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릉은 3대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의 봉릉이 같은 언덕에 조영된 쌍릉 형식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병풍석의 규모와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초기 조선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헌릉의 능 앞 석물들은 망주석, 혼유석, 장명등은 1쌍이고 양석, 호석은 각각 4쌍, 문무인석과 마석은 각각 2쌍씩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왕조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한 것이며 조선시대에서는 가장 웅장한 배치 방법이다.
헌릉이 지닌 조선 초기 왕릉으로서의 특성을 두 가지 꼽자면 소전대와 상석 아래 놓인 고석의 개수를 들 수 있다. 정자각 북서측에 있는 소전대라고 하는 석물은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지방을 불사르는 시설로 태조 건원릉과 이곳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석물이다. 한편 봉릉 앞 상석 아래에 놓인 고석의 개수가 5개인데, 이와 같이 고석이 5개인 능은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으로 모두 조선 초기 상설제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헌릉에는 불교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법석은 물론, 원찰의 설립을 금하였다.
원경왕후가 1420년(세종 2) 7월 10일 수강궁(창경궁) 별전에서 태종보다 일찍 세상을 뜨자, 태종의 명으로 같은 해 9월 17일 대모산 기슭에 건좌손향으로 왕후의 능을 조영했는데, 억불정책으로 원찰을 세우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아들 세종은 같은 해 9월 6일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 옆에 봉릉을 따로 만들어 아버지를 모시고 난간으로 연결하여 쌍릉을 조성하고 곡장을 둘렀다.
능원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손상된 원래 신도비와, 1695년(숙종 21) 하나 더 증설하여 세운 것이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조의 건원릉, 정종의 후릉, 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 때까지 세웠다가 그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했는데, 현재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과 헌릉에만 볼 수 있으며 세종의 영릉 신도비는 서초구 내곡동 원래의 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73년에 발굴하여 현재의 청량리 홍릉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입구에 있다.
인릉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와 비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 겉으로 보아서는 혼유석을 하나만 설치하여 단릉과 같은 형식이다. 인릉의 능역에는 곡장 3면, 난간석 12칸, 석양 2쌍, 석호 2쌍, 혼유석 1개, 망주석 1쌍, 장명등 1개, 문석인과 석마 각 1쌍, 무석인과 석마 각 1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과 재실 등이 있다.
봉분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 12칸만을 둘렀으며, 기타 상설은 『국조상례보편』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 장명등은 조선 초기의 팔각등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문무석인은 생동감 있는 표정과 힘차고 활달한 조각 기법, 이목구비의 표현 등이 매우 사실적이어 조선 후기의 석물조각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릉의 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이 중 하나는 최초의 조영 당시의 것이고, 하나는 고종 때 순조숙황제로 추존되면서 세운 것이다.
순조는 1834년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여 1835년 4월 19일 파주 교하 구후(舊後) 장릉(長陵) 국내에 안장하였고, 능호를 인릉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풍수지리상의 불길론이 대두되어 천장을 결정하게 되었다.
『철종실록』1855년(철종 6) 1월 18일의 기사에는 "인릉의 능침을 봉안한지 21년이나 되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외의(外議)가 서로 논쟁하고 있다고 하니, 나의 마음이 송구스럽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어머님께서도 이런 내용으로 하교하셨지만, 일이 지극히 중차대한 데에 관계되므로, 경 등과 상의하여 결정해서 행하려 한다.”로 시작하는 내용의 인릉의 천장에 대한 논의가 기록되어 있다.
논의가 있은 다음해인 1856년(철종 7) 10월 11일에 인릉은 현재의 위치인 서초구 내곡동 헌릉 서쪽 언덕으로 천장되었다. 1857년(철종 8) 8월 4일에는 창덕궁 양심각에서 순원왕후 김씨가 승하하여 같은 해 12월 17일에 인릉에 합장하였다.
