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이 국어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이상, 땅이름 문제는 곧 국어의 문제이다. 땅이름의 기원이나 그 변천은 국어사, 특히 음운사의 기초적인 지식 없이는 논할 수 없다. 어원 연구를 위해서는 엄밀한 실증(실증)과 역사성·지역성에 대한 올바른 규명이 필요하다.
큰, 으뜸·신성 '译'
'译'은 고대어인데 크다, 위대하다, 으뜸이다, 신성하다, 그리고 신성한 존재, 신인(신인)·신(신)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단군신화에 '곰' 을 내세운 것은 우리의 '译' 사상과 통하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여기에는 토테미즘의 냄새가 풍긴다. 감·검·곰·굼·고모·가마…로 불리던 우리말 이름을 한자화(한자화)하여 현(현)·흑(흑)·탄(탄)·웅(웅)·부(부) 등으로 나타내었다. 현석동(현석동 : 검은 돌)·흑석산(흑석산 : 검돌메)·탄천(탄천 : 검내)·웅진(웅진 : 곰나루)·부산(부산 : 가마메) 등이 이 예에 속한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초기에 임금의 칭호를 '이사금(이사금)'이라 하였는데, 『삼국유사』에서는 이 이사금의 뜻에 대하여 덕이 많은 사람은 이[치]가 많으므로 떡을 물어보아서 이의 자국, 즉 잇금이 많은 사람을 임금으로 삼았기 때문에 왕의 칭호를 '잇금'으로 한 데서 온 것이라고 했다. 또, 니사금(이사금)→닛금(임금)으로 변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풀이하여 만든 말에 지나지 않은 것이고, 실은 '이은 검(금)' 곧 '임금'으로서 즉 계승의 왕을 뜻하는 의미였다고 안재홍(안재홍)·이병도(이병도) 등이 주장하였으니, 이에 따르면 검(금)이 곧 왕을 의미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 단군임(왕)검(단군임(왕)검)의 임검(임검)과도 서로 통하는 것으로서 '검(검)과 금(금)' 이 다같이 신령을 의미하는 우리의 옛말임을 알 수 있다.
'이은 금'='임금' 이란 말과 임금을 높여 부르는 '상감(상감)' 이란 말과 대감·영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큰 내 또는 신성하다는 '译내' 가 검내로 변한 것이 검은 내로 바뀌어, 숯이 검으니까 숯내로 된 것이 다시 한자로 탄천()으로 된 것이다. 탄현(탄현)은 큰 고개의 뜻이다. '감골'·'감실'은 큰 마을·중심마을, 곰말[웅촌]은 큰 골·감뫼(감뫼)·검산(검산)은 큰 산 또는 신령스런 산, 곰재(고무재 : 웅치·웅현)·고모령(고모령)은 큰 고개의 뜻이다. 감악산·검단산은 큰 산이란 뜻이고, 가마골·감문동은 큰 골, 감물(감물)·감천 등도 큰 물의 뜻이다. 또 금강(금강)·금호강(금호강)도 큰 물(강)의 뜻이다. 감물면(충북 괴산군), 감문면(경북 금릉군)등의 땅이름도 모두 큰 물이라는 말을 한자로 차음(차음)한 것이다.
'크다'의 '큰'은 본디말이 '근'이다. 큰(근)마을→근마을→금마을→곰마을→굼마을→꿈마을→몽촌(몽촌 : 서울 송파구)이 되었는가 하면, 근마을→금마을→금말→금마(금마)도 되고 또, 근마을→금마을→곰말→웅촌(웅촌)도 되었다. 근(큰)여울→금여울→곰여울→꿈여울→몽탄(몽탄 : 전남 무안군 영산강가)으로도 되었다. 근(큰)나루→금나루→곰나루→웅진(웅진 : 충남 공주)으로 되었다. 부곡(부곡)은 큰 마을의 뜻일 듯한 译 계통의 땅이름인 감(译)·골(감실)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감'과 '골'이 직접 합하면 '감골'이 되지만, 그 중간에 매개모음 '럁'를 개입시키면 '감럁골' 이 되어 가마골(가맛골)로 읽힌다. 가마골은 대개 '부곡'(부곡) 등의 한자로 옮겨졌다.
새것→밝음 '꿡'
'ꟊ'의 원천인 새(꿡 : 동)는 으뜸·동쪽·새벽(서)·개석(신)·밝음(명)의 뜻으로 사(사)·동(동)·철(철)·서(서)·사(사)·소(소)·사(사)·시(시)·신(신)·서(서)… 따위가 모두 '꿡'를 나타내고(뜻 또는 음) 새말, 새터 따위로도 불린다. 「처용가(처용가)」의 꿡Ꟊ(새발·새벌)은 신라 서울인 경주에 해당하고 머릿고을[수도]의 개념으로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말이다. 신라(신라)의 한자식 이름인 서벌(서벌) 또는 서라벌(서라(야)벌)이 바로 이 '새벌'의 차음(차음)표기로 보인다. 국호인 신라나 백제 수도 '소부리(소부리 : 꿡ꟊ=부여)' 나 고려의 수도인 송악(송악)과 태봉의 수도인 철원(철원) 등도 모두 '꿡Ꟊ'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배달사상의 여명 'ꟊ'
'ꟊ'은 광명이나 나라땅의 의미로 씌었다. 'ꟊ'은 지금 우리말에서는 광명을 뜻하지만 고대에는 하늘·신(신) 따위를 가리켰으며 신이나 하늘은 그대로 해를 뜻하였다. 태양은 삼라만상의 주재자로 생각되었다. 'ꟊ'의 음을 딴 옛 땅이름으로 발(발)·대(대)·벌(벌·벌)·불((불·불·불)·부리(부리)·부루(부루)·부부(부부)·비(비)·비류(비류)·패(패)…등이 있고, 뜻을 딴 것은 평(평·평·평 : 벌과 음이 닮은 것임)·소(소)·명(명)·혁(혁)·훼(훼) 등이 있으며, 박(박·박)·백(백 : 신선함·깨끗함·밝음의 뜻)·벽(벽)·면(면)·복(복)·박(박)…도 'ꟊ'의 한 형태인 '박'의 표기에 지나지 않는다. 또 'ꟊ'은 '불'과 음이 비슷하여 이 뜻을 갖는 '화(화)'자를 쓰기도 했다. 육당(육당) 최남선(최남선)의 불함문화론(불함문화론 : 백두산을 중심으로 우리 한족(한족)을 근간으로 하여 이룬 고대문화)에서는 우리 나라 고유신앙의 하나로서 '밝은 뉘[광명세계]'의 태양 숭배인 민족 종교가 있어 후일에 가서는 '부루'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천도(천도)의 밝은 세상을 실현하는 고래의 민족교(민족교)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 '부루'는 하느님께 대제(대제)를 올리고 국가와 민족의 대사(대사)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밝은 뉘' 또는 '부루교' 는 화랑(화랑)들이 정신 수련을 위해 명산·대천을 순례하는 그 주봉(주봉) 이름을 부루와 같은 발음인 '비로' 로 하였으며 비로봉으로 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라 한다. 인체에 있어서의 '머리' 는 'ꟊ' 에서 '鱁' 만 떨어져나간 채 된 말 '박' 이 있고 또 '불'은 남자 성기(성기)로서, 삼각산 인수봉(인수봉)의 옛이름 부아악(부아악)을 '아이를 업은 형상'이라 함은 한자의 뜻풀이에 불과하고, 그 음을 향찰식(향찰식)으로 읽어 '불메', 즉 남근(남근)모양의 봉우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고대 남성 성기 숭배사상(Phallicism)의 흔적이다.
'불당굴'은 '불안골', 굳이 말하면 사타구니 안골이니, 그것은 지형을 인체에 비겨 고봉준령 속에 폭 파묻힌 골짜기 안이라는 뜻이다. 또 '배오개' 는 'ꟊ고개' 에서 변한 것이다. 붉은 고개[적현]·배고개[이현]는 붉은 흙이 있어서만 아니라, 그곳만은 나무가 우거지지 않아 밝은 양지를 이루는 고개를 말한다. 적(적)은 'ꟊ', 'ꟊ' 이 '배'로 전음(전음)되고, 리(이)는 '배' 의 사음(사음)이다. 밝은 땅[양지]이라는 뜻의 ꟊ '달' 은 배달(ꟊ의 산야)로도 되고 '박달'로도 되었다. '배달겨레' 는 ꟊ의 땅의 겨레인 것이다. 한편 배는 원래 산(산)의 뜻인 '받' 에서도 나온 것인데 '배' 를 한자로 '이'(이)자를 취해 '배내[이천]·'뱃들[선평·이평]'·'배실[백곡]'·'배일'·'배론[주론 : 산골짜기 작은 마을의 뜻]'등이 이 계열의 땅이름들이다. 서울 갈현동의 궁말[궁동]에서 서오릉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벌고개[버리고개, 벌현·봉현]는 '땅이 낮아질 염려가 있어 이 고개를 넘으면 벌을 주었다는 전설과는 달리 'ꟊ고개' 이던 것이 정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박석고개' 는 낮은 지맥을 보호하기 위하여 박석(자갈)을 깔았다는 풍수적 전설이라기보다 '박달재' 가 '달' 을 '돌' 로, 다시 그 '돌' 이 석(석)' 으로 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산·들 '韉'
韉은 햇빛이 드는 곳과 안 드는 곳을 가리키는 양달, 응달의 달과 같이 땅의 어원으로서 지금의 '들' 이 '달' 에서 비롯된 말이며, 조상들의 생활이 산악에 근거함에 따라 '달' 은 산과 들을 함께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선인들은 이 태양이 광명을 비춰주는 높은 산, 높은 곳을 의미하는 '밝' 을 붙여서 '밝달' 이라고 불렀다. 즉 광명한 산악, 또는 광명을 주는 산악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특별히 크고 유명한 산에는 '밝달' 위에 다시 크다는 의미의 우리말 '한' 을 붙여 '한밝달' 로 불렀다. 이러한 '밝달'·한밝달' 의 명칭은 후에 한자로 옮겨져, 박달(박달)·박산(박산)·태백산(태백산)이 되고, 또 백산(백산)·백악(백악)·태백산 등으로 기록되었다. 우리 나라의 명산인 백두산·묘향산(묘향산)·구월산(구월산) 등은 여러 사서(사서)에서 태백산·장백산(장백산)·백악 등의 이름으로도 불렀던 사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명산들이 모두 '밝달'·'한밝달' 로 불리었던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함박산(함박산)은 '한' 과 'ꟊ' 에서 출발된 즉 한박산이 그 본래 이름이다. 크고 밝고 빛나는 산이라는 뜻을 갖는다. '한' 이 '함' 으로 됨은 아래 있는 '박' 과 어울리면서 자음접변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함박은 함박꽃으로 알고 그 꽃과 비슷한 모란에 비유하여 모란봉(모란봉)으로도 되고 작약(작약)에도 비유하여 작약도로도 되고 비슷한 음인 함백(함백)으로도 되는 것이지만 뿌리는 한ꟊ이다.
또 천(천)·황(황)·왕(왕)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백(백)이라는 뜻의 '비로' 와 같은 의미라고 말하고 있다. 즉 천신(천신)은 산(산)을 통해서 인간세계로 오며, 산은 곧 하늘세계와 인간세계와의 매개체로 작용한다. 산과 봉(봉)은 밝은 뉘→밝안→박→발이 되고 이것이 '부루(神의 뜻임)' 로 되었는데, 이는 한자로 백(백)과 같은 것이며, 후세에 승려가 불교 경전(경전)속의 같은 발음의 문자를 빌어쓴 것이 비로(비로)라 했다. '백(백)' 은 '밝' 의 음차이고, 또 '희다' 는 뜻을 가지고 있어 '밝다' 와 통하므로 많은 산에 이 이름이 붙어 있다. 산은 인간세계에 광명을 주는 신성한 곳으로 생각하여 '희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깨끗하다, 정결하다, 숨김이 없다. 환하다(밝다)의 뜻을 가진다. 화랑도가 불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는 사실보다는, 화랑이 산천을 순례하며 심신을 연마하기 위하여 관동(관동)의 여러 승지와 지리산·금강산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명소를 찾았다는 기록은, 산천이 주는 정신적·육체적인 영향을 크게 감득(감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화랑도가 바탕이 되어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흥왕 시대(540∼576)에 이미 우리 나라 산천의 '산'의 우리말 '달(달)' 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높은 곳을 '달'이라 하였고, 그것이 다시 한자의 '산(산)'을 바뀌게 되었다.
