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6 제1회 아테네 올림픽 대회 |
|
1900 제2회 파리 올림픽 대회 |
육상 경기에서는 미국의 알빈·글렌쓰렌이 60m, 110m 허들, 200m 허들, 넓이뛰기에서 우승하여 올림픽의 첫 4관왕으로 탄생되었고, 미국의 레이·유리는 제자리 높이뛰기, 제자리 넓이뛰기, 제자리 세단뛰기에서 우승하여 3관왕이 되었으며, 그 후 1904년의 제3회, 1908년의 제4회 대회에서도 연승하여 초기의 정식 올림픽에서 8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가장 위대한 선수로 지명되었다. 테니스 경기에서는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여자 선수가 참가하였으며, 영국의 샤로트·쿠퍼는 여자 테니스 단식경기에 출전하여 올림픽에서의 첫 여자 금메달 리스트가 되었다. |
1904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대회 |
육상 경기의 하나로 실시된 마라톤 40㎞ 경기에서는 미국의 프레드·로쓰가 선두로 메인스타디움에 들어서자 제1회 아테네 대회에서 주최국 그리스의 루이스가 메인스타디움에 들어섰을 때와 똑같이 장내는 환성의 도가니로 변하였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아리스가 로쓰에게 월계관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로쓰는 반환점인 20㎞지점에서, 지나가는 자동차의 도움으로 메인스타디움에 골인한 사실이 폭로 되었고, 그로부터 약 1시간후 미국의 토마스·힉스가 지칠대로 지쳐서 골인 금메달의 영예를 안았다. |
1908 제4회 런던 올림픽 대회 |
|
1912 제5회 스톡홀름 올림픽 대회 |
이전에 용맹을 떨친 미국인디언 삭·폭스족의 피를 받아 1888년에 태어난 24세의 청년 짐·소프는 이 대회를 통하여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가장 위대한 선수"라는 최대의 찬사를 받았으며, 무명에서 일약 미국의 영웅이 되어 당시 타프트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시민 최고의 대표"라고 칭찬받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년 후 메사츄세추의 지방지 기자가 밝혀낸 "소프는 스톡홀름 올림픽 수년전인 1909년 야구 경기에 나가 보수를 받았다"라는 기사에 의해, (사실은 1909년과 1910년 여름 휴가 기간에 노스캐롤라이나의 마이너리그에서 주급 25불을 받고 야구 선수로 일함) 소프의 아마튜어 규정 위반이 알려 졌고 미국 올림픽위원회도 그것에 동의하여 소프에게서 금메달 2개와 트로피를 몰수, IOC에 반환하였다. 1913년 로잔에서 개최된 IOC 총회에서는 미국 올림픽위원회(USOC)의 보고를 받고 "IOC는 소프로부터 2개의 금메달을 박탈 했다."라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70년후 1982년 10월 IOC 집행위원회는 소프의 복권을 결정했고, 1973년 불가리아의 베르나에서 개최된 올림픽 콩그레스에서는 "아마튜어"라는 용어를 올림픽 헌장에서 삭제하게 된다. 아울러, 1983년 1월 IOC는 짐·소프의 자녀에게 2개의 금메달을 반환하였다 |
1916 제6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 |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됨. |
1920 제7회 안트워프 올림픽 대회 |
이 평화의 제전에 1959년 올림피안으로서 유일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영국의 필립·베이커 선수가 참가 했는데, 육상 남자 1,500m 경기에 출전한 그는 결승에서 같은 영국의 앨버트·힐에 이어 2위로 골인 은메달을 차지하였다. 제7회 올림픽대회의 가장 위대한 선수로는 육상 장거리의 "날으는 핀란드인" 파보·누루미로서 안트워프 대회의 금메달 3개를 비롯하여 1924년 제8회 런던 대회에서는 5개 종목에 출전, 전종목에서 우승하였으며,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1개의 금메달을 추가한 그는 총 9개의 금메달을 획득 전인미답의 기록과 함께 육상 장거리 선수들의 우상이 된다. |
1924 제8회 파리 올림픽 대회 |
제7회 안트워프 올림픽대회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로 등장한 핀란드의 파보·누루미는 이번 대회에서도 육상 장거리의 5개 종목에 출전하여 5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그로부터 4년후인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에서도 금메달 1개, 은메달 2개를 비롯하여 총 9개의 금메달과 3개의 은메달을 차지하여 초기 올림픽의 육상 영웅으로 기억 된다. |
1928 제9회 암스테르담 올림픽 대회 |
육상 세단뛰기에 참가한 미끼오·오다 선수는 15m 21을 뛰어 일본 최초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처음 실시된 여자 800m 결승에서 기누에·히토미 선수가 2분 17초 6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차지 하였고, 일본은 요시우끼·쓰루다가 수영 200m 평영에서 우승하여 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게 된다. |
