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코회와 예수회의 공통점"
두 수도회 모두 스페인 사람
도미니코회는 성 도미니코 설립.
예수회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설립
두 수도회 모두 이단에 맞서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도미니코회는 알비파에 대응하기 위해,
예수회는 개신교에 대응하기 위해서 설립.
알비파라는 이단 세력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수행한 도미니코 수도회
. 일명 설교자회라고 불리는 이 수도회를 설립한 이는
우리가 8월8일에 축일을 지내며 기리는
성 도미니코 성인이다.(1170-1221)
도미니코 성인의 전기에 따르면,
도미니코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처지였는데
한번은 성지 순례를 떠났다.
순례 중이던 어느 날 밤에 자신의 배[腹]에서
횃불을 입에 문 개 한 마리가 튀어나오고,
그 횃불로 해서 온 세상이 불타오르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이 꿈을 장차 태어날 자기 아들이 말[說]로써
세상을 불태우게 될 것임을 일러주는 태몽으로 이해했다.
어머니의 꿈대로, 도미니코 성인은 자라서 사제가 되었고
나아가 위대한 설교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교회에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알비파 이단에 뛰어난 언변으로 맞섰고 그들을 제압했다.
1150년 경이었다. 이 무렵 프랑스 남부의 알비에
그 일대를 중심으로 해서
이단을 확산시켜 나가는 무리들이 있었다.
지역 이름을 따서 알비파라고 불린 이 무리들은
세상에 두 근원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느님 이외에 물질을 그 하나로 인정했다.
물질과 관련되는 모든 것
(결혼,육류 섭취, 재산 소유 따위)을
영원한 악이라고 해서 배척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념에 따라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마저도 수정했다.
예수님은 단지 가상의 육체를 소유했을 따름이라고 하면서
그분의 부활을 부인했고,
구약의 하느님은 본래 악의 원리였다고 주장했으며,
성사의 효력과 집행에 관해서도
이단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이들은 한편으로 교회의 재산과 권력은 물론
주교와 사제들의 관리 방식에 대해서 비판했고
또한 국가 질서에 대해서도 비판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서 호응을 얻었다.
교회는 이에 대응하여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를 비롯한
수도자들을 파견하여
알비파의 오류를 지적하는 설교에 주력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으며,
끝내는 그리스도교적이지 않고
잔인하기까지 한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알비파를 척결하기 위한 전투 또는 무력적이고
강압적인 작전을 전개했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알비파들은
종교 재판에 붙여서 처형했다.
이 와중에서 스페인에서 교구 사제로 활동하던
도미니코 성인 역시 그 현장에 나섰다.
한번은 알비파 이단에 빠진 사람을 만나
밤을 지새우며 토론한 끝에 회심시켰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이단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설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설교가 무지로 인해 이단이나 오류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 교회의 진리와 신앙을
수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성인은 설교에 전념하는 수도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알비파는 도미니코 성인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열성적인 설득에도,
또 다른 이들의 어설픈 무력 사용에도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도미니코 성인은 새로운 전략을 시도했다.
삶으로써 표양을 보이기로 했다.
자신과 수도자들이 먼저 거룩하고 가난하게 살기로 했다.
도미니코 성인과 설교자들은
0 지성적인 면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탁발 수도자로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며
단순하게 청빈하게 살았다.
당시에 흔히 볼 수 있었던 타락하고
부패한 성직자들의 삶과는 다른 삶이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알비파의 비난과 공격에 맞서는 전략은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다.
또한, 이러한 전략을 구사하는 한편으로
묵주기도라는 도구를 부분적으로 활용했다.
사실, 도미니코 성인은 묵주기도를 대중화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한 사람이기도 하다.
도미니코 성인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간구하였는데,
1210년 어느 날에 성인 앞에 성모 마리아께서 나타나
로사리오를 주면서 로사리오 기도를
널리 전파하도록 말씀하셨다는 전승이 전해져 내려온다.
또한 도미니코 성인은 자신의 불타는 마음으로부터
몸을 굽혀 절하거나,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거나,
독방의 침묵 속에서와 설교 여행 중의 독서 등의
신체적 동작을 통해서 바치며
9가지 기도 방법으로 기도하였으며 전파하였다.
도미니코 성인이 활동하던 지역에서는
오래지 않아 대대적인 신앙적 부흥이 일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사람들에게 온갖 향락적인 삶을 권유하고 조장함으로써
환호를 받던 음유 시인들의 인기는 급강하했다.
수많은 여성들이 앞을 다투어
자기들이 입고 걸치던 퇴폐적인 옷가지며
장신구들을 망설임 없이 내다버렸다.
이후 도미니코 수도회는
마침내 교회의 승인을 받아서
정식 수도회로서
지성적인 생활과 대중들의 요구를 잘 조화시켜 나가며
대중의 회개 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회원들은 횃불을 입에 문 개’를
도미니코 성인과 도미니코 수도회의 문장(紋章)에 도입했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교회가 이단을 극복하도록 돕고
신자들이 지성과 청빈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가는 데에 ‘성령의 불을 가지고
교회의 신자들을 지키는 주님의 파수견’으로서
손색이 없는 역할을 수행했다.
도미나코 수도회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은 크지 않은 수도회에 속한다.
그러나 이 수도회가 얼마나 큰 수도회인지는
교회 유머 한 토막을 미루어서 짐작할 수 있다.
“하루는 작은 형제회 회원과 예수회 회원이
어느 수도회가 가장 큰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오랜 말다툼을 벌였다.
두 사람은 하느님께 여쭤 보기로 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답변을 보내 오셨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그런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다투지 말거라.
O.P. 회원 하느님으로부터.’”
여기서 O.P.는 설교자회(Ordo Praedicatorum),
곧 도미니코 수도회를 가리킨다.
하느님마저도 도미니코회 회원이시라니.
전승에 의하면, 도미니코 성인의 환시에,
하느님의 분노에 의해
위협받는 죄 많은 세상을 보았는데
성모님의 중재로 구원받고 있음을 보았다.
그때 성모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두 사람을 지적하였다.
한사람은 도미니코, 다른 한사람은
낯선 거지 곧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였다.
도미니코 성인은 프란치스코 성인을 얼싸안고 환영하였다.
“당신은 나의 친구, 나와 동행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결합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우리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전통을 지키고자 오늘날까지도
1년에 두 번
도미니코 수도자들과 프란치스코 수도자들이 함께 만나
미사를 봉헌하며 친교의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8월호, 이석규 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