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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권철(權轍)
1503년(연산군 9) - 1578년(선조 11)
조선 전기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권마(權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권교(權僑)이고, 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안탁(安擢)의 딸이다.
권율(權慄)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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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선생집 제15권 / 행장(行狀)
의정부 영의정 권공 행장(議政府領議政權公行狀)
공의 휘(諱)는 철(轍)이요, 자(字)는 모(謀)이다. 권씨(權氏)는 본래 성씨가 김(金)이었다. 그런데 신라씨(新羅氏)의 후예로 행(幸)이라는 이가 고창군(古昌郡)을 가지고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귀부(歸附)하자, 고려 태조가 그 공을 갸륵하게 여겨 ‘기미에 밝고 권도에 통했다.[炳幾達權]’ 하여 권씨의 성(姓)을 하사하고 고창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는데, 뒤에 가서 고창이 안동부(安東府)로 바뀌면서 권씨가 마침내 안동 사람이 되었다.
고려 때의 선조로는 명상(名相) 보(溥)가 저명하다. 그러다가 아조(我朝)에 들어와 문충공(文忠公) 근(近)에 이르는데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면서 우리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섬겨 관직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문충의 아들 제(踶)도 찬성의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분이 바로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마(摩)는 연천 현감(漣川縣監)으로 판서를 증직받았고, 조부 교(僑)는 양근 군수(楊根郡守)로 찬성을 증직받았으며, 부친 적(勣)은 강화 부사(江華府使)로 영의정을 증직받았다. 모친은 순흥 안씨(順興安氏)이다.
공은 홍치(弘治) 계해년(1503, 연산군 9)에 태어났다. 유아기 때부터 기상과 모습이 보통 사람과 달라 앞으로 큰 그릇이 되리라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장성해서 학문에 힘을 기울인 결과 무자년에 생원시 및 진사시에 입격(入格)하였고 갑오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학유에 임명된 다음 한림(翰林)에 선발되어 들어가 비사(秘史)를 정리하였는데, 곡필(曲筆)을 용납하지 않다가 김안로(金安老)에게 미움을 받은 나머지 고과(考課)에서 하(下)의 점수를 받았다. 이에 중묘(中廟)가 사람을 시켜 물어보기를,
“권 한림이 무슨 일 때문에 폄하(貶下)를 받게 되었는가?”
하였는데, 동료가 그럴 듯한 말로 얼버무려 답변하고 말았다.
안로가 패망하자 다시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승정원 주서로 옮겨졌는데 중묘(中廟)가 공을 무척이나 인재로 인정하면서 문의(文義)에 의심나는 것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공에게 묻게 하곤 하였다. 또 언젠가는 후원(後苑)에 거둥하여 근신(近臣)들을 대상으로 제목을 내주며 글을 짓도록 하였는데, 공이 기주(記主)의 엄무에 쫓긴 나머지 미처 글을 완성하지 못하자 상이 특명을 내려 빨리 지어 올리도록 재촉한 일도 있었다. 공이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홍문관 저작에 임명되었다가 박사로 승진하면서 시강원 설서를 겸하였다. 뒤이어 수찬으로 오른 다음 병조 좌랑으로 옮겨졌다가 마침내 이조에 들어가 좌랑이 되었는데 무슨 일로 병조에 좌천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누차 예조와 형조의 정랑 및 홍문관 교리, 성균관 전적과 직강에 전직(轉職)되었으며,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헌납을 각각 2번씩 역임하면서 시강원 문학을 겸하였다. 그러다가 병으로 체직되어 전설사 수(典設司守)가 되었다.
인묘(仁廟)가 동궁(東宮)에 있을 당시 공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시(內侍)를 보내 병문안을 하는가 하면 약물(藥物)을 내려 주기까지 하였는데, 이로부터 몇 년 동안은 산관(散官)에 몸담게 되었다. 병이 낫자 의정부 검상에 임명된 뒤 사인(舍人)으로 승진하면서 시강원 필선을 겸하였다. 그러고 나서 뒤이어 군기시 부정으로 옮겨졌는데 강관(講官)의 직책을 예전 그대로 겸대(兼帶)하였다.
