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Polis의 역사
시인 최윤희
현대 그리스의 일반현황 그리스는 남유럽 발칸 반도 남쪽 끝에 있는 나라로 정식 명칭은 헬라스 공화국(그리스어: Ελληνικ? Δημοκρατ?α 엘리니키 디모크라티아)이다. 그리스는 그리스어로는 헬라스(Hellas), 라틴어로는 그라이키아(Graecia)이고, 수도는 아테네이며 총 13개 주, 51개의 현으로 구성되며 대다수 국민은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인구의 97%가 그리스 정교회 신자이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겨울(雨期)엔 온난 다습하고 여름(乾期)엔 고온 건조하다. 국토의 4/5는 산지나 구릉으로 되어있어 유럽에서 가장 산지가 많은 나라이며 올림포스 산의 미티카스 봉(2,917m)은 그리스에서 가장 높으며 여러 줄기의 산맥이 주로 남북으로 뻗어 농업에는 적합한 땅은 적다. 이와 같은 자연조건 때문에 포도, 올리브, 무화과 등 과수는 많이 재배되었지만 곡물의 생산은 부족하여 흑해, 이집트 등과 해상교역으로 번영하였다.
그리스 주요 산업은 관광업 등 서비스업이며, 그리스 총 GDP의 15%를 차지하고 총 노동 인구의 16.5%가 직간접적으로 여기에 종사한다. 또한 해운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다. 미국 교통부 교통통계국(BTS)에 따르면, 그리스 소유의 선박은 세계 선박용량(총 141,931,000 dwt)의 18%인 3,079척을 보유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유조선과 드라이 벌크선에서 1위이고, 컨테이너선은 4위, 다른 배 종류도 4위이다.
<올림포스 산>
<고대 그리스 지도>
그리스의 통사
그리스 본토에서는 BC 6000년경부터 신석기 시대를 시작하여 BC 3000년경에 청동기시대로 들어가 소아시아 서북의 트로이와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이른바 <에게문명>이 출현했다. BC 1900년경부터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그리스인(동부 그리스방언군)이 남하하여 미케네 문명이 시작되었다. 이들의 주거(住居) 모양(메가론)으로 보아 서북방에서 그리스 본토로 들어와서 BC 1450년경에는 크레타 섬을 지배하였다. 이들이 크레타섬을 지배할 수가 있었던 것은 말(馬)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라는 설과, BC 1500년경 크레타 섬 북방 100㎞ 지점에 있는 티라섬의 화산폭발로 크레타섬이 쇠퇴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BC 1200년경에 또다른 인도유럽어족인 도리아족이 그리스를 침략했다.
고대 그리스는 암흑시대부터 시작한다. BC 1000년경부터 에게 해를 건너서 소아시아로 이주 및 정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지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아테네(아테네)가 있는 아티카지방에서 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오니아의 북쪽 아이오리스지방에는 본토의 테살리아지방에서, 소아시아 연안에는 도리스계(系)의 사람들이 이주하는 <제1차 식민활동>이 있었다.
씨족공동체(氏族共同體)는 구성원들에게 <클레로스>라는 농경지를 분배하고, 또 이 <클레로스>는 완전히 사유지로 세습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그리스 특유의 Polis(폴리스)가 세워졌다. 암흑시대 동안에는 아테네, 스파르타 등과 같이 왕정(王政)이 남아 있는 곳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왕권이 쇠퇴하고, 전차와 기마를 가진 귀족이 지배했으며 Polis의 성립은 이 귀족의 지배확립과 일치하고 있다.
BC 750경에 암흑시대가 끝나면서 그리스 고전시대가 열린다. 페니키아문자를 개량하여 오늘날의 알파벳의 토대가 된 새 그리스문자가 사용하였다. 이 무렵 그리스 전역에서는 씨족(氏族)이 한 촌락을 형성하여 정주(定住)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BC 5세기에 절정에 달했으나,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을 치른 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를 침략하여 BC 338년에 정복당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 문명을 마케도니아 제국에 전파하고, 로마제국 시대(BC 205∼146년)에도 이 문명을 로마에 전하여 그리스-로마문명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스는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1460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830년에 그리스 독립이 인정되고 1924년에 공화국임을 선포했으나 1935년에 군주제가 부활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내전이 일어나 1949년에 공산주의 세력이 패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73년 군사정권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지만, 같은 해에 전복되어 민주적으로 선출된 민간정부가 정치를 담당하고 있다.
<그리스 아테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그가 투옥되었던 감옥>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 시대 구분
고대 그리스가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났는지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기준 연대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리스인이 발칸반도에 정착한 BC 1100년경~BC 146년까지를 의미한다. 미노스 문명(BC 3650~BC 1170년), 키클라데스 문명(BC 3300~BC 2000년), 미케네 문명(BC 1600~BC 1100년) 등으로 불리는 에게 문명(BC 3650~BC 1100년)이 끝났다. BC 1150년에 몰락한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어를 쓰고 그리스 본토에서 일어났으나, 그리스 고전기(Classical Greece) 문화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미케네 문명을 고대 그리스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헬레네스(?λληνε?, 헬라스사람)>이라고 하며, 본토와 식민 Polis를 통틀어 헬레네스가 사는 곳을 <헬라스(Ελλ??)>라고 하였고, 언어와 종교 등이 다른 이민족을 <바르바로이(β?ρβαροι, barbaroi=오랑캐=야만인)>로 부르며 차별하였다. 그리스 내 Polis간의 경쟁은 치열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이 민족의 침입 등 위기상황에서는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맺고 굳건한 연대의식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는 BC 1100년경 암흑기를 시작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BC 323년까지로 보았는데, 요즘은 BC 146년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할 때까지를 의미하며, 소수 의견으로는 AD 3세기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공인한 시점을 잡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 시대 구분 1. 그리스 암흑기(Greek Dark Ages, BC 1100년경~BC 750년경)는 도기에 기하학적 문양이 기록된 사료가 일부 발견되었지만, 지금 현재 그 당시의 구체적인 역사를 알지 못하여 이 기간을 통상 <그리스 암흑기>로 부른다.
2. 그리스 고졸기(Archaic Greece, BC 750년경~BC 480년경)에는 경직되고 신성한 형태의 커다란 입상 조각품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에는 <고졸기 미소(archaic smile)>가 보인다하여 <그리스 고졸기>라고 부른다.
3. 그리스 고전기(Classical Greece, BC 500년경~BC 323년)는 그리스 문명의 최성기로서 파르테논 신전처럼 모범이며 고전적(classical)인 예술 작품이 생산하는 시기이다.
4.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Hellenistic Greece, BC 323년~BC 146년)는 그리스의 문화가 널리 퍼져 나간 시대이다.
그리스 암흑기(Greek Dark Ages, BC 1100년경~BC 750년경)
에게 문명이 소멸한 후 BC 1100년경부터 BC 8세기까지 약 400년간을 그리스 암흑기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직접적인 1차 문헌 사료는 전혀 남아있지 않으며 고고학 유적과 유물만 일부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BC 800년경에 만든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가 있을 뿐이며, 후대에 이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간접적으로 기록한 2차, 3차 사료인 헤로도토스의 <역사>, 파우사니아스의 <그리스 서술>, 디오도로스 시켈리오테스의 <역사집>, 히에로니무스의 <크로니콘(Chronicon)> 등에서 이 시기의 짤막한 연대기와 임금의 목록을 담고 있지만 여전히 확실하게 알려진 자료가 없기 때문에 암흑기라고 한다.
미케네가 붕괴된 뒤 그리스 본토 여기저기에서 부족 공동체가 나타났으며, 현실적인 생활 단위는 개별 가족으로 구성된 촌락 공동체였다. 그리스의 지형 때문에 각 자치 공동체는 바다나 산맥에 따라 이웃과 단절되어 각 섬과 계곡, 평야에 각자 독자적인 취락을 이루었다.
철기를 사용하는 도리스인이 남하했을 때 청동기를 사용하던 미케네 문명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일부 그리스 사람들은 에게 해의 섬과 소아시아 방면으로 이주하였다. 그리스인들이 이주한 소아시아 해안지대와 인접한 섬들을 이오니아라고 하였는데, 미케네 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있던 이오니아는 오리엔트 문화와도 접촉하기 쉬워서 Polis도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에서 먼저 성립하였다. 또한 그리스는 페니키아 문자를 도입하고 이를 수정하여 그리스 문자를 만들었고, BC 9세기경부터 문자 기록이 등장한다.
Polis 성립 Polis는 BC 9세기경, 그리스 각 지방에 분포한 자급자족적 정치, 경제, 사회의 배타적 기본 생활의 단위로 혈연공동체가 지역단위로 모여서 Polis가 성립되었다. 예전에는 Polis를 <도시국가>로 번역하였으나, 각 Polis는 도시와 그 주변을 아우르는 농촌을 기반으로 하고, 당시의 왕은 사법, 군사, 종교를 관장하였지만 전제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으며, 각 촌락마다 장로회의를 구성하여 주요 정책을 결정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도시국가>라고 하지 않고 <폴리스(Polis)>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외부의 위협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여러 촌락이 지리적, 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에 촌락을 형성한 다음 독립된 Polis를 형성하였다는 <집주설>이 일반적으로 널리 통하고 있다. 대표적인 Polis는 대체로 해안으로부터 멀지 않은 평지에 있었으며 정치, 군사 및 종교의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Polis 유형은 이오니아인 계통이 아테네 등과 같이 아티카 지방에 건설한 상공업과 해군을 중심으로 한 민주적 개방사회를 <아티카형(Attica) Polis>라고 하고, 도리아인 계통이 스파르타 등과 같이 라코니아 지방에 건설한 농업과 육군 중심의 과두제적 왕정사회를 <라코니아형(Laconia) Polis>라고 한다.
Polis의 가장 높은 구릉(산정)에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과 제단을 갖춘 아크로폴리스(?κρ?πολι?, acropolis)를 세우고 비상시에 시민이 대피할 수 있는 방어기지로도 사용하였다. 주거지 중심에는 아고라(αγορ?, agora)라는 광장을 만들었다. 아고라는 본래 병사들이 모이는 집결 장소였으나, 점차 시장과 같은 경제활동의 공간이자 정치적인 집회장소, 점포, 법정과 같은 공공건물 등이 들어선 여론형성의 공간이 되었다. 그리스에는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 사이에 아레오파고스라는 바위 언덕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귀족회의인 아레오파고스 회의가 열렸다.
Polis가 성립할 당시 중심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은 주로 귀족과 수공업자 또는 상인들이었으며, 농민은 촌락에 머물었고 귀족들도 그 근거지를 농촌에 그대로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Polis성립 이전의 공동체적인 성격이 파괴되는 일이 없이 도시 전체가 하나의 시민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전경>
<아레오파고스라는 바위 언덕> <아고라의 스토아>
고대 그리스 종교 고대 그리스의 신화는 인도 신화와 더불어 그 짜임새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신화의 수에 있어서 가장 풍부하다. 고대 그리스 신화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알 수 있듯이 기원전 8세기를 전후로 신들의 계보와 그들을 둘러싼 신화가 거의 틀이 잡힌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신화의 가장 큰 특징은 다신교적 전통과 신인동형사상 및 신탁에 있다. 올림포스의 12신은 일반적으로 제우스(주신 ; 신과 인간의 아버지), 헤라(제우스의 처 ; 결혼과 생산의 신), 포세이돈(제우스의 형 ; 바다의 신), 아폴론(제우스의 동생 ; 태양, 음악, 예언의 신), 헤스티아(제우스의 동생 ; 가정의 여신), 데메테르(제우스의 동생 ; 농업의 신), 아레스(제우스의 아들 ; 군신), 헤파이스토스(제우스의 아들 ; 불과 공예의 신), 아테나(제우스의 딸 ; 전쟁과 평화, 지혜의 여신), 아르테미스(제우스의 딸 ; 수렵과 달의 여신), 아프로디테(미와 사랑의 여신), 헤르메스(신들의 사자 ; 행운과 상업의 신) 등을 말하며, 이외에 에로스, 헤베, 헤카테, 헬리오스, 헤라클레스, 디오니소스1, 이리스, 셀레네, 하데스, 판, 니케 등이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각 Polis별로 그들만의 신을 모시고 살았지만, 델포이 신전은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닌 전 그리스 사람들의 성지이다. 또한 이 모든 신들은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인간처럼 생각으로 산다는 신인동형사상 즉, 인간중심적인 신앙이었다. 그리고 국가나 개인의 중대사를 신에게 묻고 결정하는 다양한 형태의 신탁이 있었다. 그러나 신의 대답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그리스 사람들이 했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델포이 성전 전경>
<델포이 아테나 신전>
<델포이 아폴론 신전>
Polis 정치체제 BC 800년을 전후하여 호메로스 시대의 왕들은 사라지거나,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존재로 전락하여 정치권력은 귀족에게 넘어갔다. 종교적 기능을 가진 세습적인 왕(basileus)은 평화 시에는 권한이나 의무를 거의 없었고, 씨족 대표로 구성된 원로회의(gerousia)의 자문을 받아 국정을 운영하였다.
정치는 왕정이었으나 왕권은 미약했고 토지 소유도 미케네와 달리 공유지와 이에 따른 공동체적 규제가 없고, 촌락공동체의 성원은 저마다 클레로스(κλ?ρο?, 분배지)를 소유하여 경제적 독립성이 강하였다. 평민은 대부분 클레로스를 소유한 농민이고 약간의 수공업자와 상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성년 남자는 자부담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국방의 의무를 담당하였으며, 왕이 주재하는 시민 전체의 모임인 민회(ekkesia)에 참석할 권리가 있었다. 민회에서는 왕의 제안을 토의, 인준, 거부, 선전포고 등 국가 주요정책을 결정하였다.
수많은 노예와 여러 대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 자유인과 외국인(metic)도 완전한 의미의 시민은 아니었고, 오직 Polis를 형성하는 데 참여한 부족의 성원 내지 그 후손만이 완전한 시민이었다. 즉 Polis는 종교적ㆍ경제적 유대로 결합하고 법에 따라 규제되며, 완전한 독립성과 주권을 가진 시민 공동체로 볼 수 있다.
노예(helotes)는 BC 8세기경 호메로스 시대부터 존재하였다. 처음에는 많은 노예 노동을 시킬 정도로 경제적 요구가 없어서 노예 수도 극히 적었고, 대부분 가내 노예였다. 그러나 농업이 확대되고 상공업과 화폐경제 발달로 노예제도는 조직적으로 발달하여 노예의 수요도 증가하였다. 특히, 숙련공이 거의 없던 그리스에 해외 식민지로부터 금속세공 기술자, 도공, 직공 등이 노예 신분으로 들어와 영리활동에 종사하였다.
올림피아 제전 고대 그리스는 운동 경기를 중요시 하였다. BC 776년경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제1회 대회가 개최한 것으로 추정되며, BC 6세기부터 범 그리스 제전으로 확대되었다. 개최지는 4개의 Polis(올림피아, 델피, 코린트, 메네아)에서 각 4년마다 개최되어 결국 매년 개최되는 셈이었다. 올림피아 경기는 제우스 신전 근처의 평원에서 여름의 마지막 만월 무렵에 개최되었으며 이 기간을 올림피아드라고 한다.
올림피아드는 통상 5일정도이다. 1일째는 선수 자격심사 및 제의 행사를 치루고, 2일째에는 마차, 경마, 5종(멀리 뛰기, 달리기,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레슬링) 경기, 3일째는 제의행사 및 소년들의 경기, 4일째는 경주, 권투, 레슬링, 5일째는 우승자 시상을 하였다.