23대 순조(純祖)
생몰년도 : 1790년 ~ 1834년
재위기간 : 1800년 ~ 1834년
생애이야기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790년(정조 14) 6월 18일, 수빈 박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정조는 의빈 정씨가 낳은 맏아들 문효세자가 1786년 어린 나이에 요절하자, 둘째 아들을 1800년(정조 24) 1월 1일 왕세자로 책봉했다. 그 해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자 11세 어린 나이의 세자는 7월 4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 후 5년 동안 나이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영조의 계비였던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이 시기에 정순왕후를 등에 업은 벽파와 반대파인 시파가 대립하고, 이는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천주교 탄압이 벌어져 정약용 등이 유배당하고 1년 사이에 300명의 교인이 학살당했다.
1804년(순조 4)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금 장인 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때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정의 요직은 안동 김씨, 반남 박씨 등 혈연을 중심으로 독점되었고, 척신들 사이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더불어 수해와 전염병 등으로 민심이 피폐해지자 홍경래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순조는 3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세도정치에 밀려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하고 1834년(순조 34)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4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일화
조선 후기 순조의 재위 기간은 척신들의 횡포와 자연 재해 등으로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가운데 잦은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그 중 1811년 12월 홍경래가 평안도 가산 다복동에서 일으킨 반란은 근대 이전 조선시대에 일어난 최대의 민중반란이었다. 평안도 용강 출신의 홍경래는 순조가 즉위하던 해인 1800년 경부터 이미 한반도 북쪽 지역을 널리 돌아다니며 정세를 파악하고 동조자를 모아 반란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뛰어난 무사들과 지식인을 모은 홍경래는 1811년(순조 11) 군대를 일으켜 8개 군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남쪽으로 진출하다가 정부군에게 패한 끝에 농민들과 함께 정주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하였다. 봉기군은 저항을 계속 하였으나, 1812년(순조 12) 4월 19일, 정부군이 화약을 터뜨려 성을 무너뜨리고 들어가 반란을 진압하였다. 홍경래는 전사하고 우군칙 등 다수가 체포되었으며, 봉기군 잔존 세력 중 1,917명이 효수 당했다.
홍경래의 난은 새로운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무력도 구성하지 못하여 정부군에게 패배하였지만, 낡은 지배체제에 저항한 사건으로써 후대 민중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헌인릉의 오리나무 숲은 서울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될 만큼 경관이 뛰어나다.
흰눈이 쌓여 있는 숲의 모습.
헌릉
3대 태종(太宗)
생몰년도 : 1367년 ~ 1422년
재위기간 : 1400년 ~ 1418년
생애이야기
태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1367년(고려 공민왕 16) 5월 16일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383년(고려 우왕 9)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이 되었는데, 조선의 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 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조선이 건국된 1392년 정안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 등의 경계로 세자 책봉에서 탈락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고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 소생의 세자 방석을 폐위시켰으며, 둘째 형인 영안군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양보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박포의 계략에 넘어간 태종의 넷째 형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태종은 이를 평정하고 1400년 11월,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1405년에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고, 17년 10개월의 재위기간 동안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다. 사병 폐지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여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는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1418년(태종 18)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정치에 관여하다가 1422년(세종 4) 5월 10일 연화방 신궁(창경궁)에서 56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일화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 등과 대립하여 세자 책봉에서 탈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더불어 정도전이 재상 중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왕자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이방원은 결국 1398년(태조 7) 8월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방원은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등의 일파를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도 아울러 살해한다.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 난을 통해 태조는 방원의 형인 영안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교지를 내렸고, 영안군은 곧 조선 제2대 임금 정종으로 즉위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신의왕후의 소생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불공평한 논공행상으로 이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중신 박포가 이방원의 넷째 형 이방간으로 하여금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이로 인해 이방간과 이방원은 개경 시가지에서 무력 충돌을 하게 되었는데, 이방원이 승리하고, 박포는 사형에 처했으며, 이방간은 유배됨으로써 진정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지위가 더욱 확고해진 이방원은 그해 2월 세자로 책봉되고, 11월에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되었다.
태종의 릉인 헌릉
처음 본 느낌...크다...봉분도 태산처럼 크고 석물 또한 크다.
대부분 혼유석을 바치는 다리가 네개인데 반해 태종의 릉은 다리가 다섯개이다.
역시 왕이 묻힌 릉이 명당은 명당인가보다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음에도 능침에는 눈이 반쯤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