갑진년에 중묘(中廟)가 승하하자 공이 국장도감(國葬都監)의 낭청(郞廳)이 되었는데, 동료가 무슨 일로 처벌을 받게 되면서 공 역시 이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다가 1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서용(敍用)되어 선공감 부정이 되었다.
인묘(仁廟)가 승하하였을 때에도 산릉도감(山陵都監) 도청(都廳)이 되었으며, 장악원 정으로 승진한 뒤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오랫동안 산반(散班)을 출입하였다. 당시로 말하면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잡고 진복창(陳復昌)이 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공이 언젠가 술자리에서 복창을 배척하였으므로 복창이 원한을 품고는 못할 짓 없이 공을 중상모략하려고 하였는데, 결국에는 그 일을 행하지 못하였다.
경술년에 승문원 판교에서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으며 그곳에서 3년 동안 있으면서 도승지에 이르렀다. 그 뒤 병으로 면직되었다가 곧이어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다. 갑인년에 또 사은사로 경사에 갔다가 돌아와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영남 지방에 기근(饑饉)이 크게 들자 명묘(明廟)가 공을 발탁하여 직질(職秩)을 올려 준 뒤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임기를 만료하고 조정에 돌아와서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공이 입대(入對)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남 지방의 백만 생령(生靈)이 공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모조리 죽어 구렁에 뒹굴게 되었을 것이다.”하고, 이어 난모(煖帽)를 하사하였으며, 얼마 뒤에 어필(御筆)로 공을 발탁하여 형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이때 호남 지방이 왜구(倭寇)의 침략을 막 겪은 때라서 조정이 해변의 방위를 중시한 나머지 공을 전라도 관찰사 겸 도순찰사로 추천하였다. 이에 공이 부임하면서부터 온 도내가 크게 다스려졌는데,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바로 오곤 하였으며, 또 왜선(倭船)이 부안(扶安)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를 나포(拿捕)하여 조정에 헌괵(獻馘)하기도 하였다.
그 뒤 부름을 받고 돌아와 다시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무오년에 세자를 책봉하기 위해 조사(詔使)가 오자 공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는데, 귀환할 적에 반송(伴送)하면서 국경에 이를 때까지 빈상(儐相 손님을 인도하고 주인을 돕는 것)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예법에 어긋나게 한 적이 없었다. 그 뒤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상이 광릉(光陵 세조(世祖)의 능)을 참배할 적에 공이 포영사(布營使)가 되어 부대를 엄히 단속하였으므로 자리를 이탈하는 군사가 한 명도 없었다. 이에 승진하여 의정부 우찬성이 되었다. 이양(李樑)이 총재(冢宰 이조 판서)로 있다가 패망하였는데, 상이 인망(人望)에 따라 공을 등용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면서 경연사(經筵事)를 겸하게 하였다. 급기야 윤원형을 축출할 적에 공의 힘이 또 컸으므로 병인년에 어비(御批)를 내려 공을 특별히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융경 황제(隆慶皇帝 명 목종(明穆宗))가 즉위하자 공이 등극(登極)을 축하하러 가게 되었는데, 출발할 무렵에 명묘(明廟)가 공을 인견(引見)하고 여행길을 위로하면서 이르기를,
“새로 천자가 즉위하고 나면 반드시 크게 진퇴(進退)시키는 일이 있을 것인데, 선조(先祖)의 구인(舊人) 가운데 폐출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소명(召命)을 받은 사람들을 경이 자세히 알아보고 오라.”하였다.
이에 공이 물러나와 사람에게 말하기를,
“상이 이렇게까지 분부하신 것을 보면 아마도 저간의 사화(士禍)에 대해 뉘우치는 마음이 드시는 것 같다. 이를 계기로 을사년에 무고한 화를 당한 인사들을 변호하여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무함당한 것을 밝혀내야 할 것이니, 지금이 바로 그 기회이다.”하였다.