모든 그리스 Polis에서는 임원과 선수를 파견하였다. 올림피아 경기가 진행될 때는 각 국가간의 전쟁과 분쟁도 정지하고 만약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많은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경기 종목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달리기였고 그후 5종 경기가 더해졌다. 경마나 전차 경기가 추가된 것은 BC 7세기 중엽이 부터였다.
경기 참가자는 모두 남성뿐이었다. 경기 관람도 여신관을 제외하고는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경기의 승리자에게는 제우스 신전 가까이에 자라고 있는 야생의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이 주어 졌다. 로마 제국 시대에도 올림픽 경기는 계속해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그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이교의 신인 제우스의 제사가 금지되었고 경기 대회도 AD 393년에 금지되었다.
<고대 올림픽이 열리던 델포이 피티아대회 경기장>
<델포이 야외극장>
<디오니소스 극장>
그리스 철학과 문학 : 상당한 분량이므로 추후 별도 제작(예정)
그리스 고졸기(Archaic Greece, BC 750년경~BC 480년경)
스파르타 도리스인이 Laconia 지방으로 남하하여 정복하는 과정에서 엄격한 신분의 분화가 생긴다. 스파르타의 신분제는 군사 및 농업생산의 의무를 지닌 <호모이오이(Homoioi, 자유민)>라는 시민계급, 정복전쟁 과정에서 종속적인 지위를 감수한 원주민은 자유로운 신분으로 상공업 종사하였지만 참정권이 없는 <페리오이코이(Perioikoi, 반예속인)>, 처음부터 예속신분이었거나 끝끝내 저항한 사람들은 <헤일로타이(Heilotai, 예속인=노예)>라고 하였다.
스파르타의 인구 구성은 시민 3~10% , 페리오이코이 10~20%, 헤일로타이 약 70~80%를 차지하였으며, 헤일로타이는 대부분 농업 노예였다. 시민은 평생을 군사조직에 속해 있었으므로 국가는 시민 모두에게 클레로스(Clores)라는 토지와 헤일로타이(노예)를 할당받아서 경제적인 부담 없이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였다.
스파르타는 BC 10세기경부터 메세니아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정복하면서 성장하였고 아르고스와 경쟁관계를 형성하였다. BC 8세기 중후반 스파르타는 메세니아를 정복하고 주민을 노예(헤일로타이)로 삼았는데, 이러한 사건은 고대 그리스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메세니아 전쟁 뒤 스파르타는 예속민의 토지를 시민에게 평등하게 분배하였다. 그 대신 스파르타 시민은 병역의무를 지면서 늘 전쟁에 대비하였다. 상류층도 병역의무와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으므로, 부자와 빈민이 모두 평등하여 시민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에는 두 사람의 왕이 있었으나 권력의 실권은 없고 두 왕을 포함하여 30명의 유명 가문 출신으로 구성된 원로원은 국정의 중요 안건을 마련하지만 이 또한 민회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스파르타의 민회는 30세 이상의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왕이나 원로원에서 제출된 안건의 인준 또는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제한된 참정권이 있었다.
BC 6세기경부터는 최고 행정권자로 임기 1년의 에포르(?φορο?, ephor, 집정관)를 선출하여 왕 및 여러 귀족들을 감시하고 민회 및 원로원을 운영하였으며 스파르타 특유의 생활양식의 준수 여부를 감시하였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정치구조는 왕정과 귀족정치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성년 남자 전원이 클레로스를 가진 동등한 시민으로서 중장보병의 의무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한적인 민주정의 성격도 있다.
스파르타의 시민 계급은 전체 인구의 5~10%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언제나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파르타는 쇄국주의와 군국주의를 채택하였으며, 시민 생활을 전시체제처럼 조직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타의 교육은 전사를 육성하는 군사교육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시민계급의 아동은 개인의 자녀가 아닌 국가의 소유물로 간주되었다. 특히,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5명의 검사관들이 <레스케(Leskhe)> 에서 정밀한 검사를 한 다음 골격이 이상하거나 기형 또는 지나치게 작게 태어나면 타이게투스 산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7살 이전까지의 사내아이는 아버지에게 기초적인 체력훈련과 기본적인 검출을 배우고, 어머니에게는 시민으로서의 소양과 기초지식을 교육을 받았다. 7세~20세까지 14년간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군사교육학교인 <아고게(Agoge)>에서 강제 입소하여 창술, 방패술, 방진, 검술, 박투, 레슬링 등의 다양한 군사훈련과 수학, 문학, 철학 등의 교육을 받았다. 14세 이후에는 하루에 한 끼는 자신이 해결했는데, 대부분 마을로 내려가서 음식을 훔쳐 먹었고, 18세가 되면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했다. 또한 <아고게(Agoge)>의 졸업시험으로는 산에 홀로 올라가 늑대나 멧돼지 등을 잡아와야 했었다.
20세에 <아고게(Agoge)>를 졸업하고 입대하여 24살에 정식 군인이 되었으며, 30세까지 군대에 복무하였다. 제대 이후에 비로소 시민권이 부여되지만 60세까지 병역의무를 지고 출퇴근 형식으로 국방을 담당하였다. 즉 그 당시 평균수명을 감안할 때 평생을 군대에 복무한 것이다.
이러한 스파르타 시민에게는 개인적인 사생활이 없었고, 오직 훌륭한 전사가 되는 게 인생의 목적이었고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은 저조하였다. 일상용품의 생산과 상업은 페리오이코이가 부담하였고, 화폐는 사용하기 불편한 쇠로 제작되었으며.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대외 무역은 가급적 억제하였다.
<스파르타 중보병>
아테네 아테네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최초로 실현하였다. 아테네는 왕정 ? 귀족정 ? 참주정 ? 민주정으로 발전하였다. 귀족정치의 중심은 최고 행정권자인 집정관(?ρχων, 아르콘)과 아레오파고스(?ρει?παγο?) 회의였다. 귀족정제는 처음에는 군사, 종교, 민사를 각각 담당하는 3명으로 구성되었으나, 그 이후 왕(1명), 최고 행정권자인 아르콘(집정관 1명), 군 지휘관(1명), 사법관(6명) 등 9명으로 증가하였다. 왕은 종교를 담당하고, 나머지는 임기가 끝나면 자동적으로 아레오파고스 의원이 되었다. 아레오파고스 회의는 부유한 명문출신의 귀족들로 구성되며 귀족 지배의 가장 핵심기관이었다. 일반시민으로 구성되는 민회가 있고, 집정관도 여기서 선출되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귀족들은 신이나 영웅 또는 왕의 후예들임을 자랑하는 가장 유력한 씨족들의 출신으로 평민보다 많은 토지와 가축을 소유하고, Polis 방위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 시대에는 중무장을 한 1대1의 전투 방식이 있었고 말의 사육이나 중무장에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귀족이 Polis 국방의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다. BC 8세기경, 전쟁에서 기병의 역할이 중시되어 말을 키우는 사람들의 발언권 또한 커졌다. 토지를 집중적으로 소유하게 된 <귀족(arostoi)>들이 정권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대부분의 Polis는 왕정을 폐지하고 귀족과두제로 바뀌었다. 소수 귀족이 관리로 선출되어 국가 최고행정권을 집행하면서 국가의 중요정책을 결정하고였다. 여성은 남성과는 다르게 참정권, 재산소유권 등이 없는 가부장적 질서에 종속된 남성의 피후견인 신분이었다. 거류 외국인은 시민권이 없는 자유인 신분이었다.
BC 7세기 초에 상인 계급이 성장하였다. 상인 계급이 떠오르면서 각 Polis를 지배하던 귀족 정권들은 새로이 부를 얻어 성장하여 정치적 권력을 얻고자 하던 상인들의 위협을 받았다. BC 7세기 후반 토지와 농업위기를 겪어 내분에 빠졌고 BC 7세기 말에는 평민이 아테네의 귀족에게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BC 7~6세기에는 귀족 중심의 1대1식 전투 대신에 중층시민(中層市民)인 중장보병(重裝步兵)의 밀집전대전투(密集戰隊戰鬪)가 전술상 중요해졌다. 이 결과 전쟁에 참여하는 시민의 권리 요구가 격심해지자, BC 621년 귀족에게 유리하게 만든 <드라콘법(Dracon)>이라는 그리스 최초의 성문법이 제정되었다.
BC 594년 솔론(Solon)은 빈부격차 해소를 위하여 시민의 부채를 탕감하고, 부채 때문에 노예가 된 자유민을 해방하였으며 상공업을 장려 및 개인별 토지소유 상한제를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시민을 재산에 따라 4계층으로 구분하고 정치참여의 비중을 다르게 구분하였다. 그리고 아테네의 대표적인 4개의 씨족에서 100명씩 골라서 400인회를 창설하여 민회에서 배심원제를 확립했다.
이러한 솔론의 개혁은 종래의 귀족지배를 존속시키면서, 당면한 긴급한 문제를 우선 해결하고, 하층시민에게도 불완전하나마나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솔론의 개혁은 정치적으로는 재산에 따라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금권정치(plutocracy)와 경제적으로는 토지재분배에 실패하였다. 이 결과 부유층뿐만 아니라 하층민에게도 불만 요인이 되어 솔론의 은퇴 이후에는 정치적 파벌싸움이 확대되었다.
<참주 (僭主: 티라노스, Ty-rannos)>는 그리스어로 ‘적법하지 않은 통치자’에서 나온 말로, 선하건 악하건 구분 없이 쓰였다. BC 660년경~BC 500년경까지를 <전기 참주시대>라고 하며, 참주의 배후에는 리디아와 페르시아 등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리스를 지배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자를 참주로 삼았다.
피시스트라토스(Peisistratus)는 솔론의 정책을 계승하며 평민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평민의 지지를 받아서 참주가 되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 문화를 보호하고 장려하기 위하여 국가 주도로 희곡을 중심으로 문학 콘테스트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참주들은 상공업과 무역을 증진하고 토지 재분배 및 토목공사 등 선정을 베풀어 빈민층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참주제는 Polis 전 구성원을 모두 만족시키는 제도는 되지 못하였다. 아테네의 피시스트라토스처럼 상공업과 문화를 발전시켜 후세에 <황금시대>로 불리게 된 자도 있으나 대부분의 참주는 실정에 빠져서 2대 이상은 지속되지 못하고 또한 이들의 권력 붕괴는 중장보병시민의 민주정으로 이행해 갔다.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는 아테네의 귀족 가문인 알크마이온 출신으로 BC 510년 히피아스를 몰아내고 참주정을 확립하였다. 특히 BC 508년에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추진하여 아테네 민주정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아테네를 3개(해안, 내륙, 도심) 지역으로 구분 후 각각 10개씩으로 쪼개어(총 30개), 각 지역단위로 50명(해안1+내륙1+도심1=50명)을 할당하여 <500인회(에클레시아)>라는 정치적 협의체를 창설하였다. 500인회에서는 민회에서 결정할 안견을 마련하고 재정관리 및 행정관 선거의 감독 등을 담당했다. 또한 참주 등 1인 독재자 출현을 막기 위하여 시민들이 도자기 조각에다가 추방 대상자의 이름을 적어서, 가장 많이 적힌 사람을 아테네에서 추방하는 <도편추방제>를 실시하였다.
페리클레스(Perikles)는 평의회, 민중재판소, 민회에 실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출하여 무산 시민의 지지를 받아서 아테네의 민주정을 완성시켰다. 과거 무보수 추첨제로 운영되던 아테네의 공직자를 수당제로 변경하여 급료를 지급하고, 시민권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민회에 배심원제를 도입하여 사법 민주주의를 실현하였다. 외교상으로는 강국과는 평화를 유지했고 델로스 동맹의 지배를 강화하였다. 또한 문화적인 측면에서 파라이오스(Piraios) 항을 축조하고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되었던 아테나 연신을 모시는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중반에 그리스는 오스만 트루크 지배하에 있었고 베네치아와 전쟁하는 과정 파르테논 신전이 다시 파괴되었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오늘날과 비교하여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시민권이 있는 성인 남성들이 직접 민주정을 실현하였으나, 여성, 거류 외국인과 계급이 낮은 사람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었다. 또한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는 극히 제한적인 민주정이며, 직적 민주정에 따른 우민정치의 위험성이 있었다.
폴리스의 식민활동
BC 750~BC 550년경까지 약 200년간은 그리스의 해외 식민 Polis 건설이 활발했던 때로 <제2차 식민활동의 시대>라고 부른다. 식민 Polis 건설 목적은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대규모 과수재배 등 귀족을 중심으로 소수자에게 클레로스(농경지)가 집중되어 영세농이 늘어나고 노예로 전락하는 등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져서 새로운 경작지가 필요했다. 또한 귀족지배체제에 대한 불만 세력과 귀족간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자들이 해외로 이주하여 농업과 상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식민 Polis를 건설하였다.
식민 Polis는 무역정류장과 농경지 확보를 위한 대규모 정착지로 건설되었으며, 본토의 그 어떤 Polis에도 예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모시(母市)의 지역의 방언, 정치제도, 관직명, 종교 등을 거의 그대로 따랐으며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긴밀한 유대관계를 성립하게 된다.
BC 7세기 초 소아시아의 리디아(Lydia)왕국에서 화폐의 주조와 유통이 전해지자, 소아시아 지역의 Polis를 통하여 그리스 본토에도 전해졌다. 상공업의 발달은 더욱 촉진되었다. 화폐경제에 입각한 상공업의 발달은 농업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경지(耕地)는 소수자에의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그마그나 그라이키아(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고대 아나톨리아(Anatolia=소아시아=Asia Minor), 갈리아 남부와 에스파냐 해안까지 식민 Polis가 건설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마실리아(마르세유),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이탈리아의 니아폴리스(나폴리), 비잔티움(이스탄불) 등이 대표적인 식민 Polis이다. 다만 동부 지중해 연안은 아시리아와 페니키아인의 세력이 강하였고, 아프리카 북부해안의 서부도 카르타고인의 세력범위였기 때문에 그리스인은 진출할 수가 없었다.
고전기에는 본토에만 Polis 수가 200개가 넘었고, 해외 식민 Polis까지 합치면 1,000개가 넘었으나 각 도시의 그 넓이는 그리 넓지 않았다. 식민 Polis 건설 초기에는 원주민에게 환영받았지만 차츰 그들의 저항이 심해지고 또한 페니키아 해군이 페르시아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그리스 함선(艦船)의 항행을 위협하게 되자 식민 활동은 끝났다.
그리스 고전기(Classical Greece, BC 500년경~BC 323년)
그리스 고전기의 Polis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Polis 인구는 적게는 수백 명~20만 명, 평균 약 5천 명 정도이고 거의 모든 Polis는 인구 2만이 넘지 않는 소규모이다. 아테네의 전성기에는 아티카 지방의 인구가 35만이며, 2만이 넘는 곳은 시라쿠사이(남이탈리아), 아크라가스(시칠리아), 아테네 등 3개뿐이었다.
