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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악마의 공격을 받은 이들
진짜 많은 사람들이 악마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듣곤 한다. 아주 유명한 구마사인 프랑스 예수회 신부인 똥꿰데의 말은 넒은 의미에서 인용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마 증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통과 끊이지 않는 질병, 불행, 만사의 불운 등에서 자유스러워지기 위해 구마사의 예식을 찾는다. 부마자들은 흔하지 않지만, 이런 불행한 사람들은 군단마냥 불어나 있다”.
진짜 부마자들과 자신의 고통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어떤 믿음직한 말을 구마사로부터 듣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런 똥꿰데 신부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똥꿰데 신부가 이 글을 쓸 때는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새로운 다른 분야들이 생겨났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쪽에서의 공격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을 나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말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부류는 서양의 향락주의와 물질주의를 부추기는 소비문화로써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잃게 한 장본인이다. 특별히 이탈리아의 경우 대부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역할이 컸으며, 막시즘을 통해 문화와 교육, 흥행 등에 영향을 미쳤다. 로마의 경우 주일미사에 매 주 참여하거나 어쩌다 참여하는 신자는 전체 인구의 12% 밖에 되지 않는다. 종교가 소멸하는 곳에는 항상 미신이 자리한다는 수학적인 뻔한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서부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교령술(交靈術)을 실행하거나 요술이나 신비술이 확산된다. 이와 더불어 요가, 참선, 초월적 명상 등이 첨가되고, 모든 윤회설에 기초한 의식들에 참여하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접신 등 상상할 수 없는 일들에 빠지고 있다. 요가를 배우기 위해 힘들게 인도까지 찾아갈 필요가 없이 이제 우리들 대문만 열면 어디에서든지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만들 수 있게 되어 버렸다. 이런 방법들은 보기에는 아무런 해악을 끼치지 않는 것 같지만, 환각과 정신분열에까지 도달하게 만든다. 또한 이단의 흔적들이 곳곳에 스며들고 있는데 자주 이런 것들은 사탄의 직접적인 상표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요즘 텔레비전에서는 마술, 죽은 영혼과의 접하는 교령술을 교묘한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다. 원하기만 한다면 이들에 대한 책들을 서점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마술을 하기 위한 여러 가지 도구들은 통신판매를 통해 가정판매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폭로하고 싶은 것은 여러 신문들이나 공포 영화 등에서 다루는 섹스물이나 폭력물은 자주 사탄의 속임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군중을 집착 증세까지 몰고 가는 어떤 음악의 확산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사탄적인 록 음악을 들고 싶다. 이에 대해 삐에로 만떼로 는 자신의 저서 사탄과 그 권모술수의 전말 (1988년 Udine, segno 출판)에서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몇 몇 학교에서 초청강연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이런 사탄의 함정에 많은 젊은이들이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은 이런 것이 심지어는 중 고등학교 내에 교령술과 마술의 형태로 엄청나게 퍼져있다는 것이다. 작은 마을에까지 악이 일반화되어 있는 상황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너무나도 많은 교회 종사자들이 이런 문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신자들을 내버려두고 있는 상황에 대해 나는 도저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다. 세례성사(이런 생각에는 교황 바오로 6세도 동의할 것임) 예식에서 구마를 거의 전부 없애버린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매 번의 미사가 끝난 뒤 드리던 성 미카엘 대천사께 드리는 기도를 삭제해 버린 것도 과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는 모든 구마사목이 시들도록 소홀히 해버린 주교들의 무성의함도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모든 교구의 대성당 내에 적어도 한 명의 구마사를 두어야만 할 것이고, 잦은 방문이 있는 성당과 성지에도 구마사제를 임명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구마사는 아주 희귀하게 여겨져서 도저히 찾을 수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구마사의 활동은 사목적 가치로 볼 때 없어서는 안될 활동이며 설교와 고해성사, 성사들을 집행하는 집전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가톨릭 교계는 비통하게 반복할 말이 바로 내 탓이로소이다 라며 가슴을 쳐야한다. 나는 많은 이탈리아 주교들을 알고 있는데, 이들 중 단 한 명의 주교만이 구마를 행했고, 구마를 도왔으며 이런 문제를 직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미 이에 대해 다른 책들을 통해 언급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반복할 생각은 없다. 즉, 어느 한 주교가 어떤 심각한 요청을 받았을 때(정신병자에 의한 것이 아닌), 이를 개인적으로나 혹은 위임사제를 통해 돌봐주지 않게 된다면 중대한 죄를 범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 구마사들은 학교를 잃은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과거에 실제적으로 구마를 행하던 구마사는 새로운 구마사들을 양성하였다. 이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할 기회를 마련하겠다.