그런데 미처 국내에 돌아오지 못했을 때에 명묘가 승하하고 선조(宣祖)가 들어와 대통(大統)을 잇게 되었다. 공이 복명(復命)한 뒤 입대(入對)하여 제일 먼저 임금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할 것과 궁금(宮禁)을 엄숙히 단속할 것을 진달드리니, 상이 경청하며 가납(嘉納)하는 동시에 공을 좌의정으로 승진시켰다.
당시 백관이 착용하는 난모(煖帽)의 제도가 매우 법도에 맞지 않았는데 공이 건의하여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르게 하였으므로 논하는 이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인묘(仁廟)를 문소전(文昭殿)에 이부(移祔)할 때 공이 그 일을 총령(摠領)하였다. 5년이 지난 뒤에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공의 나이가 벌써 일흔이 되었으므로 소장을 올려 치사(致仕)를 청하니, 상이 궤장(几杖)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간절히 사양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덕량(德量)이야말로 사람을 진정시키기에 충분하고, 공의 재지(才智)야말로 나라의 계책을 세우기에 충분하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경보다 뛰어난 현상(賢相)을 찾아볼 수 없는데, 궤를 내리고 장(杖)을 내린 것은 이에 기대고 부축을 받게 하려 함이니 경은 사양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그래도 계속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면서 해를 넘기자 비로소 허락하여 영중추부사에 임명했다가 달포가 지난 뒤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했는데, 공이 고사(固辭)하자,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노성(老成)한 대신은 나라의 시귀(蓍龜)와 같은 존재이다.
나는 그저 경이 성취시켜 주기만을 바랄 따름이다.”하였다. 그러나 한참 동안 간절하게 사양을 한 끝에 윤허를 받을 수가 있었다. 갑술년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상이 승지를 파견하여 어의(御醫)와 함께 병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공이 더욱 극력 사양하면서 소장을 8차례나 올리자 허락해 주었다.
병자년에 이르러 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공이 이번에도 극력 사양하면서 아뢰기를, “나이도 많이 들고 병도 심한데 영의정을 4번이나 역임하게 되다니 이는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못 됩니다.” 하였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하였다.
공이 언젠가 입견(入見)할 적에 상이 소황문(小黃門 처음 보임된 내시(內侍)를 말함)에게 명하여 부축해서 들어오게 한 적도 있었고, 또 공이 걷기가 불편하다고 하여 견여(肩輿)로 입궐하게 하자는 의논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이 일이 비록 실제로 행해지지는 않았으나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은 것이 이처럼 극진하였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에 걸쳐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물러가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그때마다 모두 윤허하지 않았는데, 어비(御批)의 내용 중에는 ‘팔다리와 같은 나라의 수상(首相)[股肱元輔]’, ‘나라를 위하는 진실된 마음[赤心爲國]’, ‘큰 가뭄 끝에 내리는 통쾌한 단비[大旱霖雨]’, ‘강을 건널 때 탈 배[濟川舟楫]’와 같은 표현이 들어 있었다.
무인년 여름에 병기(病氣)가 엄습하였는데, 마침 하늘의 변고가 있었으므로 마침내 소장을 올려 자신을 탄핵하다가 병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 병을 보살피게 하였다. 어느 날 밤 재촉해서 자리를 바르게 하도록 한 다음 억지로 일어나 사람에게 기대어 앉아서 유소(遺疏)를 작성하려고 하였으나 기운이 떨어져 글을 짓지 못하게 되자 실성(失聲)한 목소리로 호읍(號泣)하며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성주(聖主)를 뵙지 못하게 되겠구나.”하였다.
그때 상이 경연(經筵)에 임어하고 있다가 공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강(講)을 중단케 하고 승지를 보내 하고 싶어하는 말을 물어보게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뒤였다. 수(壽) 76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애도를 표하며 3일 동안 조시(朝市)를 열지 않게 하는 한편, 승지를 보내 조문하고 예관(禮官)에게 치위(致慰)케 하였으며 재차 유제(諭祭)를 내리고 보통 이상으로 더 부의(賻儀)하게 하였다. 유사(有司)가 물품을 마련하고 예법대로 갖춘 가운데 이해 모월 모일에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에서 장례를 거행하였다.
