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대통령은 1974년 8월8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탄핵 을 받을 위기에 몰리자 하야를 선택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처음에는 공화 당 당원 일부가 민주당 선거대책본부가 있는 워싱턴의 워터게이트빌딩에 침 입하여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일로, 체포된 피의자 및 그 직속상관이 고발되는 것만으로 끝나는 듯하였으나, 차츰 권력투쟁의 양상으 로 바뀌게 되었다. 우선 체포된 「워터게이트 세븐」의 한 사람인 J.W.맥코 드는 재판에서 백악관이 워터게이트 침입과 관계된 일들의 은닉을 지시하였 으며 피고인들은 침묵을 지키고 유죄를 부인하라는 백악관의 압력을 받았다 고 증언하였다. 그 후 J.N.미첼 공화당대통령 再選위원장(전 법무장관), 닉 슨의 보좌관들도 직접 관여한 것이 밝혀져 사임하였으나 닉슨 대통령 자신 은 사건과 무관하다고 釋明(석명)하였다.
진상규명을 위해 임명된 A.콕스 특별검사 및 W.D.럭켈스하우스 법무차관을 대통령이 해임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E.L.리처드슨 법무장관(검찰총장)이 사임한 후부터 대통령 자신과 그 측근 및 주요 각료가 사건에 관여하였다 는 의혹이 짙어졌다. 사건 발각 10개월 째인 1973년 3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정·재계에서 가장 유력한 조정役을 맡아온 C.클리퍼드(L.B.존슨 전 대통령 때 일시 국방장관)가 공공연히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닉슨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애그뉴 부통령의 대통령 승계를 막기 위하여 애그뉴가 부통령에 취임하기 이전에 출신 주에서 범한 독직을 고발해, 닉슨 대통령으로 하여금 부통령을 해임시키고 G.R.포드를 후임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그런 연후에 닉슨이 사건과 무관한 것을 증명하려고 제출한, 백악관 내의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도 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이 테이프를 통해서 닉슨이 대통령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천한 말을 사용하였거나 조작된 사실이 녹음되어 있는 점, 대통령이 원수의 자격으로 외국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보석을 패트리시아 부인에게 선물한 사실, 닉슨의 탈세 사실 등이 차례 차례 언론에 폭로되었다.
1974년 7월 20일 하원 사법위원회는 대통령탄핵을 위한 심리를 시작하여 닉슨을 벼랑으로 몰았다. 부통령 포드가 닉슨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리차드 마일러스 닉슨(1913-1994)이 1968년에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비록 그의 대통령 당선이 존슨과 험프리의 행정부가 베트남전을 해결하는데 실패한 것에 부분적으로 기인하지만, 닉슨은 당선후에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지속시켰다. 그는 한발짝 더 나아가서 1970년 4월 29일에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허가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지금껏 보지 못하던 가장 격렬한 반전 군중 시위를 불러 일으켰다. 5월 4일, 오하이오의 켄트 주립대학에서 있었던 한 학생 시위는 구호를 외치던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주방위군이 "경고용 발포"를 했을때 4명의 학생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다.
1972년에, 닉슨이 재선을 위해 뛰고있을 무렵, 그는 암암리에 야당을 정찰하고 야당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활동에 연루되었다. 이 활동의 절정은 워싱턴에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던 민주당의 참모본부에 침입한 사건이다. 동시에, 민주당의 한 선거구에서는 중도좌파 후보인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1922- )의 지명
이 있었다. 그는 대다수 선거구민들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었다. 이것이 닉슨이 선거 전날 "평화가 가까이 다가왔다"라고 발표한것과 결합하여 그가 투표에서 승리한 것이다.
닉슨은 재임기간동안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도 많은 고초를 겪었다. 1973년 초에 워터게이트 칩입사건이 시도되고 있을때, 닉슨의 가장 면밀한 도움이 침입사건의 계획에 관계되었을 것이라는 대중의 의혹이 짙었다. 닉슨 자신이 백악관의 집단 사건 은폐에 능동적으로 개입되었다는 잇달은 문제제기가 제시되자, 상원은 사건 조사 청문회를 소집했다. 청문회 의장은 샘 어빈이었는데, 1973년 5월 17일부터 11월 15일까지 청문회가 열렸다. 결국 다수의 백악관과 정보기관의 인물이 워터게이트 침입과 그에 이은 은폐에 참여했다는 증거가 폭로되었다. H.R.할데만, 존 에리히만, 존 딘, 법무장관 리차드 클레인디엔스트가 이에 연루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사직하도록 조치되었다.
이와 동시에, 닉슨은 특별 검사로 아키발드 콬스를 임명했는데, 그는 11월 26일 닉슨 자신이 은폐에 가담하였음을 폭로해냈다. 이 시점부터 닉슨은 어떠한 더이상의 조사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다. 1974년 6월 24일-30일에 상원 사법 위원회는 닉슨에 대한 세 항목의 탄핵서를 의결했다. 8월 8일, 닉슨은 이 탄핵으로 인해 사임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대통령직 사퇴를 발표했다.