BC 6세기경 이오니아 지역(=터키)이 식민 Polis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대하여 조세 정항이 있었고 BC 499년 이오니아 그리스 Polis인 밀레토스에서 반페르시아 반란이 일어났다. 앞으로의 반란 예방 및 보복을 위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BC 521~BC 486년)는 그리스 정복을 위하여 BC 490년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을 시작한다. 그리스의 핵심 Polis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군사동맹을 맺었으나, 스파르타는 참전하지 않고 아테네가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10년 후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BC 486~BC 466년)가 육로로 침략하여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이 재발하였다. BC 480년 페르시아의 왕 크레스크세스(Xerxes)는 육군 16만 명과 해군 1,200척의 함선을 이끌고 육로와 바다로 동시에 침략하는 제3차 그리스 원정을 단행했다.
이에 그리스는 연합군을 형성하여, 육지에서는 스파르타 7,000명의 보병으로 그리스로 향하는 길목이자 협곡인 ‘테르모필레’에서 맞서 싸우고, 바다에서는 그리스의 3단 노함선의 우위를 바탕으로 페르시아군에 대항할 계획을 수립했다.
협곡에 소규모 정예부대를 배치함으로써 페르시아군의 진격을 저지하였으나, 이후 페르시아 부대가 샛길로 빠져나가자 스파르타 1,000명의 병력 중에서 후대를 위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웠으나 전멸하였다. 이 전투에 승리한 페르시아는 파죽지세로 그리스를 점령하고 아테네로 향하였다.
<스파르타 중보병>
아테네 시민이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신에게 물어 봄)한 결과 ‘이제 아테네는 끝났다, 그나마 살기 위해서는 나무 뒤에 숨어라’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 결과 아테네 시민들은 아테네를 모두 비우고 모든 주민이 살라미스 섬으로 이주하여 해전을 유도하였다. 페르시아는 살라미스 해전(BC 480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BC 479년)에서 또다시 아테네에게 패퇴하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로 마케도니아, 트라케, 에게 해 제도, 이오니아가 모두 페르시아의 영향권에서 해방되었다.
페르시아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총 지휘는 스파르타가 하였는데, 이 전쟁 결과 스파르타는 신망을 잃고 페르시아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막아낸 아테네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의 재침을 막기 위하여 델로스(Delos) 동맹을 맺었다. 델로스(Delos)라는 섬에 동맹의 공동자금을 비축하고 이를 통하여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해군력을 증강시켰다. 그 후 BC 454년에 이 공동자금 금고를 아테네로 옮겨 보관하면서 부터, 아테네가 여러 동맹 Polis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델포이 아테나 보물창고>
아테네가 이룩한 해상의 패권은 동맹 Polis의 내정간섭은 물론 사법권 및 화폐주주권을 박탈하고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또한 아테네는 이러한 내정간섭과 아테네-Argon간의 동맹으로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연맹을 위협하였다. 코린토스와 메가라 사이의 국경분쟁을 빌미로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BC 404년)이 일어나 27년간 지속되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공격하고, 아테네는 순식간에 Polis에 갇혀 수성 작전으로 배수의 진을 치는데, 이 과정에서 아테네는 3차례나 전염병에 걸려 인구의 1/3이 죽었다. 아테네의 페리클레스(BC 495~BC 429년)가 아테네의 최전성기(BC 448~BC 429년)를 이끌었지만, 페르시아와 동맹을 체결한 스파르다가 BC 413년 전쟁을 재개하고, BC 404년 아에고스타모스(Aegostamos)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하여, 그 이듬해에 아테네는 무조건 항복하여 아테네의 성벽이 헐리고 함대와 모든 해외 영토를 잃었다.
그 이후 스파르타의 패권에 도전하는 코린토스와 전쟁(BC 395~BC 387년)이 일어났다 또 다시 스파르타가 승리하였다. 그러나 BC 371년 스파르타는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에 패배하여 스파르타에 종속되었던 Polis가 해방되었으며, 스파르타는 영토와 예속민을 잃은 2류 국가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BC 362년 만티네아 전투에서 테베가 승리하였으나 병력 상당수를 잃고 최고 지도자 에파미논다스가 전사하면서 테베도 단명하였다. 이로서 BC 4세기의 지속적인 내전으로 그리스는 전반적으로 약화되었고 BC 360년경부터는 외부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Hellenistic Greece, BC 323년~BC 146년)
아테네가 최전성기를 구가하다가 펠로폰네소스전쟁 이후 고대 그리스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이 전쟁의 결과 아테네를 제압한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는 스파르타 쇠망(衰亡)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여러 Polis를 지배해야 했기 때문에 쇄국책(鎖國策)을 강행할 수 없었고 화폐경제를 부정하는 자급자족경제가 불가능해졌다. 또한 스파르타는 여러 Polis에서 시행되었던 민주정을 폐지하고 스파르타식 귀족 과두정(寡頭政)을 강제했기 때문에 여러 Polis로부터 반발을 자초하였다.
결국 테베, 아테네, 코린토스, 아르고스가 동맹하여 코린토스 전쟁을 일으켜서 스파르타에 저항하였으나,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힘을 빌어서 전쟁을 종결시켰다. 그 후 테베는 민주화를 추진하고 새로운 사진전법(斜陣戰法)을 고안하여 강국이 되었으며, BC 371년 레우크트라 싸움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고 패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 후 전 그리스를 지배할 수 있는 강력한 Polis가 나타나지 않고 서로 대립과 항쟁하는 동안 북방에서는 마케도니아가 성장하였다. BC 359년 즉위한 필립포스 2세는 중앙집권을 실현하고 테베로부터 배운 전술을 개량해 먼저 트라키아를, 이어서 중부 그리스를 정복하고, BC 338년 카이로네이아에서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군을 격파하여 전 그리스의 패권을 잡았다.
<고린도(코린토스) 운하>
그리스 Polis가 모두 약해져있던 시기에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부상하였다. 20년 뒤 필리포스는 자신의 왕국을 통합한 다음 북쪽과 서쪽으로 영토를 넓히고 테살리아와 트라케를 정복하였다. 필리포스는 카이로네아 전투(BC 338년)에서 테베와 아테네 연합군을 격파하고 사실상 그리스 전역의 패자로 올라섰다. 그는 대다수 Polis들을 코린토스 연맹에 가입하도록 강요하고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은 후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하였으나 개전 초기에 자신의 경호원이었던 오레스티스의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되었다.
필리포스가 죽자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BC 334년에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BC 330년에 페르시아제국을 멸망시킨 뒤 인도까지 진격하여 유럽에서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BC 323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급사하여, 제국은 다시 셋으로 분할되고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왕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 후 중부 그리스의 Polis가 중심이 되어 <아이톨리아동맹>을, 펠로폰네소스의 Polis가 중심이 되어 <아카이아동맹>을 결성하여 서로 연합해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 시대에 각 Polis가 변화 및 쇠퇴해 가는 상세한 상황은 명확하지 않다.
헬레니즘 시대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부터 로마가 그리스를 지배하는 시기이다. 마케도니아(Μακεδον?α)는 그리스어로 '높은 것', '고지 사람'을 뜻하며, 그리스 반도의 최북방에 있던 고대 왕국으로 서쪽으로 에페이로스, 북쪽으로 파이오니아, 동쪽으로 트라케(트라키아), 남쪽으로 테살리아 지방과 접하였다. 헬레니즘 시대는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이 끝난 시점부터 시작하여 BC 146년 로마가 그리스를 병합하면서 끝났다. 로마 제국은 헬레니즘 사회와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계속 존속케 하였으며 그리스도교가 발흥하기 전까지 본질상 변화가 없었으나, 그리스의 정치적 독립은 이때부터 종식된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전쟁(BC 218∼BC 201년)에서 한니발의 침략을 물리친 후 마케도니아와 싸워서 이겼다. BC 196년 그리스를 마케도니아의 지배로부터 해방한다고 선언하고 제3차 포에니전쟁(BC 149∼BC 146년)이 끝날 무렵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었고 남부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속주 장관의 감시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 Polis의 자치독립도 완전히 잃고 만다. BC 27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는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아카이아주(州)>라는 이름으로 속주로 삼았다.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그리스에서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을 배웠고, 그리스에서 유학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고대 동방의 문화유산을 계승하고 고도의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신화와 종교보다 우주와 인간의 위상을 더 중요시 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 역사자료 해설
1. 그리스의 신 태초에 흙과 물, 그리고 하늘이 혼돈 상태에 있다가 얼마 후에 이 혼돈 가운데 게오 여신(흙의 신)과 우란 신(하늘의 신)이 등장하였다. 게오와 우란 두 신 사이에 거인이 탄생했는데, 우란 신은 거인 아들이 자기 권력을 탈취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깊은 지하 연못에 처박아 버렸다. 그런데 그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인 크로노스가 거인을 구출하였다. 덕분에 크로노스는 거인의 도움으로 권력을 탈취하여 세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크로노스 신도 격렬한 싸움 끝에 결국 막내아들 제우스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 제우스와 그를 보좌하는 많은 신들이 올림피아 산 위(텟살리아)에 산다고 하여 그리스인들은 그 신들을 올림피오스라고 불렀다. 제우스는 크로노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을 자신과 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가졌다. 제우스 자신은 번개 불의 신으로서 아내 헤라와 함께 하늘을 관장하였다. 동생 포세이돈에게는 바다를 위임하고 또 다른 동생 하데스에게는 사자(死者)의 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아폴로는 빛의 신, 시의 신이 되어 학문과 예술의 수호신인 9명의 정령을 그 권력하에 두었다. 절름발이 헤페스트는 불과 대장간의 신, 아프로디테는 미의 신, 아레스는 전쟁의 신, 아테네는 지혜의 여신이었다. 인간의 경제 활동의 각 부문에도 각각의 수호신이 있었는데, 데메트르는 농경을 수호하는 신이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의 신, 아테네는 베틀의 신, 헤르메스는 교통과 상업의 신, 아르데미다는 사냥의 신이었다. 그리스 각 지방에는 삼림, 초원, 강, 산 등에 사는 씨족 신이 따로 있었다. 그리스인은 신들이 불사의 존재로서 전능한 능력을 지녔으나, 신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운명에 지배 받기 때문에 불운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인은 숙명을 모이라라고 불렀는데 어느 누구도 숙명(모이라)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모이라는 인간과 신의 생활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2.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에게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다 주고 불의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제우스는 노하여 프로메테우스를 멀리 카프카즈로 유배를 보내어 그를 절벽의 바위에 쇠고랑으로 채운 다음, 매일 매로 하여금 간을 쪼아먹게 하였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용감하게 모든 고통을 찾아내면서 제우스에 굴복하지 않았다. 인간이 불을 사용하게 되자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뿐만 아니라 인간도 엄벌에 처했다. 제우스는 온갖 고통과 불행을 금제 상자에 담아 이것을 미인 판도라의 손에 넘겨주었다. 판도라는 미인이었을 뿐 아니라 호기심이 매우 많은 여자였기 때문에 금제 상자를 보고 잽싸게 열어 보았다. 판도라가 금제 상자를 열자마자, 상자 가운데 있던 온갖 고통과 불행이 빠져 나와 빠른 속도로 인간 세상을 뒤덮고 말았다.
3. 헤라클레스 그리스인의 화제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영웅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헤라클레스였다. 그리스 신화 가운데 나오는 헤라클레스는 대중의 진정한 영웅이자 남아다운 수난자였다. 헤라클레스는 네메아 시(아르 고리스)의 주민을 공포에 떨게 하고 그들의 가축을 먹어치우는 사자를 때려죽이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을 물리치기도 했다. 또 그는 구리발톱과 부리를 한 괴상한 새도 물리쳤는데, 이 새는 제우스에 의해 바위에 묶여 있던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먹던 새로서 헤라클레스는 그 새를 죽임으로써 인간을 위해 수난 당하던 신을 구출해 주었다. 한편 헤라클레스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가로막고 있는 암벽을 깨서, 하나는 스페인 쪽으로 던지고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 쪽으로 던졌다. 이로 인해 생긴 두 개 의 커다란 암벽을 그리스인은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명명했다. (오늘날의 지브로올터 해협) 안티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흙의 신 게오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안티우스가 적과 싸워 지게 될 경우 대지에 입맞춤하면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새로운 힘을 공급받아 원기를 회복했다. 그리하여 자기 나라에 들어오는 어떤 이방인도 물리쳤는데, 안티우스의 약점은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떠나 있으면 힘이 약화되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이 점을 간파하여 안티우스를 대지에서 떨어지게 유인하여 공중에서 싸웠는데, 마침내 그의 숨통을 조일 수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이처럼 많은 위엄을 달성함으로써 마침내 제우스에 의해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
4. 오이디푸스 앗키타 지방 보에오티아의 라이아 왕의 아들 오이디푸스는 자기 부모의 곁을 떠나 다른 사람에게 양육 되어 부모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보에오티아의 테베로 가는 도중 한 노인을 만났는데 서로 길을 양 보하지 않아 싸움이 벌어졌는데 오이디푸스는 노인과 그의 종자를 죽였다. 그 중 한 명의 종자가 겨우 살아 도망쳤다. 오이디푸스는 이 노인이 자기 아버지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테베 시 근교의 바 위산에 반신은 사자이고 반신은 여자인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살고 있었다. 스핑크스는 통행인에게 수수 께끼를 내어 그것을 풀지 못하는 사람을 죽였다. 오이디푸스가 그 곳을 지날 때 스핑크스는 다음과 같 은 수수께끼를 냈다.『아침에는 네 발로, 낮에는 두 발로, 밤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이냐?』라고 묻자 오이디푸스는 『그것은 인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려서는 기고, 성장하여서는 걷는데, 늙어서는 지팡이를 쓴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스핑크스는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죽어 버렸다. 이제 편안 하게 살 수 있게 된 시민들은 오이디푸스를 라이아의 뒤를 이어 왕으로 추대했다. 라이아 왕은 강도에 게 살해되었다고 시민들은 생각하였으며, 라이아왕의 미망인 유카스트 즉, 오이디푸스의 어머니가 오이 디푸스의 아내로 되었다. 오이디푸스가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테베 사람들이 무서운 병에 걸려 죽 어 갔다. 신은 테베 시민에게, 라이아 왕의 피로 손을 더럽힌 자를 추방하지 않는 한 이러한 재앙은 그 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때 라이아 왕과 길에서 만난 오이디푸스와의 싸움에서 간신히 도망쳐 온 종자가 오이디푸스에게 라이아 왕을 살해한 사람은 당신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오이디푸스는 너무나 도 큰 충격을 받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 버리고 말았다.
5. 데세이 에게이 왕의 아들 데세이는 앗티카 제일의 용사로 인정받고 있었다. 데세이는 앗티카의 흉악한 강도 프로크르스트를 살해했다. 프로크르스트는 길가는 나그네를 불러다가 진수성찬으로 대접한 뒤 침대에서 쉬라고 권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나그네의 발이 침대보다 길거나 짧으면 침대에 맞춰 나그네의 발을 자르거나 잡아당겨 늘렸다. 이 침대를 <프로크르스트의 침대>라 부른다. 데세이는 프로크르스트를 살해하여 그 침대에 가로로 눕혀 놓았는데, 그 침대가 프로크르스트에게는 너무 짧았다. 데세이의 제일의 위업은 크레타의 미노스 왕에게 가혹한 공물을 바쳐야 했던 자기 나라 사람들을 그 의무로부터 해방시켜 준 일이었다. 9년마다 7명의 소녀와 7명의 소년을 미노스 왕에게 공물로 바쳐야 했는데, 이 소년 소녀들은 사람의 몸에 소의 얼굴을 한 괴물 미노다우르의 먹이로 바쳐졌다. 이 위업의 어려움은 괴물을 퇴치 하는 것보다 오히려 미궁을 빠져 나오는 일이었다. 그런데 미노스의 왕녀 아리아도나가 데세이를 흠모 하여 그에게 실 꾸러미를 주었다. 데세이는 그 실 끝을 미궁 입구에 매어놓고 실을 풀면서 미궁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미노다우르를 살해한 다음 실을 따라 무사히 미궁을 빠져 나왔다. 이 일을 위해 떠나 던 날, 데세이는 부친 에게이 왕과 이별하면서 만약 무사히 일을 마치면 하얀 돛을 단 배를 타고 돌아 올 것이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검은 돛을 단 배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데세이는 일의 성공으로 정신없이 기뻐하다가 아버지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타고 왔던 검은 돛을 단 배 그대로 고국으로 되돌아갔다. 매일 밤 바닷가에서 배를 기다리던 아버지 에게이 왕은 검은 돛을 보고 데세이가 죽은 걸로 단정을 내렸다. 에게이 왕은 심히 낙심하여 바다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그 이후부터 이 바다를 에게 해라고 불렀다고 한다.
