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종연횡을 거듭하며 영토 다툼을 벌인 끝에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 멸망했다. 자기네가 차지한 남의 나라 땅은 철저하게 부수고, 그 위에 자기네 세상을 세우곤 했다. 이 땅 삼국시대의 유적은 대다수 그 삼국전쟁에 사라졌다.
하지만 남의 것이라도 영토 확장과 보전에 요긴하여 재활용하던 땅이 있으니 바로 산성이다. 전국적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진 산성들이 꽤 많다. 경기도 오산 땅에도 하나 있다. 이름은 독산성, 이름을 풀면 '대머리 산성'이되 지금은 떡갈나무와 소나무가 무성하다.
경부고속도로 오산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잠시 번잡한 시내로 들어갔다 수원쪽으로 나오면 세마대 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언제 그랬느냐 싶게 한적한 시골길이다. 들판과 산길을 지나 10분만 들어가면 '독산성 세마대지'라고 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자연석으로 만든 큼직한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 산길이다. 통신 시설을 지나면서 꽤 급한 경사로가 왼쪽 오른쪽으로 휜다.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급한 마지막 언덕을 돌아 오르면 절 하나가 반긴다. 보적사다. 두터운 독산성 성문이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다.
독산성은 둘레가 3.6km로 걸어서 50분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작은 산성이다. 하지만 이 산성에는 한국 전사에 인상깊게 남아 있는 내력이 있다. 절 기록에 따르면 보적사는 서기 401년 백제 아행왕이 전쟁 승리를 기원하며 세웠다고 한다. 독산성 역시 축조시기를 그 즈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암자 정도로 아담하게 규모가 줄었다.
임진왜란(조일전쟁) 때 동래에 상륙한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부대가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접근했다. 이때 의병을 일으킨 권율 장군이 독산성으로 올라가 진둔했다. 한양 가는 길목, 평야지대에 우뚝 선 산성의 전략적 위치를 노린 3만여 가토 부대가 독산성을 포위했다. 조선 선조 26년(1593년) 7월의 일이다.
성 안에 물이 없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평야에 우뚝 솟은 전술적인 장점은 있지만 아래 샛강까지 길이 막히면 성안은 무장해제. 가토 기요마사는 포위작전 도중 물이 없을 것 같은 성안에 물 한동이를 길어 성내로 들여 보냈다고 한다. 그래, 더 버티지 말고 투항하라는 비아냥이었다. 권율 장군은 그 물을 가지고 나무 한 그루 없는 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고 말 여러 필을 내어 보란듯이 물을 부으며 씻겼다고 한다.(사실은 물이 아니라 쌀로 씼겼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멀리서 보면 쌀의 하얀 빛깔이 물과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 이를 본 왜장이 "물이 넘쳐나는 저 성을 상대로 장기전은 무리"라며 작전을 포기하고 물러섰다는 이야기. 권율 장군은 퇴각하는 왜군을 행주산성에서 물리쳤다.
말을 씻겼던 곳에 세마대라는 정자가 서 있다. 정자 기록에 따르면 일제 치하에 일인들이 파괴했던 정자를 이승만 대통령 시절 이래 수년에 걸쳐 중건했다고 한다. 나라 살림이 워낙 열악해 당시 국민학생들이 폐품 팔아 모은 돈도 들었다고 적혀 있다. 현판은 이 대통령 친필이다.
절 뒤로 난 오솔길이 세마대로 가는 길이다. 치솟은 소나무 사이를 지나면 세마대가 나온다. 떡갈나무가 숲을 이뤘고 발 아래에는 낙엽이 수북하다. 정자 뒤편 떡갈나무 사이 너머로 오산 평야와 멀리 산자락이 시원하다. 성곽을 따라 걸으면 정상을 중심으로 성 줄기가 유장하다. 군데 군데 벤치가 있다. 걷다가 가끔 뒤를 돌아 보면 걸어 왔던 길이 매우 낭만적으로 보인다. 이곳이 전쟁터였다는 사실은 믿기 힘들다. 쉬엄 쉬엄 걷다보면 다시 보적사 뒷마당이 나오면서 산책의 끝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