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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월 23일 토요일...! 그날은 부여,논산지역에
가기로 했다.
아는이들과 같이 가기로.....
어느덧 역사적인 2월 23일이 다가왔다.
세수하고 아침먹고 집을 나섰다. (아침 7:00)
아는애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곳은 서울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역으로 가야된다.
우리동네에서 서울역으로 운행하는 노선은 서울20번,
1개노선이다.
서울 20번은 원래 h버스에서 운행하는 노선인데 작년에 그
회사가 부도나서 쓰러짐으로써
운행이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2월들어와서 h여객이 그
노선을 인수하여 운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정상화는 되지 못했다. 28대 차량중 겨우 10대정도만
굴리고 있다.
버스를 기다린지 10여분만에 20번이 왔다.
이번에 탄 버스는 한성여객소속
서울20번(노원역-서울역)버스로 차종은 BS106L이다.
20번노선의
자세한 정류장은 오른쪽을 힘껏 누르면 나온다..
---> (20번
노선안내)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승객들은 그런데로 많았다.
도봉동,창동,쌍문역,신창동,수유리,미아리,돈암동,삼선교,창덕궁,경복궁,덕수궁,숭례문을
지나
8:00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부지런히 서울역사(驛舍)로 들어갔다.
2.
역사안에는 엄청난 사람들로 졀라 혼잡했다.
(처음 화면으로 )
여기서 같이 가기로 한 신민재님과 주경이를 만나고
표사는곳으로 갔다.
예약한 철도표를 구입하고 개표를 받구 열차타는곳으로
나간다.
이번에 타는 열차는 서울역을 8:25분에
출발하여 서대전,서광주,화순,보성,벌교경유 순천으로
가는 무궁화호 제 433열차이다. 우리의 목적지인 논산역에는
10:56분에 도착한다.
차실은 4호차 49,50,53석이며, 운임은 8100원이다.
열차에 탑승하여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8:25분이 되자 열차는 슬슬 출발한다.
한강을 건너 영등포,수원역에서 엄청난 승객을 태우고
남쪽으로 달린다.
나는 피곤한지라 잠이 들고... 꾸벅꾸벅~~
잠에서 깨보니 어느덧 대전광역시에 진입...
서대전역에서 많은 수의 승객들이 내리고 탔다.
서대전역을 지나서 두계를 지나 우리의 목적지인 논산역에
제시간보다 4분늦은 11:00에
도착했다.
3.
논산역은 논산시의 중심역이다.
(처음 화면으로)
논산은 많이 와봤지만 논산역은 처음이다.
열차표를 기념품으로 품안에 넣고 논산역사를 나왔다.
역전에는 조그만 광장이 있고 주위에는 식당,약국등의
편의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 논산시는 대전광역시 서남에 위치한 도시로
농어촌통합시이다.
논산시의 인구는 약 10여만명으로 주요 읍,면으로 강경읍,연무읍,채운면,두마면,벌곡면,가야곡면,
연산면등이 있으며 주요 관광지로는 관촉사,견훤릉,강경포구,쌍계사,대둔산,개태사,사계김장생유적,
노성산성등이 있다.
논산시의 남쪽에 위치한 연무읍에는 그 유명한 연무대가
있다.
이곳은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논산훈련소가
위치해있다.
4. 논산역을 나와서 부근에 위치한
논산시내버스터미널로 갔다.
논산역에서 시내버스터미널까지는 약 100여m 거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여로 가야된다.
논산시내버스터미널은 논산시내버스를
독점운행하고 있는 덕성여객소유로 여기서
운행하는
논산시내버스 노선은 논산시내,관촉사,강경,연무읍,가야곡,벌곡,신도안,두계역,도곡리,갑사,계룡,
신원사,동학사,부여읍,석성,여산,천호동굴방면으로
운행한다.
덕성여객외에도 부여여객소속 부여군내버스(부여읍행)도
이곳에 들어온다.
시내버스터미널로 들어가서 시내버스표 3장을
구입했다.
논산시내버스요금은 750원이다. 그런데 승차권을 구입할
경우 730원이다. (무려 20원씩이나
할인을)
부여읍까지 요금은 1500원... 그러나 나는 시내구간승차권을
구입했다 (730원)
승차권을 구입하고 몇분정도 기다리니 부여로 가는 버스가
나온다.
이번에 타는 버스는 부여여객소속
부여군내버스 '논산역->부여터미널'노선으로
차종은 bs106이다.
논산역에서 부여읍으로 운행하는 시내버스노선은 20분간격으로
운행한다.
'논산-부여' 시내버스노선의 자세한 운행 시간표는
------> (부여행
시내버스 시간표)
버스는 시내버스터미널을 나와서 좌회전하여 논산시내로
들어간다.
시외터미널을 지나 반월동시내에서 승객을 그럭저럭 태우고
논산천을 건너서
부여로 졀라게 달린다.
원북리,십자가,정각리,능산리고분군을 지나서 어느덧
부여읍내로 진입..
부소산성입구에서 내렸다. (12:00)
5.
부여는 거의 6개월만에 와본다.
(처음 화면으로)
부여는 옛백제의 도읍지로써 백제시대문화재들이 많이
남아있다.
여기서 잠깐 사비부여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는데....쩝..
역사분야와 담쌓고 사는 이들은 아래 '건너뛰기'를
누르면 바로 다음 내용으로 넘어간다.
------> (
건너뛰기 -.-;; )
*
부여는 백제시대 사비성으로 백제성왕때부터 의자왕때까지 약 120년간
백제에 수도였다.
한때는 가구수 15만호에 인구 80만을 자랑하던
국제도시였으나 지금은 인구 10만도 안되는
시골도시이다.