6. 에게 문명(Aegean Civilization) 그리스 문명이 성립되기 이전에 에게 바다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던 청동기 문명으로 크레타 문명, 미케네 문명, 트로이 문명으로 나누어진다. 에게 해의 북쪽을 제외한, 로도스 섬, 키프로스 섬으로부터 레반토 지방에도 미쳐 동부 지중해 해역에 퍼진 사상 최초의 해양 문명이며 유럽 지역에 일어난 최초의 문명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걸쳐 독일의 슐레이만과 영국의 에반스 등의 발굴에 의하여 그 실체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 문명은 에게 해 지역의 올리브, 포도 재배와 그 제품인 기름과 술의 해상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더불어 오리엔트의 선진 문명과의 접촉의 결과로 이룩되었다. 이리하여 B.C. 3000년경부터 독자적인 청동 문명이 일어났는데, 에게 문명에는 크레타, 미케네, 트로이, 키클라데스, 헬 라딕(그 후기가 미케네 문명), 텟살리아의 여러 문명이 있으며, 점차 상호 밀착, 통합되어 갔다. B.C. 2000년경부터 크레타 문명이 동 지중해 해역의 주도자가 되었고 이어서 미케네 문명이 전지역을 통일하게 되었다. 미케네 문명은 철기를 가지고 남하한 그리스인인 도리아 인에게 멸망하였으며 이후 폴리스 중심의 그리스 문명이 나오게 된다.
7. 크레타 문명(Creta Culture) 에게 문명의 전기 문명으로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한다. 크레타 섬은 동부 지중해의 중심에 있으며 면적은 약 8,620km이다. 섬의 중부가 특히 번성하여 크놋소스, 파이스토스, 말리아에 초기의 궁전이 세워 졌고 벽화와 화려한 채색 도기가 출현하였다. 후기가 되자 크놋소스 왕이 섬 전체를 통일하여 전설상의 미노스 왕의 해상 왕국이 성립되고 크레타 문명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크놋소스는 세계 제 1의 도시가 되어 궁전은 그 장려함을 자랑하게 되고 동부의 여러 항구도 번영하게 되었다. 그 교역권은 이집트, 레반트, 그리스에 이르고 이전의 그림 문자로부터 선문자 A가 발전되었다. 국왕은 신성하며 신관 또는 상인 왕으로서 활약하였다. 궁전은 많은 작은 방으로 이루어진 여러 층의 건물로, 안뜰이 있었으며 그 장식은 꽃, 새, 물고기 그림과 궁정 생활을 나타내는 벽화로 크레타 인이 회화에 상당한 수준을 가졌음을 짐작케 한다. 도자기는 형체가 아름다웠고 화초와 바다 동물의 무늬가 있었다. 모든 미술이 자연주의적이고 밝고 경쾌한 양식으로 되어 있었다. 신앙은 자연 숭배, 주물(呪物) 숭배를 바탕으로 하였고 여신이나 독립된 신전은 없었다. 인종은 지중해 인종과 소아시아인과의 혼성이었다. B.C.1400년 2차에 걸친 그리스인의 침략으로 궁전과 문명이 동시에 괴멸되었다. 20세기 초 영국의 에반스가 크노소스에서 커다란 궁전 터를 발견하였으며. 1952년 영국의 마이클 벤 트리스라는 젊은 학자가 선문자 B라는 독특한 문자를 해독함으로써 이들의 문명이 알려졌다. 선문자는 오래된 순서로 선문자 A, B로 구분하는데, 주로 왕실에 관한 기록, 세금 징수와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한 수, 곡물 가축 등의 수를 기록하고 있다.
8. 미케네 문명(Mycenean Culture) 에게 문명 후기에 번영했던 문명으로 독일인 슐레이만이 발견했다. B.C. 2000년경 남하해 온 그리스인은 B.C. 1600년경부터 급속히 크레타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활발한 해상 활동을 전개하여 문화가 번영했다. 이 때부터를 미케네 시대라 이른다. 미케네 인은 점점 부강하게 되면서 크레타 인을 압박하여 B.C. 1500년경에는 동부 지중해의 해상권·교역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그리스는 여러 왕국이 할거하여, 펠로폰네소스의 미케네, 필로스, 중부 그리스의 오르코메노스 등이 유력했다.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문명을 모방한 것이었으나, 크레타가 밝고 다채로우며 개방적인 데에 반하여, 미케네는 상무적 (尙武的)이며 장중한 그리스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왕의 주거는 장중하고 견고한 성채이며, 메가론 건축이 핵심으로 되어 있다. 크레타 식 화려한 궁전과는 판이하나, 건축내부의 벽화는 크레타 풍을 모방하고 있으며, 전사·수렵도 등이 그려진 벽화는 그 기교 면에서 크레타보다 뒤떨어진다. B.C. 1200년경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인으로서 마지막으로 남하한 도리아 인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역사적으로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 문화의 선구인 동시에, 오리엔트 문명을 그리스에 전하는 교량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9. 트로이 문명(Troian Culture) 트로이는 마르마라 해에 가까운 소아시아의 힛사를리크 언덕으로서, 거기에는 9층의 주거지(시:市)가 있었다. 제1시는 이미 성벽을 만들고 금속 문화를 가졌으며, 제2시(B.C. 3천년기(紀)의 후반경)는 장경(長經) 120m의 높고 견고한 성벽을 가졌으며, 성내에는 4개의 메가론이 서 있어 최초의 융성기를 보여 준다. 이 곳은 흑해와 에게 해, 유럽과 아시아의 두 대륙이 접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교역과 부근 평야의 농산물, 배후지의 광산 등으로 부를 안겨다 줄 수 있었다. 술레이만이 발견한 「트로이의 보물」은 제2시에 속하며, 황금제의 관과 장신구와 용기·은제품 등으로 국왕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였다. 도기는 조잡하지만 사람의 얼굴을 나타낸 안호나 동물호가 특색이다. 이 문화는 에게 해의 유럽 쪽, 레스보스 섬, 소아시아의 내지로 퍼져 갔으나 에게 세계의 동북부에 한정되어 있고, 크레타와의 접촉은 찾아볼 수 없다. 제2시의 붕괴 후, 제3시부터 제5시가 같은 문화를 갖고 부흥되었으며 제6시는 두 번째의 전성기로서 성벽은 최대의 영역을 둘렀는데, 그 유구(遺構)로서 남아 있는 것은 적다. 그러나 그 유구나 유물은 완전히 미케네 문명으로서 호메로스의 트로이는 이에 이어지는 제7시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트로이 문명은 제2시가 대표하게 되는데, 그 문화와 타문화와의 관계·기원은 분명치 않으며, 그 연대에도 여러 설이 있다. 트로이는 19세기에 독일인 슐레이만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소년 시절 슐레이만은 아버지로부 터 선물 받은 "아이들을 위한 세계사" 라는 책에서 붕괴하는 트로이 성을 묘사한 그림 한 장을 보고 전 설 속에 파묻힌 트로이를 자신이 찾아 낼 것을 결심하고 생애의 절반을 발굴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데 보냈다. 마침내 그가 49세에 그 꿈은 실현되어 트로이 문명이 허구가 아닌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게 된다.
10. 일리아스(Ilias) 호메로스의 서사시로「일리온(트로이의 별명)의 노래」라는 뜻. 이 장시는 전 24권에 15,693행인데, 아 킬레우스의 분노ㆍ슬픔ㆍ싸움, 헥토르의 처자와의 결별과 용맹, 그 부친의 비탄의 장면이 특히 유명하 다.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의 최후 10년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텟살리아의 왕인 페레아의 궁중에서 결혼식을 축하하는 향연이 베풀어졌는데, 여기에는 불화의 여신 에리다를 제외한 모든 신들이 초청되어 참가하였다. 화가 난 에리다는 향연을 망칠 결심을 하고, 신들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고 쓴 종이와 함께 사과를 던졌다. 이에 제우스의 아내 헤라와 지혜의 여신 아테네, 그리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 극심한 말다툼이 일어났다. 여신들이 이 문제의 해결을 제우스에게 구했으나 제우스는 트로이 왕 프리알의 아들 파루스에게 이 곤란한 문제의 해결을 떠넘겼다. 헤라는 자기를 뽑아주면 파루스를 전 세계를 다스리는 왕자가 되게 해 주겠다고 했고, 아테네는 세계에서 제일 가는 용맹과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노라고 약속했으며 아프로디테는 세계에서 제일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젊은 파루스는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건네주었다. 이 때부터 헤라와 아테네는 파루스를 증오하였고, 나중에는 트로이 주민 전체에게 깊은 반감을 품게 되었다. 한편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파루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네라이의 왕비 헬레나를 몰래 훔쳐 데려가는 일을 거들어 주었다. 메네라이는 헬레나를 되찾아 파루스에게 당한 모욕을 복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스의 모든 왕들도 메네라이를 돕기로 결정하고 트로이 정벌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메네라이의 동생으로 미케네의 아가멤논 왕이 전군을 지휘하였다. 이 전쟁은 1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양 진영의 영웅들이 모두 참전했다. 그 중 유명한 사람은 그리스의 편에서는 페레아의 아들 아킬레스였고 트로이 편에서는 프리암의 아들 헥토르였다. 아킬레스의 절친한 친구 파도로크르가 트로이 성문 앞에서의 헥토르와의 결전에서 패하여 아킬레스는 친구에게 빌려준 자신의 갑옷과 투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자 아킬레스의 어머니인 여신 페티다가 불과 대장간의 신 헤페스트를 찾아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입어 보지 못한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킬레스는 새로운 갑옷과 투구를 걸치자 곧바로 전쟁터로 나섰다. 그리스 군과 분연히 맞서 싸우던 많은 트로이 인이 살해되고 간신히 살아 남은 자는 도주해 버렸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헥토르만은 도망치지 않고 아킬레스가 자기에게 가까이 오기를 당당히 기다리고 있었다. 헥토르의 부모는 성벽에 서서 아킬레스와 싸우지 말고 성안으로 들어오라고 외쳐댔지만 헥토르는 말을 듣지 않았다. 헥토르는 아킬레스와 용감히 싸웠으나 아킬레스의 갑옷과 투구를 그의 창으로 뚫을 수 없었다. 장시간의 싸움 끝에 아킬레스는 헥토 르를 살해했다. 숨을 거두기 직전 헥토르는 아킬레스에게 자기 시체를 효수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킬레스는 냉혹했다. 그는 헥토르의 머리를 자르고 시체를 전차에 묶어 자기 진지로 돌아왔다. 아킬레스도 오래 살지는 못했다. 헥토르의 친구 파루스는 아킬레스의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치에 화살을 명중시켜 아킬레스를 쓰러뜨렸다. 아킬레스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킬레스의 몸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사자(死者)나라의 물을 그에게 끼얹었다. 그러나 이때 어머니가 아킬레스의 말 뒤꿈치를 잡고 물을 끼얹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마법의 물이 닿지 않아 쉽게 상처가 날 수 있었다(아킬레스 건). 헥토르가 전사한 후 트로이 군은 벌판에서 그리스 군과 일대 결전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성밖으로 나왔다. 아킬레스가 없는 그리스 군은 직접 맞서 싸우기보다는 책략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오딧세이의 계략에 따라 나무로 된 큰 말을 만들고 그 안에 그리스에서 제일 용맹한 군인들을 숨겨 놓았다. 나머지 군인들은 트로이 군을 속이기 위해 타고 왔던 배가 있는 근처의 섬으로 퇴각했다. 그리스 군의 후퇴를 목격한 트로이 군은 포위망을 풀고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밤이 되어 트로이 군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목마 안에 타고 있던 병사들은 성문을 열고 그리스 군을 불러 들였다. 이리하여 그리스 군은 시내 곳곳에서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트로이 군을 살육했다. 마침내 전쟁 10년만에 대 트로이는 함락되고 말았다.
11. 오딧세이 오딧세이는 12,110행으로 이루어진 장편 시로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이타카의 왕 오딧세이를 주인 공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 용사들은 귀로에 올랐지만 이타카(이오니아 연안의 섬)의 왕 오딧세이는 바다 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 무려 10년 이상 바다를 떠다녀야 했다. 오딧세이의 모험 가운데 재미있었던 일은 싸이렌과 만난 일이었다. 싸이렌은 인어였는데, 그의 노래는 듣는 이로 하여금 황홀감에 젖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싸이렌이 살고 있는 섬 주변을 통과하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한 번 이 섬에 들어간 사람은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오딧세이는 이 섬 가까이에 이르자 싸이렌의 노래 소리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모든 사람의 귀를 납으로 틀어막고 자기의 몸도 돛대에 묶었다. 오딧세이는 싸이렌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자 섬 쪽으로 헤엄쳐 나가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옆에 있던 일행이 그를 더욱 단단하게 묶어 세웠기 때문에 오딧세이는 노래를 들어가면서 그 섬을 통과할 수 있었다. 오딧세이의 배는 다시 폭퐁우를 만나 난파되었고 선원들은 바다에 표류하였다. 오랜 고생 끝에 오딧세이는 뗏목을 엮어서 다시 바다로 헤쳐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눈이 하나만 있는 거인 포르펨(포르펨은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을 장님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오딧세이의 뒤를 밟은 포세이돈이 그의 뗏목을 부러뜨렸다. 오딧세이는 겨우 어떤 바다의 여신에 구조되어 알 수 없는 섬에 머무르게 되어 간신히 살아났다. 이 섬을 다스리는 아르키노이 왕은 오딧세이를 기쁘게 맞이해 주고 토산품을 선물로 주기도 했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배도 만들어 주었다. 오딧세이가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나라들을 편력하는 동안 고국에 있는 아내 페네로바에게는 권세 많은 구혼자가 수없이 찾아왔다. 오딧세이는 다시 고향에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아내 페네로바는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구혼자들의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오딧세이가 거지로 변장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마침 구혼자들이 술을 마시고 소란을 떨고 있었다. 그들은 거지로 변장한 오딧세이를 짓궂게 우롱 했다. 페네로바는 오딧세이의 활을 당겨 화살로 12개의 도끼 구멍을 통과하면 자기의 남편으로 맞이하겠다고 구혼자들에게 제의했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활을 당기려 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 활을 당 길 수 없었다. 그때 오딧세이가 자기 힘을 시험해 보겠다고 제의했다. 구혼자들은 이에 반대했지만 오딧 세이로부터 거지의 신분을 알게 된 데레마히는 그에게 활을 넘겨주었다. 오딧세이는 아주 쉽게 12개의 구멍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나서 그는 구혼자들을 모조리 쏘아 죽였다. 페네로바는 이 누더기를 걸친 늙고 추한 거지가 오딧세이라고 전혀 믿지 않았으나 그가 자기의 남편이 되었음을 인정했다. 오딧세이가 돌아오고 구혼자들이 사살되었다는 소문이 곧 이타카 전역에 퍼졌다. 살해된 구혼자들의 연고자들이 오딧세이와 그의 동료들에게 싸움을 걸어 왔지만 아테네의 도움을 받은 오딧세이가 승리했다. 아테네신은 오딧세이와 이타카 사람들은 화해시켜 이타카 사람들은 다시 오딧세이를 왕으로 추대했다.
