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를 닮았다해서 고슴도치 섬이라 이름지어진 위도(蝟島)는 허균이 에서 꿈꾸었던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 알려질 만큼 풍요롭고 아름다운 섬입니다. 위도 근해는 서해의 고기떼들이 집결하는 청정해역. 고기 많고 인심좋은 위도는 사실 낚시터로 너무 잘 알려진 탓에 섬의 경관이 아름답다는 사실은 덜 알려져 있습니다.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을 가진 위도해수욕장, 몽돌해변이 깨끗한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해수욕이 가능한 깊은금해수욕장, 논금과 미영금 등 알려지지 않은 해변절경이 섬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수려한 해안을 따라 섬을 한바퀴 돌 수 있는 일주도로가 나 있어 차를 싣고 들어가면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섬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습니다. 1. 蝟島의 지리적 환경 위치 - 전북 부안군 위도면의 어미섬 변산반도 서쪽으로 10km 지점에 있다. 동경 126도 17분, 북위 35도3분, 면적 14.14 km2, 해안선 길이 67km, 인구 1800여명 지리적 환경 - 위도는 우리나라 서해안에 위치한 전라북도에서 가장 큰 섬이다. 위도라는 명칭은 섬의 전체모습이 고슴도치를 닮았다하여 蝟島(고슴도치 蝟)라 부르며 면적은 1, 414 ha로 부안군의 2.8%에 해당하며 해안은 암석해안으로 이루어 졌다. 제일 높은 산으로는 해발 254.9m인 망월봉과 241m인 망금봉이 있고 그밖의 100m 이상 되는 곳이 대부분이다. 위도의 수리적 위치로 보면 위도(緯度)상으로 35°35′이고 경도상으로 동경 126°15′이다. 1월 평균기온은 -1.5℃, 8월평균기온은 27℃이며 연강우량은 1100㎜이며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위도의 지형은 백악기말의 신기화산분출암으로 산지가 많아 임야의 토지이용율이 낮고 농경지도 15%정밖에 되지 않아 경지율이 매우 낮다. 따라서 예로부터 어로활동을 위주로 어촌사회를 형성하여 나갔던 것이다. 농산물로는 마늘, 고구마 등이 생산되며 근해에는 멸치, 새우 등이 많이 나며 겨울에는 주로 김양식을 한다.
2. 위도와 그 주변의 섬 식 도 - 위도와 더불어 두 번째 큰 유인도로서 어장이 풍부하고 낚시로도 유명하다. 거륜도 - 식도 다음으로 큰 유인도이다. 배편은 일주일에 한 번 있다. 이곳은 전막리 마을 뒷편에 위치해 있다. 왕등도 - 상왕등도와 하왕등도가 있는데 마치 독도의 동도와 서도를 연상케 한다. 역시나 낚시로 유명한 곳이다. 딴치도 - 진도의 바닷길이 열리듯 이곳 또한 바닷길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치도마을과 떨어진 섬이라서 붙여진 이름인 듯. 이곳은 무인도이다. 새 섬 - 낚시꾼들이 이곳을 모르고는 위도에 다녀왔다고 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이곳은 말 그대로 고기반 물반이다. 이곳은 무인도이다. 일명 갈매녀라고 부른다. 상어섬 - 말그대로 상어모양을 하고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무인도이다. 거북섬 - 섬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서 미영금 앞바다에 위치한 무인도이다. 이곳엔 해초와 해산물이 풍부하다. 형제섬 - 큰형제섬과 작은형제섬이 있는데 큰형제섬은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아서 산나물이 매우많다. 그리고 작은형제섬은 한때 군사 훈련지로 쓰여졌다. 무인도. 똥 섬 - 소리마을에 위치한 이 섬은 말 그대로 갈매기의 똥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또한 무인도이다.