공은 선천적으로 성품이 충성스럽고 순후하며 엄숙하고 굳세었으며 어려서부터 공보(公輔 삼공(三公) 육경(六卿))의 기량과 풍도를 갖추고 있었다. 세무(世務)를 급선무로 여겨 강구하지 않은 일이 없었는데, 조정에 45년 동안이나 몸담고 4조(朝)를 차례로 섬기면서 4차례에 걸쳐 영의정을 역임하였지만 감히 공의 허물을 의논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랏일에 노심초사하며 새벽녘까지 등불을 밝힌 적도 있었고, 늘 백성의 안정과 변방의 대비를 중시하면서 사방에서 누가 오기만 하면 민물(民物)의 성쇠와 변방의 득실을 꼭 물어보곤 하였다. 평생토록 사치스러운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교통(交通)하며 뇌물을 주고받는 일을 일체 하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 큰 정사를 의논하고 큰일을 결단할 때에는 반드시 고전(古典)을 상고하여 좋은 쪽으로 따랐고, 가능한 한 성헌(成憲)을 준수하면서 새로 일을 만들어 번잡스럽게 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형법(刑法)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신중한 면모를 보였는데, 언젠가 말하기를,
“선인(先人)께서 늘 경계해 주시기를 ‘입으로라도 살(殺)이라는 글자를 말하지 말라.’ 하셨다. 그래서 내가 누차 형벌의 권한을 행사하였고 또 오래도록 정승의 지위에 몸담고 있었지만 감히 사람 목숨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으며 죄수를 논할 때는 반드시 그를 살릴 방도를 강구하곤 하였다.”하였다.
처음에 김안로(金安老)가 권력을 휘두를 때 공이 안로의 뜻을 거역했고, 진복창(陳復昌)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 공이 또 복창의 뜻을 거슬렸다. 그러다가 이양이 패망하자 공이 그 대신 전조(銓曹)를 장악하였고, 윤원형(尹元衡)이 축출되자 공이 곧바로 정승으로 들어갔다. 군자들은 바로 이 점을 들어 공이 얼마나 사론(士論)에 중시되었는지 인식하고 있다.
공은 내행(內行)에 독실하였으며 선조 받들기를 그지없이 성실하게 하였다. 종자(宗子)가 가난하여 사당을 수리할 능력이 없자 공이 가재(家財)를 털어 공사를 진행시켰으며,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사우(祠宇)가 무너져 형편없이 되자 공이 새로 보수하였다.
그리고 매달 초하루에 여러 자손들을 모아 전(奠)을 올릴 때 참여케 하는 동시에, 종족(宗族)들을 보살펴 은혜를 골고루 베풀면서 가난한 나머지 시집 장가를 못 가는 자가 있으면 공이 시집 장가를 보내 주곤 하였다. 공이 죽던 그해에 정부의 뜰 안에 서 있던 큰 홰나무가 비바람에 부러졌는데, 이것을 보고 공이 말하기를,
“내가 아마 죽을 모양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재주가 없는 몸으로 정승의 윗자리까지 올랐는데 기록할 만한 공덕(功德)이 하나도 없으니 내가 죽고 나서 비석을 세울 필요도 없다. 그저 묘표(墓表)에 관직과 성명만 써넣으면 충분하다.” 하였다. 병석에 누워 있은 지 근 한 달 동안 집안에 관계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오직 정성스럽게 나랏일만 이야기하다가 임종 때에 가서야 그쳤다.
공은 연치(年齒)와 덕망(德望)이 모두 높고 복록(福祿)이 구비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근대의 현상(賢相) 가운데 공명(功名)을 끝까지 누리면서 아무 흠이 없었던 이를 거론할 때면 공이 꼭 첫째 둘째를 차지하곤 한다.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와의 사이에 아들 넷을 두었다.