12. 신탁 그리스인은 자기 집에 있는 제단이나 신전에서 신에게 예배드렸다. 성전의 대부분은 그것이 있는 지방 내에서만 숭배되었다. 그러나 성전이 있는 곳은 그리스 전역에서 존경받았으며, 때로 그리스 국경 밖에서도 중시되었다. 델피 신전은 유명했다. 델피 영지는 포키스의 팔리나스 산록(중부 그리스의 델피 부근)에 있었는데, 프치아라고 하는 무녀가 신탁을 내렸다. 무녀는 동굴 틈에서 살고 있었는데 동굴 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때문에 무녀는 정신이 혼몽하여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흥얼거렸다. 그러면 신관이 곁에서 이 말을 듣고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고는 신의 뜻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는 이 신의로 사람의 방향을 자기 이익에 따라 조정하였는데, 심지어 국가의 행동도 좌우하였다. 실제로 신탁은 미래의 일을 예언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탁은 이런저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애매한 말이었다. 어느 날 델피의 왕 크레스가 페르시아 인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리스 강의 수로를 변경시켜도 좋은지 즉,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해도 좋은지의 여부를 델피 신탁에 의뢰했다. 강의 수로를 변경하면 크레스가 페르시아를 격파 할 수 있다는 신탁이 있었다. 크레스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여 강의 수로를 변경시켰다. 그러나 그는 참패했다. 크레스는 신탁이 틀린 책임을 물었으나, 델피 신관은 신탁 때문이 아니라 크레스 자신의 죄 때문에 참패했다고 대답했다. 신탁이 내린 충고나 예언에 대한 보답으로 신관에게 재물이 바쳐졌다. 이리하여 델피 신관은 커다란 부를 지닌 강자로 등장하였다. 그는 금을 대여해 주기도 하고 국가의 내정에 간섭하기도 했으며, 전쟁 때에는 이런저런 형태로 나라를 원조했다.
13. 올림피아 고대 그리스의 풍습에는 운동 경기가 중시되었다. 그리스에는 커다란 운동경기가 네 개 있었다. 그것은 올림피아, 델피, 코린트, 메네아에서 행해졌고 각기 4년마다 개최되었으므로 결국 매년 개최되는 셈이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 제사 때에 행해진 것이었다. 올림피아 경기는 제우스 신전 근처의 평원에서 여름의 마지막 만월 무렵에 개최되었으며 이 기간을 올림피아드라고 불렀다. 올림픽 경기는 보통 기원전 776년에 제1회가 열렸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실제로 시작된 것은 훨씬 오래 전부터일 것이다. 올림피아 경기를 보기 위해 그리스 세계의 각지에서 많은 국민이 모여들었다. 모든 그리스 국가는 이 경기에 임원과 선수를 파견하였다. 올림피아 경기가 진행될 때는 각 국가간의 불화도 정지되고 전쟁도 종식되었다. 이를 범하는 국가는 많은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러한 <신성 한 체전>은 그리스인의 문화적 통일을 촉진하였다. 경기 종목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달리기였고 그후 5 종 경기(멀리 뛰기, 달리기, 창 던지기, 원반 던지기, 레슬링)가 더해졌다. 경마나 전차 경기가 추가된 것은 기원전 7세기 중엽이 되고서였다. 후에는 연설, 시의 낭송, 그림 등의 예술 콩쿠르까지 추가되었다. 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남자뿐이었다. 그들은 전라로 경기를 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시작된 풍습으로 원래는 옷을 입고 경기를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원전 720년 오르싯포스라는 이가 경기 중에 허리에 두른 천을 떨어뜨리고 주워 두를 여유가 없어 그냥 계속 달려 우승하였는데 그 뒤 천을 두르지 않고 달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 알려져 전라로 출전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 경기 관람도 여신관을 제외하고는 여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의 승리자에게는 제우스 신전 가까이에 자라고 있는 야생의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이 주어 졌다. 승리자에게 주어진 상품은 이것뿐이었으므로 명예가 가장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올림픽 경기의 아마추어 정신의 아름다운 표현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승리자는 자신들의 폴리스로 돌아가면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물질적인 보수도 상당하였 다. 가령 아테네 시에서는 국가에 특히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국비로 식사를 제공하는 [브류타네이온]이 있었는데 승리자는 일생동안 이 식사를 허용 받았다. 더구나 상금도 500드라크마나 받았다. 또한 우승자에게는 극장의 일등석이 배당되었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올림피아에 입상이 세워졌다. 로마 제국 시대에도 올림픽 경기는 계속해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이교의 신인 제우스의 제사가 금지되었고 경기 대회도 기원 393년에 금지되었다.
14. 폴리스(Polis) 이 말은 원래 외적이 쳐들어 왔을 때 주민들이 의거하여 싸우던 산채를 뜻하였는데 이것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고 도시 국가를 형성하게 되어 점차 국가 전체를 뜻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원래 의미 의 폴리스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즉 '높은 폴리스'라고 불리웠다. 아테네의 명칭은 그리스의 신 아테나(전쟁과 평화의 여신)에서 따온 것이다.
15. 아크로폴리스(Akropolis)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의 중심이 되었던 언덕. 원래 폴리스라고만 불리웠는데 폴리스가 도시 국가를 뜻하는 말이 되자 akros(높은)라는 형용사를 붙였다. 도시 성립시나 식민시의 건설에 있어서 방어의 원리가 강하게 작용하였음을 이 지형에서 볼 수 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코린토스의 아크로코린투스 등 대부분의 폴리스가 그 아크로폴리스를 지니고 있으나 스파르타와 같이 뚜렷이 언덕진 곳이 없는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서 주위에서 60∼70m의 높이, 동서 약 300미터, 남북이 약 150미터의 흰 5각형의 석회암 언덕으로서 견고한 성벽을 두르고 서쪽 끝의 프로필리이어(樓門)로 들 어가게 되어 있다 언덕 위에는 중앙 남쪽부터의 파르테논을 위시하여 에레크테이온과 니케의 신전이 있다. 언덕의 남쪽 기슭에는 페리클레스의 오데이온, 디오니소스 극장,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에우메네스 주랑(柱廊), 헤로데스 앗티쿠스의 오데이온이 있다. 이 외에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시칠리아의 아크라가스의 것도 유명하다.
16. 아고라(Agora) 그리스 도시 국가의 중심 광장. 시장-market(영어), Markt(독일어)으로 번역되나, 이는 아고라의 일면을 표현할 뿐, 아고라의 적당한 용어는 없고 어원적으로는 사람들의 집회장이다. 아크로폴리스가 종교·정치의 중심임에 대하여 아고라는 시민의 경제 생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중심으로서 로마의 포룸에 해당하며 동양의 도시에는 없었다. 이 광장의 주위에는 관청과 신전 및 주랑이 세워져 있으며, 이 주랑에 는 가게들이 들어 있었다. 시민들이 항상 이 곳에 모여 정치나 학문을 논하였음이 플라톤의‘대화편’ 에서도 나타난다. 많은 도시에서 발굴되고 있는데, 대표적 아고라는 근년에 와서 전체의 모습이 분명히 드러난 아테네의 그것이다. 광장 부분은 대체로 200∼250m정도이나, 동쪽·남쪽·서쪽의 일부에는 중앙 ·동·동북·남·앗탈로스 등의 주랑(스토아)이 있으며, 이스토스 신전이 서있고, 광장 안에도 아레스의 신전 및 오데이온이 있으며, 기타 여러 종류의 건물과 군데군데에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17. 세습 사유지(Kleros) 그리스의 자유 시민들이 소유한 사유지를 의미한다. 오리엔트 사회에서는 대규모의 관개 농업을 경영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성립하였으나, 그리스는 천수 농업 지역이었기 때문에 가족단위 노동의 집약을 통해서만 생산성을 올릴 수 있었다. 농민들, 즉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경제적 자립이 중요하였으며 따라서 그리스인들은 가능한 한 클레로스를 증가시켜 경제적으로 자립하고자 하였다. 그리스 사회를 시 민 공동체라 하는 바, 그리스 시민들의 비교적 평등한 상호 관계의 기초는 그 구성원들의 비교적 균분된 사유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8. 아테네 민주 정치의 성립 배경 아테네 민주 정치 발전의 관건은 평민의 경제력 신장과 중장 보병으로서의 역할 증대에 있었다. BC 6세기 초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무구의 가격이 저렴해짐에 따라 중소 농민이나 해외 무역을 통해 성공한 상공업자들이 자비로 중무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중장 보병 부대의 전투력은 귀족 기병 부대 를 훨씬 능가했다. 이에 과거 귀족의 기병 부대에 비해 훨씬 큰 규모의 부대가 형성되고 이로 인한 전술상의 변화는 일정한 대형 및 규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립된 것이 중장 보병의 사각형 밀집 대형(Phalanx)이라는 것이다. 이 밀집 대형 속의 병사들에게는 개인적 용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중시되었다. 따라서 평민들 사이에는 전열(즉 공동체)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즉 자기 권익을 지키는 것이 곧 애국심이라는 새로운 의식과 더불어 기존 신분 질서에 대한 회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19. 아르콘(Archon) 제 1인자, 지배자, 고관을 뜻하는 그리스어이며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많은 폴리스에서 볼 수 있는 국가 최고관의 호칭. 원래 귀족제 때의 관직으로서 폴리스의 성립과 더불어 생겨나, 민주제 시대로 계승된 관직인데, 그 성립과 변천은 아테네에서 가장 명료하게 볼 수 있다. 아테네에서는 처음 왕가 출신이 3명이 종신제로 임명되었는데, BC 750년에는 임기 10년, 다시 BC 683년에는 임기 1년으로 되었으며 다른 귀족도 취임하였다. BC 4, 5세기경에는 매년 9명의 아르콘이 취임하였는데, 최고관인 아르콘 에포니모스, 제사장으로서의 왕의 뒤를 이은 아르콘 바실레우스, 군인·외인 관리의 플레마르코스 및 이 밖의 6명의 사법 담당자 테스모테타이가 있었다. 솔론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9명의 아르콘은 명문의 출 신에서만 선출되었으며, 자격은 솔론에 의한 계산 등급 규정이 4등급 중, 제 1등급에 들어 있어야 했다. 페르시아 전쟁후에는 전 시민에게 개방되었으나, 민주 정치의 진전으로 세력을 잃어 가고, 487년 추첨에 의해 선출하게 됨으로써 무력화되어 스트라테고스가 사실상의 최고관이 되었다.
20. 드라콘(Drakon ; BC 7세기 후반) 처음 아테네는 성문법이 없었고 관습에 의해 재판이 행해졌었다. 에우바도리도스(귀족;노예주)가 재판권을 장악하여 언제나 부자의 이익이 되도록 판결하였다. 민중의 압력이 거세지자 에우바도리도스는 일 정한 정도 양보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BC 621년, 에우바도리도스는 아르콘의 한사람인 드라콘에게 성문법의 제정을 일임했다. 드라콘이 만든 법률은 가혹한 것이었다. 드라콘은 BC 621년에 소송 절차나 형벌의 규정을 포함한 법전을 제정하였다. 이 법전은 관습법을 성문화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성문화되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법 적용에 대한 횡포를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형벌은 가혹하여 후세에 이 법률은「피로 쓴 것」이라 불렸으며 살인에 관한 것 이외에는 솔론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살인에 관한 법률은 BC 409∼408년에 재공포되었으며, 오늘날 그 비문이 일부가 출토되어 판독되고 있다. 고의에 의한 살인, 과실로 인한 살인, 정당 방위를 위한 살인을 구별하고, 살인 교사자를 살인범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등 주관적인 면이 고려되어 있다. 관습법이 성문법으로 바뀌었어도 평민의 생활에 이로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민중 봉기가 그치지 않았다. 정치 제도를 개혁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21. 솔론의 개혁 기원전 594년에 아테네 제일의 아르콘으로 선출된 솔론이 민중과 귀족간의 화해를 도모하는 개혁을 실시할 당시, 소 토지 소유자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웠다. 채무금을 표시하는 돌의 수가 점점 더 증가하였고, 많은 아테네 시민이 고향을 등지든지 노예가 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솔론은 혁명적인 성격을 띤 두세 개의 시책을 단행했다. 최초로 취해진 시책이 < 부채 면제>였다. 솔론은 토지에 있는 채무금 저당표석(抵當慓石)을 제거하도록 명령하고 부채의 반환을 폐지하였으며 채무 노예를 금지했다. 또 채무금 미 반환으로 대지주의 손으로 넘어간 토지는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으며, 다른 나라의 노예로 팔려간 시민들은 국고에서 대신 지불하여 고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이러한 시책은 귀족의 이익에 배치되는 것이었으나 데모스의 반란이 두려워 그들도 받아 들여야만 했다. 솔론은 소득에 따라 시민을 네 등급으로 나누었다. 제 1등급에 속한 자는 소맥 500메진(1메 진은 52.5리터) 이상 또는 그에 상당하는 올리브 기름이나 포도주를 거둬들이는 시민이었다. 제 2등급에 속한 자는 300메진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이었다. 이 등급의 시민은 말을 기를 만한 재산이 있었기 때문에 (기마전사>라고 불렀다. 제 3등급에 속한 자는 200메진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인데, 이들은 소 두 마리를 소유할 만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제크기데스>(한 조라는 뜻)라는 불렀다. 마지막 제 4 등급에 속한 자는 전혀 토지를 갖지 못한 시민으로서 페다라고 불렀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도 재산 소유의 정도에 따라 정해졌다. 제 1등급의 시민만이 국가 최고의 직책을 맡았으며, 이들 가운데 아르콘이 선출되고 아레오파구스의 위원으로 충원되었다. 제2등급의 시민은 기병이었으며 제 3등급의 시민은 갑옷과 투구, 그리고 칼과 창을 개인적으로 마련한 중갑보병이었다. 이 세 등급 가운데서 솔론이 제정한 400인 회의와 아레오파구스가 국가를 쿠데타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제 4등급의 페다는 국무를 담당하지 않았으며 다만 민회에 출석하여 배심원 재판에 나갈 권리밖에 없었다. 이것이 솔론이 단행한 아테네 국가의 개혁 내용이었다. 솔론의 개혁은 에우바도리도스의 권력을 철저하게 제한하는데 실패했고, 빈민을 만족시키지도 못했다. 따라서 그들 모두에게서 불만을 샀다. 에우바도리도스는 솔론이상 공업자나 소지주를 중시한 것이 불만이었고, 데모스는 솔론이 토지 소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하지 않은 데 불만이었다. 사실 부채가 폐지되었다 해도 빈민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빈민은 이전처럼 무일푼이었고 새로운 채무금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리하여 솔론의 개혁후에도 민심의 동요가 계속되고 오히려 고조되어 갔다.