리차드 닉슨이 불명예 속에서 탈퇴한 때는, 바로 행정부에 대한 일반적인 환멸,냉소주의,불신과 특히 정치인들에 대한 이러한 감정이 미국에 드리워지게 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인 것이다.
1972년 6월17일 아침 워싱턴 포스트지 브래들리 편집국장 방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포토맥 강변에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 6층 민주당 선거본부에 괴한 5명이 침입했다가 체포됐다는 제보전화 였다. 흔한 범죄기사 쯤으로 생각한 그는 사회부장을 불러 내용 을 전해주었고, 사회부장은 입사 9개월 밖에 안되는 봅 우드워드 와 칼 번스타인 기자에게 취재지시를 내렸다.
뉴욕타임스도 "유치한 3류 절도사건과는 관련이 없다"는 백악 관의 부인을 받아들여 지면 한구석에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보석심리가 진행중인 법정에서 일당 중 한명이 "전직 CIA직원"이라 고 답변하는 것을 들은 우드워드는 대단한 기사거리라고 직감했 다. 풋내기 기자들이 접근하기에는 ''''''''핵심''''''''이 너무 두터웠다. 들쑤 시고 다니던 이들에게 어느날 전화가 걸려왔다. "이봐, 그들이 사용한 돈의 출처를 따라가보게." 지하주차장에서 만난 내
부 밀고자의 한마디가 사건을 권력남용 및 정치공작으로 돌려세웠다. ''''''''딥 스롯(Deep Throat)''''''''이라고 불렸던 인물의 등장이었다. "존슨 등 전임자들도 했던 일들이야. 그런데 왜 나만…" 처음 에 닉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 같았다. 50년대 냉전시대를 넘어 해빙을 주도했던 닉슨이지만 미국 국민들 마음에 쳐지고 있었던 ''''''''불신의 벽''''''''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30년대 대공황 극복, 60년대 인종차별 금지 등을 수행한 정부에 신뢰를 보냈던 국민들은 70년대들어 베트남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들자 불신으로 돌아섰다. 언론도 대통령의 편이 아니었다. 개인의 권력 유지를 위해 IRS(국세청)와 CIA(중앙정보국)를 이용, "더 이상 감춘 게 없다"며 거짓말로 일관한 대통령에게 "노(NO)"라고 외친 것이다. 닉슨은 사임후 8권의 저서를 쓰며 포기를 모르는 ''''''''거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25년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민 60%는 "사임이 마땅했다"고 응답했다. "역사가들 은 나를 중국을 방문한 대통령이 아니라 사임한 대통령으로 첫 문장을 시작할 것이다." 닉슨이 회고록에서 말한 그대로였다.
버금일지
▶1882 스트라빈스키 태어남
- 분류 : 인물
- 지역 : 국외
- 내용 : Igor Fyodorovich Stravinskii 1882∼1971
러시아 태생 미국 작곡가. 산크트페테르부르크출생. 스위스·프랑스·미국 등지에서 거주하였으며, 20세기 음악의 흐름의 선두에 서서 예술음악의 전개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음악가 중 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마린스키극장의 유명한 베이스가수인 관계로 일찍부터 음악과 친숙해졌지만, 양친의 권유로 관리가 되기 위해 페테르스부르크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20세에 작곡가가 될 결심을 하고 N.A.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의 기초를 배워 1907년 4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 E장조(op. 1)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발표한 《환상적 스케르초(1908)》와 《불꽃(1908)》이 1909년 2월 러시아발레단의 주재자 S.P.디아길레프에게 인정받아, 이 두 사람의 콤비에 의해 발레단은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파리에서 초연된 그의 3대 발레작품 《불새 (1910)》 《페트루슈카(1911)》 《봄의 제전(1913)》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민화풍(民話風)의 제재를 사용한 것으로, 러시아민요풍의 5음 내지 6음의 선율과 대편성된 오케스트라의 참신한 연주, 마디를 무시한 복잡한 리듬, 그리고 격렬하고 원색적인 색채감과 힘에 넘친 음악으로 파리와 유럽의 음악계에 큰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의 10월혁명으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스위스 각지를 전전하면서 《여우(1916)》 《병사의 이야기(1918)》 등의 작품을작곡하여 다음의 신고전주의의 작풍(作風)을 준비하였다. 20년의 《풀치넬라》에서 45년의《에보니협주곡》까지는 신고전주의의 양식에 따라 작곡한 곡들로, 이러한 일련의 작품은 G.B.페르골레시·J.S.바흐·F.J.하이든·L.베토벤 등의 고전주의음악을 모델로 삼았다.