3. 지명의 유래 & 마을 소개 위도의 땅이름은 섬으로서의 지명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순수 우리말 땅이름이 잘 보존되어오고 있다. 바닷가 지형의 땅이름인 끔, 금이, 꾸미, 구미의 땅이름이 가장 많이 보이는데 위도 사람들의 속설로는 위도의 18금, 또는 위도의 24금이 있다고도 말한다. 그 다음은 여 와 목의 땅이름인데 여는 바닷물 속에 숨어있어 잘 보이지 않는 암초를 말한다. 돛단여, 배잡은여, 숨은여, 검은여, 딴달래섬여 등이 그것이다. 위도에 남아있는 우리말 마을 이름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살펴본다. 진말 (진리) 위도면의 면소재지. 진리엔 위도 관아가 있는데 수군 진영이 있다하여 "진말"(진마을)로 불리어 오다가 일제 때 진리라 칭했다고 한다. 현재 진리엔 위도 중학교와 위도 고등학교 및 우체국, 농협 등과 같은 행정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진리는 보통 섬마을들이 세찬 바람에 노출되어 있는데 비해 온화한 바람과 조용한 파도를 끼고 있는 마을이고 다른 지역에 비해 평야지대를 가지고 있어 논농사도 짓고 있다. 도장금이(해수욕장) 벌금의 서쪽당대 너머 해수욕장이 있는 마을. 현재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 벌금이(벌금) 벌끔, 벌그미, 벌구미. 진말의 북쪽마을. 진리에서 서북간 1km지점 떨어진 곳으로, 조선조 말엽 창녕 조(曹)씨와 평산 신(申)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오는데 지금은 다수의 성씨가 살고 있다. 이곳은 원래 지대가 낮은 지역으로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아서 옛부터 소금을 생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금을 생산하는 소금벌이라서 "벌금"이라 칭하게 되었다 하는데 이 마을에는 천혜자원의 위도 해수욕장을 끼고 있어 위도 관광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의 당집 근처 야산 정상에는 수백년 된 후박나무 숲이 있다. 당집은 진리마을에서도 명절 때 제(祭)에 사용한다. 시루금이(시름) 시름금, 시루금, 시루구미. 진말의 동북쪽 후미의 마을. 떡시루 모양의 구미형 지형마을이다. 진리에서 파장금으로 가다보면 파장금 못미쳐 작은마을이 바로 시름이다. 시름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떡시루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시루"로 불리워 오다가 지금은 "시름"이라고 불린다고 전해진다. 시름은 위도 내연 발전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파장금 파장금이, 파장구미. 시루금이 북쪽 후미의 마을. 위도여객선 선착장이 여기에 있다. 1970년대 초까지 파시가 형성되었었다. 진리에서 동북간으로 2km떨어진 곳으로 격포에서 여객선이 출발해서 제일먼저 닿는 곳이기도 하다. 파장금 이라는 이름은 칠산어장을 끼고 있어 많은 어선들이 왕래하고 폭풍이 몰아치면 어선들이 대피하는 마을이며 물결이 길면 어선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혹은 파도가 길게 치면 금(金) 즉 돈이 몰려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도 한다. 정금 (井金) 진리에서 동북쪽으로 1km떨어진 곳으로 최초의 인동 장(張)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원래 지형상으로 볼 때 형체가 솥뚜껑과 같다하여 솥 정(鼎)자를 붙이고 이곳에 금이 나왔다 하여 금자를 붙여 정금이라 칭하였다고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마을에 물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우물 정(井)자로 바뀌었다. 만조시에는 위도와 떨어진 섬마을 이지만 간조시에는 다리 위를 걸어서 섬을 내왕할 수 있다. 그 옛날 이 정금 마을에 살던 장씨는 한때 엄청난 부를 이룬 적이 있는데, 엽전으로 본 섬과의 다리를 가설하려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치도 진리에서 남쪽으로 1km떨어진 곳으로 고려조 이래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을 치도라 부르는 것은 마을 형태가 마치 꿩모양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온다. 