 국왕도 순응했지만, 일본은 친불파 성향인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시하누크보다는 일본에 망명했다 귀국한 손 웟 탄(Son Ngoc Thanh)이 더 신뢰할만한 인물이었다. 결국 손 웟 탄이 5월에 캄보디아 외무부장관이 되었다가, 8월에는 총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라오스에서는 시사왕웡(Sisavang Phoulivong 또는 Sisavangvong) 국왕이 총리였던 펫사랏 라따나웡(Phetsarath Rattanavongsa) 왕자와 반목을 하는 가운데, 프랑스 통치를 선호하면서 일본의 독립요구를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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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13년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지도. |
2. 저 항
중화민국은 프랑스군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미국은 원래 식민통치를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 행정력을 복원시키기 위한 대규모 작전 개시를 망설이고 있었다. 1944년 말부터는 영국의 특수부대인 "포스136"(Force 136)의 특공대들도 인도차이나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일본의 쿠테타가 일어난 후부터, 프랑스와 영국은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는 방식으로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3월의 일본 쿠테타 당시 탈출한 프랑스군 병력은 프랑스-영국 특공대로 합류해서 싸움에 참여했다. 일본이 라오스 지역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장악력이 떨어졌으므로,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은 라오스로 그 활동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하지만 이들 반군들은 정교한 지휘체계를 갖고 있지 못했고, 무장상태 역시 대규모 작전을 감행할 수 있을 정도는 못되었다.(주1) 프랑스와 라오스 게릴라들은 의미있는 화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농촌지역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베트남 북부에서는 호치민(Hô Chi Minh)이 이끄는 "비엣민"(Viet Minh)이 독자적으로 일본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농촌지역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대부분 도시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점령군 출신 반군들과는 접촉을 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나찌 점령 하에서 해방되어,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에 대적할 목적으로 파견하게 될 "프랑스 극동 파견군"(French Far East Expeditionary Corps)을 창설했다. 하지만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선언과 함께 일본군은 항복했다. 일본군은 8월 19일에 비엣민에 항복했다. 그리고 바이다오 황제가 퇴위하면서 비엣민이 하노이를 통제했다. 그러나 타이 응우옌(Thái Nguyên) 도에 주둔 중이던 일부 일본군 병력은 항복을 거부하고, 8월 20일부터 25일까지 비엣민과 교전을 계속했다. 결국 그들도 8월 26일에 항복을 했고, 비엣민은 그들의 무기들을 모두 노획했다.(주6)
9월 2일,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했다.
3. 이후의 여파
더글라스 그레이시(Douglas Gracey) 소장이 지휘하던 영국 "제20 인도사단"(20th Indian Division) 병력과 중화민국 군대가 인도차이나로 들어와 일본군의 무장해제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9월에 도착한 "프랑스 극동파견군"이 이 작업에 합류했다. 자크 마쉬(Jacques Massu)가 지휘하는 병력은 사이공을 통제했다.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혼돈에 빠져들었다. 총독이었던 장 드쿠 제독은 "자유 프랑스" 대신 "비시 프랑스" 정권을 지지했었기 때문에, 재판에 회부되어 프랑스로 압송됐다. 라오스에서는 펫사랏 라따나웡(Phetsarath Ratanavongsa: 1890~1959) 왕자가 이끌던 "라오 이싸라"(Lao Issara: 자유 라오스)가 시사왕 웡 국왕을 폐위시키고 국가의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1946년 4월 프랑스군이 라오스로 진격함으로써 그의 정부는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에서 손 웟 탄을 체포하여 프랑스로 압송했다. 북부 베트남은 호치민이 통제하여, 이후 벌어질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준비할 수 있게 하였다.
(주1) Grandjean (2004).
(주2) Jacques Dalloz, La Guerre d'Indochine, Seuil, 1987, pp.56-59.
(주3) The Damned Die Hard by Hugh McLeave.
(주4) Windrow, Martin (2004). The Last Valley. Weidenfeld & Nicolson.
(주5) The Damned Die Hard by Hugh McLeave.
(주6) Cecil B. Currey, Vo Nguyên Giap - Viêt-nam, 1940-1975 : La Victoire à tout prix, Phébus, 2003, pp.160-161. |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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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차대전 당시 일본과 베트남의 관계를 전쟁 상황에서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이전부터 일본이 동남아에 대한 야욕을 키우며 불란서와 영국 등 식민정권에 대한 민족적 저항세력을 키우고 지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부분들이 배경으로 설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크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울-노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 귀중한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무언가 약간 공허한 느낌을 갖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지적해주신 부분이 새로운 출구가 될 것 같습니다..
일단은 완전 초보자의 관점이기 때문에,
다소 무식한 방법이긴 하오나
물량공세(??)로 나간 후에 빈 자리를 좀 더 채워볼까 싶습니다. ^ ^
우선은 <제2편 일본의 태국 침공과 점령>...
<제3편 일본의 버어마 침공>...
뭐 이런 식으로 4~5편을 더 다뤄볼 예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각주나 참고문헌들을 통해서라도
더 진전될 수 있는 자료들이 있는지 검토해볼 요량입니다.
그래도 부족하면
학술정보를 통해서 영어권이나 일본어권의 학술논문들을 좀 살펴볼까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에 선생님께서 핵심을 찔러서 지적해주시니
더욱 구체성을 갖고 탐색목표로 작용할 수 있을듯하여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 ^
귀중한 가르침에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