백제성왕(재위523-554년)은 웅진(공주)에서 이곳 사비(부여)로
수도를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고 백제의 재중흥을 꿈꾼다.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 한수유역(한강)을 점령한다.
그래서 신라는 한수상류지역을 먹고 한강하류는 백제가 먹기로 약속했으나
의리라고는 개뿔도 없는 신라국의 왕인 진흥왕은 고구려와 비밀리에
밀약을 맺고
(밀약내용-> 서로 공격안하기,한수유역을 신라가 먹도록 고구려가 눈감아주기,고구려 백제편
안들어주기 등등) 백제와의 약속을 깨고 한수유역을 모두 차지한다.
이에 열받은 성왕은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하나 관산성태수
도도(이름이 틀릴 수 있음)
의 항전과 관산성을 지원하러온 한수유역 신라군사들에 협공으로 성왕은 신라군에 잡혀
무참히
살해되고 4명의 좌평과 29500명이 전사하는 완전 참패를
당했다.(554년)
그 이후 위덕왕때부터 백제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다.
위덕왕,혜왕,법왕,무왕을 거쳐 의자왕대에 이르는데
의자왕(재위641-660)은 재위 초기 신라의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을 공격해
김춘추(신라무열왕)의
사위 김품석을 죽이고 한수유역 40여개의 성을 차지하는등 세력을
크게 확장한다.
그러나 의자왕은 자만에 빠진 나머지 사치,향락에 빠지고 나라는
급격히 기울어간다.
660년 신라와 당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한다. 신라군은 육로로 해서
김유신이 5만군사를 이끌고,
당나라군은 소정방이 수군 13만군사를 이끌고 백제로 쳐들어갔다.
신라군은 남천정(경기도이천)으로 돌아서 황산(충남논산)에서
백제의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결사대와 맞장을 뜨게 된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백제군앞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자 이에 김유신은
관창,반굴등 어린 화랑등을 출진하게하고 이들이 전사하자 이에 눈이 뒤집힌 신라군은
백제군을 전멸시키고 계백은 장렬히 전사한다.
얼마뒤 사비는 포위되고 의자왕은 웅진(공주)으로 도망갔다가
660년 7월18일 항복한다.
당나라 소정방은 의자왕과 관리 93명 백제백성 12870명을 당나라로 모시고?간다.
나당연합패거리의 공격으로 화려하고 웅장했던 인구80만의
국제도시 사비는 불바다가 되고
그 이후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패자(敗子)의 비참한 최후란 것인가......??
백제가 망한후 당나라는 중원대륙에 있던 백제의 영토를
모두 당나라영토에 편입시키고
백제본토(충남,전라도지역)에 웅진,마한,금련,동명,덕안?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를 다스린다.
그러다가 670년이후 신라왕 김법민(문무왕)은 겨우겨우 (그것도
운이 좋아서) 당나라세력을 몰아내고
백제본토를 지배하게 된다.
백제멸망후 부여는 일개 별볼일 없는 시골동네로 전락한다.
부여지역에는 많은 백제시대유적,문화재가 남아있다.
6.
버스에서 내린다음 부근 식당을 찾았다.
(부여의
간략한 역사를 알고 싶다면)
마침 점심시간인지라 점심을 먹기 위해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지 않는가..^^*
중국집으로 들어가서 볶음밥과 짜장면을 맛나게 먹고
밖으로 나왔다.
배가 부르니 이제야 살것 같군.. 한편으로는 은근히 졸리다...
꾸벅..
길을 건너서 부소산성정문으로 갔다.
정문주차장에는 수십대의 차량들이 주차되있었다.
부소산성정문은 사비문이다.
2층누각으로 되있다.
매표소로 가서 입장료를 확인해보니 무려
2000원... 허걱~~
별 수 없다... 입장료 2000원을 내고 부소산성안으로
들어간다.
2000원x3명= 6000원...!
7.
부소산성(扶蘇山城)은 부여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처음 화면으로)
부소산성은 개인적으로 3번 와봤다.
이 성은 백제사비도성을 방어하는
핵심시설이다. 부여로 도읍을 옮긴 서기 538년 이전에 이미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의 정상과 능선을 따라 흙으로 쌓았으며, 성의 총
길이는 2,459미터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은
크게 3개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가운데 계곡 전체를 둘러싼
포곡식 산성만 백제시대의 것으로
발굴조사 결과
확인되었다.
성의 시설물로는 동, 서, 남, 북 4개 지점의 문터 및 장대,
그리고 군창터등이 있다. 백마강을 낀 북서쪽
성벽 아래
절벽에는 백제 멸망시 궁녀들이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이 있다.
부소산성은 사적 제5호로
지정되있다.
지금부터 부소산성 경내를 살펴보겠다.
* 부소산성의 토성(土城)
* 부소산성의 전경 (사진왼편에
큰 기와집이 고란사, 바로 정면에 보이는 부분이 낙화암,
그위에 희미하게
백화정이 보인다. 산꼭대기에 사비루(사자루)가 희미하게
보인다.)
8. 사비문을 지나니 바로
왼편에 무슨 유적지가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백제시대 왕궁터로 전해지는 관북리백제유적이다.
(처음화면으로)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725번지에 위치한
이 유적은 현재 왕궁지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남쪽일대 184필지 95,048㎡(28,780평)
중 33필지 2,102㎡는 '83년 9월 충청남도
지방기념물 제43호
전백제왕궁지(傳百濟王宮址)로 지정되어 있다.
'82년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方形石築蓮池)가
발견되었고, '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삼국시대의 궁궐 중 고구려의
안학궁(북한 평양 소재)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신라와 백제의 왕궁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 백제왕궁터를 포함한 관북리백제유적지는
모두 사적 428호로
지정되있다.
사비문을 지나 바로 옆에 보이는 유적은 관북리백제유적의
일부분이다.