항(恒)은 광흥창 수(廣興倉守)이고, 개(愷)는 호조 좌랑이고, 순(恂)은 모관(某官)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율(慄)은 문과(文科)를 통해 조정에 진출하여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임진왜란 때에 도원수(都元帥)로 왜구(倭寇)를 격파하여 대공(大功)을 세움으로써 중흥의 제일 명장(第一名將)이 되어 그 명성이 화이(華夷)간에 전파되었으며 선무(宣武)의 원훈(元勳)에 책훈되고 모관에 증직되었다.
내가 늦게 태어났지만 나름대로 선배 명공(名公)들을 따라 노닐면서 공의 덕업(德業)에 대한 대체적인 내용을 상당히 들을 수가 있었다.
이에 삼가 이상과 같이 공의 행장을 작성하면서 역명(易名 시호를 내리는 것)할 자료로 참고하도록 감히 청하는 바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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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議政府領議政權公行狀
公諱轍。字某。權本姓金。新羅氏之裔。有曰幸者。以古昌郡歸麗祖。麗祖嘉其功。以爲炳幾達權。賜姓權氏。邑之古昌。古昌後爲安東府。權氏遂爲安東人。麗有名相溥。至文忠公近。以文學名世。事我太祖太宗。官至贊成。文忠之子曰踶。亦官贊成。於公爲高祖。曾祖摩。漣川縣監。贈判書。祖僑。楊根郡守。贈贊成。考勣。江華府使。贈領議政。妣順興安氏。公以弘治癸亥生。兒時氣貌異常人。知其爲遠器也。及長力學。戊子。中生員進士。甲午。擢文科。拜成均館學諭。選入翰林。修祕史。不曲筆。爲金安老所惡。寘之下考。中廟使人問曰。權翰林何事見貶。同列以權辭對。安老敗。復入翰苑。遷承政院注書。中廟甚器之。每文義有疑。輒使問之。嘗御後苑。命題試近臣。公𠫷於記注。篇未成。上特命趣進。其受知如此。拜弘文館著作。陞博士。兼侍講院說書。尋陞修撰。遷兵曹佐郞。遂入吏曹爲佐郞。以事左遷兵曹。陞正郞。屢遷禮曹刑曹正郞,弘文館校理成均館典籍直講。爲司憲府持平,司諫院獻納者各再。兼侍講院文學。以疾遞。爲典設司守。仁廟在東宮。聞公病。遣內侍問疾。賜以藥物。自是在散官者數稔。疾愈。拜議政府檢詳。陞舍人。兼侍講院弼善。尋遷軍器寺副正。講官仍舊。甲辰。中廟昇遐。公爲國葬都監郞廳。同職坐事。公亦連逮奪職。歲餘。復敍拜繕工監副正。仁廟昇遐。又爲山陵都監都廳。陞掌樂院正。以謝恩使書狀官。朝京師還。而出入散班者久之。時尹元衡秉國。陳復昌爲其瓜牙。公嘗於酒席斥復昌。復昌嗛之。欲中傷公無不至。竟未果焉。庚戌。自承文院判校。陞承政院同副承旨。積三歲。至都承旨。病免。尋拜兵曹參知。甲寅。又以謝恩使。赴京師還。拜戶曹參議。會嶺南大饑。明擢公陞秩。爲慶尙道觀察使。期滿還朝。又拜都承旨入對。上謂曰。嶺南百萬生靈。微卿其盡溝壑乎。仍賜煖帽。未幾。御筆擢拜刑曹判書。時湖南新創倭寇。朝廷以海徼爲重。乃推公觀察全羅道。兼都巡察使。一道大治。