또한 《11개의 악기를 위한 래그타임(1918)》을 작곡하여 재즈에도 관심을 가지는 한편, 탱고·왈츠 등의 대중음악에도 접근하였다. 34년에는 프랑스국적을 취득하여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 자신의 작품을 연주함과 동시에 레코드나 자동피아노를 위한 녹음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39년 9월 하버드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연인 베라와 함께 미국의 서해안에서 영주할 것을 결심하였다. 미국에서 그는 작품의 개정판을 내는 데에 힘을 쏟았으며, 많은 작품을 편곡하였다. 48년에 만난 젊은 작곡가 겸 지휘자인 R.크라프트를 조수로 삼아 《난봉꾼의 행각(1951)》 《7중주곡(1953)》 등을 작곡하여 창작활동을 재개함과 동시에 자신의 작품의 지휘자로서 세계 각국에서 공연하였다. A.쇤베르크가 죽은 51년부터는 12음기법에도 흥미를 가져 《칸티쿰 사크룸(1955)》 《설교·설화·기도(1961)》 《레퀴엠 칸티클즈(1966)》 등의 12음기법에 따른 종교음악을 많이 남겼다. 71년 4월 6일 뉴욕에서 죽었으며, 생전에 그가 사랑하여 《칸티쿰 사크룸》을 헌정하였던 베네치아에 묻혔다.▣
▶1928 아멜리아 이어하트 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단
- 분류 : 사회
- 지역 : 국외
- 내용 : "엄마, 내가 이 멋진 모험을 끝내지 못한다고 해도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가족은 너무 안전한 것만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요. 내 인생은 정말 행복했어요. 이 행복했던 인생의 한가운데에서 삶을 끝낸다 하더라도 전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 1928년 첫번째 대서양 횡단 비행을 앞두고 어머니에게 쓴 편지 중에서
대서양 횡단의 영웅 찰스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단독 횡단한지 일년 뒤인 1928년 이번에는 여성 최초의 대서양을 횡단기록이 세워졌다. 비행기로는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용감한 여성의 이름은 아멜리아 이어하트(Amelia Earhart)였다.
그녀는 그녀의 애기(愛機)인 빨간색 록히드 베가의 연료탱크를 늘리는 등의 준비작업을 끝내고 1932년 5월 20일 뉴펀드랜드를 출발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서양 횡단 비행동안 날씨는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그녀의 앞길에는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그 속으로 빨려들어간 이어하트의 작은 비행기는 가랑잎처럼 흔들렸다.
날개의 결빙현상으로 양력을 잃은 비행기는 자꾸 아래로 쳐졌고 심지어는 난기류에 휘말려 한꺼번에 3천피트씩이나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마침내는 엔진의 이상 진동으로 인해서 최종 목적지인 파리에 조금 못미친 북아일랜드 지역에 불시착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15시간의 대서양 횡단비행은 세 가지 기록을 남겼다. 가장 빠른 대서양 횡단 비행, 여성 조종사로서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 여성 혼자서 시도한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기록은 지금도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단독으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이어하트에게 모든 언론의 찬사가 빗발쳤다. 그녀는 교황을 알현했고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초청받을 정도의 명사가 되었으며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국립지리학회의 금장 메달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1950 ''탁류''의 작가 채만식 사망
- 분류 : 인물
- 지역 : 국내
- 내용 : 『탁류는 한 시대의 역사적 현장으로서 세태의 혼탁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인간의 탐구에 크게 기여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제 유서깊은 이 고장 도도히 흐르는 바다를 굽어보는 자리에 정성을 모아 여기 영구불망의 한 돌을 세워 그 업적을 길이 추모하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 그지 없다』"(군산 월명공원에 있는 백릉 채만식선생문학비 중에서)
채만식은 1902년 군산시 임피면 취산리에서 부친 채규섭(蔡奎燮)과 모친 조우섭 사이의 5남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몽선습 소학 사서삼경 등을 깨우쳤으며 9세가 되어서야 임피보통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접하게 된다. 1918년 서울로 유학, 중앙고보(中央高普)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 와세다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관동대지진과 가정의 어려움으로 1년6개월만에 학업을 단념하고 1923년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취직하게 된다. 이때 조선문단에 단편「세길로」를 발표, 문단에 데뷔한다. 1926년에는 조선일보로, 이후 개벽사(開闢社)로 자리를 옮긴다. 이에 앞서 그는 중앙고보 2학년인 18세때 집안의 강권으로 한살위인 함라면 은선흥(殷善興)과 결혼, 3남매를 두었으나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숙명여고 출신인 둘째부인 김씨영(金氏榮)과 재혼한다.