옛날 백제시대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재 이곳은
건물의 주춧돌등이 복원되있다.
9. 관북리유적을 지나니 바로앞에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편으로 가면 서복사지,낙화암,부소산성구문,고란사등이
나오며
오른편으로 가면 삼충사,영일루,군창터,낙화암,고란사가
나온다.
부소산성경내에 도로는 좌우로 순환하는 순환도로이다.
우리는 오른쪽으로 가기로 했다.
오른쪽 길로 조금 가니 삼충사가 나온다.
삼충사(三忠祠)는
무엇을 하는 곳일까?
(처음화면으로)
이 사당은 백제말기때 충신인 성충,계백,흥수를
모신사당이다.
이 사당은 박정희정권때 세워진 사당이다. 사당 오른편에는 연못이
있다.
사당안에는 본전(本殿)이 있는데,
그안에는 계백,흥수,성충의 영정이 모셔져있다.
그러면 성충,계백,흥수는 도대체 누구인가??
* 이들은 백제말기 충신이다 이외에도
윤충,지수신,흑치상지,복신,도침등 많이 있으나
이 3명이 대표적이다.
계백(?~660)은 백제말기 명장으로 가잠성(충북괴산)을 지켜
신라군의 침입을 막았으며
660년 5천결사대를 이끌고 황산(충남 논산)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5만명과 싸워
전원 전사했다.
성충(?-656)은 의자왕때 상좌평을 지냈던 사람으로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의자왕을 잘 보좌했으나 의자왕이 나중에 미쳐버리자.
계속 간언을 하다 옥에 갇힌다.
그는 나당연합패거리에 공격을 걱정하며 "육군은 탄현(대전근방)에서
수군은 기벌포(금강하류)에서
막으라" 고 말하고 죽었다. 결국 이렇게 하지 않아 백제는 망한다.
흥수(?-?)는 역시 의자왕을 보필하던 신하였으나
결국 나주로 귀양간 인물이다.
의자왕이 나당군이 쳐들어오자 이를 막을 계책을 알려달라고
칙사를 보내는데 흥수도 성충이 말한
그대로 "육군은 탄현(대전근방)에서 수군은 기벌포(금강하류)에서 막으라"고 말했으나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
10. 삼충사를
지나 오른쪽 길로 계속 올라간다.
부지런히 계속 올라가니 뒤편으로 부여읍내가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산위쪽과 길 옆에는 부소산성의 토성(土城)이
부소산을 감싸고 있다.
토성은 위에 사진과 비슷하게 생겼다.
나무로 둘러싸인 길을 20여분정도 올라가니 가까이에 2층누각이
보인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영일루(迎日樓)이다.
11.
영일루는 부여에 있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처음화면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군수(홍산은 부여의
서쪽)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영일루는 충남문화재자료 101호로 지정되있다.
* 영일루의 모습
12. 영일루에
올라가서 부근 경치를 관망하고 누각위에 걸려있는 시문을
읽었다.
그런데 모두 한문으로 써있는지라.. ㅋㅋㅋ
누각에서 내려와서 좀 가니 매점이 나온다. 매점은 별로
볼것이 없고...
매점에서 길이 2갈래로 갈라진다.
왼편 길로 가면 군창터,고란사,낙화암이 나온다.
오른편길로 내려가면 태자천(太子泉)이
나온다.
태자천은 말그대로 태자들이 마시던 우물이다.
태자천은 2000년 8월에 가본적이 있다. 거기서 물도
마셨다.
왼편길로 좀 가니 보호철책으로 둘러싸인 큰 공터가 나온다.
그 공터는 무엇인가?
13.
그 공터는 군창터(軍倉址)이다.
(처음화면으로)
이 군창터는 백제시대 군량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던곳이다.
660년 나당연합패거리에 공격으로 불탔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도 이곳에 식량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군창터가 좀
넓다.
예전 건물이 있던 터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지금도 이 군창터에서 탄화된 쌀이 나온다고 한다. (탄화된 쌀은 썩지
않는다..!!)
이 군창터는 충남문화재자료 109호이다.
그 넓은 군창터 한구석에 진도개 1마리가 팔자좋게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 가 있었다. 저 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황량한 군창터의 모습
14. 군창터를
지나서 왼편길로 계속 걸어갔다.
이제 어느덧 부소산의 정상부근까지 올라온 것이다.
길양쪽에는 수만그루의 나무들이 말없이 서 있다.
좀 가니 길 오른편으로 토성이 보인다.
그것은 부소산성의 토성이다. 사적5호이다.
토성을 옆에 끼고 계속 걸어가니 저쪽의 무슨 건물이
보인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건물과 움집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데...
15.
그것은
수혈병영지(竪穴兵營址)이다.
(처음화면으로)
말그대로 병사들이 먹고자고 하던 숙소이다.
건물과 움집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그 건물은 병영터유적을 보호하는 보호각이다.
이 유적은 백제시대 병사들이 야영했던
병영터로 추정되는곳이다..
그 집터 옆에는 그시절 야영막사를 복원한 움집이 있다.
움집은 서울암사동신석기유적지(사적
267호, 서울 강동구 암사동소재)에 복원된 움집과
좀 비슷하다.
움집옆에는 목책(나무로 세운 방어시설 같은것)이
세워져있다.
그반대편에는 부소산성에 토성이 펼쳐져있다.
움집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입구가 좁아서
들어가기가 어렵다.
움집을 보고 옆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안에는 수혈병영터의 흔적이 보존되있다.
병영터를 관람하고 밖으로 나왔다.
야트막한 고개를 하나 넘으니 2층누각이 하나 나온다
그 누각은 아까전에 본 영일루와 모습이 비슷하다. 아니
같다고 볼 수 있다.
16.
그 누각의 이름은 반월루(半月樓)이다.