관심 주제에 다시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영화 이야기를 한 마디 해야 겠다. 지난 1975년 2월 2일 바티칸 라디오 방송에서는 영화 “엑소시스트”의 감독 윌리엄 프렌드킨과 이 영화를 위해 자문역할을 한 예수회 신학자 토마스베밍건과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감독은 1949년에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공포의 줄거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 이 영화의 의도였다고 밝혔다.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은 그 내용이 진짜 부마를 다룬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함구했지만, 부마진단여부는 신학자들의 몫으로 돌렸다.
진행자는 이 영화가 공포물의 한 종류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종류인지 그 자리에 동석한 예수회 신부에게 묻자 역시 신학자들의 몫이라는데 결정적으로 동의하였다. 이 영화는 전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는 점 이외에도 무척 신중하게 악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점차 잊혀져 가고 있던 구마사들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눈을 뜨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악마의 경악을 금치 못할 방해에 떨어질 수 있는가? 일반적인 방해에서부터 시작해 모든 이들을 공격하는 유혹들로 구분해 보고자 한다. 경우에 따라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이런 일반적인 방해에 빠져 들 수 있다. 악마의 일반적인 방해를 네 가지 요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셨을 때, 악의 전염에 의한 피해, 죄에 단단히 묶여 있는 중죄 상태, 악마와 접하는 사람들 혹은 그런 장소를 자주 찾는 것 등이다.
1. 하느님께서 허락하셨을 때
분명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일어날 수 없으며, 하느님께서 절대로 악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할 경우(자유를 소유한 창조물로서) 악을 허락하신다. 하지만 악으로부터 선을 선별해 내시는 분이 하느님이란 사실이다. 첫 번째 경우는 인간적인 과실에 의해서가 아닌, 악마의 개입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굳건할 때, 하느님께서 악마를 이겨낼 수 있는 모든 은총을 주시면서 자주 사탄의 일반적인 방해(유혹들)를 허락하신다. 또 주님은 가끔씩 사탄으로 하여금 놀라운 활동(부마 혹은 악의 지배세력의 방해)을 하도록 허락하셔서 인간이 겸손과 인내, 절제를 연마하도록 하신다.
첫 번째 경우에 해당되는 실례들은 이미 우리가 고찰한 육체적인 고통의 원인이 되는 외적 행위에 의한 것으로(성 비오신부나 성요한 비안네)가 당한 채찍질 당하거나 몽둥이질을 당하는) 욥과 성 바오로 사도가 당한 악마의 괴롭힘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다시 더듬어 보고자 한다.
많은 성인들의 삶은 이런 예들을 흔히 보여주고 있다. 성인들 중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성인 두 분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깔라브리아 신부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마리아 수녀(아랍 최초의 복녀)에 관한 예를 들고자 한다. 이 두 실례는 인간적인 아무런 이유 없이(악마의 공격을 당한 당사자들의 책임 없이), 악마에 의해 신체 요소들이 자의에 의한 조절 불능 상태가 되어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게 됨으로써 그들의 성화(聖化)에 반대되는 일을 만든 전형적이고 고유한 부마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2. 악마의 주문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이 경우 또한 악의 원인 제공자가 본인이 아니다. 또 자신이 원해서 주술사에게 찾아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힐 목적으로 악마를 이용한 주문을 청하는 경우, 자신에게도 그 악이 엄습한다. 이에 대해서 나는 앞으로 한 장(章)을 설정해 폭넓게 다룰 것이다. 여기에서는 단지 악마를 통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 악마의 유린이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실제로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묶임 의식, 시선(視線)을 이용한 저주, 유린(蹂躪), 저주(詛呪) …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악마를 이용한 주문(呪文)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런 악마를 이용한 주문(呪文) 때문에 부마자가 되거나 그 외 악마의 세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자주 발생한다는 것 또한 첨부하고 싶다. 이런 악을 이용한 주문을 믿지 않는다고 우기는 교회 종사자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막상 이런 악의 피해를 본 자신들의 신자들을 보호할 능력이 되는지 난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런 일을 허락하실 수 있느냐고 놀라워하는 사람도 있다. 주님은 자유를 가진 창조물로 우리들을 만드셨고, 이런 당신 창조물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극악한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창조물인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마다 자기가 살아온 삶의 형태에 따라 심판 받을 것이고, 최종적으로 보상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주신다. 결국 우리가 자유를 적절히 사용하게 될 때, 그에 맞는 보상을 누린다. 반대로 잘못 사용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다. 사람들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거나 수만 가지 형태의 표독함으로 이웃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는 자유의지의 인간이다.
두려운 사건 중의 하나를 예로 들면, 누군가를 살해하기 위해 청부 살인자에게 돈을 지불하는데도 하느님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계신 하느님이 아니다. 이처럼 내가 어떤 주술사나 무당에게 찾아가서 돈을 지불하면서 어떤 누군가에게 해를 입게 해달라고 요구하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이를 막지 않으신다. 물론, 많은 경우 이런 이들을 막고 계시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고 있는 사람과 열성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쉬고 있는 사람이나 혹은 이보다 더한 사람, 습관적으로 죄 속에 빠져 사는 사람들 보다는 훨씬 더 보호를 받는다.