'韉'은 달과 음이 비슷해서 '월(월)' 로 되어 색다른 땅이름이 많이 남았다. 서울 신월동(신월동)은 옛이름이 '곰달내' 인데 여기서 '곰달'은 '译韉'로 들(넓은 들)이 뜻이었다. 그런데 '곰달'을 '고운달'로 해석하여 한자로 신월(신월)이 되었다. '산고개' 란 뜻의 달고개[월산리]·달재[월령리]가 있고 '산의 곶' 이란 뜻의 달고지[달곶]·달들·다랏골은 월평[월평]으로 표기했다. '산바위' 란 뜻의 달바우는 월암(월암)이라 하였다. 달내[달내]는 들 가운데 내란 뜻의 '들내' 가 변한 것이다. 산을 가리키는 고어로 '모이·뫼', '부리', '숲·수리', '모로·머리' 등과 같은 말 외에도 韉이 있으며 대체로 '달(달)'로 차자(차자)되고 여기에서 韉→두류(두류)韉→들[평] 등으로 변한 땅이름이 있다. 평지보다 훨씬 높은 산을 '모鿁' '모로[지]'라 하고 한자로 모로(모로)·말로(말로)로 나타내기도 하며 머리·우두머리와 같은 개념의 이름을 뜻한다. 제주도에서는 평지에 고립되어 있는 산을 마루라고 부른다.
'비탈'은 '빗[]과 '달[지]' 이 합쳐 이루어진 '빗달' 이 변한 말인데, '날비(비)'자 '비길 비'(비), 비파 비(비)' 자 등 여러 한자로 나타내었고, 때로는 '맥(맥)·사(사)·비(비)·화(화)' 자도 더러 벼랑의 뜻으로 쓰고 있다. '별(별)'은 그대로 벼랑의 옛말이어서 낭떠러지의 뜻이 들어간 땅이름들에 별(별)·성(성)자를 더러 취했다. 별(벼랑)과 별[성]은 음이 같아서 특히 전라·충청 지역에 성산(성산)·성암(성암 : 별바위·벼락바위) 같은 땅이름들이 나왔다. 베리끝(벼릿골·배릿골·버릿골)은 벼랑과 관계가 있다.
사물의 으뜸자리 'ꏉ'
ꏉ(말·마루·마르)은 일(사)과 몬[물]의 으뜸자리였다. 말은 꼭대기·주재(주재)와 종주(종주)의 뜻을 지닌 우리의 옛말로서, 말(언어)·마을[부촌 : 정치결성체·현연결성체]과 관련 있는 뜻이었다. '말'·'마로'·'마리'·'마라'·'모라'…로 파생된 말이, 뜻으로는 달리는 말[마], 곡식을 되는 그릇의 말[두], 마르다[건] 따위로, 음으로는 말(말)·마라(마라)·모라(모라)·마로(마로) 따위로 나타내었다.
우리말의 마루가 대청을 뜻하고, 또 한편으로 '마을' 이 관부(관부)를 뜻했던 것도 일맥상통함을 보인다. 마립간(마립간)은 말한의 대자(대자)였다. 신라가 부족회의를 열 때 왕이 앉는 자리, 최상의 자리가 그 마루(말)로서 거기 앉는 '한(임금)' 이었던 데서 '말한(마립간)' 이라 했다고 보고 있다. 'ꏉ' 은 '머리[두]' '마루[종]' '마리(마이·마리)' '뫼[산] 등의 말을 낳았다. 마산(마산)이 지난날에는 '말메' 혹은 '마루(르)메' 였고, 모래내는 'ꏉ내'→'말내' 또는 '몰내'→'모래내', '마리'는 즉 '머리' 이니 마리산은 가장 높은 산, 거룩한 산, 즉 신산(신산)·성악(성악)이라는 뜻이다. 말섬·마루섬·말도(말도)·두도(두도)·마도(마도)·마로도(마로도) 따위가 모두 이 '말', '마루·마르' 로부터 나온 것이라 하겠다. 북한산(북한산)의 우리말 지명은 '부루칸모로' 였는데 이를 풀이하면 부루(산신)+칸(으뜸)+모로(뫼 : 산)→산신령(또는 천신)의 산이라고 한다. '칸' 은 '한' 과 유사음이며 신라의 마립간(마립간)이나 거서간(거서간)의 간(한)도 바로 이 뜻에 해당한다. 모로(모루)는 산의 뜻을 가진 옛말로서 이 말에서 파생된 현대말에 뫼(메 : 산), 마루(꼭대기 : 종), 머리[두] 등이 있다. 모리→모이→뫼(산), 모로→모루→머루→마루(종), 모리→머리(두)가 되었다. 마재[마현·두척]는 높은 고개의 뜻인 '말재' 에서 나온 것이고 '재' 는 박달재 곰재처럼 옛말이 '자' 인데, '자' 를 한자 척(척)으로 취해 '두척(두척)'과 같은 한자 땅이름이 된 것이다. 잣내[잣내]·잣머리[척지]도 같은 경우이다. 두산리(두산리)는 본래 '말뫼' 인데 두산의 '두(두)' 는 마루를 뜻하고 '마루' 가 '말' 로 되었다가 옮겨진 한자이다. 뫼[산]는 메 또는 '매' 로 발음되었는데, '뫼' 는 몰(모리)이 변한 말이다. 이 '몰' 은 더 오래 전에 ꏉ(말)이었는데, 꼭대기인 마루[종 : 산마루·산등성이]머리·마리[두·수] 등 많은 말을 만들었다. 산의 뜻을 가진 '달'·'뫼'·'재' 등 순 우리말이 한자로 달(달)·월(월)·두(두)·매(매)·응(응)·마(마)·종(종)·지(지)·항(항)·성(성)·자(자)·척(척)등의 글자를 취했다. 매봉산(매봉산)은 산(산)의 뜻이 셋이나 겹친 것이다.
생활의 수단·능력 '꿉'
꿉은 원래 생명의 원천을 뜻하는 살음(삶)이었는데 활산(활산) 또는 거산(거산)으로 적고 있다. ꟊ달(ꟊ의 땅)의 꿉, 꿉→사람·사랑·슬기로 새끼를 쳤고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 즉 살다→살암→사람이 된 것으로 접미사 '암(엄)'은 어떤 상태나 형태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꿉'은 생활의 수단이며 능력이었다. '꿉'을 소리대로 적은 것은 살(살)이고, 뜻으로 적은 것으로는 전(전)·미(미)·시(시)이다. '사리(사리)' '사을(사을)' '사리(사리)' '살곶이[전곶]'…로 표기된 땅이름들은 꿉에 근거를 둔 것이고, 살은 다시 설·솔·술…로 형태를 달리하여 갔다. 살내[실천]는 물살이 빠른 계곡을 말하고 전탄강(전탄강)은 물살(전)이 빠른 여울[]의 강이라는 뜻이다. 이 '살'은 다시 선(선)·성(성)이 되고, 뜻으로 수리[차]·시리[]·소리[]·솔[송] 등이 되고, 또 음으로는 '설(설)·상'(상 : 상악은 금강산의 옛이름)자 등으로 차자(차자)되기도 하였다. 한강물과 중랑천이 어우러지는 아우라지[합수]에 물살이 세다 하여 물살의 '살' 과 '곶' 의 합성어가 곧 살곶이다. 아우라지가 흙이 쌓인 턱이 뾰족히 나왔으므로', 그 흙의 턱이 '곶(곶)' 이 된다. 이처럼 '곶' 은 우리말로 뾰죽히 나온 돌출부의 땅을 뜻한다. 그러니까 살곶이는 '물살이 센 곳의 뾰족한 땅' 이란 뜻이다. 한자로는 전관평(전관평)이라 한다. 살곶이벌은 조선조 때 무사들이 매를 사냥하며 심신을 단련하던 말 달리며 활을 쏘는 터였다. 경기도 진위천 하류의 황구지천(황구지천)은 뻗친 내의 뜻인 느러곶이내→놀곶이내로 되면서 항곶포(항곶포)였는데, '항'이 황으로 변하였으나 모두 '크다', '넓다' 는 뜻의 '한'이며 '구지'란 '고지·곶이=곶'으로 결국 큰 고지가 있는 강이란 뜻이다. 강원도 고성(고성)의 명승지 삼일포(삼일포)는 본래 꿉개였는데, 이것이 살개, 다시 사흘개로 되었다가 삼일포(삼일포)로 변한 것이다. 물살이 빨라 이름붙였다고 전하는 '사리내' 는 싸리내가 되고 '쌀내[미천]' 가 되기도 하였다. 꿉을 삶[생]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활산리(활산리)·거산리(거산리)로, 꿉을 쌀(미)로 보고 미산(미산)을 취했다. 또 '살'을 화살로 보았기 때문에 전산(전산)·시산(시산)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꿉'은 또 설(설·설)로 발전했으며, 꿉뫼가 설악산(설악산)·설성산(설성산)·설봉산(설봉산)이 되었다.(설림(설림)은 서천의 옛이름이다.) '술'의 변형인 수리(수리·수리·수리)는 다시 새겨서 취(취)·술()·차(차) 따위로도 번져갔다. '수리' 는 술(꿉)에 뿌리를 둔 말로서 술이 연철되어 '수리' 가 되었다. '수리' 는 꼭대기를 뜻하는 옛말로서 오늘날의 머리의 '정수리'도 바로 이 말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한자로는 대개 '술(술)'자를 취했다. 서술산(서술산)·술모산(술모산) 등이 '수리뫼'이다. '수리'를 새 무리[조]의 취(취)로 보아 '취(취)' 자가 들어간 영취산(영취산)·취봉(취봉) 등이 신령한 산이라는 의미의 '수리뫼'에서 나온 것이 많다. 신라에서 '수리'는 으뜸이라는 뜻의 '수[웅]'로서 『삼국유사』에는 범어(범어)에서 왔다고 하며, 소슬산(소슬산)이라 기록하고 있다. '높고 신령함' 을 의미하는 우리말 '솟을, 솟아, 수리' 등을 한자의 음 또는 훈으로 표기함에 불과한 것이다. 굳이 말하면 '큰 산(큰 덩어리의 산)'을 말한다. 물론 '응봉(응봉)' 같은 땅이름은 '높다' 는 뜻의 '수리' 가 「수리=매」로 뜻 빌림[]이 되어 수리봉이 응봉으로 된 경우도 있다. '수리'·'술이 술(주)'을 닮아 땅이름에 '주(주)' 자를 취하기도 하였다. 예천은 옛 이름이 산골이란 뜻의 수리골이 술골로 되어 그 훈을 술(주)로 보고 수주(수주)로 했다가 예천(예천)·주천(주천)으로 바꾼 것이다. 수리를 뜻하는 꿉땅이름이 시루봉으로 불리다가 한자식 이름인 증산(증산)·증봉(증봉)으로 된 경우도 있다. '수리' 는 또 '수레' 로 음이 바뀌면서 경기도의 축령산 남쪽 기슭을 가로지르는 '수레넘어고개'나 남양주시 마석의 차산리에서 덕소로 넘어가는 같은 이름의 고개를 한자로 차유현(차유현)·차유령(차유령)·차령(차령)·차현(차현) 등으로 기록하였다. 본뜻은 '영너머고개'가 그에 알맞은 이름이라 하겠다. 전국 각지의 '송(송)' 자 든 마을이름이 꿉과 관계 있는 '솔' 로 불리고 있었던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또 '송'(송)자가 아니라도 소리(소리)·소을(소을)·소라(소라)… 같은 이름도 '꿉' 의 변형 '솔' 로 심어졌고 뜻으로는 성(성)자 따위가 쓰이고도 있다.
갈리는 분기점 '诉'
'诉' 은 물·물가·분기(분기)를 뜻하며 작은 냇줄기[] 또는 냇줄기가 갈린 곳을 뜻하는 '가' 라는 옛말에서 나온 것이다. 물가는 인간생활의 근거지를 이루는 곳이다. 诉의 전음(전음)인'갈' 은 다시 분음(분음)으로 가鿑(가람)이 되고 '갈래', '가라'가 되어 이에 관계되는 땅이름이 많이 분포한다. '갈' 은 '고을' 이란 뜻이 있다. '诉' 은 삶의 터전으로 '고을'·'골' 로까지 번져왔던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을이 많이 모여 부족국가를 이룬 것이 6가야이다. 여섯 가라국의 '가라(가라)' 도 낙동강 지류 때문에 붙여졌는데 본디는 '诉' 이었을 것이며, '诉' 이 '가라'·'가리'·'걸'·'골'·'고르' …로 변해갔을 것이다.