22. 참주(僭主: Tyrannos) 그리스의 비합법적인 지배자. 티란노스(Tyrannos)는 왕을 뜻하는 외래어로 원래는 폭군이란 뜻은 없었으나, 민주 정치가 확립된 후, 특히 B.C. 4세기의 플라톤 등에 의하여 나쁜 뜻으로 해석되게 되었다. B.C. 7, 6세기의 페이돈(아르고스), 클레이스테네스(시키온), 페이시스트라토스(아테네) 등으로 대표되는 자들을 전기 참주, B.C. 4, 3,세기의 디오니시오스 1세(시라쿠사이), 이아손(페라에), 아가토클레스, 히에론 2세(시라쿠사이) 등으로 대표되는 자들을 후기 참주라고 한다. 전자는 귀족 정치에서 민주 정치에로의 전환기에 나타나, 주로 화폐 경제의 진전에 수반되는 사회의 변동에 처하여 귀족에 대한 평민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고, 또 외적의 침입에 당면하여 국민적 방위의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후자는 주로 군사적 지도자로서 주로 폭력으로 독재권을 장악하였으나, 오랜 법률ㆍ국제(國制)는 파괴하지 않고, 이를 자기의 지배권 확보 책으로 사용한 것이 특색이다. 참주 정치는 세습되었으나, 대부분 2대째에 타도되었다. 참주 중에는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처럼 민중에게 선정을 베푼 사람이 많았다. 그는 상공 업을 장려하고 가난한 농민을 돕는 등 아테네의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아들의 폭 정과 귀족의 반항으로 참주 정권은 무너지고 민주 정치가 나타남으로써 참주 정치는 귀족정과 민주정의 과도기적 정치 형태가 되어 버렸다.
23.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 BC 600?~527년) 아테네의 참주로 아테네에서는 솔론의 퇴임 후 당쟁이 심하였는데, 과두 정치를 바라는 평민당과 중 용의 정체를 바라는 해안당(海岸黨)에 대해, 민주 정치를 바라는 산지당(産地黨)의 수령이 되었다. BC 565년경 메가라와의 전쟁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BC 561/560년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한 후 참주가 되었 다. 다른 두 당파가 결속하여 그를 추방하였으나, 해안당의 수령 메가클레스의 딸과 결혼한다는 조건으 로 귀국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파혼했으므로 다시 추방되었다. 그는 트라키아의 팡가이온 금광에서 자금 을 저축하여 용병을 사들였으며, 외국인과 동맹을 맺어 10년 후에는 무력으로 정권을 회복하였다. 또한 그는 민중을 기만하여 무기를 회수함으로써 참주 정치의 기틀을 튼튼하게 하였으며, 망명 귀족으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분배하여 소 농민층을 확립시킴으로써, 솔론 시대 이래의 빈부의 대립 문제를 일단 해결 했다. 농민에게는 생산물에 십일세를 과하여 권농책을 시행했다. 정치 제도는 솔론의 것을 존속시켰으 나, 자기 일족으로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게 하였다. 그의 시대에는 도자기 등 수공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수공업자의 수가 많았던 것 같은데도, 권농책에 역점을 두었다는 사실은 그의 세력 기반이 농민에게 있 었음을 보여준다. 그에 의해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폴리스가 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협피아스가 뒤를 이었다.
24.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 ; BC 6세기 후반) 아테네의 정치가. 일찍부터 참주정 타도에 힘썼으나, 여러 번 실패한 후 스파르타의 원조를 얻어 BC 510년 이의 타도에 성공하였다. 그 후 과두파의 이사고라스와 정권을 다투어 일시 망명했다가 민중이 이사고라스에 반대하여 일어나게 되자 귀국하여 BC 508/7년 이후 민주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종래 씨족제적 4부족 제도를 폐지하고, 10부족으로 편성하였다. 이 새로운 부족의 구성 단위를 이루는 것은 데모스(구(區))이며, 모든 아테네 사람은 당시의 현주소의 구에 소속되고 주소가 바뀔 경우에도 대대로 소속구를 세습한다. 그리고 이 구가 몇개 모여 트릿티스를 구성하는데, 전 앗티카의 해안·내륙지·중심시는 각각 10개의 트릿티스를 포함한다. 이 세 지역에서 트릿티스를 하나씩 뽑아 추첨으로 3개의 트릿티스를 뭉쳐서 신부족을 편성했다. 이러한 편성 방법을 사용한 것은 종래의 귀족의 씨족제적 세력이나 B.C 6세기에 생긴 평지당(平地黨)·해안당(海岸黨)·산지당(山地黨)의 지역적 성격을 띤 당파의 기반 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다. 신부족 편성에 따라 솔론이 설치한 400인 평의회를 폐지하고, 각 부족으로부터 50명의 평의원을 선출하는 500인 회를 신설하는 동시에 각 부족 가운데서 1명의 비율로 10명의 장군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참주의 재현을 방지하기 위해 도편 추방의 제도를 만든 것도 그였다고 한다. 그의 개혁은 아테네의 민주정의 기초를 확립하여 놓았는데, 그의 생애나 사상에 관하여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25. 스파르타의 정치 제도 스파르타의 최고 권력자는 두 명의 왕이었다. 왕은 전쟁 때만 전쟁권을 행사했을 뿐이고 평상시에는 게르시아라고 하는 장로회의에서 국사를 논의했다. 게르시아는 3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2명의 왕 외에 선출된 28명의 종신 장로가 회의에 출석했다. 장로는 60세 이상이어야만 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제도는 5명의 에페로스(특별히 선출된 공무원)로 구성된 평의회였다. 에페로스는 1년마다 새로 선출되었다. 후에 에페로스의 권한이 강화되자 왕의 책임을 물을 정도까지 되었다. 이외에 성인이 된 스파르타 시민 모두가 참석할 수 있는 민회가 있었다. 민회는 매달 한 번식 개최되었는데, 왕은 이 민회에 출석하여 게르시아의 결정 사항을 설명하였다. 그때 시민들은 이 결정 사항을 심의하는 대신 단순히 찬성 또는 반대의 소리를 지를 수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정치를 주도한 것은 민회가 아니라 왕과 에페로스 그리고 게르시아였다.
26. 스파르타의 생활과 교육 스파르타인 사이에는 오랫동안 공유재산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토지는 평등하게 분배되었으며 토지 매입에 의한 부의 축적은 금지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리쿠르구스는 스파르타 인을 평등하게 하고 호사한 생활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금, 은 화폐 대신 철 화폐를 유통시켰다고 한다. 이 철 화폐는 엄청나게 크고 무거웠기 때문에 화폐를 많이 모아 두는 일은 불가능했다. 스파르타 인은 평시에도 공동 식사를 하였으며 전사의 대장은 치시티아라고 불렸다. 스파르타 인은 아들의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스파르타 인은 아들을 낳으면 시의 장로로 하여금 운명을 결정케 했다. 장로는 허약한 아이는 아이겟스 산 계곡에 내던지고 건강한 아이만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허약한 아이는 용맹한 전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건강한 아이만을 교육시켰던 것이다. 소년은 일곱 살부터 열 여덟 살 때까지 국민학교(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김나지움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과목은 체조였으며 창던지기나 원반던지기 등 군사 교육이 주를 이루었다. 학생들의 신체를 단련시키고 고된 전사 생활에 적응케 하기 위해 일부러 거친 옷과 음식을 먹이고 때로는 구타도 하였다. 스파르타 교육은 아주 간단한 질의 응답 식의 교육이었다. 이러한 간결한 질의 응답 식을 <라코니아 식>이라 불렀다. 스타르타의 어머니들은 아들을 전쟁터에 내 보낼 때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기보다는『방패와 함께, 그렇지 않으면 그 위에서』라는, 즉 승리하여 돌아오는가 그렇지 않으면 용사답게 전사하라는 뜻의 말을 건네주었다. 이러한 엄격한 교육의 결과로 스파르타 인은 용맹하고 강인한 전사로 성장하였다.
27. 리쿠르고스(Lykurgos) 스파르타의 전설적 입법자. 그의 연대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일정하지 않으나, BC 1000년경~BC 600년경까지의 차이가 있다. 토지의 균등 분배, 원로회의 설치, 민회의 정기적 개최, 귀금속 사용의 금지, 공동 식사 등의 군국적 생활 양식을 정하였다고 전하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傳承)은 BC 5세 기 이후의 것이고, 또 그의 연대나 가계에 대한 전승도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실재성은 의문시 되 고 있다. 스파르타의 여러 제도도 오랜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며, 그가 만일 실재했었다고 해도 그 일부 분을 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펠로폰네소스 각지에서 숭배되었던 같은 이름의 신이 입법 자로 생각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28. 페리오이코스(Perioikos ; Peri-oikoi) 고대 그리스의 반자유민으로 변두리에 사는 사람이란 뜻. 도리아계 국가 특히 스파르타에 많았다. 참정 권은 없으나 지방 자치권과 군사ㆍ납세의 의무를 가졌다.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였으며, 토지 보유자도 있었던 것 같다. 스파르타에서는 시민에 가까운 권한을 가졌지만, 텟살리아에서의 그 지위는 낮은 종속민에 불과하였다.
29. 중장 보병(Hoplitai) 그리스 폴리스의 시민으로 조직된 군인. 그리스의 폴리스는 원래 전사 공동체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중장병의 의미는 폴리스 사회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아테네의 귀족정 시대에는 귀족으로 이루어진 중갑 기마병이 중심이었으나, BC 7세기에 이르러 자비로 부담했던 무구(武具)가 가벼워지고 가격이 떨어지면서 중산 평민층이 중장보병으로 참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그들의 참정권도 확대되었다.
30. 이오니아(Ionia) 에게 해에 면한 소아시아의 서안 지방. 그리스인들이 초기부터 식민하여 동방 문명의 영향을 받아, 본토보다 일찍 BC 800년경부터 천문ㆍ철학ㆍ문학ㆍ미술 등이 발달하였다. BC 7세기에 리디아인의 세력 밑에 들어갔고, BC 6세기 크로이소스 왕 때에 페르시아에게 지배되었는데, B.C. 500년경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이오니아의 반란」은 실패하였으나,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477년 그 지배에서 해방된 다음에는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BC 330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토벌로 자유를 회복, 그 후 마케도니아, 페르가몬, 로마 등에 복속되었고, 중세기에는 비잔틴 제국령, 현재는 터키령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생명선이었으며, 그리스 문화 형성에 공헌하였다.
31.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 B.C. 6세기말 페르시아는 거의 전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서쪽으로 진출했다. 이에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시는 B.C. 6세기 중엽에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는데, 그들은 무역 활동이 억제되고 참주제를 강요당하여 불만이 많았으므로, 밀레토스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에 대해 반란 을 일으켰다(499 B.C.). 반란은 진압되었으나(494 B.C.),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이 반란을 원조했다하여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의 노여움을 사, 그리스 원정이 일어나게 되었다.
▶ 제1회(BC 492년) 다리우스의 사위 마르도니오스의 지휘하에 트라키아 해안을 제압하였다. 해군은 아토스 곶(串)에서 폭풍으로 큰 손해를 입었지만 목적을 달성하고 귀국하였다.
▶ 제2회(BC 490년)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토벌한다는 명목 하에 다리우스는 다티스, 아르타페르네스가 지휘하는 원정군을 파견하여, 낙소스 섬과 델로스 섬을 정복하고, 에우보이아섬에 상륙하여 에레트리아를 파괴했으며, 앗티카 북부의 마라톤 벌에 상륙하였으나, 밀티아데스가 지휘하는 아테네 군에게 격퇴되었다. 할 수 없이 해상으로부터 다시 아테네를 공격하려 했으나 밀티아데스 등이 이미 회군하여 아테네를 수비하고 있었으므로 단념하고 귀국하였다.
▶ 제3회(BC 480년)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해군 확장안을 채택하여 페르시아의 재 침공에 대 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페르시아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친히 지휘하여,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텟살리아를 거쳐 그리스 본토로 남하, 테르모필라이의 험준한 길목을 지키고 있던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그리스 군을 격파하고 아테네에 침입하여 시가지를 불태웠다. 아테네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아래 부녀자를 피난시키고, 모든 남자를 해군에 편입, 군함에 태우고 페르시아 해군과 살라미스 만에서 교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육상에서 이를 보고 급히 귀국 하였고, 육군은 텟살리아로 후퇴하였다.
▶제4회(BC 479년) 마르도니오스 지휘하에 페르시아 군은 다시 남하, 앗티카를 침범하고 보이오티아에 들어갔으나, 플라타이아이 싸움에서 패배하고 퇴각하였다. 한편 페르시아 해군은 미칼레 싸움에서 그리스 군에 패하여 이오니아 도시들은 독립을 회복하였다. 페르시아 전쟁과 동시에, 서방 시칠리아에서도 시라쿠사이의 참주 겔론의 지휘하에 카르타고 군을 격퇴함으로써 그리스는 동서에서 이민족의 위협을 물리쳐 자유를 확립하였다. 아테네는 이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해상 진출의 기틀을 확고히 했으며,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여 그 맹주가 되었고, 문화상에 있어서는 찬란한 고전 시대를 맞이하였다. 또한 국가 제도상으로는 민주 정치를 철저히 실현시켰다.
32.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마라톤 경기가 페르시아와 아테네 사이에 벌어졌던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소아시아 해안에 있었던 그리스인의 식민지는 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에 정복되어 그 압제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고, 그리스가 이를 원조하게 되어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25마일 떨어진 곳인 마라톤(Marathon)에 상륙했다. 애국심에 불타는 아테네의 중무장 보병들은 자기들의 두 배가 넘는 페르시아 군대를 이 곳에서 격파했다.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병사가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는 "기뻐하라, 우리의 승리를" 이라는 한 마디를 외친 후 곧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마라톤 전투에서의 승리는 중무장하고 전투에 나선 아테네 시민의 승리였으며 민주 정치의 승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페르시아의 위협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를 계승한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침략하기 위해 몸소 대군을 진두지휘했다.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여 아테네는 델포이에 있는 태양의 신 아폴론 신전에 사람을 보내 신의 계시를 받아 오게 했다. 이것은 당시 정치의 신정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의 계시는 절망적이었다. 다시 한번 계시를 간청하자 약간은 희망적인 내용이었다. 나무로 만든 벽 뒤에 숨으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나무로 만든 벽'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이 때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사람이 '나무로 만든 벽'이란 배를 뜻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래 해군의 증강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으로 이미 2년 전에 그가 제안했던 배 200척이 건조되어 있었다. 아테네의 민회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아테네 시민은 모든 부녀자와 노인을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시키고 싸울 수 있는 남자는 200척의 배에 올라 페르시아 군과 싸울 준비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아테네가 가지고 있던 200척의 배는 3단 노선이었으며 길이는 약 40미터, 폭은 6미터였다. 그리고 노를 젓는 데는 100명 이상의 사람이 필요했다. 뱃 머리에는 충각(衝角)이라고 하는 뾰족한 것이 달려 있었는데 이것은 나무 뿌리를 날카롭게 깎아 청동을 입힌 것이었다. 전속력으로 적함에 다가가 이것으로 적함의 옆구리를 찔러 침몰시키는 것이 당시 사용된 전술이었다. 따라서 노를 젓는 사람의 기술과 일치된 단결심이 승리의 열쇠였다. 결전은 기원전 480 년 살라미스 해상에서 벌어졌다. 아테네를 버리고 해상에서 페르시아 군에 맞서 싸운다는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다. 400척이 넘는 페르시아 배의 절반 이상이 침몰했고 크세르크세스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네테는 승리했고 민주 정치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죽음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는 민주주의적 시민 생활에 대한 애착이 아테네 시민의 투지와 단결을 가져다 준 결과였다.