(처음화면으로)
반월루는 안내문이 없어서 자세한것은 알 수 가 없다.
다만 1900년대에 세워진 누각으로 생각된다.
반월루의 모습은 아까전 영일루와 같다.
그런데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하더니만,
마침 반월루에서는 무슨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원지역에 온 약 40~50여명의 사람들이 누각위에서 무슨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우리가 누각앞에 서 있자, 몇몇 아줌마들이 "올라가서
떡,술좀 먹고 가요" 라고 그런다.
그래서 마침 배도 고프고 해서 누각위로 올라갔다.
위로 올라가니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떡,막걸리,소주,돼지고기등을 맛나게 먹으면서 놀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한테 떡을 듬뿍 주었다. 떡을 먹으면서 서
있으니 어떤 아저씨가 소주 마시라고
한잔을 채워서 나한테 준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한잔에
들이키고, 그러자 이제는 막걸리를 준다.
막걸리좀 마시고 떡을 어느정도 먹은다음, 누각에서
내려왔다.
문화재보호구역에서 저런 행위를 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사는 세상에 문화재가 사람보다 위에 설 수는
없을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구실로 문화재를 파괴하고
때려부시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17. 반월루를 나와서 조금 걸어가니 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편으로 가면 서복사,부소산성구문,정문이 나오며,
오른편으로 가면 궁녀사,태자천이 나온다,
북쪽으로 가면 부소산성의 상징인 낙화암,고란사가 나온다.
4거리에는 매점 2개가 자리잡고 있다.
4거리를 지나서 낙화암쪽으로 갔다.
좀 걸어가니 저 아래에 백마강이 보인다. 백마강(白馬江)은
금강의 일부로 부여지역에서는
백마강이라고 부른다.
3분정도 걸어가니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낙화암,고란사방면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사자루(사비루)가 나온다.
우리는 왼쪽으로 내려갔다.
좀 내려가니 정자가 하나 나온다. 그 정자는 무엇일까?
정자앞에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18.
그 정자는 백화정(百花亭)이다.
(->처음화면으로) (->낙화암으로)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구조는 육각형 평면을 가진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백화정은 충남문화재자료 108호로
지정되있다.
.
* 낙화암위에 세워진
백화정의 모습
백화정의 모습은 위에 사진과 같다.
백화정위에 올라가서 낙화암과 백마강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백마강은 유유히 흐르는구나... 쩝..
백화정에서 사진좀 몇방 찍고 아래로 내려갔다.
19.
백화정아래는 그 유명한 낙화암(落花岩)이
있다. (처음화면으로)
낙화암은 말그대로 꽃이 떨어진 바위이다.
낙화암은 흔히 3000궁녀가 떨어진곳으로 알려져있다.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패거리에게 공격을 받고 사비성이 함락되자
많은 여자들이 이곳에서 백마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약 수십에서 수백명정도 였는데 후대에 와서 3000으로
과장한것이다.
낙화암은 백제여인들의 굳은 절개와 고귀한 충절의 표상이 되고
있는곳...!!
낙화암은 충남문화재자료 110호로
지정되있다.
낙화암아래에는 백마강이 흐르고 있다.
낙화암에서 1342년전 백제멸망때 궁녀,여인들이 백마강에 뛰어든것을
이리저리 상상하며 백마강을 바라보았다.
낙화암에서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낙화암을 나왔다.
* 낙화암의 모습
백화정을 지나서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가면 고란사가 나온다.
험준한? 산길을 계속 내려가니 바로앞에 백마강이 보이고
강가에 고란사가 보인다.
20.
고란사(皐蘭寺)는
부소산성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절앞에는 백마강이 흐르고
있다.
고란사는 부소산(扶蘇山) 낙화암(落花岩) 아래 백마강이
한눈으로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다.
초창(初創)은 백제(百濟) 제17대
아신왕대(阿莘王代)라고 전해지기도 하며, 또는
백제시대(百濟時代)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삼천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高麗) 초기(初期)에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創建年代)는 알 수 없다.
암자가 자리잡은 이곳 주변은 경관이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과 더불어 기암괴석,기화이초(奇花異草)
등으로 더욱 유명(有名)한 곳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은산의
숭각사(崇角寺)로부터 옮겨 지은 것이며,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정조(正祖) 21년(1797)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처음 화면으로)
절 앞에는 백마강이 흐르고 뒤에는 절벽이 있어 좀처럼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시원하다.
고란사는 충남문화재자료
98호이다.
고란사는 건물이 달랑 1채있는 조그만 절이다.
강가에 종루(鐘樓)가 있다.
종루를 지나서 고란사뒤로 가니 그 유명한 고란초약수(皐蘭草藥水)가
우리를 맞이한다.
약수는 절벽밑에 있다. 암석이 떨어질것에 대비하여 낙석방지시설이
설치되있다.
이 약수는 고란초가 피어있는 바위에서 나오는 약수로 백제시대 백제왕의 전용
식수였다.
우리는 약수를 마셔보았다. 물이 좀 밑에 있어서 물뜨는데 좀
힘들군. (팔이 길어서 다행 호호^^)
약수를 마셔보니 맛있다.. 고란초약수라서 그런가??
2번정도 떠 마셨다.
고란초란 꽃은 희귀한 식물로 요즘은 거의 볼수 없을정도에 이르렀다
한다.
약수가 있는곳은 그늘이 져있어 시원하다. (여름에는 졀라
시원함..)
* 고란사 경내의 모습 (은행나무가
인상적이다. )
* 고란사 선착장 전경..
21. 약수를 마시고 고란사건물뒤에
그려진 벽화를 보았다.
벽화의 내용은 석가여래에 대한 내용이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벽화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낙화암에서 뛰어내리는 궁녀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궁녀들 뒤에는 나당연합패거리들이 칼을 들고 쫓아오는듯한
자세로 그려져있다.