'诉' 의 땅이름으로 갈메마을·골메·갈재·노령(노령)·갈촌(갈촌)·갈월동(갈월동)·갈현동(갈현동)·가로리·구로리(구로리) 등이 있다. '가리'·'가라' 등이 들어간 산이름 중에서는 산줄기가 갈린 목, 또는 고장을 가른 산이란 뜻으로 붙여진 것이 많다. 갈매(갈매)는 대개 작은 산이나 언덕에 많이 붙여져 있다. 갈밭[갈전]·갈월(갈월)은 '갈뫼' 와 같은 뜻인 '갈달(诉韉 : 물가 마을)' 의 한자식 표기이다.
사물의 핵심 '량'
'량' 은 일과 몬(사물)의 핵심을 일컫던 우리 옛말의 원형인데, 아리(르)는 삶의 터전에 있어서 핵심적인 데를 강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강(강)을 나타내는 가장 오래된 우리 고어(고어)이다. 영장(영장)·장상(장상)의 뜻이며, '량'에서 출발한 말이 '아리(아리 : 경기도 옹진군 송림면 동쪽에 있는 섬)' '올'·'오리(오리)'·'울'·'우르'·'우리'로 나타났다. 생물체의 번식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알()이면서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의 핵심이 얼[정신]이며, 알고 있다는것, 그 '알음' 이라는 것도 '얼' 의 소산이다. 이에 관련된 땅이름이 한자로 아란(아란)·오열(오열)·엄리(엄리)·욱리(욱리)·어라(어라)·월라(월라)·위례(위례)·아례(아례)·어란(어란)·우라(우라) 따위이다. 아리수(아리수)·욱리하(욱리수)·열수(열수) 등 한강 옛이름은 아리내(나)로서 량갈래 이름으로 볼 수도 있다.
다(다)·대(대)·성(성)·일(일) '한'
'한' 은 다(다)·대(대)·성(성)·일(일)을 뜻하며 지금도 남아 있는 말이다. '하다' 는 '하고한 날' 따위로 쓰여 '많고 많은 날' 의 뜻이 되듯이, 중세에는 '많다' 는 뜻으로 썼다. 하나[일]의 뜻이기도 한 이 '한' 에서 비롯되어 크고 많으며 근원이고 시작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한' 은 크고 많으며 높고도 강성한 것 외에 모든 일의 시작이라는 우리 고유의 말이었다고 생각된다. '하늘' 도 '한' 과 '량' 에서 시작된 말로, 모든 사물의 중핵이며 시작을 의미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삼한시대의 마한·진한·변한의 한(한)이나 한(한)·한(한) 역시 우리말 '한' 의 한자식 표기였다고 생각된다. 왕의 위호(위호)를 표시하는 거서간(거서간)·마립간(마립간)·오간(오간)·이벌간(이벌간)의 간(간)이나 거슬한(거슬한)·서발한(서발한)·서불한(서불한)의 한(한·감·한·한)이 모두 '한' 의 사음(사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몽골의 성길사한(성길사한)은 영어로 'Chingiz Khan' 인데 '한'(한)은 왕 따위에 붙이는 칭호였다. '한' 이 '칸' 이 되었다가 '큰' 의 음에 가까워지면서 금(금)·검(검)·궁(궁) 등이 되었다. 한강은 본래 우리말의 '한가람'에서 비롯되었다. 즉 '한' 은 '간'·'칸'과 함께 '큰'·'으뜸'·'첫째'·'높은'·'넓은' 등의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큰 가람'('가람' 은 '가라' 와 무(물의 옛말)가 합쳐 이루어짐)→'큰 강' 이라 한 것을 한자로 한강(한강)으로 표기한 것이다. 한강을 한사군(한사군)·삼국 초기에는 대수(대수)라 하였는데 이는 한강이 국토의 허리띠와 같다는 표현과 일치한다. 광개토왕 능비(능비)에는 아리수(아리수), 『백제본기(백제본기)』개로왕 21년 조(조)에는 욱리하(욱리하)라 하였다. 이들은 모두 우리말의 아리라와 같은 계열어로 보고 있다. 또 신라 문헌에는 상류를 이하(이하)·북독(북독)이라 하였고, 하류를 왕봉하(왕봉하)라 기록되어 있다. 한강을 또 한산하(한산하)·한산수(한산수)라고도 했는데 한산은 북한산을 뜻한 것으로 보이며 고려 때에는 열수(열수)·사평도(사평도)·사리진(사리진)이라 하였다. 열수는 아리수와 같은 계열어의 한자식 표기이고, 강변에 모래가 많아 사평도(사평도)·사리진(사리진)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제가 중국의 동진(동진)과 교류하여 중국 문화를 들여오면서 한수(한수)라 하다가 뒤에 한강(한강)으로 부르게 되었으나, 그 뜻은 큰 강을 의미하는 한가람의 한자식 표기이다.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서울지방이 한양부(한양부)로 호칭되자 한강으로 굳어졌다. 서울 신촌 쪽의 노고산(노고산)은 한양의 서쪽 꼬리에 있다 하여 '한미산(한미산)'이라 불렀는데, 그 '한미산' 이 '할미산' 이라 불리다가 '할미' 의 뜻으로 '노고산' 이 됐다는 것이지만 원래 큰 산의 뜻인 '한뫼' 또는 '한미' 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메' 가 '한미' 로, 다시 '할미'로 되었는지 모른다. '한' 이나 '큰' 은 한자 땅이름이 보편화할 때 '대(대)'자로 많이 바꾸어 대전(대전 : 한밭)·대도(대도)등으로 되었고, '대(대)' 는 또 '대[죽]' 와 음이 같기 때문에 '대재[대재]' 의 '대' 를 대나무의 '대' 로 보아 엉뚱하게 '죽령' 으로 바꾼 예도 있다.
작다 '둾'
단군왕검이 아사달산(아사달산 : 역사에 처음으로 기록된 땅이름으로 『삼국유사』에 나옴)에 도읍을 세우고 조선(조선)을 세웠다는 '아사달' 의 '아사' 는 옛말 '둾(일찍·새로·아침의 뜻)' 에서 온 것이고, 달은 땅(들)의 옛말이나 결국 이 이름은 '아침의 땅' 이란 뜻이 된다. '조선(조선)' 도 이 뜻에서 나온 이름이라 한다. 아사달(앗달=아홉 달)이 구월산(구월산 : 본시 궁홀산(궁홀산)에서 궐산(궐산)으로 변하였고 이것이 아화(아화)한 것이라고도 함)으로 변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아사달을 '아시 땅', '처음의 땅', 곡 '아사' 가 우리말의 아침[조]·아시[초 : 애시당초와 같은 뜻], 일본말의 아사[조] 등과 같은 알타이어 계통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의 중국식 발음인 '첫센(조선)'도 날이 일찍 샌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은 아사달과 같은 뜻의 이름으로 볼 수 있고, 나아가 밝은 땅을 뜻하는 '밝달'·'배달' 과도 연결된다. 그러므로 '아사달' 을 한자로 풀이함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고구려·가라(가야)와 같은 땅이름도 순수한 우리말인 '크다' 나 '땅(나라)' 의 뜻을 가진 옛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덕현(덕현)은 덕재, 즉 '큰 고개'이고 아현(아현)은 '둾재' 즉 '작은 고개' 이다. '덕' 은 여진족의 만주말에서 온 '크다' 는 뜻이다. 비탈·언덕·고원 등의 뜻도 있다. 소백산맥 중의 죽령(죽령)은 원래는 큰 고개라는 뜻의 대(대)재인데, '대' 를 한자로 '죽[죽]'으로 취하고 고개를 영(영)으로 하여 죽령(죽령)이 됐을 것이다. 우리말에서 '아'·'애' 는 작다는 뜻이다. 애기·아가·아제(작은아버지)·아지(동지 또는 작은 설)·아(애)오개(아현 : 작은고개)·애호박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아'(애)자가 들어간 것은 '작은'·'작다' 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아미산(아미산)의 '아' 는 '작다', '미' 는 '뫼' 라는 뜻이다. 작은 섬은 죽도(죽도 : 좁(족)섬→죽섬)·시도(시도 : 살(꿉)섬)·우도(우도 : 소(솔)섬)으로도 되었다. 죽도는 불모(불모)한 섬에 붙인 이름인데 대머리의 '대' 는 대도(대도)와 대섬이 되고 대섬은 죽도이다. 또 '작은 섬' 의 뜻이 좁도→족도→죽도로 된 것도 있다. '작은'·'작다' 는 뜻의 '아지(치)'가 땅이름에 붙어 엉뚱하게도 '까치'[]로 된 실례가 많다. 아치고개→까치고개→작현(작현)·작치(작치), 아치밭→까치밭→작전(작전), 아치바위→까치바위→작암(작암), 아치산→까치산→작산(작산), 아치울→까치울→작정(작정)→아치내→까치내→작천(작천), 아치굴→까치굴→작굴(작굴), 아치다리→까치다리→작교(작교) 등의 땅이름들이 있다. 아차산(아차산·아차산)은 '작은 산' 의 뜻인 '둾자' 의 변한 음이다. '둾자'에서 '자' 는 산의 옛말이다. '자' 는 다시 척(척)으로 되어 잣내는 척천(척천)·자머리는 척지(척지)가 되고 이 말은 뒤에 '재' 란 말로 바꾸어 '박달재' 와 같은 땅이름을 이루게 했다. '작은 섬' 의 뜻인 '아섬(애섬)' 은 '솔섬' 이라고도 했는데, 솔섬이 송도(송도)가 되어 소나무가 많은 섬처럼 알기 쉬우나 실제는 작은 섬이기 때문에 붙여진 경우가 더 많다. '솔' 은 '솔다(좁다)' 와 같이 작고 좁은 것을 뜻한다. 솔고개[솔개, 송현]·솔내[송헌]·송(솔)골[송곡] 중에서도 소나무와 관계없는 것이 많다. '손돌목' 의 '손' 은 '좁은' 의 뜻을 가졌다. 이 말은 '솔다' 의 관형형이다. 따라서 '손돌' 은 '좁은 물가' 의 뜻이 되고, '손돌목' 은 그러한 곳의 길목임을 뜻하게 된다. 송우리(송우리)는 작은 모퉁이란 뜻이다. 작은 내의 뜻을 지닌 듯한 '아시내' , 한자로 아천(아천, 아천), 아계(아계)가 제주, 삼척군 하장면 번천리, 영월군 상동면 천평리 등에 있다.
가장자리, 머리·뫼(산) '衾 '
'衾(갓)' 은 가장자리를 뜻하는 반면, '산(산)' 의 뜻이기도 하다. 가장자리란 뜻의 '갓' 은 가사·가좌·자재 등으로 전음되었다. 가장자리의 골짜기 또는 그러한 골(마을)이라 뜻은 대개 가실(가오실)이라 갓골이 되었다. '가오실' 은 가오리(가오리)·가좌리(가좌리)·가곡리(가곡리) 혹은 가곡(가곡)으로 적기도 한다. 한자의 뜻은 이 경우 아무런 상관이 없고, '실' 만 옛말로 골짜기[곡·동]의 뜻이 된다. 이 '가럁' '가꿁' '가믁' 는 모두 '衾(갓)' 즉 가장자리[], 변두리로서 벌판의 가장자리 혹은 벌판을 내다보는 산 아래 마을들이 모두 그렇게 불린다. 궂이 말하면 갓동네는 산기슭 마을의 뜻이니, 북한산 동쪽 기슭의 우이동(우이동) 못 미처 수유(수유)2동의 가오리나, 남양주시 천마산의 보광사 아랫마을 가곡리 또는 서울 서대문구의 가좌동, 인천광역시 서구 석남동 아래 가좌동이 모두 그런 뜻의 이름들이다. 원래 '머리'·'뫼[사]'의 뜻을 가진 '갓' 에서 '갓골[동]'·'갓골[현]'은 '산마을' 의 뜻이다. 갓바위[암·암]는 아래위의 굵기가 같은 선바위[입암]와는 달리 위쪽이 더 크고 퉁퉁하게 보이거나 갓모양을 한 것이 다른데, 갓바위 중에는 남성의 성기 모양을 닯은 것이 있어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민간신앙이 곁들여져 있기도 하다.