34세때인 1935년 서울에서의 기자생활을 청산하고 개성으로 가 중형 준식(俊植)의 금광업을 도우며 창작에 몰두한다. 1938년에는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서울로 피신했다가 1945년 봄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고향 임피로 돌아와 8·15 해방을 맞는다. 이 해에 아버지와 큰아들의 상을 당하게 된다.
1949년 6월 탁류의 인세수입 37원과 몇편 소설의 원고료를 합해 익산시 주현동에 난생 처음 집을 마련한다. 그러나 무리한 집필로 폐환이 악화돼 감당키 어려운 치료비 때문에 집을 처분하고 나머지 돈으로 마동 269번지에 반토담집 초가를 사서 이사한다.
그해 6월 6·25사변이 발발하기 보름전인 1950년6월 17일 4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94 O.J 심슨 전처 살해 혐의로 체포
- 분류 : 사회
- 지역 : 국외
- 내용 : 1994년 6월 백인 여배우 니콜 브라운 심슨과 애인론 골드먼이 로스앤젤레스의 고급주택지 브렌트우드 저택에서 피투성이 시체로 발견되고 이어 경찰의 수사를 통해 미식축구 스타 출신의 흑인 배우 O.J. 심슨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으며 심슨과 경찰의 고속도로 추격전은 TV로 생생히 중계돼 당시 공전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세계무역센터와 오클라호마시티 연방건물 폭파사건과 콜럼바인 고교를 비롯한 잇단 학교내 총격 등 엄청난 사건들을 제치고 이 사건이 90년대 사건으로 선정된 것은 돈, 권력, 명사, 인종, 가정 폭력, 미디어의 광적인 취재 등 미국의 추악한 면이 모두 뒤엉킨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른바 <드림 팀>이라고 불린 유력 변호사들을 대거 고용한 심슨은 인종차별을 끌어들여 형사사건에서는 무죄로 풀려났으나 민사사건에서는 유죄로 인정돼 3,350만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 무일푼의 처량한 처지로 전락하게 됐다.
▶1971 미국-오키나와 반환협정 조인
- 분류 : 정치
- 지역 : 국외
- 내용 : 미국과 일본의 오키나와 반환에 대한 최종 합의는 1971년 6월 9일에 이루어졌으며, 1971년 6월 17일 오키나와반환협정이 조인되었다. 이에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의 전정권이 반환되었고, 오키나와편이 발족되었다.
▶1906 만세보 창간
- 분류 : 문화
- 지역 : 국내
- 내용 : 광무 10년(1906) 손병희(孫秉熙)가 창간한 일간신문. 최초의 완비된 인쇄공장을 병설한 국한문 혼용으로, 나라 걱정과 비정(秕政)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전개, 특히 이인직(李人稙)의 신소설 「혈의 누」를 연재하여 신문소설의 효시를 이루었다. 1907년 경영난으로 이완용이 매수(買收)하여 ''대한신문(大韓新聞)''으로 고치고 , 친일내각의 기관지로 되었다.
6월 17일부터 다음 해 6월 29일까지 293호를 발행한 만세보는 일간지로, 창간에서부터 폐간 때까지 모두 4면 7단으로 발행하였는데, 단지 포덕 48(1907)년 1월 1일 신년호만은 8면으로 발행하였다. 신문의 판형은 한국 초창기 신문들이 주로 타블로이드(Tabloid)였던 데 비해 푸랑케트판(倍大版;가로33.5cm 세로48.5cm)으로 하고, 1면을 7단으로 나누어 1단은 41행, 1행은 14자로 판을 짰다. 신문제호 『萬歲報』는 근대의 최고 전각서예가이기도 한 사장 오세창(吳世昌)이 쓴 것으로 오세창은 만세보의 초대 사장이 되었다.
▶1970 부관 페리호 개통
- 분류 : 사회
- 지역 : 국내
- 내용 : 부관페리는 부산항(釜山港)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항을 페리호로 잇는 국제항로(港路)로, 1970년 6월 17일 부관 페리호 3,800t급 연락선이 승객 403명, 선원44명, 자동차 8대를 싣고 부산항 제2부두에 들어와, 한·일간 바다길이 열리게 되었다.
첫댓글 참 복잡다난햇던 날이었네 다 읽고 나니 ...그래도 돋보기 안쓰고 봤다는거에 박수좀 쳐줘봐 어여!~~~ㅎㅎㅎ
다덜 돋뵈기는 안쓰고 봐~~~~
6월 17일 사건들이 이렇게 많이있었나,,, 오늘은 나중에 어떤일이 기록될까,,,
워터게이터 사건이 벌써 그렇게 오래 됐네 ...그렇게 떠들썩 했었는데.....이완용 매국노인줄 다 알지...
쓰는사람도 잇을지 모를건데 ..ㅊㅣ.........
그럴까? 그럼 지금이라도 짝짝....뭔가 좀 어색하네...
돋보기? 쓰고 보는 사람 없을걸....
쓰진않고 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