33. 아테네 민주정치 특징 아테네의 민주정은 페르시아 전쟁 후 완성되었다. 전쟁 중 배에서 노를 저었던 무산 시민들도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참정 때문에 생계에 지장이 없도록 수당이 지급되었다. 아테네 민주정의 특징은 모 든 성년 남자 시민(Demos)은 누구나 입법, 사법, 행정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일부 특수 관직을 제외한 모든 관직은 추첨에 의해 선임되었다는 점이다.(직접 민주정) 그러나 정치적 권리는 폐쇄적인 시민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특권이었으며 여자, 거류 외국인, 노예에게는 참정권이 없었다.(제한적 민주정) 폴리스 시민들이 누린 자유는 노예의 노동력을 밑받침으로 한 노예 경제에 의한 민주정이었다.
34. 페리클레스(Perikles) 아테네의 정치가인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명문 귀족 출신이었는데 BC 461년 에피알테스(Ephialtes)가 암살된 뒤 민주파의 지도자가 됐다. 귀족 정치의 잔재인 아레오파고스(Areopagos) 회의의 실권을 빼앗아 대부분의 관리를 추첨으로 뽑고, 관리에게 일당을 지급하는 것을 비롯한 민주적인 개 혁을 단행했다. 페리클레스는‘대관’(아르콘) 같은 중요한 관리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군사 지도자 로서 기원전 443년 이후 연속해‘장군(스트라테고스)’에 선임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하여‘이름은 민주정이었지만 페리클레스의 1인 지배’로 일컬어지는 강력한 지배를 했다. 그러나 혼자서 지배하는 참주가 아니었으며, 항상 민회와 민중의 의견에 따라 정치를 하였다. 그는 델로스 동맹 기금에 의해 넉넉해진 재정으로 공무에 종사하는 시민(이때 다수의 무산 시민 계급이 시민권을 차지하게 되었음)들에게 보수를 줌으로써 대중적인 민주주의가 관철되었다. 그의 시대에 파르테논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같은 화려한 신전들이 건설되는 등, 아테네는 학술·예술·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아낙사고라스 (Anaxagoras)에게 배우는 등 그 자신도 개명된 지식인이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작과 함께 유행한 페스트로 두 아들과 함께 죽었다.
35.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 BC 477∼404년)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의 아리스티데스(Aristeides)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모아 결성한 대 페르시 아 해상 동맹. 페르시아의 침공은 479년에 격퇴되었으나, 그 뒤의 침공에 대비하여 결성된 것이며, 에게 해의 섬들과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폴리스가 가맹하여 그 수효는 약 200이 되었다. 함선을 낼 수 있는 폴리스(Polis)는 함선을, 함선을 갖지 못한 도시는 선박 건조와 함대 유지에 필요한 돈을 내서 연합 함대 를 조직해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했다. 델로스(Delos) 섬의 아폴론 신이 매개였기 때문에‘델로 스 동맹’이라고 일컬어졌다. 동맹의 기금도 처음에는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에 보관했다. 아테네는 이 금을 관리하는‘그리스 회계관’(헬레노타미아이)을 두고 동맹의 맹주가 됐다. 동맹 도시는 함선을 내어 실전에 참가하기보다는 금전을 내거나 공납금을 내는 쪽이 훨씬 많았다. 따라서 함선의 대부분을 내고 있던 아테네의 힘이 갈수록 강해졌다. 그리하여‘아테네 제국’이라 일컬어진 것처럼 동맹시를 강력하게 지배했다. B.C. 454년 동맹의 금고가 델로스에서 아테네로 옮겨져 페리클레스는 이 기금을 민주주의 정치 기금으로 활용하여 공무에 종사하는 시민들에게 보수를 주면서 민의에 따른 정치를 하여 아테네가 번영하였다. 공동의 자금이 아테네의 재정으로 유용되었기 때문에, 가맹 도시의 자금 제공은 아테네에의 공납금과 같은 성격을 띠었다. 원래 가맹 도시는 독립과 자치를 보전한 것이었는데, 아테네는 각 시에 민주 제도를 강제하고, 공납금의 증액 할당, 아테네 기준으로 화폐와 도량형 통일, 무역 통제, 동맹시로부터 경작지 몰수 따위를 동맹시에 강제했으며 분쟁을 아테네의 법정에서 해결토록 했다. 이 때문에 각 도시는 차례로 이반할 것을 기도했으나, 그 때마다 진압되고 독립을 잃었다. 이로 인해 아테네에 대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불만이 차츰 높아져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됐다.
36.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여러 도시의 공수(攻守) 동맹. 제1, 제2 멧세니아 전쟁에 의해 스파르타는 멧세니아인을 헤일로테스로서 예속시켰으나, BC 550년경 테게아와 싸워 이겼을 때는 테게아인을 헤일로테스로 하지 않고, 그들과 항구적인 동맹을 맺기로 하였다. 이윽고 다른 아르카디아의 도시들도 스파르타와 동맹하였다. 이것이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기원이다. 뒤에 코린트, 시키온, 트로이젠, 에피다우로스, 메가라, 아이기나 등이 참가하여, B.C. 6세기말까지에는 아카이아의 대부분과 아르골리스를 제외한 펠로폰네소스의 모든 도시가 이에 가입하였다. 동맹의 제도도 이 때 정해졌는데, 각 도시는 개별적으로 스파르타와 조약을 맺되, 동맹이 전쟁을 할 때는 모두가 군대를 보내어 스파르타 왕의 지휘 를 받아 싸우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 또는 코린토스에서 회의를 열어, 투표에서 다수 도시가 찬성해야만 스파르타는 각 시의 참전을 요구할 수가 있었으며, 또 스파르타는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의 개최를 거부할 수 있었다. 또한 세금을 과세하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기부금은 받았다. 이러한 조약에 따라 가맹시 코린토스와 메가라가 아테네에게 압박을 받자, 스파르타에 개전을 독촉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년)이다. 테베의 융성으로 BC 366년에 해체되었다.
37.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 BC 431∼404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자의 동맹 도시를 이끌고 싸운 그리스 세계의 전쟁. 델로스 동맹에 의하여 더욱 발전하게 된 아테네와 고래로부터의 강국인 스파르타와의 사이에는 일찍부터 알력이 있었지만, 상업 도시 코린토스가 아테네로부터 압박을 받게되고, 이를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 스파르타에 호소하자 개전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개전과 함께 스파르타가 육군으로 앗티카에 침입한데 대하여,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지도에 따라 마을의 주민들은 성벽 안에 수용하는 동시에 주로 해군에 의하여 적국을 공격하는 전술로 나왔다. 기원전 430년부터 수년 동안 아테네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인구의 1/4를 잃은 데다가 페리클레스가 병사한 가운데서도 아테네의 작전이 성공하여, 425년 스파르타는 강화를 제안하였으나, 아테네의 정치가 클레온의 강경론 때문에 이 강화는 성립되지 못했다. 그 후 스파르타의 명장 브라시다 가 암피폴리스를 함락시켰으므로 평화의 기운이 일기 시작하더니,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모두 전사 하자 421년에 니키아스의 조약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알키비아데스는 반 스파르타적으로 나와, 그의 제안으로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415∼413)을 행하였으나, 이것은 대실패로 끝났으며, 아테네는 전 해군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413년 이래 스파르타는 앗티카의 교통상의 요지 데켈레아를 점령하였으므로 식량의 수입마저 곤란하게 되었다. 이에 동맹 도시들은 이반하기 시작했고, 또한 페르시아는 스파르타 해군의 자금을 제공하였다. 아테네는 해군을 재건하여 소아시아 해역에서 싸웠으며, 또한 복귀한 알키비아테스의 활약으로 몇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자금으로 해군을 강화하기는 하였으나,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아테네에게 패배하자 강화할 것을 제의했으나, 아테네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그러나 끝내는 405년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는 격파되고, 이듬해에는 항복하였다. 이에 델로스 동맹은 해산되고, 함대는 12척만 남기고 모두 스파르타에 인도되었으며, 페이라이에우스 성벽은 파괴되었다. 이 전쟁 이후 그리스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38. 자연 철학 철학은 그리스에서 현저하게 발달하였다. 이 과학은 우주란 무엇이고 만물은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 세계의 기원을 최초로 설명하고자 시도했던 사람들은 소 아시아 도시의 현자들이었다. 세계 최초의 학자인 그들은 수학, 천문학, 지리학 등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하는 말에 만족하지 않고 과학적 설명을 추구했다. 최초의 철학자인 밀레투스 출신의 탈레스(기원전 6세 기)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다. 그리스의 철학자 가운데 특히 유명한 사람은 에페소스 출신의 헤라 클리투스(BC 6세기)와 아프데라 출신의 데모크리투스 (BC 5세기)였다. 헤라클리투스는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 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한다고 가르쳤다. 데모크리투스는, 세계의 기초는 신도 정령도 아니고 물질이라고 했는데,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그 물질은 끊임없이 결합과 분리의 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는 또 다양한 원자의 여러 형태의 결합에서 천태 만상의 자연 현상을 설명했다. 데모크리투스는 이러한 학설로 모든 일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종교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데모크리투스는 세계 최초의 유물론자라 말할 수 있다.
39. 탈레스(Thales) 소아시아의 밀레투스(miletus) 출신으로 BC 7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생존했으며‘7현인’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철학의 시조’라 불렀고, 그리스 자연 철학을 시작한 사람이다. 일식(BC 585년 5월 28일이라고 함)을 최초로 예언한 사람이다. 탈레스(Thales)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다. 그는 상인으로 짐작된다. 상업 때문에 이집트에 가서 신관들에게 배우고 피라미드의 높이를 그림자를 이용해 재는 법, 바다의 배까지 거리를 재는 방법, 각 변이 3 : 4 : 5의 비율인 삼각형은 직각 삼각형이라는 것들을 생각해 냈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당시 선진국에서 오랫동안 묻혀 있던 지식을 실용화했다.
40.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로 어려서 이집트와 동방 세계를 여행했다고 하며, 박학다식으로 유명하였다. 그의 저서는 철학 이외에 윤리학·수학·천문학·음악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플라톤은 그의 이름을 거론한 적이 없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설을 중시하였다. 그의 철학의 기본은 원자론(原子論)으로서, 레우킵포스의 원자론을 계승, 확립하였다. 즉 불변 불멸의 극미(極微)의 아토몬(atomon ;분할할 수 없는 것)과 허공의 존재를 주장하고, 무한한 허공 속에서 무수한 아토몬이 운동하여 집합함으로써 물질이 형 성되고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했으며, 아토몬은 모두 동질이나 형태나 크기가 다르며, 배열을 달리함으로 써 다양한 물체가 생긴다고 설명하였다.
41.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5∼525?B.C.) 그리스의 철학자로 밀레토스 출신이며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로서 밀레토스 학파를 완성하였다. 아낙 시만드로스가 만물의 시원을「무규정적인 것」이라고 보고, 그 성격을 명확하게 규명하지 않은데 대하여 공기(아에르: 실은 안개와 같은 것)가 바로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고, 이것을 회석하면 불, 농축하면 물, 또는 흙이 된다고 보았다.
42. 소피스트 27년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의 사회생활은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이전의 철학자 들은 주로 우주 기원의 문제와 만물 근원의 문제를 연구하였으나, 계급 갈등이 심화하고 정권 투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국가와 사회에 대한 또는 시민의 본분과 의무에 대한 사회 문제가 철학의 근본 문제로 등장하였다. B.C. 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웅변술을 가르치고 돈을 받던 소피스 트들이 이러한 문제를 연구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은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프로디코스, 힙피아스 등이다. 그들은 상대방을 설득하고 토론하는 기술을 가르침으로써 시민을 계몽하는 역할도 했다. 그들은 비판적 정신을 키우는 데 기여하고, 또 계몽적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반면에 공인된 도덕률에 대해서 회의나 경시의 풍조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도 가져왔다. 소피스트들은 만인에게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칙은 없다고 믿었다. 미덕의 기준이나 법률이나 치세법이나 모두 각 사람 각 민족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고 페르시아의 사회 제도가 각기 다른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들이 이러한 회의론에 빠져 진리의 탐구를 게을리 하고 논쟁에 이기기 위한 웅변술, 수사술에만 전념하였기 때문에 원래는「현인(賢人)」을 뜻하던「소피스트」란 말이 도덕이나 진리를 무시하는「궤변의 무리」를 뜻하게 되었다. 소피스트가 나타난 이후 철학의 대상은 자연계를 떠나 인생 문제로 옮아가고 철학과 자연 과학의 영역이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43.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 BC 485?~415?년) 트라키아의 아브데라 출신의 소피스트, 소피스트라 자칭한 최초의 사람으로 아테네 등에서 40년간 소피스트로서 활약하였다. BC 444년에 아테네가 식민시 투리오이를 건설하였을 때 그 시의 법전 기초의 임무를 맡았다.「인간은 만물의 척도」란 유명한 말은 각 개인의 주관적 판단 이외에는 보편적·객관적 인 진리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상반하는 주장은 모두 다 참이며, 어느 것이나 변론의 힘으로 이기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신들의 존재는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는 도덕 면에는 미치지 않았으며, 전통적인 도덕을 신봉하여 각자가 속하는 사회의 도덕률을 존중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44.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년)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보편적 진리와 도덕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은 자기 성찰로써 인 식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과 대립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회의론이 아테네의 청년들에 게 주는 해독을 염려한 나머지 스스로 가두에 나가 『누구든지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만은 스스 로 알고 있다』고 말했으며, 델피의 아폴로 신전의 격언인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다. 소크라테스는 독특한 대화법인 문답과정을 통해 대화자 자신이 올바른 해결을 찾도록 유도하고, 스스로 자신의 견해 가 틀렸음을 깨닫게 하는 방식을 주로 택하였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지식 그 자체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지식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판단법도 이러한 점에 착안하였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사람들의 반감과 오해를 초래하여,『국가가 숭배하는 신들을 숭배하지 않고 아테네의 젊은 이들을 오염시켰다.』는 구실로 소송당하여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의 제자와 친지들이 감옥에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감옥에서 도망치던가 자기 학설을 포기하라고 권고했으나, 그는 독배를 기꺼이 마시고 죽 음을 택했다.(기원전 399년) 소피스트와 달리 그는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확신하고 따라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권위, 곧 국가, 법률, 도덕 등을 존중하여 몸소 국법을 엄수했던 것이다.
45. 플라톤(Platon ; BC 429?~347년) 소크라테스의 학설을 계승한 사람은 귀족 출신의 플라톤이었다. 스승이 사망한 후 플라톤은 철학 학교(아카데미아)를 세우고 거기에 모인 청중에게 철학을 강의했다. 플라톤은 데모크리투스와는 달리 세계의 기초는 물질이 아니고 신사상, 즉 이데아라고 주장했다. 그는 진실의 존재는 이데아(관념)이고 물질적 존재는 이 이데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이원론적 관념 철학을 세웠다. 세계 최초의 거물급 관념론자인 그는 데모크리투스의 자연 및 사회의 과학적 설명을 일보 후퇴시켰던 것이다. 또한 그는『국가』에서,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하고 군인이 국가를 지키며 근로자가 일하는 국가를 이상 국가로 주장했다. 플라톤은 철학자와 군인도 사유재산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며 일하는 근로자에 대해서는 국가의 행정에 관여하지 못하며 시민권도 가질 수 없는 노예와 다를 바 없이 생각했다. 플라톤은 사회 구성원을 이성을 지닌 자유인과 주인의 명령에 복종만 하는 노예로 구분하여 노예주 철학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플라톤은 이러한 이상 국가를 시실리 섬에서 실현코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의 국가론은 아테네 민주주의를 부정한 일종의 귀족주의 정치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민주정치가 중우정치로 타락 해 가던 당시의 실정을 고려한다면 그의 주장들 속에서 구국 의식의 일단을 찾아볼 수도 있다.