작은·좁은·가는[세] '잔'
물건의 부피가 크거나 굵지 못하여 '가늘고, 작다' 는 뜻의 말에 '잘다' 가 있다. 이 '잘다' 의 관형형으로 굳은 말이 '잔' 인데 이 '잔' 을 접두사로 하는 땅이름이 많다. 이 '잔' 은 뒤에 衁의 음이 따라오는 경우에는 '장' 으로 발음된다. 좁은 들을 '잔들' 이라 하는데 '들' 은 옛날에 '달' 이라고도 했다. 이것이 연철되어 '잔다리' 라는 땅이름이 되고 작은(좁은, 가는)들의 뜻일 경우가 많다. 이 '잔다리' 는 세교리(세교리)·잔료(잔(잔)교) 등의 한자식 이름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또 세전리(세전리)는 '잔밭', 세천리(세천리)는 '잔(장)개울' 의 의역이고 척천리(척천리)는 작은 내의 뜻인 '잔내' 가 변하여 자내로 된 것을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잔방(뱅)이' 는 들 가운데 있는 작은 논배미이다. 논배미의 준말이 '배미' 이다. 큰 논배미는 '한배미' 가 되는데 한자로는 대야미(대야미)·대율(대율)로 되었다. 배미를 '밤' 으로 보고 이것을 한자의 '야(야)'자와 '율(율)'자를 취한 것이다. 잔(장)메(매)·잘(잔)미·잘머리는 '작은 뫼'의 뜻이다. 장자골은 장좌리(장좌리)·장재리(장재리·장재리)로 퍼져 나갔다. '잔(장)골·잔실' 은 작은 마을이란 뜻인데 '잔' 을 한자로 자운동(자운동)·자은리(자은리)·장곡(장곡)·장동(장동)으로도 소리옮김한 경우가 있다.
위·산꼭대기·등성마루·산·고개 ‘잣’
'잣' 은 원래 '위[상]' 의 뜻으로 지형을 나타낼 때는 산꼭대기나 등성마루의 뜻으로 사용되던 것이 뒤에 산(산)이나 '고개' 의 뜻으로 변하였다. '잣' 이 나중에 '걁' 이 탈락하여 '자' 가 되고 다시 오늘날 '재' 라는 표준말로 정착하였다(잣→자→재).
삼국시대에는 '재[산·현]'자보다는 '지(지·지)' 자를 많이 사용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지명을 개칭하면서 '재' 의 뜻이 들어간 행정지명을 거의 모두 성(성)자가 들어간 이름으로 바꾸었다. 예를 들면 한자를 차음하여 큰 재를 궐지(궐지)로 표기했던 것을 '궐성(궐성)' 으로 '늦재(늘어진 재)' 는 '노사지(노사지)'로 표기했다가 '유성(유성)'으로, '깊은 재' 는 '열기(열기)' 로 나타내었다가 '열성(열성)' 으로 바꾸었다. 옛말 '자' 는 현재 '재' 란 말로 변하고 그 뜻도 한재[한현]·갈재[갈치]·새재[조령]에서처럼 '고개' 또는 '뫼' 로 한정되어 버렸다. '잣고개' 는 산(산)의 뜻인 '잣' 과 '고개' 가 합성된 땅이름이다. 이것이 한자로는 백현(백현)·척령(척령)·척지리(척지리:자(재)머리)·자산리(자산리)·척곡(척곡)·척동(척동)·산척리(산척리) 등으로 표기된 경우가 많다. 여기서 '백(백)' 은 훈이 '잣' 이고, '척(척)' 은 훈이 '자' 인데 산(산)의 옛말 '자' 를 빌어쓴 것이다. 이처럼 '자' 는 산(산)을 뜻하고 한자로는 척(척)·성(성)·자(자)·작(작) 등을 사용하였다.
둥근·둘러싸인·뭉침·덩이 '둠'
'둠' 은 '둥글다(원)' 는 뜻 외에 뭉침[], 덩이[체], 둘러싸임[] 등의 뜻을 포함한 말이기도 하다. 대둔산(대둔산)은 '큰 둠뫼' 로서 크고 둥근 산의 뜻으로도 볼 수 있다. 둠골[둥골: 둔동리]은 양쪽으로 산이 막혀 붙은 이름이다. '둠' 이 '두무'·'두메' 로 연철되어 두무실[두무곡], 두매리(두매리 : 두멧골)가 되었다. '둠' 은 덩어리를 나타내기도 해서 고을이나 마을의 한 부분을 나타낼 때 접미사처럼 쓰이는데 그 앞소리의 영향으로 보통 '뚬(뜸)' 이 되었다. 위뜸·아래뜸·새뜸·양달뜸 같은 땅이름이다. '둠' 은 '덤', '돔' 으로도 되어 '덤' 은 '터미' 로 되었다가 모음동화로 데미(대미)가 되어 대미산(대미산)·'대마'·'대모' 로 되어 대마산(대마산)·대모산(대모산)이 되었다. 테미는 '태미'·'퇴미' 로 되기도 했다. 대미는 '대[죽]의 산(산)'으로 보고 죽산(죽산)으로 표기한 곳도 있다.
2. 땅이름의 변천
1) 땅이름 변천의 과정
땅이름은 오랜 세월 전승되어 내려오는 동안 자연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지리적 변화나 또는 음운 형태의 변천과 더불어 파생되는 의미의 변화 때문에 그 땅이름이 붙여졌던 본래의 뜻을 잘못 판단하기 쉽고, 본래의 의미와는 아무런 관련을 지어볼 수 없는 엉뚱한 땅이름으로 변하기도 한다. 땅이름은 그 뜻과 내용을 글자 그대로 나타내지 않는 경우가 무척 많다. 현재의 글자 그대로 땅이름을 풀려고 하면 큰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땅은 자기가 가진 본래의 뜻을 숨기고, 다른 이름의 옷으로 치장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언어학적 지식 없이는 그 뜻과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땅이름 본래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려면 시간적으로 언어가 발달한 과정인 통시적 고찰 및 수평적·공간적으로 현존하는 언어의 형태·성질, 내지 방언을 연구하는 공시적(공시적) 방법의 비교 연구가 아울러 필요하다. 땅이름의 교체·소멸·신생의 과정에 따라 유연성(유연성)이나 의미가 변하는 원인은 다음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발음의 부정확과 음운의 변천
이것은 향토인들 사이에 오랜 세월 동안 불러오면서 불완전한 발음의 구전(구전)이나 발음하기 쉬운 대로 부르면서 많은 변천을 가져왔다. 말의 뜻은 변하지 않으면서 말소리가 달라진 것으로 토박이 땅이름은 기록됨이 없이 입으로만 전해 내려왔기 때문에, 말하고 듣는 사람의 인식의 차이에 의해 쉽게 변하게 된다. 이는 땅이름이 보수적이어서 옛말을 그대로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발음을 쉽게 하여 노력을 덜 들이려는 조음경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방언에 의한 음운의 동화현상으로 모음변이(모음변이) 현상은 뒤에 오는 '螡'음이 그대로 존속되면서 자음이 게재된 위에, 앞에 오는 '葡' '蓡' '薡' 따위가 '蕁' '蒁' 로 각각 변하는 것인데 장승배기(박이→배기)·쇳대(솟대)배기(박이→배기) 따위가 그 예이다. 또 비음화(비음화)·설측음화(설측음화)·구개음화(구개음화)·어두강화(어두강화)·축약·첨가 등의 현상이 있다. 비음화는 국어의 자음 중 콧소리가 아닌 자음(衁·鑁·ꑁ)이 콧소리(둁·遁·ꁁ)로 바뀌는 현상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국물→[궁물], 닫는다→[단는다], 밥물→[밤물]로 발음되는 것과 같다. 설측음화(설측음화)는 설전음(설전음 : 영어 'R' 발음)이 설측음(혀옆소리 : 영어 'L'발음)으로 발음되는 경우의 현상을 말한다. 설측음은 혀끝을 윗 잇몸에 댄 채 혀의 양쪽 트인 곳으로 소리를 내거나 그 혀를 떼면서 내는 소리이다. 즉「달·물·술」등에서의 '鱁' 이 설측음인데 영어 'L'발음에 해당된다. 「다리·무리·도리도리」 등에서의 '鱁' 은 설전음(설전음)으로 영어 'R' 발음에 해당된다. 설측음화현상의 예를 들면 '빨' 에서의 '鱁' 은 설측음이고, '리' 에서의 '鱁'은 설전음인데, 이 둘이 만나면 '빨리' 에서와 같이 '리' 에서의 '鱁' 이 설측음 즉 'L' 발음으로 된다. 이는 '빨' 에서의 설측음 '鱁' 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옛 땅이름 '달랫골' 은 '산골' 의 뜻인데 '鱁,鱁' 이 겹쳐 설측음이 되는 경우이다. 구개음화는 본디 구개음이 아닌 鑁·졁 따위의 자음이 그 아래에 오는 모음 '螡'음을 닮아서 입천장소리로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면 긴배미→진배미로 발음되는 것과 같다. 어두강화(어두강화)는 국어 낱말의 첫 자음이 된소리(豁·顁·ꡁ·뱁·끁)나 거센소리(쑁·졁·챁·쁁)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역사적으로도 '곶(화)>꽃, 갈(도)>칼' 과 같은 예가 있다. 즉 衁,豁, 쑁 중 '衁' 은 연한(순한) 소리임에 반하여 '豁' 은 된소리, '쑁' 은 거센소리이다. 현대어의 방언에서도 '기와→끼와, 과(과)→꽈, 상놈→쌍놈' 이라고 강화(강화)하여 발음하는 일이 허다하다. 축약(축약)은 2음절의 형태가 1음절, 3음절의 형태가 2음절 등으로 줄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어휘를 짧게 하기 위해 음절을 줄임으로써 언어 생활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사이→새(간), 오이→외(), 그리+어→그려 등 비슷한 예로 생략(생략)도 있다. '개왓마을' 이 '개왓말' 로 다시 '갯말' 로 '막힌 골' 이 '막골' 로 형태변화가 되어 줄어든 것과 같다. 삼국시대 땅이름 중 야서이(야서이)→야서(야서), 반나부리(반나부리)→반남(반남), 파부리(파부리)→부리(부리)·복성(복성)으로 된 경우의 예가 있다. 첨가(첨가)는 두 형태 사이에 자음이 끼어 들어가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까치네(작천)>깐치내, 양지마을>양짓말로 된 것 같다.
문자의 바뀜
첫째, 의미의 유사성으로 말미암아 표기문자가 달라진 땅이름이 있는데, 부여군 홍산면은 대산현(대산현)→한산현(한산현)→홍산현(홍산현)으로 바꾼 것이다. 한(한)은 대(대)를 뜻하는 차음(차음)이고, 대(대)와 홍(홍)은 다 의미상 비슷한 차훈자(차훈자)로 문자를 바꾼 것이다. 둘째, 음이 같아 글자를 바꾼 땅이름으로 칠전(칠전)이 칠전(칠전 : 전남 진도군 의신면)으로 바꾼 것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말로 '옻밭' 이라 옻 '칠(칠)' 자를 썼는데 쓰기가 불편하여 '칠(칠)' 자로 바꾸 데서 본래의 뜻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셋째, 미화(미화)나 피휘(피휘)의 동기로 본래의 음이나 의미에 직접 관련 없이 전연 다른 글자를 써서 새로운 땅이름을 만들어 내는 일이 있다. 임금의 이름[휘]자를 피하려고 감획(감획)하여 표기하거나, 옥(옥)이 있었으므로 '옥밭거리' 라고 한 것을 옥은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생각에서 이를 미화하여 옥(옥)자로 바꾸어 옥동(옥동)으로 고치는 경우이다.
행정구역의 병합 또는 분할로 달라진 땅이름
함풍현(함풍현)과 모평현(모평현)을 아울러 함평현(함평현), 인동과 효동을 합치어 인효로(인효로)라 한 것처럼, 둘 이상의 지역을 아우를 때 각 땅이름의 표기문자 중 한 자씩을 떼내어 합하여 새로운 땅이름을 붙인 합성땅이름의 경우 본래의 의미가 달라진 경우가 많다. 이런 예는 특히 일제 때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심했다. 반대로 한 곳의 땅이름을 다시 나누어 부르는 경우이다. 무안군 하의면 상대동리(상대동리)와 상대서리의 예와 같이 상하, 내·외, 동·서·남·북 등 방위를 나타내는 말이 앞이나 뒤에 붙는 예가 많다.
동음견인(동음견인) : 연상적 어원에 의한 의미 변천
음이 비슷한 관계로 새로운 어원을 만들어 내는 현상이다. 그래서 가공적으로 어원을 세운다. 쉬운 예로 교감선생을 곶감(꽂감) 선생이라 하는 것과 같다. 땅이름에서 강원도 지역의 '부수베리/부시베리' 는 원래 고구려 계통의 말에서 '부수/부시' 는 소나무[송], '베리' 는 벼랑[]을 뜻한 것인데, 동음을 끌어들여 어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부싯돌이 많이 나는 곳' 으로 잘못 설명하는 따위와 같은 것이다. 땅이름의 고대어를 현대어로 기록할 때, 특히 한자로 표기하면서 생기는 유연성(유연성) 혹은 의미의 변천이다. 옛날에 도둑이 많아 도둑골이라 한 것을 고치어 도덕골 또는 도덕(도덕)이라 하다가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덕리로 한 예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땅이름의 교체·소멸·생성 과정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지역의 역사·풍속·지리뿐 아니라 전설·민담 따위를 세밀히 조사하여 이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명명(명명)의 동기나 유연성, 어휘의 구조, 의미 분석 등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추론이나 오류(오류)에 빠지기 쉽다.