궁녀들은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에 몸을 던지고 있다.
그중 일부는
나무가지에 걸린채 죽어있었다. (잘못 뛰어내려서
나무에 걸린것임)
벽화를 보고 고란사를 나왔다.
고란사앞에는 백마강이 펼쳐져있다. 강가에는
유람선선착장이 있다.
여기에 이르자 일행들이 배를 타자고 그런다.
배를 탄다..!! 그것도 좋을듯 싶다.
선착장으로 가서 운임을 확인해보니 1인당 2200원이다.
그런데 선착장에는 손님들이 하나도 없었다.
선착장에는 매표소와 매점이 있다. 그리고 배2척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착장직원이 말하기를 " 손님 7명이 와야 배가
출발한다. 지금 가고 싶으면 10000원을 내라"
고 말을 하는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7명이 모이기를 기다리면서 자리에 앉아서
쉬었다.
그러나 손님들은 좀처럼 올 생각을 않했다.
20분정도 기다리니 사람들이 1명,2명 오기 시작한다.
음 이제야 오는군... 쩝..
그리고 몇분뒤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선착장으로 들어온다.
그때가 되자 선착장직원이 나를 표사라고 그런다.
그래서 표를 구입 2200원 x 3명 =
6600원.. (계산이 맞나?)
22.
우리는 표를 사고 배안으로 들어갔다.
(-> 처음 화면으로)
유람선이라고는 하지만 좀 그렇군.......
배안에 우리를 포함하여 10여명의 관광객들이 승선했다.
몇분뒤 배를 조종하는 아저씨가 승선하더니 문을 닫고
시동을 건다.
배는 느릿느릿한 속도로 선착장을 출발하여 백마강을
가로질러 간다.
선착장을 벗어나서 좀 가니 강가에 조룡대(釣龍臺)가
보인다.
조룡대에는 다음과 같은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 나당연합패거리들이 사비성을 공격하던 660년 7월..!
백마강을 건너고자 하나 계속 안개가 피고 소용돌이가 쳐서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 당나라장수 소정방은 부근 백성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백마강안에
용이(백제30대왕 무왕이 죽어 용으로 화(化)한거라 한다.)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정방은 그용을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냐고 물어봤으나
애국심깊은 백제백성들이 말할 리 없다. 모두 입을 다물고 답을 안한다.
이에 뇌물을 주고
설득하니 그중 한노인이 그만 불고 만다. "그 용은 백마를 좋아하오!"
그래서 백마를 미끼로 하니 용이 강에서 나와 결국 용은
잡히고 만다(뒷부분은 좀 햇갈림..!)
어느시대나 애국자가있으면 반드시 매국노도 있다는 것을 새삼느끼게
해준다..!!
배안에서는 조룡대,낙화암,부소산성 관련 안내방송이
나온다.
백마강의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면서 구드래선착장으로
천천히 이동한다.
가는 도중 낙화암을 보았다. 저위에 백화정이
보이는군..
낙화암을 지나서 10여분정도 가니 어느덧 구드래선착장에
도착했다.
고란사선착장에서 구드래선착장까지는
약 20여분정도 걸린다.
유람선을 타면 조룡대와 낙화암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자 배에서 내렸다.
선착장을 지나서 좀 가니 구드래공원이 나온다.
23.
구드래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 처음 화면으로)
이 명칭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가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 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두래로
변하여
구두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왜국(일본)의 배들이 구두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 왔는데, 왜국에서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 ‘구두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구두래 나루를 건너 울성산 남쪽 기슭에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세운 왕흥사가 있고, 옛 문헌에
‘사비의 강’으로 기록된
백마강이 부소산 기슭을 따라 흐르고 있다. 백마강 양쪽에는
왕흥사와
호함리절터,
부소산성, 부여나성을 비롯한 당시의 유적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소중한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구드래공원은 사적 및 명승 6호로
지정되있다.
* 구드래공원의 전경 (왼편에 백마강, 윗쪽은 부소산성)
24.
구두래공원은 그런데로 잘 꾸며져있었다. 공원서쪽으로는
백마강이 유유히 흐르고
공원북쪽에는 부소산성이 위치해있다.
부여읍내로 향하는 길로 조금 걸어가니 구드래조각공원이
나온다.
조각공원에는 수십개의 조각품들이 전시되있다.
공원한가운데에는 구드래과련 안내판이 서 있다.
우리는 구드래조각공원을 가로질러서 부여읍내로 걸어갔다.
부여읍내까지는 약 1km거리이다.
길가에는 토속이 풍기는 식당,까페들이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다.
10여분정도 걸으니 부여읍내 소방서앞로터리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어디로 갈까?
무량사로 갈까 하다가 그냥 궁남지로 가기로 했다.
궁남지를 갈려면 걸어가거나 아니면 택시를 타야된다.
소방서앞로터리에서 궁남지까지는 약 3km거리이다.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기로 했다.
길건너로 가서 택시를 한대 잡아타고 궁남지로 간다.
택시운전사는 특유의 충청도어(忠淸道語)를 구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운전사가 "부여 어디어디 가보셨나요?"
내가 " 부소산성,정림사지,능산리,박물관..."
운전사가 " 공주의 계룡산이 제일 좋은데 거기 가시지
그랬어요?"
나 " 계룡산 어디요?"
운전사 " 갑사,신원사,동학사 거기는 놀기 좋은곳이죠"
나 " 신원사,동학사,갑사 다 가봤습니다"
운전사 " 그렇습니까.! 많이 다니셨네.."
계백장군동상을 지나서 2면도로로 좀 들어가니
가까이에 궁남지가 보인다.
어느덧 궁남지주차장에 도착하여 내렸다.