원래 치도리의 생업은 농업 위주였으나 일제시대 어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칠산어장의 중심지로 파시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초등학교가 있으며 마을에서 바다를 거쳐 1km 떨어진 곳에 딴치도가 있다. 깊은금이(지풍금, 깊은금, 심구미리) 깊은금, 지푼금이, 심구미. 치도리의 옆마을 치도리에서 서쪽으로 1.5km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깊을 심을 쓴 것처럼 마을이 매우 깊은 지형에 위치해 있다. 이곳엔 내원암 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창건 당시에는 큰 종이 있어 저녁에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가 10km떨어진 멀리 식도까지 들렸다 한다. 이와 같은 지명이 하왕등도에도 존재한다. 대돌목(대리) 대저목, 대리, 대장마을. 면 소재지인 진리에서 치도를 거쳐 서쪽으로 약 6km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형태가 큰 돼지의 목 형국이라 해서 "대저항"이라고 불리어 왔는데, 그후 대저항이 "대장"이라고 불려오다 큰 대(大)자에 마을 리(里)를 붙여 "대리"라 불렀다 한다. 대리는 일찍이 풍부한 어족 자원의 형성으로 많은 어선들이 어장을 형성하면서 큰 마을로 형성되어 왔다. 이곳은 대리 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폐교가 되었으며, 이 대리마을이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인 위도 띠뱃놀이가 전해오는 마을이다. 소돌목(소리) 치도에서 대리를 넘어가기 전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작은 마을이 바로 소리다. 대리를 큰돼지 목이라 불렀던 것에 비해 소리는 소돌목으로 작은 돼지목이란 지명의 유래를 가지고 있다. 살막금이(전막리) 살막금, 살막구미, 전막리. 대돌목 서남쪽 후미에 있는마을. 고기잡이 어살을 만들었던 곳이다. 대리에서 서쪽으로 약 0.5km떨어진 마을로 본래는 행정구역상 대리에 속해 있었다. 처음에는 농업을 생업 수단으로 했으나 점차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는데 당시의 원시적인 방법으로 마을 앞 해역 갯벌에 대를 쪼개어 발을 엮어서 살을 만들어 바다에 말둑을 박아 살을 쳐놓고 밀물 때 물을 따라 들어왔던 고기들이 썰물 때 나가다 이 살에 걸리게 되어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살을쳐서 고기를 잡는다하여 "살막금"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살 전(前)자에 막 막(幕)을 써서 전막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논끔이(논금) 논끔, 논구미, 답구미. 전막리에서 서쪽으로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나오는 곳으로 본 마을에서 유일하게 벼를 경작한다 하여 논금이라 하였다. 논금은 몇가구 되지 않지만 조약돌 해변이 넓게 펼쳐져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원래는 대리에서 논금으로 직접 넘어가는 산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막리를 거쳐 논금으로 가는 순환도로가 넓게 나있다. 미영금 미영금이. 논끔의 동쪽 후미에 있는 마을. 전막리에서 서쪽 해안가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논금을 지나 넓은 모래사장과 조약돌 해변이 있는 조용한 미영금 해변이 보인다. 멋들어진 해안 절벽과 바위사이에 조심스럽게 들어앉아 있는 이곳은 섬의 정취를 느끼며 조용히 휴가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장소이다. 미영금 해변 뒤로난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거나 조용히 해수욕을 즐겨도 좋고 낚시를 즐길 수 있다. 