우리 나라 땅이름은 외국의 그것보다 유난히 어지럽다. 이는 땅이름은 정치적 또는 지리적 조건에 따라 변경하는데 옛 땅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든지, 오랜 세월 동안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발음상으로 변경되어 불리게 되거나, 고유의 땅이름을 한자로 표음화(표음화)하는 과정에서 '달래섬' 을 '월출도(월출도)'라 하는 바와 같이 외래문자의 유입으로 복잡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 지점에 두셋의 땅이름이 복합 호칭되고 있으므로 그 표기에 많은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2) 행정구역 개편과 땅이름 변천
인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땅이름도 시대에 따라 변천하여 왔다. 땅이름은 지리·역사성을 내포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하였으므로 과거의 땅이름을 오늘날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있으나, 어떤 것은 완전히 없어져 어느 곳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개중에는 시대에 따라 위치도 다른 경우가 있다. 특히 변방 지대의 땅이름 변천은 시대성이 많아서 그 위치가 유동적인 것이 흔하여 같은 땅이름이 동일장소가 아닌 경우도 있다. 우리 나라는 땅이름을 자주 바꾼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삼국→고려→조선 시대로 왕조가 바뀔 때마다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땅이름을 고쳤기 때문이다. 고대 땅이름의 독법(독볍)은 음·훈(훈) 등 여러 가지를 써서 어려운 부분이 매우 많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742∼765) 차츰 쇠퇴해 가는 왕권을 회복하려고, 행정 구역을 고쳐 9주, 5소경, 293현으로 세분하여 전국의 땅이름을 일제히 변경하였다. 당시의 땅이름 개칭에는 옛 땅이름과 비슷한 음으로 고친 것(), 음독하기 좋은 말로 의역한 것 (), 훈독하기 위하여 의역한 것() 등이 있다. 그러나 땅이름의 변경은 반드시 규칙적으로 정연하게 정리한 것이 아니고, 옛 땅이름의 음·훈과는 관계 없이 고친 것도 있다. 특히 군·현 이름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왕조가 바뀔 때마다 이름을 고친 것도 있고, 오랫동안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도 있다. 일제 때 모든 군·면을 통폐합하였다. 1912년 1월 1일 317군, 4,351면을 1933년 1월 1일에는 220군, 2,446 읍·면으로 통폐합하였는데, 이때, 옛 군·면 이름이 절반 가까이 없어졌다. 또 리·동명도 여럿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든 것이 많았다. 1912년 6만 2,532리·동을 1933년 1월 1일에는 2만 8,336개로 격감하였으니 거의 3분의 1로 준 셈이다. 당시의 땅이름 가운데는 현재와 같이 '리' 혹은 '동' 으로 부른 것이 많았으나 예외로 리·동이라 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리·동명의 변경 방법은 다만 리를 동이라 하거나 동을 리로 개칭한 것, 또는 전(전)·항(항)·등(등)·곡(곡)·치(치) 등과 같이 지형·지세를 표시하거나 정(정) 따위 교통의 뜻을 표시한 것들이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리·동 폐합 때 유서 깊은 땅이름을 지방 면서기가 제멋대로 개폐하여 아무 연고도 없는 무의미한 땅이름으로 바꾼 것이 적지 않아 역사나 땅이름 연구에 많은 차질을 빚고 있는 점이다.
2내지 10여 개 이·동을 폐합하여 새로운 동명을 붙이면서 종전의 동명과는 전혀 무관한 새로운 호칭을 붙인 것이 많았다. 병합한 이·동 중 1개리의 이름을 그대로 새로운 동명으로 한 것이나, 옛 땅이름을 유래나 의미를 무시하고 같은 음이나 비슷한 음의 다른 한자로 고친 것, 혹은 쉬운 한자로 바꾼 것도 있다. 예컨대 상장리(상장리 : 예산군 고덕면)를 상장리로, 사기리(사기리)를 사기리로, 서울 합정동(합정동)을 합정동 따위로 고친 것들이다.
3) 행정 단위의 승강과 땅이름
고려 이후 조선조 말기까지에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왕조와의 관계에 따라 행정 단위를 승격하거나 강등하였다. 이는 중앙집권 체제를 기반으로 성립한 고려·조선왕조의 정치적 체제 구축을 위하는 현실적 통치책의 일환으로 판단된다. 지역이 승격한 사례를 보면 첫째, 외침(외침)이나 반역(반역)이 일어났을 때 그 고장 주민들이 이를 물리치거나 진압하면 그 지역을 승격했다.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홍건적)이 송도(송도)를 침략하자 왕은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웃 여러 고을에서 대항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안성(안성) 주민들만이 도둑떼의 남하를 막았으므로 안성현을 안성군으로 승격하였다.
둘째, 국가 공신이 나면 그 지역을 승격하였다. 고려 태조 13년(930)에 후백제의 견훤(견훤)을 격퇴할 때 안동군의 장길(장길)·김선평(김선평)·권행(권행)이 태조를 도운 공이 컸으므로 안동군을 안동도호부(안동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셋째, 왕비(왕비)의 고향이나 어태(어태)를 묻은 곳의 고장을 승격하였다. 인천은 고려 숙종조(1096∼1105)에 임금의 어머니 인예태후(인예태후) 이씨(이씨)의 고향이라하여 소성현(소성현)을 경원군(경원군)으로 승격하고, 인종조(1123∼1146)에는 순덕왕후(순덕왕후) 이씨의 문향(문향)이라 하여 인주(인주)라 하였으며, 공양왕 2년(1390)에는 7대(문종조∼인종조) 어향(어향)이라 하여 경원부로 승격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인천군으로 강등하고, 세조 6년(1460)에 그 어머니 소헌왕후(소헌왕후) 심씨(심씨)의 외향(외향)이라 하여 다시 인천도호부로 승격하였다. 한편, 땅이름을 강등한 사례를 살펴보자. 먼저, 적군에게 항복하면 강등하였다. 강원도 양양군(양양군)은 고려 고종 8년(1221)에 거란병(거란병)을 잘 막았으므로 양주방어사(양주방어사)로 승격하였으나, 같은 임금 44년(1257) 호족(호족)에게 항복하니 덕녕현(덕녕현)으로 강등하였다. 다음, 인륜(인륜)에 어긋나는 일을 한사람이 있으면 그 고을을 강등하였다. 경상도 밀양군은 조선 태종 때에 밀양도호부였으나, 중종 13년(1518)에 이 고을에서 아비를 죽인 패륜(패륜) 사건이 나서 현으로 강등하였다.
4) 지방 특수행정 구역
신라·고려 시대에 군·현 이외의 지방특수행정 구역으로 장(장)·향(향)_·처(처)·소(소)·부곡(부곡)을 두었다. 이는 지방제도사(지방제도사)뿐 아니라 행정구역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 읍·면의 지역이나 명칭 설정근거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특히 신라시대에는 주(주)와 군·현을 설치할 때 그 면적이나 장정들의 인구 수가 아직 현이 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고을은 향 또는 부곡이라 하고 군·현에 붙이었다. 고려 때에도 소(소)라 칭하는 고을이 있었는데, 금소(금소)·은소·동소·철소·사소(사소)·지소(지소)·와소(와소)·탄소(탄소)·염소(염소)·묵소(묵소)·자기소(자기소)·어량소(어량소) 따위의 구별이 있어서 각각 그 고장의 특산물 산출을 담당하였고, 또 처·장이라는 고을은 궁궐이나 절, 내장실(내장실)의 예속으로 세금을 부담하였다. 부곡의 발생은 상고(상고) 시대의 씨족 제도가 붕괴하여 속민 제도(속민제도)가 생기고, 속민제도에서 부곡 제도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 씨족제도를 살펴보자. 공동체 상호간의 정복전(정복전)에서 승리한 종족이 패배한 종족을 복속시킨 데서 종족 노예제가 생겼었다. 이 부곡은 종족 노예제의 소산이다. 일반적인 행정구획과 향·소·부곡을 구별하는 기준이 호구(호구)의 많고 적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예컨대 부곡(부곡)은 때로는 현(현)보다 큰 호구(호구)를 갖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현에서 부곡을 강등되는 수도 있었다. 예컨대 원래는 군·현이라 할지라도 정부에서 중벌(중벌)을 받으면 향·소·부곡 등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반대로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우면 보다 높은 행정구역으로 승격되었던 것이다. 향·소·부곡이란 것은 지역적 차별로서 신라시대부터 조선조 초기까지 특수한 지방 하급 행정구역으로 지칭하여 왔다. 따라서 그 지방의 정착 주민은 일반 양민(양민)과 신분적으로 구별되는 천민(천민)이었으며 이들은 주로 광산·제염(제염)·목장에 종사하였다. 이들에게는 갖가지 제약이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선비나 양민 자제에게만 허가한 국학(국학)에 입학할 자격이 없었다. 형제(형제)면에서는 노예에게 부과하는 형벌과 같은 정도로 다루고, 그 자손들의 귀속(귀속) 문제는 천인으로 대우하며, 승려(승려)가 되거나 과거(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않는 등 많은 신분상의 제약을 가하였다. 이렇게 신분상의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같은 지역에 모여 살면서 국가나 상류사회에 공납(공납)하는 농사나 광산 활동 등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제도가 조선 초기에 이르러 소멸되면서 주·군·현으로 흡수되고, 뒤에 읍·면 성립의 기본 골격(관할구역 명칭)이 되었다. 오늘날 전국 각 시·군·읍·면 지역 중에는 관할 지역의 불합리성으로 인하여 조정해야 할 곳이 많다. 이는 조선 태종 때 시행한 견아상제(경아상제)에 기인된 부산물로서, 당시 지방호족(지방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특수 시책이었다. 견아상제는 중국의 한(한)나라 이전부터 사용하여 왔다. 이는 행정구역을 마치 개의 아래위 이빨처럼 윗니가 아랫니의 사이로 쑥 들어가 박히고 아랫니는 윗니 사이로 들어가 서로 엇물리게 된 모양처럼 긋는 것을 말한다. 한 고을이 길게 다른 고을로 뻗어 들어가고 또 그 고을을 다른 고을 옆으로 길게 뻗어 서로 엇물리게 경계를 정하는 제도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앙집권 체제하에서 지방관민이 모반할 때에는 이웃한 다른 고을에서 진압하기 쉽도록 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위현(진위현 : 평택군)의 영신폐현(영신폐현)의 주(주)에 보면, 그 고을이 옛날에는 아주 작은 넓이로 양성현(양성현)에 속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 견아상제에 의하여 수원부(수원부)에 이속(이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에서는 태종이 지방의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 이 제도를 써서 모든 구역이 서로 엇물리도록 하였으므로, 군·현 구획법이 조선조 말기까지 계속되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등의 문헌은 모두 이 제도를 기준으로 설명하였다.
3. 시대별 땅이름 변천사
우리 나라 땅이름들은 삼한→삼국→통일신라→고려→조선→일제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시대가 바뀌고, 영역이 바뀌고, 쓰이는 말과 글이 바뀔 때마다 옷을 바꾸어 입어야 했다.
한자가 보편화되지 않던 신라 초기에는 나라 이름에서부터 임금·벼슬·땅·사람 등의 이름들이 온전히 우리말로 되었었다. 그런데 서기 6세기 초부터 한자 사용이 본격화함에 따라 순수한 우리말로 된 갖가지 이름들이 한자말로 바뀌었다. '새터말'·'벌말'·'밤나뭇골' 등의토박이 땅이름들은 대개 한자로 적어서 '신촌(신촌)'·'평촌(평촌)'·'율곡(율곡)' 등으로 변질되거나 우리 입에서 멀어져 갔다.