택시요금은 2000원이다..
25.
궁남지(宮南池)는
부여읍 남쪽에 위치한 백제시대 별궁연못이다.
(-> 처음 화면으로)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
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궁남지는 사적 135호이다.
지금부터 궁남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음..
* 궁남지(宮南池)의 모습
26. 궁남지의 모습은 위에 사진과
같다.
연못안에 섬이 있고 그곳에 누각이
세워져있다.
연못의 수심은 졀라 깊었다. 그러나 수심이 몇m인지는
모른다.
연못주위에는 버들나무(맞나 모르겠음)들이 운치있게
연못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연못을 시계반대방향으로 반바퀴 도니 궁남지내 섬으로
가는 목교(木橋)가 나온다.
우리는 그 목교를 건너 섬으로 갔다.
목교는 서울 경복궁에 있는 향원정의 목교와
비슷하게 생겼다.
목교를 건너 섬으로 갔다. 섬에는 누각이 세워져 있다.
누각에 들어가서 주변 경치를 둘러보았다.
지금으로 부터 1400여년전인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때
무왕은 그의 부인인 선화공주
(신라 진평왕의 딸)와 태자,공주들, 많은 문무신료들과 함께
여기서 마시고,놀고,떠들고.....
그때 모습이 대충 상상이 간다.
누각을 나와서 다시 목교를 건너는데 저쪽
궁남지주차장쪽에서 검은양복을 입은
남자 수십명이 이쪽으로 걸어오는군.. 도대체 저들은
무엇이지? 혹시 조폭들..?
왠지 갑자기 긴장하기 시작했다. 손에는 몽둥이같은것도
들고 있고.. 그렇다.
목교를 건너서 시계반대방향으로 연못을 돌기 시작하면서
그들과 마주쳤다.
마주친 다음 무엇을 했을까?
--> 그냥 지나쳤다.. ^^*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누각쪽으로 가고 있었다.
남자 수십명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곱게 단장을 한 여자
수십명이 누각쪽으로 가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오늘 결혼한 부부의 친구들이다.
그들이 여기로 온 이유는 일종의 뒤풀이?를 하기 위해서.....
(예를 들면 신랑의 발때리기...etc..)
궁남지를 한바퀴 돌고 북동쪽에 연못으로 갔다. 이곳은 그냥
정원으로 꾸며놓은 곳이다.
연못을 지나서 부여읍내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길 오른편에 작은 산이 하나 보이는데, 그 산은 화지산이다.
이 산에는 백제시대유적지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화지산일원은 사적 428호로
지정되있다.
27. 화지산을 지나서 읍내로
걸어갔다.
나는 궁남지근처에 있는 동남리절터를 보고자 했으나
일행들이 반대하여
할 수 없이 부여읍내로 향했다.
계백장군동상을 지나서 어느덧 부여시외터미널에 도착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되는가?
갈 곳은 이미 정해져있다. 바로 논산이다.
부여에서 논산가는 방법중 제일 저렴한 방법은 물론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걸어가자구 말했다가는 맞아죽기 쉽다.
부여->논산까지는 직행버스가 10~20분간격으로,
시내,군내버스는 20분간격으로 운행한다.
우리는 시내버스를 타기로 했다.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운행하는 시외버스 노선은 아래를
참조할것...
-------> (시외버스
노선정보)
시외버스터미널앞 시내버스매표소에서 논산까지
버스표를 구입하니 1500원이군..
버스표를 구입하고 붕어빵을 열심히 뜯어먹으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몇분뒤 논산가는 버스가 왔다.
이번에 타는 버스는 부여여객 소속 '부여터미널-논산역'을
운행하는 부여군내버스 bs106이다.
부여-논산구간은 부여여객(부여)과 덕성여객(논산)이 공배로
운행하고 있다.
버스는 계백장군동상을 지나서 정림사지,부소산성입구,능산리고분군,십자가를
지나
논산천을 건너 논산시로 진입...
어느덧 논산시외버스터미널앞에 도착하여 내린다.
28.
다시 논산시내로 왔다.
(-> 처음 화면으로)
여기서 우리가 갈 곳은 연무읍에 있는 견훤릉이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연무대방면 시내버스를 타는
곳으로 걸어갔다.
5거리를 지나 연무대방면으로 200m정도 걸어가니 연무대방면
시내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연무대방면으로 운행하는 논산시내버스는 모두 논산역에
있는 시내버스터미널에 출발한다.
논산에서 연무대방면 시내버스 운행시간은
------> (연무대방면
버스시간표)
버스매표소에서 시내버스승차권을 구입했다.
논산시내버스요금은 750원,
승차권을 구입할경우 730원이다.
나는 승차권을 6장구입했다. 6장이나 구입한 이유는 왕복을
해야하기 때문에
6장이면 730 x 6 = 4380원이다. 그러나 매표소아줌마가 20원
할인해 주었다.
버스표를 구입하고 좀 기다리니 연무대방면 버스가 온다.
버스가 오자 운전사에게 "견훤릉 가요"라고 물으니
간다고.....
마침 그 버스가 견훤릉앞을 지나간다.
이번에 탄 버스는 덕성여객소속
논산시내버스 노선으로 '논산역-안심리방면'으로 운행하는
버스이다 차종은 그 유명한 bf105이다.
논산시내버스는 무번호체제로 되있다.
앞에 행선판을 보고 타야된다.
버스는 논산시청을 경유 논산시내를 벗어나고.. 잠시뒤
은진에 도착한다.
은진을 지나 1번국도를 졀라게 달려서 어느덧 연무읍에
도착한다.
연무읍은 논산훈련소가 있는 곳이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아마 모르는이가 없을듯 싶다.
연무읍은 읍인데도 규모가 상당히 컸다.