마지막으로 사기꾼들의 천국인 악마를 이용한 주문과 악마의 현혹술에 대해 언급하겠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런 부류는 진실보다는 엄청난 거짓이 만연한다. 이 분야는 사기꾼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고,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변덕스러운 이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마사들만 조심할 것이 아니라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3. 죄 속에 단단히 묶여 있거나 중죄 상태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불행하게도 이런 상태가 점차로 증가하고 있으며, 그 결과 악마로부터 공격을 받는 사람들의 숫자도 그만큼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근본적으로 진짜 원인은 항상 믿음의 결핍에서 온다. 믿음이 부족하면 할수록 무속이 증가일로라는 당연한 수학적인 계산이 나온다. 복음에서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예로 유다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유다는 도둑이었지만, 주님께서 이런 사람을 교화시키고 인도하고자 노력하신다. 과거의 습관 때문에 불응과 굳어버린 악습으로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 26, 15). 라고 흥정하는데 까지 치달아 간다.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요한 13, 27)라는 아주 비극적인 문장을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읽게 된다. 완전한 부마형태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본다.
가정 파괴의 현실을 앞에 두고 나는 무질서한 결혼생활의 피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와 더불어 또 다른 죄를 짓고 사는 이들의 경우를 보아 왔다. 유산을 일삼아 온 여성들, 그러면서 그 외 다른 죄들을 짓고 있는 여성들을 만났고, 혼외정사의 타락에 빠진 이들을 구마한 경우, 폭력의 죄를 짓고 있었던 이들, 마약을 복용하고 동성애에 빠져 또 다른 죄를 범하는 이들의 경우 등을 접했는데, 분명한 것은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만 치유의 길이 열린다는 말은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말이다.
4. 악마와 교접하는 사람들 혹은 그런 장소를 자주 찾는데서 비롯됨
나는 이런 표현을 통해 교령술(交靈術)을 행하는 곳에 함께 있거나 주술이나 사탄 의식 혹은 사탄교단(그들만의 검은 미사를 드린다), 주술을 행하는 것 등을 의미하고자 한다. 무당이나 주술사 등을 자주 찾아다니는 것, 물론 카드점쟁이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을 찾아다니는 어리석은 사람 모두는 자칫 잘못하면 악마를 이용한 주문(呪文)에 노출될 큰 위험에 놓여있다. 사탄과 관계를 맺기를 원할 때, 사탄에게 하는 서약식, 사탄과 맺는 피의 계약, 사탄적인 학원들에 등록하거나 사탄의 교주를 임명하는 일 등등… 불행하게도 15년 전부터 이 분야는 점차 증대하고 있는데 거의 폭발적인 수준이라 하겠다.
주술사나 이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쫓아다니는 것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다. 모든 치료에도 불구하고 병이 떨어지지 않을 때, 혹은 불행이 겹겹이 증폭될 때, 사람들은 즉시 악마의 소행이니 액운을 떼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카드 점을 보러가거나 무당을 찾아갔을 때 “아이쿠, 누군가 악마를 이용한 주문을 붙였군요.” 라는 말을 듣는다. 여기까지는 약간의 돈밖에 들지 않고 피해도 없다. 여기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혹시 운을 트이게 하고 싶으면 한 백만 원 정도가 필요하겠는데요.” 혹은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경험한 많은 경우에 복채로 내놓은 돈이 무려 4천 2백 만 원까지 간 적이 있었다. 이런 제의가 받아들여지게 되면 무당이나 카드점쟁이는 즉시 개인적인 물건들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서 본인의 사진이나 속옷, 머리카락 한 올, 혹은 몸에 난 털, 손톱 등인데 이 시점에서 악이 무르익어 가는 것이다. 그러면 무당이 이런 물건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당연히 악마적인 주술을 실시한다.
