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신라(新羅) 제4대 탈해왕(57∼80)이 탄강한 곳이다. 신라 3대 왕성(王姓) 가운데 최초의 석씨왕인 탈해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왜국(倭國)에서 동북쪽으로 천여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왕비가 잉태한지 7년만에 큰 알을 하나 낳았는데,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하여 왕이 궤속에 알과 칠보(七寶), 노비(奴婢)를 함께 넣어 바다에 띄워 인연이 있는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라고 기원하였는데, 이때 적룡(赤龍)이 나타나 호위하였다. 그 궤가 신라 땅에 와 닿았을 때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발견하여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다. 궤가 바다에 떠와서 닿았을 때 까치들이 우짖어서 발견하게 되었으므로 까치 '작(鵲)'자에서 '조(鳥)'자를 떼어 '석(昔)'으로 성(姓)을 삼고, 궤를 풀고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였다 한다. 탈해는 자라서 제2대 남해왕(南解王)의 사위가 되고 62세에 유리왕(儒理王)의 뒤를 이어 제4대 임금이 되어 24년간 재위하였다.
탄강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계림동(鷄林洞)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라 하였고, 조선 헌종(憲宗) 11년(1845) 탄강지에 하마비(下馬碑)와 땅을 하사하여 석씨 문중에서 유허비(遺墟碑)와 비각(碑閣)을 건립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사적 제174호)은 경주시 동천동에 있다.
※석탈해 신화(昔脫解 神話)
가락국 바다 가운데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이 신민들과 함께 북을 치고 맞아 들여 머물게 하려 하니, 배가 곧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지금도 상서지(上西知) 하서지촌(下西知村)이 있다). 마침 포구 가에 한 노파가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니 혁거왕의 고기잡이의 어미였다.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 바다 가운데 본래 바위가 없었는데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고 배를 끌고 가서 찾아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들고 그 배 가운데 궤 하나가 있는데 길이가 20척, 너비가 13척이나 되었다. 그 배를 끌어다 수림 밑에 두고, 길흉을 알지 못하여 하늘에 고하였다. 조금 있다가 궤를 열어 보니 단정한 남아와 아울러 칠보와 노비가 그 가운데 가득차 있었다. (그들이) 대접받은 지 7일만에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정명국(政明國) 또는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하는데, 완하(琓夏)는 혹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倭)의 북동 1천 리에 있다)으로 우리나라에 일찌기 28 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사람의 태(胎)에서 나왔고 5, 6세 때부터 왕위를 이어 만민을 가르쳐 성명을 올바르게 하였다. 8품의 성골이 있으나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대위(大位)에 올랐다. 이 때 우리 부왕 함달파가 적녀국의 왕녀를 맞아서 비를 삼았더니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하여 아들을 구할새, 7년 뒤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이에 대왕이 군신에게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음은 고금에 없는 일이니 이것이 불길한 징조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또 칠보(七寶)와 노비를 배 안에 가득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기를 '마음대로 인연 있는 곳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여기에 왔노라."고 말을 마치자, 그 아이가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 석총(石塚)을 만들고 7일 동안 머무르면서 성중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니 마치 초생달같이 둥근 봉강(蜂岡)이 있어 지세가 오래 살 만한 곳이었다. 내려와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모략을 써, 몰래 숫돌과 숯을 그 곁에 묻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 집 문 앞에 가서 이것이 우리 조상 때의 집이라 하였다. 호공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여 서로 다투어 결단치 못하고 관가에 고하였다. 관에서는 무엇으로써 너의 집임을 증명하겠느냐 하니, 동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시골에 간 동안 다른 사람이 뺴앗아 살고 있으니 그 땅을 파 보면 알 것이라." 하였다. 그 말대로 파 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있으므로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때 남해왕이 탈해의 슬기 있음을 알고 맏공주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가 아니(阿尼) 부인이었다. 하루는 탈해가 동구(東丘)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를 시켜 물을 구해 오라 하였다. 백의가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도에서 먼저 맛보고 드리려 하다가 그 각배가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탈해가 이를) 꾸짖자 백의가 맹세해 말하기를 "이후에는 멀고 가까운 곳을 논할 것 없이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하니 비로소 그릇이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가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지금 동악 가운데 우물 하나가 있어 속(俗)에 요내정(遙乃井)이라 하니 바로 이것이다. 노례왕이 돌아가매 光虎(武)帝 중원(中元) 6년 정사(丁巳) 6월에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예적 내 집이라 해서 남의 집을 빼앗았으므로 성을 석씨(昔氏)라 하였다. 또는 까치로 인하여 궤를 열게 되었으므로 '작(鵲)' 字에서 '조(鳥)' 字를 떼고 석씨(昔氏)라 성(姓)하였다고도 하고, 또 궤를 풀고 탈출해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한다. 재위 23년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에 들어가니 소천구(疏川丘) 가운데 장사지냈던바, 그 뒤에 신의 가르침이 있기를 "나의 뼈를 삼가 묻으라" 하였다. 그 두골의 둘레가 3척 2촌, 신골의 길이가 9척 7촌이나 되며 이가 엉키어 하나가 된 듯하고 골절이 모두 연해졌으니 참으로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이었다.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궐내에 모시었더니 신이 또 이르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두어라." 하므로 (거기에) 봉안케 하였다(또는 이르기를 탈해 붕후(崩後) 27세(世) 文虎(武)王 떄 조로(調露) 2년 경신(庚辰) 3월 15일 신유(辛酉) 밤에 태종의 꿈에 매우 사나운 모양의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탈해인데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지금까지 나라에서 끊이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곧 동악신(東岳神)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