통일신라 시대
옛날에는 문자라고는 한자밖에 없었던 시절, 우리 말소리를 그대로 표기할 글이 없어서 한자를 빌어서 그 소리(음독)와 뜻(훈독)으로 우리말을 표기하였다. 그렇게 표기한 글자가 곧 이두문자이다. 향찰(향찰)이라고도 불리운다. 한자를 한글처럼 사용한 셈이다. 옛날에는 우리말을 표기할 때 말뜻만을 나타낼 경우는 한자로 의역하면 되었지만 말소리를 나타내는 경우는 이 이두문자로 그 소리를 표기했다. 이것은 한자에 대한 이해가 어렵고 한문장(한문장)의추상성과 거기 담긴 중국의 사상체계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당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문만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가서 자연히 향찰식 이두식 문장의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과 『삼국유사』는 한문체로 서술된 역사책이지만 땅이름·사람이름·직관명·노래 등 한자로 적혀 있되 한문이 아닌 부분도 많이 있다. 이 대목이 바로 이두문체이다. 비록 한자를 빌어쓸망정 우리말식 땅이름으로 썼던 것이다. 중국과 우리 나라는 언어 구조가 다른 데서 중국어 표기에 알맞은 한자를 우리 국어 표기에 사용하려고 한 그 차용(차용 : 음차, 훈차)이란 퍽 불합리하였으니 한자를 우리말의 순서로 맞추어 표기하던 서기식(서기식) 표기, 한자의 소리[음]나 뜻[훈]을 차용하여 우리의 말 순서대로 표기하던 향찰식이나 이두식 표기가 객관적인 보편 타당성을 띠지 못했다. 단편적인 사람이름·땅이름·관직이름 등의 고유어 표현마저도 두 나라의 음운체계 음절구조를 파악해서 혹은 소리로 혹은 뜻으로 혹은 약음(약음)·약훈(약훈) 등 심지어는 어떤 암시적 표기까지도 들어 있었던 것이니 이러한 고충은 제대로 중국류의 한문자화로 해결해 갔던 것이다. 순수한 우리말의 옛 땅이름이 우리말의 소리와 뜻에 따라 그대로 이두문자로 표기되어 전해왔으나 나중에 한자지명으로 바뀌게 되어 우리말 소리와는 다른 한자 소리의 땅이름이 되어버린 경우가 있다. 흔히 순 우리말 땅이름이 한자로 옮겨지면 그 소리나 뜻이 이상하고 어감도 엉뚱스럽게 둔갑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경남 울산시 두서면 전읍리(전읍리)는 순수 우리말인 '돈 마을' 또는 '돈말' 로 쓰이다가 이두문자로 '회은촌(회은촌)' 으로 표기했다. 곧 '회은촌' 의 '회(회)' 는 '돌다' 라는 뜻말의 줄기, '돌' 에 '鱁' 이 탈락한 '도' 의 소리이며, '은(은)' 은 '은' 또는 '遁'으로 읽는 '遁'소리이고 '촌(촌)' 은 '마을' 이라는 뜻으로 읽은 '말' 이란 소리다. 따라서 이두문자로 표기한 '회은촌(회은촌)' 은 '돈말' 이라는 우리말 소리를 그대로 표기한 땅이름이다.
그러나 이 땅이름은 그 뒤 '돈말' 에서 '돈골' 로 바뀌었고, '회은촌(회운촌)' 이라는 이두 지명에서 '전읍(전읍)' 이라는 한자지명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땅이름이 '회은촌(회은촌)' 에서 '전읍(전읍)' 으로 바뀐 것은 우리 지명사(지명사)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신라 때 이곳에 돈을 만드는 주전소가 있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비롯한 지명이라고도 풀이하고 있으나 '돌다[회]' 의 매김꼴은 '돌' 은 이지만 '鱁'이 탈락하여 '돈[회]' 이 된 것인데, 한자로 '돈' 을 화폐인 '전(전)' 자를 취해 전읍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두표기도 조선조에 들어서는 글자로서는 이두에서 한자로 옮겨졌고 소리로서는 우리 말소리가 생소한 한자소리로 바뀌어 뜻만 같고 소리는 다른 땅이름이 되고 말았다. 대체로 땅이름의 한자 표기는 그 뜻만 옮겨지고 말소리는 우리말 소리가 아닌 생소한 한자소리였기 때문에 일반대중에게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 문자의 생활화에 따라 점차로 구전되어 오던 우리말의 땅이름은 사라지고 한자말 한자어의 땅이름이 판을 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 땅이름의 대부분은 이와 같은 변천과정을 거친 한자 지명이다. 『삼국사기』에 신라 제22대 지증왕(500∼513) 때까지는 임금을 왕(왕)이라 하지 않고, 거서간(거서간)·차차웅(차차웅)·이사금(이사금)·마립간(마립간) 등 옹근 우리말 이름을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거서간은 산라초의 왕호(왕호)로 박혁거세를 거서간이라 불렀다. 이것은 고대의 진한(진한)말로 임금 또는 귀인(귀인)을 뜻하였으며, 제사(제사)를 맡은 웃어른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이사금은 신라 초기 박(박)·석(석)·김(김)이 왕통을 이음에는 연장자로서 한 까닭에 왕을 이사금이라 하였다. 읽기와 의미에 대하여 이론이 많아 연장자의 의미, 사왕(사왕), 계군(계군)의 뜻, 임금[구주]의 뜻을 갖는 어원이라는 등의 주장이 있다. 차차웅은 신라 남해왕의 칭호이다. 무당을 뜻하는 말로 제정일치시대의 원시사회적 수장호(수장호)의 특색을 나타낸다. 마립간은 화백과 같은 부족회의에 있어서 신분에 따라 서 있는 사람의 자리가 말뚝표로 정하여져서 왕은 그 주석(주석)에 있었으므로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생기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였고, 어떤 학자는 신라 고대 남자 집회소 혹은 부족회의 등의 간(간)이라 하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말의 머리라는 말과 연관시켜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보고 있다.
한편, 땅이름에도 ' '
이라는 기록으로 볼 때 길동현을 '영동현' 이라 하고 청풍현은 본래 고구려 시대의 '사열이현'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영동현의 '영(영)' 은 길동현의 '길(길)' 을 우리말 '길다(영)' 로 풀어 '영동(영동)' 이라 하고 '사열이' 는 음으로 읽은 사열이 고을이름을 '사늘하다'·'상쾌한 바람' 이라는 뜻으로 새겨 청풍(청풍)이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말을 향찰식(향찰식)으로 표기한 것마저 '영동(영동)'·'청풍(청풍)' 따위로 뜻풀이해서 한자화(한자화)해 버렸다. 또 이런 예는 전국적으로 수없이 많다. 오늘날의 대전(대전)은 본래 한밭이고, 이리(이리)는 솜리(속리)이며, 청주의 학평리(학평리)는 두룸벌, 백송리(백송리)는 잣골이었다. 그래서 행정지명으로는 앞것을 쓰고 있으나 현재도 그 주민들은 토박이 이름대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 순 우리말 땅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꾼 유래를 잠깐 살펴보자. 신라는 제30대 문무왕(문무왕) 8년(668)에 3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의 잔존문화로 인하여 국력을 배양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그 때는 우리의 고유문자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다가 당(당)으로부터 한문자(한문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삼국통일 후 신문왕(신문왕) 5년 (685)에 9주(주) 5소경(소경)을 설치하였다. 옛 고구려 땅에는 한산주(한산주 : 한주), 수약주(수약주 : ), 하서주(하서주 :)의 3개주를, 옛 신라와 가양의 땅에 사벌주(사벌주 : ), 삽량주(삽량주 : 양주), 청주(청주 : )의 3개주를, 그리고 옛 백제의 땅에는 웅천주(웅천주 : 웅주), 완산주(완산주 : 전주), 무진주(무진주 : 무주)의 3개 주를 두어 통치하였다. 그 가운데 한산주(경덕왕 때 한주로 개칭)는 지금의 경기도와 황해도 대부분 지역과 강원도일부, 충북의 일부 그리고심지어는 극히 협소한 지역이지만 평남과 충남의 일부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관내에는 1소경 1중원경(중원경)으로 현 충주(충주)와 28군 49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9주 아래에 설치한 군(군)과 현(현)은 경덕왕(경덕왕) 16년(757)에 일대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전국은 모두 117군과 293현으로 나누어졌다. 그밖에 양주(양주)에 김해경(김해경), 한주(한주)에 중원경(중원경), 삭주(삭주)에 북원경(북원경), 웅주(웅주)에 서원경(서원경), 전주(전주)에 남원경(남원경)의 5소경을 두었다. 드디어 제35대 경덕왕 16년에 임금은 결단을 내렸다. 그때까지는 주로 구전(구전)하는 고유 행정구역의 땅이름을 모두 한자식으로 통일 표기했다. 옛 고구려·백제의 영토까지 온나라에 걸친 대대적인 작업이었다. 군·현의 명칭은 물론이고, 3자 이상 토박이말 땅이름까지 모두 2자를 원칙으로 하는 한자식 땅이름으로 고쳐 지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때는 중앙집권체제 강화의 필요에서 각기 상이하였던 삼국의 땅이름을 일률적인 형식으로 통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적 요청이었으며, 땅이름의 통일이 지방행정의 정책수행을 위하여 필수 불가결한 지위를 점하게 되는 계기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문화사적 측면에서 보면, 유입된 한문화를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문화적 성장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름·벼슬이름까지 그렇게 하자니 억지와 무리가 따르게 되었다. 우리 토박이말을 한자로 표기하자니 그 작업이 매우 어려워서 어떤 것은 음으로, 어떤 이름은 훈(훈)으로 적었다. 이로부터 우리 나라 행정구역 이름을 모조리 한자로 통일하였으니, 그 시행이 1,200년도 더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행정지명을 변경한 것은 순수 우리말 땅이름에 대한 한자의 침식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한자의 표기가 지역간 언어의 차이로 말미암아 달리 나타났는데, 이것은 지방사투리의 형성으로 해석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보면, 대개 백제에서는 '부리(부리)' 로, 신라에서는 '불(화)', '벌(벌, 불, 평)' 로 고구려에서는 '홀(홀)' 로 나타났다. 이것은 원시 우랄알타이어로 '시·촌·읍' 즉, 성(성)·촌락·주택집단의 뜻을 가진 동일 접미어들이다. '굴(굴), 골(촌), 골(골)' 등도 '홀(홀)' 과 동일 유형의 접미어이다. 신라 경덕왕은 고구려의 땅이름에서 많이 보이는 '홀(홀)'과 백제 '홀(홀)·굴(굴)'을 동비홀(동비홀)→개성(개성), 매홀(매홀)→수성(수성)·수원(수원), 술이홀(술이홀)→봉성(봉성), 달홀(달홀)→고성(고성), 보굴(보굴)→보성(보성), 나혜홀(나혜홀)→백성(백성)·안성(안성)등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제2음절 이하에서는 '성(성)' 으로 바꾸었다. 백제의 '부리(부리)'는 소부리(소부리)→부여(부여)·사비(사비), 파부리(파부리)→부리(부리)·복성(복성), 반나부리(반나부리)→반남(반남:부리의 생략), 모량부리(모량부리)→고창(고창), 고량부리(고량부리)→청무(청무)·청량(청량) 등으로 바꾸었고, 신라의 '불(화)' 은 모화(모화, )→임관(임관), 골화(골화)→임천(임천), 비화(비화)→안강(안강), 노사화(노사화)→자인(자인), 굴아화(굴아화)→울주(울주)·울산(울산), 갑화량곡(갑화량곡)→기장(기장), 달구화(달구화, 달불)→대구(대구), 아화옥(아화옥)→비옥(비옥), 추화(추화)→밀성(밀성)·밀양(밀양), 거지화(거지화)→헌양(), 우화(우화·우불)→우풍(), 칠파화()→진보(), 비자화()→창녕(), 추량화()→현풍() 등과 같이 변경하였다. 골[]은 고구려 땅이름 '홀()' 이 발달한 것이며, '올/울'[예: 가재울 ]은 신라의 땅이름 '블[]' 과 백제의 땅이름 '부리()' 가 발달한 것이다. 또 우리말 '실' 계 땅이름(예: 논실)은 행정지명이 되면서 한자로 '곡()' 으로 옮겼다.
우리 땅이름을 한자로 옮기는 방법에는 소리 옮김(), 뜻 옮김(), 소리뜻 옮김(), 뜻소리 옮김()등이 있다. 토방이 땅이름을 한자 지명으로 옮길 때 행정 관서에서는 주로 토박이 땅이름 전체를 뜻 옮김의 한자 지명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큰말→대촌(), 윗말→(), 대섬→죽도(), 물미→수산(), 갯말→와촌(), 새터→신대리(), 솔치모랭이→송우(), 양달말→양지촌(), 노루메기→장항(), 절골→사곡동(), 가래울→추동(), 밤밭→율전(), 된골(곧은골)→직동(), 벌말→평촌() 따위와 같다. 소리를 옮긴 예로는 방죽[], 서낭당[], 퉁소[]배미, 장포[]우물들은 한자말의 소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래 그 한자의 소리를 잃어버리고 토박이 말처럼 된 것이다. 이러한 말을 귀화어라고 한다.