여기에서 나는 한 가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속임수에 빠지는 이유가 있다. 이런 점쟁이들이 “항상 성당에 얼굴을 내밀고” 기도하는 척 하며, 이들이 운영하는 사주 철학관을 찾아가 보면 여기저기 십자가 고상들이나 성모님의 상본, 성인들 상본이나 성인 비오 신부님의 상본 등이 보란 듯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나는 단지, 액운을 풀어주는 주술을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악의의 주술은 하지 않는다.”라고 현혹하기 때문에 속임수에 걸려들게 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액운 떼는 푸닥거리 주술이라는 말은 악의 주문을 떼기 위한 것이고, 악마적인 주문을 만드는 주술은 누군가를 해하기 위해 액운을 덧씌운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실제적으로 구마사 깐디도 신부님께서 끊임없이 주장했던 것이 바로 악마적 주문을 만드는 주술과 악마의 주문을 푸는 주술은 있을 수가 없고, 두 가지 모두가 악마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형태의 미신은 악마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 잘못 발을 들여놓게 되어 처음에는 심하지 않은 악의 영향(실제로는 이런 형태의 그 어떤 증상도 없었을 가능성이 많음) 때문에 점쟁이를 찾아갔지만 되돌아 나올 때는 혹 떼러 갔다가 뗄래야 뗄 수 없는 더 큰 혹인 악령을 업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우리 구마사들이 겪는 것은 자주 이런 주술사들이 저질로 놓은 악의 방해공작을 제거하는데 엄청난 힘을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경우 과거와 마찬가지로 부마는 정신질환으로 혼동될 수가 있음을 말해두고 싶다. 정신의학적으로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증세를 앓고 있는 환자들을 만났을 때, 의사의 솔직한 양심으로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는 신경정신과 의사들을 나는 진정으로 존경한다. 베르가모의 정신과 의사인 시모네 모라빗또 교수에 의하면 많은 환자들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사탄에 의해 우롱당하고 있는 것을 밝혀냈다고 단언하였다. 또한 그는 이런 환자들을 대했을 때 몇 몇 구마사들의 도움을 통해 이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Gente, 1990년 제 5호. 106-112 페이지 참조). 나는 이와 유사한 케이스들을 알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한 사건에 주목하고자 한다.
1988년 4월 2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스페인의 가르멜회 회원인 프란체스코 빨루루 신부를 복자품에 올리셨다. 복자 빨루루 신부는 말년의 삶을 부마자들을 위해 바치신 구마분야에서 상당한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분이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요양원을 만들고 환자들을 돌보셨는데,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환자들을 대상으로 구마기도를 해서 만약 진짜 정신병자들은 그 질환 그대로이지만, 부마자일 경우 구마기도를 통해 치유되곤 하였다. 당연히 이런 일을 하는 그에게 사제단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자 그는 두 번에 걸쳐 로마를 찾아가서 1866년 교황 비오 11세와 만났다. 1870년에는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로 하여금 구마직무를 영속적인 임무로 설정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공의회가 어떻게 중단되었는지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사목적인 직무는 시급하게 다시 적용시켜야 할 분야이다.
정신질환과 부마를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고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 유능하고 경험이 풍부한 구마사는 이런 문제에 대비해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염두해 두고 있으며 분별요소들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반면 정신과 의사의 경우에 이런 마귀들린 상태를 믿지 않아서 부마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구마사 깐디도 신부님은 몇 년 동안이나 어떤 젊은이에게 구마를 하고 있었는데 그를 치료했던 정신과 의사는 분명히 그 젊은이는 간질병을 앓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신부님은 그 의사를 구마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였고 이에 응하였다. 깐디도 신부님께서 그 젊은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을 때,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그러자 정신과 의사는 “보라구요, 신부님, 분명 간질병이라니까요.” 깐디도 신부님은 기절한 젊은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 위에 손을 얹자 이 젊은이는 갑작스럽게 벌떡 일어나 꼼짝 않고 서있는 것이었다. “간질병 환자들은 이런 증세도 보입니까?” 라고 깐디도 신부님이 의사에게 묻자, 당황한 의사는 전혀 볼 수 없는 현상이라고 했다. 의사는 이런 행동에 너무나도 당황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 젊은이가 치유되기까지 구마는 몇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오랫동안 이 의사 저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계속해 보았지만, 오히려 더 심해졌을 뿐이었다.
이런 복잡한 상태는 상당히 민감한 부분으로 공동연구를 요구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결론 부분에 가서 언급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적잖은 숫자의 환자들이 잘못된 의학적인 치료에 의한 피해를 고스란히 입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비신자라 하더라도 자신들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모든 과학자들을 나는 존경한다.
의사 에밀리오 세르바디오는 정신의학과 정신분석학 교수이며 국제적으로 유명한 초심리학자이다. 그는 1975년 2월 2일 바티칸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과학은 자신의 도구들을 통해 도저히 설명 불가능하고 증명해 낼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 앞에서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정확하게 그 한계를 그을 수는 없지만, 이런 현상은 육체적인 현상만을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도구들을 통해 어느 선까지 그것을 밝혀내는 것은 가능해도 불가능한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부마에 대해 과학적으로 이름 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악마적 성향과 파괴성이 보이는 현상들은 아주 특별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초심리학이나 정신 병리학 전문의가 증명해 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닌 전혀 다른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버릇없는 젊은이를 가학성 음란적인 범죄자에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잣대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이들 서로 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저는 의사인 제 견해로써는 도저히 조정 불가능한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불가사의한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이 과학의 몫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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