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일부 호족과 6두품 계열의 유학자들이 문벌귀족을 형성하였다. 여러 대에 걸쳐 중앙의 고관을 배출한 가문으로 경원이씨(이자겸), 파평 윤씨(윤관), 해주 최씨(최충), 경주 김씨(김부식) 등이 여기에 속한다.
문벌귀족은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문하성과 중주원의 고관이 되어 정치를 주도하였다. 또한 과전과 공음전을 받아 경제적 혜택을 누렸으며, 권력을 이용하여 사유지를 넓혔다. 이들은 서로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어 결속을 강화하였는데, 특히 왕실과의 통혼을 중시하였다.
한편,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한 지방 출신의 신진 관리들은 문벌 귀족의 권력 독점에 반감을 가졌다. 그중 일부는 왕의 측근 세력이 되어 이들과 대립하였는데,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은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대표적 문벌 귀족이었던 이자겸은 딸들을 예종과 인종에게 거듭하여 시집보내면서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다. 이에 일부 신진 관료 세력들이 왕과 함께 이자겸을 몰아내려고 하자, 이자겸은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부하인 척춘경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1126). 그러나 이자겸은 인종에게 포섭된 척춘경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 난으로 문벌 귀족 사회의 분열이 더욱 심화 되었다.
이에 묘청 등 서경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앞세워 서경 천도를 적극 추진하면서 칭제 건원과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문벌 귀족의 반대로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로 정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1135),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게 1년 만에 진압되었다. 이는 지배층 내부 분열로 사상적 대립 이었다. 즉,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으로 서경파(묘청)는 고구려 계승중시하여 북진정책을 주장하는 반면, 개경파(김부식)는 신라계승을 중시하여 유교적 성향으로 사대를 하여야 한다고 했다.
묘청의 서경천도의 실패로 분사제도 폐지로 서경지위가 하락하였으며 북진정책 후퇴와 보수적 성향이 강화되었다. 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두고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에서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며 자주성을 평가하고 있다.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은 진압되었지만 문벌 귀족들은 사회 모순에 대한 개혁을 외면하였다. 국왕도 젊은 문신들과 함께 향락에 빠져 실정을 거듭하였다. 게다가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고, 하급 군인은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잡역에 빈번히 동원되어 불만이 높아지면선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무신정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제가 보건데 서경 임원 역의 땅은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아주 좋은 땅입니다. 만약 이곳에 궁궐을 짓고 전하께서 옮겨 앉으시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또한 금나라가 선물을 바치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요, 주변의 36나라가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옵니다. <고려사>
김부식의 주장
금년 여름 서경 대화궁에 30여 개소나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서경이 만약 길한 땅이라면 하늘이 이렇게 하였을 리 없습니다. 또, 서경은 아직 추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거동하시면 농작물을 짓밟을 것입니다. 이는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아끼는 뜻과 어긋납니다. <고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