歲旱禱雨輒應。倭船抵扶安。勦捕獻馘。徵還。復拜刑曹判書。戊午。詔使來冊世子。公爲遠接使。比還伴送至境。儐相無違禮焉。拜兵曹判書。上謁光陵。公爲布營使。部勒嚴整。士無離次。陞議政府右贊成。李樑以冢宰敗。上用人望擧公代之。兼經筵事。及尹元衡之黜也。公又有力焉。丙寅。御批特拜公爲議政府右議政。隆慶紀元。公進賀登極。將行。明廟引見公爲勞苦之。且曰。新天子踐阼。必有大進退。凡先朝舊人起廢收召者。卿其詳訪以來。公退語人曰。上敎及此。殆悔端之萌乎。有能藉是以訟乙巳無辜。伸柱雪誣。此其機也。未還。而明廟大行。宣祖入紹大統。公復命入對。首陳正君心嚴宮禁之說。上爲傾聽嘉納焉。陞左議政。時百官煖帽。制甚不典。公建請悉從華制。論者美之。仁廟移祔于文昭殿。公領其事。居五歲。陞領議政。明年。公已七十。上章乞致仕。上命賜几杖。公懇辭。上曰。卿德量足以鎭人。才智足以謀國。當今賢相無過於卿。有几有杖。所以倚扶。卿宜勿辭。公乞免不已。踰年乃許。拜領中樞府事。月餘。復拜領議政。公固辭。上不許曰。老成大臣。國之蓍龜。而予所仰成也。久之。懇辭得允。甲戌。復拜領議政。以病辭。上遣承旨。挾御醫視疾。公辭益力。章八上。乃許。至丙子。又拜領議政。公又力辭曰。年邁病甚。且四領政府。非所堪。終不許。公嘗入見。上命小黃門挾掖之。又以公不良於行。至有肩輿入闕之議。事雖不行。其眷遇至矣。屢以老病求退。皆不允。御批有股肱元輔。赤心爲國。大旱霖雨。濟川舟楫等語。戊寅夏。感疾。會有天變。遂上章自劾。疾益甚。上遣御醫視之。一夕趣令正席。強起倚人而坐。欲草遺疏。氣乏不成文。失聲號曰。吾不復見聖主矣。上方御經筵。聞公病革。卽命輟講。遣承旨問所欲言。已不能言矣。享年七十有六。訃聞。上震悼。輟朝市三日。承旨臨弔。禮官致慰。再賜諭祭。賵賻有加。有司備物具禮。用是年某月日。葬于楊州之洪福山。公資性忠醇嚴毅。自幼有公輔器度。急世之務。靡不講究。立朝四十五年。歷事四朝。四領台鼎。而人不敢議其疵。憂勞國事。或明燈達曙。每以安民備邊爲重。有從四方來者。必問民物衰盛邊防得失。平生不喜奢靡。不通人問遺。其爲相也。議大政斷大事。必稽古典。擇善而從之。遵守成憲。不事紛更。尤致謹於刑法。嘗曰。先人每見戒曰口不道殺字。故我屢執刑柄。久處相位。而不敢輕用人命。論囚。必求其生道。初金安老用事。而公忤安老。陳復昌張甚。而公又忤復昌。及李樑敗。而公代掌銓。尹元衡黜。而公旋入相。君子以是知公之見重於士論也。公篤於內行。奉先甚謹。宗子貧不能修廟。公以家財營之。文忠公祠宇頹廢。公爲修葺之。每月朔。集諸孫參奠。撫養宗族。恩意周徧。貧不能嫁娶者。爲嫁娶之。公卒之歲。政府庭中大槐樹爲風雨所折。公曰。我其死矣。謂諸子曰。吾不才。致位上相。無功德可紀。我死無所事碑。惟於墓表。書某官姓名足矣。寢疾近一月。無一語及家。惟諄諄說國事。至屬纊乃已。年德兼尊。福祿俱備。人論近代賢相。以功名終。無玷缺者。公必居甲乙焉。夫人昌寧曹氏。有子男四人。曰恒。廣興倉守。曰愷。戶曹佐郞。曰恂。某官。曰慄。以文科進。歷內外官。壬辰之難。爲都元帥。破倭寇立大功。爲中興第一名將。聲聞華夷。策宣武元勳。贈某官。維晩生。竊從前輩名公。頗聞公德業梗槩。謹狀如右。敢請所以易其名者。<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