1932 제10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대회 |
|
1936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 |
제10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대회에 이어 일본 선수단의 일원으로 마라톤의 손기정, 남승룡, 농구의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축구의 김용식, 복싱의 이규환 선수가 참가 하였고, 임원으로는 이상백씨가 총무로 참가하였다. |
1940/1944 제12회, 제13회 올림픽 대회 |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됨. |
1948 제14회 런던 올림픽 대회 |
한국 스포츠 사상 최초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7개 경기 67명의 선수단을 파견한 한국선수단은 역도 경기의 김성집 선수가 합계 380㎏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획득 올림픽 무대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며 복싱 경기에 참가한 한수안 선수도 아깝게 결승진출에 실패하여 동메달에 만족하였다. |
1952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대회 |
1952년 헬싱키 올림픽대회는 제14회 런던 올림픽에 혜성같이 등장한 인간 기관차 에밀 쟈토벡이라는 위대한 선수를 탄생시켰다. 1922년 체코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쟈토벡은 헬싱키 올림픽대회에서 5,000m, 10,000m, 마라톤 3종목을 모두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 육상 장거리의 전무후무한 선수가 되었다. 쟈톡벡의 부인인 다나 쟈토프코바는 투창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부부가 금메달 리스트로서 올림픽 역사에 기록된다. |
1956 제16회 멜버른 올림픽 대회 |
7종목 57명의 선수단을 파견한 한국선수단은 복싱에서 송순천 선수가 해방후 첫 은메달을 획득하였으며, 역도 경기의 김창희 선수는 동메달을 획득하여 종합 29위를 차지 하였다. |
1960 제17회 로마 올림픽 대회 |
복싱 라이트헤비급에 출전한 미국의 캐시어스 M 클레이(무하마드 알리)는 춤추는 듯한 경쾌한 발놀림과 빠른 펀치로 18세의 나이에 새로운 참피온으로 등장했으며. 1964년 예상을 뒤엎고 소니 리스튼 선수를 7회 KO 시켜 사상 가장 나이어린 프로 복싱 헤비급 참피온이 되었다. |
1964 제18회 동경 올림픽 대회 |
1960년 제17회 로마 올림픽대회에서 맨발의 신화를 창조한 이디오피아의 아베베는 동경 올림픽대회에서도 우승, 올림픽 사상 최초의 마라톤 2연패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
1968 제19회 멕시코 올림픽 대회 |
육상 200m 경기후 진행된 시상식에서는 1위와 3위에 입상한 미국의 흑인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시상대에서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높이 치켜 들어 항의 시위를 일으켰으며 결국 두 선수는 미국 선수단에서 제명 당한 뒤 올림픽 선수촌을 떠나야만 했다. |
1972 제20회 뮌헨 올림픽 대회 |
미국의 유태인 수영선수 마크 스피치는 자신이 참가한 7개 전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 |
1976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 |
여자 체조 경기에서 14세의 나디아 코마네치라는 「체조의 요정」과 한국계 소련인인 넬리킴의 탄생으로 TV를 시청하는 지구촌 가족을 매료시켰다. |
1980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 대회 |
레닌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자 800m에서 스티븐 오베트가 세계 신기록 보유자인 세바스첸 코우를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 먼저 미소를 지었으나, 다음날 열린 1,500m에서는 코우가 오베트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 전날의 패배를 설욕했다. 세바스첸 코우는 그후 6차례의 세계 신기록과 세계적 권위의 각종 메스콤에서 "올해의 육상인"으로 가장 많이 선정된 선수가 되었으며, 상업광고에 출연하는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
1984 제23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대회 |
육상 경기에 출전한 미국의 칼 루이스는 100m, 200m, 400m, 넓이뛰기에서 우승 4관왕에 등극하며 LA올림픽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오른발이 왼발에 비해 약간 짧은 불구선수 바레인의 조아큄 크루즈는 800m에서 금메달을 획득 인간 승리의 감동을 연출하며 수만 관중의 환호를 받았다. |
1988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 |
서울 올림픽대회의 가장 큰 뉴스는 남자 육상 100m의 우승자 카나다의 벤 존슨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