*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 :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세 가지 분리된 영혼의 능력에 대응하여 세 가지의 분리된 계급이 생기게 된다고 하였다. 첫 번째로 욕구적인 것에 상응하는 것은 '서민' 이다. 즉, 일상 생활의 여러 가지 수요를 공급하는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다. 두 번째로, 기개있는 자에 상응하는 '수호자' 또는 '보조자' 로서 밖으로 적을 방위하고 안으로 질서를 유지하여 국가를 확보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세 번째로는 이성적인 것에 상응하는 최고 계급, 즉 '통치자' 또는 '철학자'로서 그들의 사명은 입법과 그 실시, 즉 정치를 담당한다.
46.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년) 고대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로 칼키디케 반도의 스타기로스에서 출생. 부친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의 아민타스 2세의 주치의였다. 17세 때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약 20년간 체재하였다. 그 후 아테네를 떠나 41세때 당시 13세의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 되었다. BC 335년 아테네로 돌아와 아테네 교외 리케이온에 학원을 열어 제자들을 길렀으며, 숲을 거닐면서 사색하고 강의를 하였기 때문에 소요학파라고 불려진다.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아테네에 반 마케도니아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마케도니아와 연고가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독신죄로 고소되어, 학원을 테오프라스토스에게 위임하고 칼리스시로 도망하여 거기서 위장병으로 죽었다. 그의 연구는 실증주의적 경향이 강하여,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윤리학설ㆍ정치학을 비판하였으나, 그의 체계적 사유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플라톤 철학의 영향이 있다. 그의 연구는 형이상학ㆍ논리학ㆍ윤리학ㆍ정치학ㆍ심리학 ㆍ예술학ㆍ생물학 등에 미쳤고, 그 각 분야에 독자적인 방법과 내용을 편술하여 이 학문의 기초를 쌓았 는데, 그는 이들 여러 분야의 인식을 형이상학을 정점으로 하는 체계로 구축하고 전 존재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전 시대에 발달한 모든 과학을 집대성하였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는 과학의 다양한 문제가 취급되어 있다. 그는 비단 철학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학문을 체계화하는데 힘썼다. 그의 방대한 학문 체계는 뒤에 스콜라 철학에 도입되어 중세의 사상계에 군림하고 사라센의 학문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지식이 다방면에 걸쳐 훌륭한 학설을 많이 제시하였지만, 다른 많은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 제도를 정당한 현상으로, 즉 노예 제도는 자연의 영원한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고대의 이 위대한 사상가조차도 노예주 계급의 고유한 사고방식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저서로는 에우데모스, 철학에 대하여, 시학, 국제지, 정치학, 오르가논, 자연학, 천체론, 형이상학, 영혼론 등이 있다.
47. 호메로스(Homer) 그리스의 서사 시인으로‘일리아스, 오딧세이아’등의 작가. 생존 연대는 BC 1200년부터 700년쯤까지 여러 설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매우 오래된 인물로 생각했지만, 요즘은 시대를 상당히 내려보는 경향이 있어 BC 800년 이전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출생지도 명확하지 않아, 스미르나·키오스·유 로폰·이타카·필로스·아르고스·아테네 등이 거론된다. 언어상으로는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과 아이올리스 지방의 경계로 생각되며 장님이라 설도 있다. 그의 2대시는 최초의 그리스 문학이며, 또 최대의 걸작이다. 그리스 시대를 통하여 가장 많이 강의되었고, 또 그리스인의 의인적 신관과 인간관을 형성 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시의 무대는 미케네 시대인데, 여기에다 작자가 속했던 시대의 여러 가지 요소가 가미되었다. 그러나 그가 생존하기 전부터 있었던 원(原)호메로스의 편집자인지, 혹은 원작자인 지, 또‘일리아스’‘오딧세이아’가 한 사람의 작품인지 두 사람의 작품인지 등에 관하여서는 아직 일정한 설이 없다. 이것이「호메로스 문제」라고 불리는 것이다.
48. 헤시오도스(Hesiodos ; BC 700년경) 그리스의 서사 시인. 고대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호메로스보다 좀 뒷시기의 인물로 본다. 작품으로는『노동과 나날(Ergakai Hemerai)』『신통기(神統記 : Theogonia)』2편이 남아 있는데, 후자는 그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노동과 나날』에 따 르면 그의 아버지는 소아시아 키메의 상인이었는데 나중에 그리스 본토의 보이오티아에 농업을 경영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재산은 헤시오도스와 그 동생 페르세스에게 나누어졌는데, 동생은 재산을 곧 잃어버리고 형에게 더 많이 요구해 재판이 벌어졌다. 형 헤시오도스가 동생에게 사람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해야만 한다는 것을 훈계한 것이『노동과 나날』이다. 당시의 농민 생활, 귀족이 부정하게 행한 재판, 그 밖에 민간 풍속을 아는 데 중요한 문헌이다. 『신통기』는 올림포스의 신들의 계보를 찾아 세계의 생성을 체계화한 것이다. 유비아 섬의 칼카스 시에서 백일장에 우승했으며, 로크리스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49. 사포(Sappho ; BC 612?~?) 소아시아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 태생의 여류 서정 시인. ‘10번째의 뮤즈’로 일컬어졌다. 정변 때문에 소녀 시절에 잠시 시칠리아로 갔다가 나중에 귀국해 소녀들을 모아 일종의 종교적 단체 생활을 하면 서 음악과 예법을 가르쳤다. 그 때문에 사포(Sappho)를 일종의 동성애자로 보기도 하지만, 결혼해 클레이스라고 하는 딸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간결한 시행에 감미로운 정열을 담아, 다양한 운율을 자유 자재로 구사하여 자연에의 동경을 표현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시대에는 7권(혹은 9권)의 시가 있었는데 연애를 노래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기독교 시대에 대부분 파기되어 지금은 단편 외에는 2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미소년 파온과의 불행한 사랑 때문에 레우카스의 낭떠러지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녀가 출현한 시대는 이른바 서정시의 시대로, 알카이오스(Alkaios),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 솔론 (Solon), 그 밖의 서정 시인이 속출했으며, 여류 시인도 배출됐다.
50. 아나크레온(Anakreon: BC 570∼?) 그리스의 서정시인, 이오니아의 테오스 섬 출신으로 아브데라로 이주하고, 후에 사모스 섬의 참주 폴 리크라테스, 그의 몰락 후는 아테네의 참주 힙파르코스의 궁정에 초빙되었다. 명랑하고 경쾌한 술과 사 랑의 노래를 즐겨 불렀으며, 독음(獨吟)·풍자시 등을 많이 지었다. 후세에 그의 시풍을 모방하는 자가 많아「아나크레온풍」이라 불리었다.
51. 그리스의 미술 그리스의 미술하면 파르테논 신전과 그리고 조각들을 생각할 수 있다. 건축과 조각의 수준을 볼 때 회화의 수준도 상당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으나 회화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 주로 항아리에 그려진 기하학적 문양과 풍속화를 통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 미술의 작품들에는 크레타 양식의 쾌활한 운동감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딱딱한 점에서는 이집트 미술을 능가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그림들은 누구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이집트 미술과는 상당히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행위가 아닌 감정을 그린 회화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 사람들은 처음부터 죽은 자보다 살아있는 자에게 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52. 그리스의 연극 그리스의 연극은 술과 정열, 그리고 재생의 신인 디오니소스에 대한 제사에서 유래되었다. 디오니소스의 제사에서는 희생물로 산양을 죽이고 그것을 뒤집어 쓴 제사장과 합창대가 서로 대사를 주고받으며 비극(tragodia)을 상연하였다(tragos〓산양, odus〓합창대) 연극의 주제는 인간의 오만(Hyburis)때문에 신의 징벌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는데, 국가적 행사로 상연된 연극에서 그리스 시민들은 시민 의식을 정화할 수 있었다 한다.
53. 아이스킬로스(Aischylos; BC 525?∼456년) 아테네 3대 비극 시인 중의 한 사람. 페르시아 전쟁에서는 마라톤 및 살라미스에서 싸웠다. BC 468 년경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에 의해 초빙되어 후에 귀국하였으나, 재차 시칠리아 섬으로 가서 젤라에서 죽었다. 비극의 배우를 종래의 1인에서 2인으로 늘려서 대화를 시킴으로써 그 형식을 바꾸었으며, 내용도 사상적ㆍ예술적으로 높이는 등 참된 의미의 비극을 창조했다. 작품은 종교성에 넘치고 등장 인물은 초인적인 영웅이다. 제우스를 전지전능한 선한 신이라고 믿고, 신화 전설을 다시 해석함으로써 이 신념을 관철하려 애썼다. 90여 편의 작품 중 7편만이 전하는데,‘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리스 비극으로서 는 예외로 당시의 사건을 취급하였으며, 페르시아 전쟁의 목격자 기록으로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다.‘오레스테이아’3부작은‘아가멤논’,‘코에포로이’,‘에우메니데스’로서 씨족제적 사회에서 폴리스 사회 에의 진보를 명확히 의식하고 있으며, 이 외에‘구원을 바라는 여인들’,‘테베로 향하는 7인’,‘사슬에 얽매인 프로메테우스’가 있다.
54. 소포클레스(Sophokles ; BC 496?~406년) 아테네의 3대 비극 시인의 한 사람. 부유한 무구 제조자의 아들로 서 아테네 근교 콜로노스에서 태어 났다. 어려서부터 우수한 교육을 받아 음악과 체육에 뛰어났으며, 살라미스 해전 후의 축제에 소년 무창 대의 선두에 섰다. BC 468년에 최초의 작품으로 선배 아이스킬로스를 누르고 우승하였고, 이후 24회나 우승하였다고 한다. 정치면에서도 장군이나 델로스 동맹의 재무관과 같은 요직에 있었지만, 품성이 온후하여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던 사람이었다. 제3의 배우가 출현하는 극을 처음으로 썼고, 합창대를 개혁하기도 하여 비극을 기술면에서도 완성하였다. 작품은 치밀한 구성하에 완전한 언어로 씌여졌으며, 그 기교는 더없이 완전했다. 아이스킬로스가 신의 정의를 믿은 데 대하여 그는 신의 전능과 인간의 무력을 확신하고, 불합리한 신의 지배도 그대로 승인했다. 따라서 그가 그리는 인물은 초인적인 영웅이 아니라 인간미를 띠고 있다. 123편의 작품 중 전하는 것은 7편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이 왕이 영화의 절정에서 부친을 죽이고 모친을 아내로 삼는 중죄인으로서 비참의 극으로 역전하는 것을 그린 것인데, 고래로 가장 비극적인 비극으로 치고 있다. '안티고네'는 이 여주인공의 성격 묘사나, 불문의 법과 국왕 의 법률과의 대립 문제를 제기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55.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 BC 445?∼385?년) 그리스의 희극 작가, 시인. 생애의 상세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시류에 반대되는 보수적 입장에서, 소피스트의 신식 교육이나 그 영향을 받은 에우리피데스의 신식 비극 등을 반대했다. 활동한 시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의 30년간과 일치하며, 시종 평화주의자로서 클레온을 중심으로 한 호전적 정치가를 통렬히 공격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패배(404) 이후의 작품에는 시사적 정치 문제에 대한 강렬 한 관심은 사라지고, 이른바 중기 희극의 경향이 나타난다. 작품은 기지와 해학, 기발한 공상과 달콤한 서정이 넘치는 반면, 당시의 지도적 인물의 희화나 민중의 생활 묘사를 포함하고 있어, 정치사나 사회사의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작품으로‘아카르나이의 사람들’‘기사(騎士)’,‘구름’,‘벌’‘평화’‘ 새’‘여자의 평화’‘테스모포리아를 축하하는 여인들’‘개구리’‘여자 의회’‘복의 신(神)’의 11 편이 현존한다(연대순).
56. 메난드로스(Menandros : BC 342?∼291?년) 아테네 태생의 희극 작가. 알렉산더의 초빙을 받았지만 조국을 사랑한 메난드로스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이 100편 이상이나 있었다고 하지만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20세기초부터 사막 속에 매몰되어 있던, 그의 작품을 기록한 파피루스가 몇 개 발견됐다. 완전한 것이 아니라 모두 조각이었지만 그의 작품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로마의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의 희극은 모두 그의 작품을 모방하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앞 시기의 작가와 달리, 정치 풍자는 하지 않고 일상생활과 연대 따위가 주제로 되어 있다. 피레우스에서 수영하던 중 익사했다고 한다.
57. 헤로도토스(Herodo-tus ; BC 484?∼430?년) 그리스의 역사가로 소아시아의 할리카르낫소스의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참주 리그다미스의 타도 운동 에 실패하자, 사모스에 망명하였다. 한때 귀국하였다가 다시 아테네를 찾아 페리클레스, 소포클레스와 사귀고, 아테네 민주 정치의 찬미자가 되었다. BC 444년 아테네의 투리오이 식민에 참가하여 그 곳의 시민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북으로는 흑해 북안, 남은 이집트 남단, 동은 바빌론에 이르는 대 여행을 하여 견문을 넓혔다. '역사'(9권)는 동서 양대국이 충돌했던 페르시아 전쟁을 주제로 한 것인데, 그 사이사이에 많은 에피소드들을 삽입하였으며, 대 여행에서 얻은 견문도 기술하였다. 신화나 속설에 대해서는 여러 번 이오니아식의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철저하지는 못하며, 또 신탁이나 조짐을 믿으며, 인간의 오만에 대한 신의 보복이 있을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강한 연구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자기가 탐구한 바에 의하여 기술하였기에 후세에「역사의 아버지」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각 민족마다 풍속ㆍ습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관습에 대해서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58. 투키디데스(Thukydides ; BC 460?∼398?년) 아테네 태생의 역사가로 BC 424년에 장군으로 뽑혀 칼키디키의 암피폴리스를 구원하러 나섰는데, 현지에 도착하자 도시는 이미 함락되어 있었다. 그 뒤 망명해 20년간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BC 404년에 귀국했지만 그 뒤의 생애는 분명치 않아 죽은 곳이나 연도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자‘이것은 대 전쟁이 될 것이다’고 생각해 즉시 역사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현존하고 있는 그의『펠로폰네소스 전쟁사』(8권)는 BC 411년 전반에서 중단되어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역사는 연대기적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민회 나 전장에서의 지도적 인물의 연설이 많이 삽입되었고, 역사 추진자의 의도나 사상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의『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헤로도토스의 이야기식 서술과는 달리 엄밀한 사료 선택과 비판이 이루어졌고, 대상을 엄밀히 전쟁사에 한정했으며, 종교나 도덕에 구애됨이 없이 오로지 정치적 관점에서 인과 관계를 설명하였고 목격자가 한 이야기도 면밀한 검토 끝에 기술했으며, 공문서도 이용하는 등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진실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한 가치가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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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윤희 원문보기 글쓴이: 최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