고려시대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은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산천의 세(세)와 호족들의 세력을 주된 기준으로 설정하였다. 또 행정구역의 계층적 구분에서는 신라 시대에는 주()·소경()·군·현으로, 고려 시대에는 경()·부()·목()·군·현·속군·속현 따위로 등차를 두었다. 경·부·목과 주요 군·현에는 중앙에서 감무관을 파견하여 그 고을과 여타의 속군·속현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정부는 전국 각처에 산재하는 호족의 세력을 인정하고 그들을 통하여 민중을 지배하였다. 그 거주지에 주·부·군·현과 그밖에 향()·소()·부곡() 등도 동시에 거기 상응하는 지위와 격식을 주었으니, 주·군·현의 칭호는 동시에 호족 세력의 대소·강약과 주민 신분의 고하에 따라 결정하였다. 즉 이러한 등차는 국가의 군사상·행정상 중요성이나 왕실의 연고(), 호족의 세력 관계 등에 연유하였지만, 고려 시대에는 근본적으로 호구의 다소, 토지의 광협에 따름으로써 이를 합리화하려고 노력한 듯하다. 고을 이름은 신라 경덕왕 때 중국식으로 개칭한 후 고려 태조 23년(940)에는 여러 주·부·군·현의 이름을 개정하였다. 이어 성종 11년(992)에는 다시 주·부·군·현과 관()·역·강·포()의 이름까지 개정하였다. 같은 14년에 설치한 관내도(:경기도·황해도 일대)·중원도()·하남도()·강남도()·해양도()·영남도()·영동도()·산남도()·삭방도()·패서도()의 10도()는 당()의 도()이름과 마찬가지로 산천 경계를 따라서 명칭을 정한 것이다. 성종 10년 지방의 특성을 나타내는 별호()를 제정했는데, 고려사회의 본관이나 성씨·봉작명()의 운영에 기본원리가 되었다. 한편, 오아족의 안태지(), 왕후나 외척의 고향, 왕사()·국사()등의 출신지, 지방민의 국가와 왕에 대한 공죄(), 그리고 효도나 부모 살해 등의 요인들로 인하여 고을의 승격, 강등이나 행정구역의 설치, 폐합을 자주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군·현 이름에 '주()'자를 붙인 곳은 대개 큰 고을이어야 하는데, 부·군은 고사하고 중소 현에까지 '주'자를 붙인 명칭이 많다. 같은 '주'자를 쓰는 고을에도 목()이나 부()뿐만 아니라 지사부()·속군·속현 등이 허다하였다. 고려 제8대 현종9년(1018) 또 이러한 대략 완비된 5도 양계제()는 우리 나라 지방 행정구역 변천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전국을 경기와 5도() 및 동계·북계의 양계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개경(:개성)·서경(:평양)·동경(:경주)·남경(:양주, 지금 서울) 등 4경()과 안남(:전주)·안서(:해주)·안북(:안주)·안동 등 4도호부 그리고 광주·충주·정주·진주·상주·전주·나주·황주 등 8목()을 두었다. 지방제도 개편 때, 전국을 경·부·목·주·진·현 등으로 구획하여 외관()을 두고, 나머지 군·현과 향·소·부곡 등을 지방관이 있는 주현()에 분속하여 관내()로 삼았다. 속현에는 원칙적으로 외관을 파견하지 않았고 주현에 파견한 지방관의 통제를 받았다. 향교()는 대개 속현에는 두지 않았으나 특수한 곳에는 설치하기도 하였다. 또 주현과 멀리 떨어져 있는 속현에는 조세()·공물()의 수납·조조()·진제(:구제)등을 목적으로 각종 창고를 두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삼국사기』와 『고려사지리지』를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새 땅이름을 많이 수록하였다.
조선 시대
태종 13년(1413)에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한 것이 8도제()이다. 8도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충청도·경상도·전라도·강원도·황해도·함경도·평안도인데, 이후 고종 32년(1895) 23부제()로 개칭될 때까지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도에는 관찰사가 파견되어 도내의 부윤()·목사()·부사()·군수()·현령()·현감() 등을 통할 감시하였다. 무릇 주와 부·군과 현의 사이에는 각각 등급이 있는데,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래도 본떠서 지관()의 행정관이 있는 자리에도 주()자를 붙여 부르는데, 이런 보기로는 인주()니 괴주()니 하는 따위가 바로 이것이고, 현감()으로서 주()자를 붙여 부르는 고을은 과주()와 금주()가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뒤섞여 부르기 때문에 그 고을의 등급을 알 수가 없어서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 많아 지관()이나 감무관()으로 행정관리가 된 고을은 그 주()자를 모두 ∼'산()'자나 ∼'천()' 등으로 바꾸었다.
조선 시대에는 세종실록지리지 간행 때 새 땅이름을 수록한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실은 땅이름은 8,129개인데 별도로 간행한 『경상도지리지』에는 7,202개의 땅이름을 실었다. 양성지()의 『팔도지리지』, 노사신() 등의 『동국여지승람』 및 김정호()의「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는 땅이름을 약 20,000개나 수록하였다. 그러나 이 자료들에는 우리말 땅이름을 거의 한자로 표기하여, 할미산을 노고산(), 모래내를 사천(), 애오개를 아현(), 삼개를 마포() 식으로 적어놓았다. 고려 시대에는 중앙행정 감독의 편의상 전국을 5도()·양계()로 하고, 조선 시대에 8도제를 실시하였다. 이때 도의 명칭은 도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부()·주()의 이름을 따서 정하고, 그 고을의 격( )을 승강할 때는 도의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군()·현() 이름의 변화는 초기 군현의 정비, 병합과 혁파()·신설·승격과 강등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중국처럼 산천·지세 등 자연 경계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주()이름 위주의 도이름을 사용했으므로 해당 주·부에서 반역자나 강상죄인()등이 나면 등급을 격하하고 도()이름도 바꾸었다. 그 가장 심한 예가 조선 시대 초기의 함경도와 후기의 충청도의 경우였다. 도이름의 변천을 보면 이러하다.
양광도()[일부]→충청도→공청도→공흥도→충흥도→충청도(등 읍명을 적용) 등 22번의 거듭되는 변화가 있었다.
전라도→전남도→광남도→전광도→전라도(등 읍명을 적용)
고려 시대에 경상주도()·경상 진주도()·경상도 등으로 불렀으나 조선왕조 전기()를 통하여 경상도로 고정(경주)과 상주를 적용, 평안도()와 경상도는 사신이 왕래하는 길목이라는 이유로 평양 등에 강등할 사항이 있었으나 바꾸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 강릉도와 교주도() 및 회양도()를 합쳐서 교주강릉도라 불렀으나, 조선 시대에는 강원도→원양도()→강양도()→강원도(을 적용).
고려 시대의 서해도, 조선시대에 풍해도()→황해도→황연도(을 적용).
고려 시대의 동계()가 조선 시대에는 영길도()→함길도→영안도()→함경도()(을 적용)
고려 시대의 패서도()→북계도→서해도가 조선 시대에 평안도()로 고정. (를 적용)
유형원()은 도이름을 위와 같이 자주 바꾸는 폐단을 비판하여, 우리 나라는 종전부터 주·군은 사람으로 인하여 그 등급을 올리고 내리는 까닭에 어떤 원칙과 기준이 없고, 각 도는 주를 따라 그 이름을 정하므로 또 자주 바꾸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충청도의 경우, 충주를 현을 강등하면 공청도로 하고, 청주를 강등하면 공흥도, 공주를 강등하면 또 고쳐서 홍청도로 한 것과 같다. 도 이름을 바꾸므로 갈래가 많아 인식되지 않으니 차라리 천고()에 변함이 없는 산천의 이름을 따서 도이름을 고정하는 것이 옳으리라고 제안하였다. 태종 3년(1403) 11월 사간원()의 진언()에 따라, 같은 13년(1413) 10월 도이름 개편과 동시에 읍호도 개칭하였다. 즉 종2품 부윤()의 임지()인 부()와 정3품 임지인 목() 이외의 고을에는 '주()'자 사용을 금지하여 도호부 이하 군현은 모두 산()·천()의 두 글자로 대체했다(대도호부에도 州자 사용을 금함). 전국 '천()'자 36개소, '산()'자 23개소 등 59개 군·현명을 대대적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자 대신에 평()·원()·성()·양()…으로 개칭한 사례도 있었다. 수주()→부평(), 수주()→수원(), 구주()→구성(), 양주()→양양() 등이 곧 그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이룩하기 위하여 군현제를 개편하였다. 고려왕조도 그 본질은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였지만 신라시대부터의 토호적 향리() 세력이 강하여 그들은 주·부·군·현에 계층적으로 편입하고 주·부와 일부 군·현에 파견관을 두어 이들을 감독하게 한 데에 불과하다. 외관을 파견하지 못한 이른바 속군·속현은 주된 부·군·현의 감독하에 토호적 향리들을 다스린 것이 상례였다. 그 결과 고려의 지방행정 구역은 토호들의 세력판도에 의하여 크거나 작아졌고, 대체로 너무 세분되고 고르지 못하여 견아상() 또는 월경처()도 많았다. 이와 같은 고려의 행정 구역에 대하여 조선왕조가 실시한 시책은 향리가 통치한 속군·속현·향소()·부곡() 등 각 임내(관내)의 폐지, 군현의 병합·이속()에 의한 개편, 월경처는 물론 견아상입지()를 정리하는 일 등이었다. 태조() 때부터 논의하기 시작한 이 작업은 태종() 14년(1414)에 군현을 폐지·병합하기로 결정, 그 실시를 각 도에 시달하고 세조() 때 종결을 보게 되었다. 그 병합과 이속의 예를 보면, 용구()와 처인()을 아우러 용인(), 부령()과 보안()을 합하여 부안()으로 하고, 계림(경주)의 해안()을 대구()로 이속하는 것 등이었다.
첫째, 조선의 지방행정상 부·목·군·현의 계층은 국가와 왕실에서 인정하는 주요도, 토지의광협, 호구()·전결()의 다소로 등차를 두었는데, 대도호부와 목은 민호가 1,000 이상, 전결은 10,000 이상이었다.
둘째, 모든 부·목·군·현은 모두 도() 산하에 있는 병렬()의 단위로서 통례적인 명칭을 고을()이라 하고, 그 지방관을 통칭 수령()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품계가 대도호부사(정3품)·목사(정3품)·도호부사(종3품)·군사(종4품)·현령(종5품)·현감(종6품)으로 각각 다를 뿐이고, 행정적으로는 모두 병렬적인 지위에서 관찰사의 통할권() 안에 든 것이 고려조와 달랐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수령에게 군사직을 겸하게 하였는데, 그로 말미암아 수령간에 상하의 계통이 서게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렇듯 수령이 겸임하는 군사직의 상하관계는 일단 유사시에 수령간의 명령계통을 확연히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셋째, 조선왕조에서도 왕자·왕비의 안태지나 외척의 고향, 충신·효자가 난 고을 등의 현을 군으로, 군을 부로 승격하였다. 태종 3년(1403)에 임천군()을 임주부()로 승격하였다. 반면, 역적·패륜아가 난 고을은 부를 군으로, 군을 현으로 강등하였는데, 중종 35년(1540)에 충주()를 약성부()로 한 것이 그 예()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폐합하는 사례가 많았으나, 대체로 3년 정도가 지나면 다시 복구하는 것이 상례였다. 신라와 고려 초에, 땅이름을 따서 임금 이름을 붙인 것과 사람 이름을 따서 땅이름을 개칭한 바 있으나 이는 드문 예이고, 일반적으로 사람의 이름이나 이름자를 따서 지은 땅이름은 적었다. 이는 고려조 이후 혐명사상()으로 인하여 이름자를 취하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특히 땅이름 중 임금이름, 대신의 이름, 궁전이름 등은 피하여 개칭케 한 바도 있었다.
태조 2년(1393)에 영흥부()가 설치되어 영흥현()이 영평현()으로, 세종 4년(1442)에 영흥전호()를 피하여 영흥현이 영유현()으로, 영조 26년(1750)에 대구()를 공자의 휘()인 구()를 피하여 대구()로, 정조 즉위년(1776)에 선왕()의 피휘()로 이산()을 초산()으로, 이산()을 이성()으로, 순조 즉위년(1800)에도 역시 피휘 때문에 이성()을 이원()으로, 이성()을 노성()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군현을 아울러 새로운 이름을 정할 때는 복잡한 문제가 많았다. 주()와 현()처럼 등급의 고하가 있는 것을 병합할 때, 그 이름은 으레 상위의 땅이름을 하위의 것보다 우선했다. 그러나 같은 등급의 것을 병합할 때는 쌍방이 모두 자기 고을 이름을 새 군현 이름의 첫 자로 배치하려는 경쟁이 치열하여, 그 지방 주민들의 세력 강약에 따라 군이름의 배자() 선후가 결정되었다. 주현()과 속현을 병합할 때는 원칙상 주현의 이름을, 군현과 향·소·부곡을 병합할 때는 군현의 글자를 앞에 두었다. 병합할 때 조선시대 군현이름의 결정은 읍치의 소재지는 두 읍 가운데 큰 곳으로 하는 원칙이 있었다.