논산시내보다 더 도시화된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육군훈련소때문에 먹고사는 동네가 바로 이곳 연무읍이다.
버스운전사는 우리한테 여러가지 정보를 주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운전사가 나한테 이런저런 정보를 주었다.
'견훤릉'간다고 하니까. 운전사가 신기해했는지. 아니면
기특해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친절했다. 그는 사계김장생유적을
가볼것을 나에게 권했다. 그곳이 아주 좋다고 하면서..
그리고 나한테 "어디서 왔어요?" 라고 물으니 나는
그냥 "대전요"라고 말하니
연무읍에서 대전가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버스는 연무읍내를 벗어나서 조그만 농로로 들어간다.
그곳에 이르니 '견훤묘 1km'라는 이정표가 설치되있다.
그 농로로 들어가면서 버스운전사와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나오는 버스가 언제 있냐고 물으니 이 버스는 안심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나간다면서
천천히 '견훤릉'을 둘러보고 1km걸어서 입구에서 타고 갈것을
권했다.
입구에는 논산시내로 가는 버스가 10여분간격으로 다닌다.
농로로 1km정도 들어가니 어느덧 견훤릉입구에 도착했다.
운전사는 견훤릉입구에 버스를 세우고 다왔다고
알려준다.
나는 감사의 뜻을 표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서 이정표를 따라 언덕을 오르니 언덕정상에 1개의
큰 고분이 서있는데..
29.
그것은 바로 '견훤릉(甄萱陵)'이다.
(-> 처음 화면으로)
견훤은 2월말까지 절찬리에 방영했던 사극 '태조왕건'의
나왔던 인물이다.
마침 그날이 '태조왕건' 마지막전편을 방영하는 날이였다.
그 내용은 견훤이 고려태조 왕건에게 귀순하는 내용과
신라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한 내용을
방영했다.
여기서 잠깐 후삼국 이야기를 해야되는데 역사분야를 졀라
싫어하는 이들은
아래를 과감하게 누르기 바란다.
------> (
그냥 통과하기 -.-;;)
이 고분(古墳)은 후백제의 시조 견훤(甄萱:867∼935)의
능이라고 전해온다.
견훤의 원래의 성은 이(李)씨이며, 상주 사람으로 신라 장군 아자개의 아들이라 한다.
그는 가은(경북 문경시)에서 태어났으며 무예가 아주
뛰어났다.
젊은나이에 서라벌로 진출하여 김위홍(경문왕의
아우)밑에서 장군을 지내다가
칙령을 받고 군사를 이끌고 전라남도지역으로 이동하여
여러 토착세력들을 때려잡고
892년에 무진주(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왕을 칭한다.
900년에는 완산주(전북 전주)로 국도(國都)를
옮기고 국호(國號)를 '백제(百濟)'라 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말하는 후백제이다.
그는 중국의 오월,당나라와 국교를 맺고 바다건너 일본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신라와 궁예가 세운 고려(후고구려)를 공격하여
전라도,충남,경북,경남,충북지역
상당수를 점령한다.
904년에는 마진(후고구려)에 장군 왕건의 수군에게
나주지역을 빼앗겼다.
2차례 대야성(경남 합천)을 공격했으나 별 소득없이
철군했다.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국호를
고려(高麗)로 했다.
이에 견훤은 왕건에게 사절단을 보내 잠시나마 우호관계를
맺기도 했다.
920년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대야성을 점령한다.
925년에는 조물성(경북 북부)에서 고려의 왕건과 오랫동안
싸웠으나 승부를 못가리고
서로 볼모를 교환하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926년 백제에서 보낸 견훤의 처가쪽 사람인 진호가 고려에서
살해당하자
견훤은 고려에서 보낸 왕신(왕건의 사촌아우)을 죽이고
전쟁을 선포한다.
927년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비밀리에 신라서라벌을
공격한다.
신라,고려 어느 누구도 백제가 서라벌을 공격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견훤은 서라벌로 입성하여 포석정에 머물고 있던 경애왕(신라
55대왕 재위 924~927년)을
잡아죽이고 많은 신라관리들을 죽이고 유유히 철수한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태조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오는도중
공산(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
견훤의 백제군과 치열한 맞짱을 뜨게 된다.
그러나 고려군은 크게 패하고 고려의 주요장수인 신숭겸,김락,전이갑등이
장렬히 전사하고
고려군 1만여명이 전사했다.
왕건은 신숭겸덕분에 겨우겨우 송도(개성)로 줄행랑을 친다.
929년 백제는 삼년성(충북
보은)에서 고려군을 크게 격파한 이후,
후삼국중에서 제일 강대국으로
국위를 크게 떨치면서, 경상북도지역을 야금야금 먹기
시작한다.
그러나 930년 고창(경북
안동)에서 고려군에게 크게 패한이후 백제는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934년 운주(충남 홍성)에서
다시 고려군과 맞짱을 뜨지만 역시 고려군에게 패한다.
그 이후 견훤은 등창이 심해지고 마음까지 약해지면서
서둘러 후계자를 세우게 되는데..
그는 남달리 애지중지했던 4남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견훤의 본처소생으로 신검,양검,용검형제와
이들을 따르던 능환과 여러
문무대신들은
견훤의 이런 조치의 크게 불만을 표하게 되고 결국 935년 3월에
신검을 중심으로 한 신검파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金山寺,
전북 김제)에 가둔다.
정확하게 금산사 경내에 있는 미륵전(彌勒殿)지하에
유폐시킨다.
졸지에 유폐를 당한 견훤은 후궁인 고비와 여러자식들을
이끌고 935년 6월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땅인 나주로 도망을 친다.
나주를 통해서 고려태조 왕건에게 귀순한 견훤은 백제를
정벌한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935년 10월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태조에게 나라를 들어
바치고.. 이제 남은것은 백제뿐이다.
936년 가을 고려태조왕건은 87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치기위해 일리천(경북
구미)으로
향한다. 이때 백제는 견훤의 장자인 신검이
백제왕이 되어 10여만의 대군을 이끌고
일리천으로 향한다.
그러나 백제군은 견훤을 선봉으로 세운 고려군에게
보기좋게 패하고...
할 수 없이 황산(충남 논산)으로
후퇴한다. 그러나 고려군의 공격으로 결국 백제군은 크게
무너지고
백제왕 신검은 936년 9월,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한다.
이로써 견훤이 세운 후백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백제가 망한후 견훤은 논산에 있는 황산불사(黃酸佛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며,(936년 9월)
죽을 때 완산주(전주)가 그립다고 유언을 하였으므로
완산을 향하여 묻었다고 한다.『삼국사기』에는
걱정이
심해 등창이 나 황산의 절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동국여지승람』에는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커다란 봉분앞에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비석이
서 있을 뿐 주변에는 아무 시설이 없고 남쪽으로
전주
뒷산이 70리 떨어져 잘 보이고 있다.
견훤릉은 충남지방기념물 26호이다.
(-->
견훤에 대해서 알아보기)
* 후백제왕
견훤의 릉 (비석과 상석이 세워져 있다.)
30. 어느덧 견훤릉앞에 도착했다.
견훤릉은 봉분과 비석,상석이 전부이다. 비석,상석은
최근에 견씨문중에서 세운것들이다.
비석에는 '後百濟王甄萱陵'이라고 쓰여있다.
여기서 보면 전주의 뒷산이 보인다고 한다
견훤릉에는 우리외에도 관광객 서너명이 관람을 하고
있었다.
후삼국시대 비운의 인물 견훤...!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이
무너뜨려야 했던 이유는...?
견훤릉을 한바퀴 둘러보고 견훤릉을 나온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되는가.. 다시 논산으로 나가야 된다.
그래야 서울로 갈 수 있으니.......
금곡리마을을 지나 철로(논산-연무대역)를 건너서 입구에
이른다.
여기서는 논산으로 가는 논산시내버스가 많이 다닌다.
버스를 기다린지 얼마안되서 논산역으로 가는 버스가 왔다.
이번에 탄 버스는 덕성여객소속
논산시내버스 '연무-논산역' 노선으로 bs106l 냉방차이다.
버스표를 내고 탑승... 연무읍을 지나 은진,논산시청,5거리를
지나서 논산역에서 내렸다.
31. 다시
논산역으로 왔다. 그때시간 6:30분경
(처음화면으로)
어느덧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역전부근에 있는 분식집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고
논산역사로 들어오니 7:10분경..
역사(驛舍)에 들어가서 예약한 철도표를 구입하고 과자를
먹으면서 열차를 기다린다.
어느덧 8:00가 되자 개표를 시작하는군.. 개표를 받구
열차 타는곳으로 나갔다.
논산역에서 대전,서울방면 열차시간표는
------> (열차시간표)
그런데 열차가 지연되는군... 8:10분이
되자 우리가 탈 열차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타는 열차는 목포역을 17:20분에
출발하여 서울역에 22:49분에 도착하는
무궁화호 제 426열차. 차실은 5호차 19,20,23석이며 운임은 8100원이다.
8:12분이 되자 열차는 논산역을 출발하고..
열차안에 승객들은 졀라 많았다. 그러나 입석은 없다.
나는 피곤한지라 잠이 들고........ zzz
잠에서 깨보니 어느덧 수원역에 이르렀다.
안양,시흥,영등포,용산역을 지나 서울역에 22:49분에 정시로
도착했다.
열차표는 기념품으로 가져오고,.....
서울역전 광장에서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나는
서울지하철4호선(당고개-오이도)을 타고
노원역에서 서울지하철7호선(장암-온수)으로 갈아타고 집에
오니 0시... 즉 자정이다.
---> 이로써 백제권(부여,논산)
여행의 대장정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된다........!
32. 마무리
이번여행은 부여,논산지역을 갔으며..
부소산성,낙화암,백마강유람선,고란사,구드래공원,궁남지,견훤릉을
관람했다.
--- 집으로 가져온것들 ---
1. 서울->논산 무궁화호 승차권
2. 부소산성 입장권
3. 백마강 유람선 승선권
4. 논산->서울 무궁화호 승차권
이 여행후기는 2002년
3월 13일 새벽 3시에 완성했습니다...
------ the end ------
*
서울시내버스 20번 노선도
(원래
자리로 가기)
운행회사: 한성여객
운행대수: 28대 (현재 회사사정으로 10대정도만 운행)
운행거리: 32.1 km
주요 정류장:
상계7단지종점-노원역(미도파)-도봉면허시험장-용화여고-상계9,10단지-상계11,12단지-
상계14,15단지-노일초교-수락산역-두산주공(우리집)-노원교-도봉역-성황당(도봉동)-도봉시장-
방학동-다리앞-창동-정의여중-쌍문역-도봉전화국-신창동(주택앞)-대우아파트-신창시장-양조장-
샘표간장-쌍문동-수유리(강북구청)-수유시장-신일고-성북시장-삼양입구-대지극장(신세계)-
미아3거리(현대미아점)-길음동-미아리고개-돈암동(성신여대)-돈암초교-삼선교(한성대)-
혜화동로터리-성균관대입구-창경궁앞(서울대병원)-창덕궁(비원)-안국동-경복궁-세종문화회관(광화문)-
시청(동방플라자)-서울역종점-남대문시장-명동(밀리오레)-대한극장-퇴계로-을지5가-종로5가-
이화동-방송통신대-혜화동(대학로)-동성고교-삼선교(한성대)-
이하 역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