조선시대 군현이름의 병합은 대체로 116개였다.
그 이름짓는 실례를 분석해 보면
① 두 지역의 첫 글자를 각각 취한(AA'+BB'=AB) 경우(27개)이다.
예를 들면 무풍()+주계()=무주, 해남()+진도()=해진(), 삼기()+가수()=삼가(), 청보()+송생()=청송() 등이다.
② 한 지역은 앞글자, 다른 지역은 뒷글자를 취한(AA'+BB'=AB') 경우(12개)이다. 예를 들면 부령()+부안()=부안(), 용구()+처인()=용인(), 이산()+석성()=이성(), 청당()+도안()=청안() 등이다.
③ 한 지역의 뒷글자와 다른 지역의 앞글자를 합성한(AA'+BB'=A'B) 경우(2개)이다. 해풍()+덕수()=풍덕(), 은풍()+기천()=풍기()가 그 예이다.
④ 두 고을을 두고 글자를 각각 따온(AA'+BB'=A'B') 경우(14개)이다. 의창()+회원()=창원(), 정해()+여미()=해미(), 도강()+탐진()=강진(), 고흥()+남양()=흥양() 등이다.
⑤ 주군이 속현을 병합한다거나 군·현에 이속되는 경우(AA'+BB'=AA'의 경우 58개)가 대부분이었다. 진보()+청송()=진보(), 교하()+심악()=교하(), 고봉()+신주()=고봉(), 홍주()+여양()=홍주() 등이다.
⑥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AA'+BB'=C) 경우(3개)이다. 동성()+수안()=통진(), 연산()+무산()=영변(), 강음()+우봉()=금천() 등이다.
또 명칭이 혼동되기 쉬운 곳으로 태종 16년(1416)에 보천()을 예천(), 청주()를 북청(), 보령()을 보은(), 양주()를 양양(), 보성()을 진보(), 영산()을 천안(), 횡천()을 횡성()으로 바꾸었다. 특이한 예로 산음()과 안음()을 산청()과 안의()로 바꾸었다. 영조 43년(1767)에 산음현에서 7세 여아가 사내아이를 낳게 되자 “안음과 산음은 경계를 삼고 있는데, 지난번에 변희량의 역모가 일어났고 이번에는 음부()가 나타났으며, 또 아미산()도 있으니 이런 까닭에 삼소()가 어우러져 이런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는 군현명에서 연유한 바이니 소홀히 할 수 없다”하여 개칭하였다 한다. 그래서 산음()이냐 산청()이냐는 그 지도의 제작연대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편, 조선 초기에 이르러 호구수를 기준으로 하여 군현 등급과 칭호를 정하려는 국가적 노력이 엿보인다. 군현의 등급을 결정하는 여러 가지 요건 가운데 인구수가 기본이 되는 것은 고금이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는 이러한 기준을 무시한 채 여러 가지로 불합리하게 군·현 등급의 승강을 빈번히 하였으나 조선 태종조부터는 그러한 폐단을 점차 없앴다. 그리하여 세종 때 군·현 이름을 그 지방 인구의 다과에 따라 정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특히 태종 13년(1413) 지방제도를 일대 개혁한 뒤부터 일반화한 듯하다.
넷째, 부·군·현 밑에는 면()·사()·방()이, 그 아래로 동·촌·리·계()가 있었다. 면·사·방 가운데 부·군·현의 청사 소재지를 당시 통칭 '읍내'라 하였다. 서울은 조선조에 들어 5부(:북·남·동·서·중부) 52방()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방 밑에 각 지역명칭이 계()·동·리·촌·평()·포() 등 다양했다. '속담에 '동네방네 소문났네'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행정구역 단위인 동()과 방()의 안() 이란 뜻의 '동내방내()'라는 한자말에서 나온 것이다. 갑오경장(:1894) 무렵 서울의 행정구역은 5서(:를 바꿈), 47방(), 288계(), 775동이었다.
다섯째, 군·현의 청사 소재지, 즉 통칭 읍내들은 그 규모에 대소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정보의 집적지였다. 그 곳에는 대부분 5일마다 시장이 서서 상업적 거래지였으며, 그 주민의 상당 부분은 비()농업적 또는 반()농업적 직업인들이었다. 특히 당시의 장터는 정보매체 중 가장 큰 몫을 하였다. 도로나 하천의 접합지점에다 자리잡았는데, 대개의 경우 읍내에서 이웃읍내까지의 거리가 60∼110리, 평균 약 80리 정도가 보통이었다. 예를 들어 경주()를 중심으로 이를 살펴보면 울산()·언양(),·영천()은 각각 약 80리, 연일()은 60리, 흥해()·장기()는 각각 110리였다. 읍내에서 그 영역 안의 모든 중심마을은 1일 왕복권 내에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보행교통에만 의존한 시대에 1일 보행의 적정량인 약 80리(32km) 안팎의 위치마다 결절 지점이 있어서 큰 마을이 생기고, 여기에 군·현의 청사를 세워 읍내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통례가 그러했다는 것이다. 높은 산이 연이은 평안·함경·강원의 3도에는 읍내 상호간에 1일 이정()을 기준할 수 없었으며, 반면 삼남() 지방에는 토호의 세력이 강했으므로 군현 개편이 뜻대로 되지 않아 30∼40리에 읍내가 존재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초기에는 주·부·군·현이 각기 읍치()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 등 몇 개(주로 4면)의 방향으로 면을 나누고, 이런 면 아래에 리·동·촌 따위 등 자연부락을 붙였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면·리·촌·사()·동·방() 등의 용어가 실제는 명확한 구분 없이 서로 혼용되어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이었다. 또 면·리제의 실시와 함께 초기의 권농관()과 이정()에는 재향품관()이나 유식자를 임명하였다. 권농관은 제언()·관개·파종 등을 관리하는 수령의 직사()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군·현 이름의 변경과 관등의 변화는 그 사유와 과정, 그 시기와 함께 전반적인 역사적 고찰을 통해 종합적인 땅이름 연구를 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일제 시대
19세기 말, 일본이 대륙침략의 길잡이와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조선의 지형도를 간행하려고 본격적인 땅이름 조사에 들어갔다. 이때 서울 합정동()의 '蛤'을 '合'으로 고치는 등 그들의 사용에 편리한 땅이름으로 변경한 것이 상당히 많았다. 조선 시대에는 구리개()란 곳을 일제가 그들의 어운()을 따서 황금정통()이라 불렀는데, 우리 정부 수립 후에는 다시 우리가 을지로()로 바꾸었다. 또 조선 시대의 한성()을 경성(), 진고개()는 본정()으로 일제가 바꾸었는데, 광복 후에 각각 서울, 충무로로 개정하였다. 1895년 일제의 조종에 의해 제정된 홍범() 14조가 선포되고 같은 해 5월 21일 칙령 제98호 '지방제도 개정에 관한 건'이 공포되어 8도 제도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어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가 모두 '군'으로 통일되었다. 23부는 한성부()를 비롯한 인천부(), 충주부(), 공주부(), 개성부() 등이다. 그러나 23부제는 불합리한 점이 많아 시행한 지 불과 1년 2개월 만에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8월 4일 칙령 제36호인 '지방제도·관제·봉급·경비 개정의 건'을 공포하여 13도제가 시행되었다. 13도제는 종래의 8도제를 바탕으로 하여 경기·강원·황해를 제외한 5도를 남북 양개 도()로 분할한 것이다. 오늘날의 지방행정구역 체계는 바로 이 13도제에서부터 그 기반이 확립되었다.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제국주의 일본은 같은해 9월 30일 일본 칙령 제345호로 '조선총독부() 및 소속 관서관제'를 공포하여 이후 36년간의 식민통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13년 12월 29일에 공포되고, 이듬해 3월 1일부터 시행을 본 조선총독부 부령 제111호 '도의 위치, 관할구역 및 부군명칭, 위치 관할구역'에 따라 도의 관할 구역과 부·군의 명칭과 위치 및 관할 구역이 대폭 정리되었다. 대체로 오늘날의 각 계층별 지방행정 구역의 명칭과 규모가 이 때에 그 기초가 확립되었다.
1914년의 개혁을 거쳐, 1941년에는 13도 21부() 218군() 2도()88읍() 2,259면()으로 확정하였으며, 여기에 도지사()·부윤()·군수()·도사()·읍 면장()을 배치하였다. 1914년부터 실시한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과 같은 행정상의 커다란 변혁 때마다 순우리말 땅이름은 차츰 소멸일로를 밟게 되었다. 이때 일본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이른바 창씨 개명에 앞서 전국적인 땅이름 변경을 실시하였다. 땅이름과 성씨는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둘 이상 땅이름에서 한 자씩을 떼어 붙여 새 땅이름을 만드는 소위 합성 땅이름을 이때 무의미하게 양산하였다. 19세기 말 일본은 대륙침략의 길잡이와 토지수탈 목적 아래 토지조사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지형도를 간행하였다. 이를 위해 본격적인땅이름 조사에 착수했는데 이때 약 180만 개의 땅이름이 채집되었다. 그러나 이 때의 땅이름 조사는 불충분했고 더욱이 일본인들이 사용에 편리한 땅이름으로 상당히 변질된 것이 많았다. 그것은 1899년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5만 분의 1 군용지형도, 1910년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지형도에 땅이름을 기재할 때 한자지명 옆에 일본 문자인 '가타카나()'를 병기()했기 때문에 여기서 파생된 혼란이 심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6만 개 가량의 마을이름을 절반으로 줄이면서 우리 땅이름을 고쳐 버렸다. 그들은 우리 땅이름을 변경할 때 '행정구역개편'이라는 이유를 붙였다. 행정구역이 달라졌으니, 지역 명칭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지명 변경의 이유였다.
『동국여지승람』이나『대동지지』의 땅이름이 오늘날의 그것과 서로 다른점이 많은 것은 이 지형도를 간행할 때 일본인이 저질러 놓은 결과이다. 땅이름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 민족의 얼을 묶는 중요한 무형적 재산이다. 따라서 일제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이 땅에 남아 있는 땅이름을 퇴색시켜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코자 했던 것이다. 또 그들 식의 땅이름을, 또는 일본에 있는 땅이름을 우리 땅 곳곳에 붙여 나감으로써 우리 나라에 일본땅이름을 새겨 나가려는 저의()가 깔려 있었음도 볼 수 있다. 식민지 시대에 일제는 '땅이름 바꾸기' 작업을 꾸준히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땅이름은 한번 붙여지면 여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 끈질긴 속성과 우리 민족의 비협조로 인하여 그들의 목적을 쉽게 성취하지 못하였다. 그런 중에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함으로써 더 이상의 땅이름 훼손을 막을 수 있었다.
해방 이후
1945년 8월, 광복 후에는 다시 한국적이 땅이름으로 개칭하였으며, 유럽·미주() 등지의 예처럼 사람이름(호·시호 등)을 땅이름으로 취하여 개칭한 것도 있다. 그리고 행정구역 분리 때에 새 땅이름을 붙일 경우 복고적()인 땅이름을 취하는 수가 많다. 그래서 땅이름에는 신라 이후 변화 없이 그대로 현재까지 계속되는 것이 있는 반면에 여러 번 바꾼 것도 있으며, 혹은 같은 땅이름인데 장소(위치)가 상이()한 수도 있다. 1970년대 한때 한자교육 폐지에 따라 부정확한 땅이름 발음과 오기가 많아서 땅이름의 혼용·오용 등이 많아졌다. 한편, 지도상의 땅이름과 현지에서 부르는 그것이 다르거나 차이가 있으면 군사상에도 곤란을 겪는다. 그리고 한 곳이 둘 이상의 이름으로 불리는 복합호칭 땅이름을 지도상에서 통일표기하기 위하여 국무회의 결정에 따라 1958년 국방부 지리연구소에 중앙지명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각 도·시·군·읍·면 지명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땅이름을 조사·심의한 결과, 남한 지역만 총 12만 4,198개의 땅이름을 채택하여 이를 토대로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현재는 1980년 측량법에 중앙지명위원회와 각급 지방에 지명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규정하여 중앙지명위원회의 기능은 건설교통부 국립지리원에서, 지방지명위원회는 시·도 및 시·군에서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아직도 땅이름의 오기()·개작() 등 혼란이 심하므로 이를 정리하기 위한 작업을 꾸준히 지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편, 일제 시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조치가 우리 지명사()에 큰 오류를 범하면서 우리말 우리글을 되찾은지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한자 지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상세한 내용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