또한 미영금엔 민박집과 횟집이 다수 있다. 왕등도 왕등도는 위도에 딸린섬으로 상왕등도와 하왕등도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절해의 고도다. 왕등도는 한말의 큰 유학자 간재 전우 선생이 국운의 기울어짐을 크게 탄식하며 도해지의에 의하여 1908년에 처음 이곳에 숨어살았던 곳이기도 하여 그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4. 위도만의 특징 초분 - 현재 위도에서 초분을 행하지는 않는다. 초분이 남아있는 곳은 전남 남해안 지역에서 소수가 존재할 뿐이다. 초분(草墳)은 죽은 자를 바로 묻지 않고 시체를 지상에서 썪힌 후 뼈만 추려서 묻는 이중장제(二重葬祭)이다. 이런한 풍습은 주로 전라도의 해안가 지역에서 많이 보여지는데 오늘날에 행해지는 곳은 거의 없다. 여러 가지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위도에도 1970년대에만 하더라도 약 15기 정도가 남아 있었고 80년에 초반에는 몇 개 안 되는 초분을 위도에서 볼 수 있었다. 파시(派市) 파시라는 것은 해상에서 벌어지는 생선시장을 말한다. 파시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냉동선이나 동력선이 없던 시대에 보다 신선하게 생선을 팔기도 하고 계속해서 고기를 잡아야 하기에 불가피하게 육지에 들를 수 없기에 이루어진 해상 위의 시장을 말한다. 위도의 앞에서 벌어진 칠산 파시는 흑산도 파시, 연평도 파시와 더불어 3대 조기 파시로 유명하며 특히 칠산 파시는 조기 맛이 매우 뛰어나며, 이곳에서 잡힌 조기는 대부분 영광군 법성포나 줄포를 통해 굴비로 가공되어 내륙으로 들어갔는데 영광굴비의 명성은 여기서 나왔다. 위도에는 조기파시 이외에도 조선시대에는 청어파시가 유명했으며 1980년대에는 키조개파시가 섰던 곳으로도 유명하다.현재 파시가 이루어지는 곳은 거의 없다. 5. 위도팔경 일찍이 위도사람들은 위도의 절경을 위도 팔경으로 읊고 있는데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내원모종(內院暮鐘) - 내원암의 저녁 종소리, 정금취연(井金炊煙) - 정금마을의 밥짓는 연기, 식도어가(食島漁歌) - 식도에서 들려 오는 어부들의 노래소리, 망봉제월(望峰霽月) - 망월봉에 떠오르는 달, 봉산출운(鳳山出雲), 선소귀범(船所歸帆), 왕등낙조(旺嶝落照) - 왕등도의 낙조, 용연창조(龍淵漲潮) - 용연에 뜨는 해.
6. 위도의 볼거리 (1) 내원암 - 위도의 유일한 사찰 내원암은 조선 숙종 당시 자장율사가 창건, 4백년의 역사를 지닌 조계종 비구니 사찰로, 사찰이라기 보다는 어느 수도승이 머물렀을 법한 작은 암자인 이 곳은 법당 옆 약수는 물맛이 일품이고 절주변에는 기관지에 좋다는 인동초가 분위기를 더욱 고즈넉하게 만든다. 또한 절터가 여인의 자궁을 닯아 이곳에서 아들을 기원하면 득남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내원암 앞마당에는 백일홍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고있는 배롱나무가 있다. 이곳 내원암에 있는 배롱나무는 꽃나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우람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내원암의 명물이 되어있다. 100일(7월~9월)동안 꽃을 피운다고 하여 백일홍이 된 이 아름다운 나무는 내원암의 운치를 한층 더 고조시키고 있다. 이 배롱나무의 수령은 약 170여년으로 추정하고있다. 이곳 내원암은 전설 속의 종이 하나 있는데 아주 오래전 이곳 절에서 종을 치면 저멀리 왕등도까지 들렸다한다. 또한 이 절에 또하나 아주 오래되고 부드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향나무가 있는데 그 자태가 정말 아름답다. 최근 내원암에선 절 위에 용왕각을 지어 바다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넋과 혼을 위로하고, 바다에서의 안전과 풍어를 비는 기도처를 마련했다. 한편 내원암은 수백년이 넘은 특이한 탱화를 소장하고 있다. 깊은금 마을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다. (2) 해수욕장 - 부안군 위도면 벌금리 주변의 산들이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는 아담한 모래사장이 위도해수욕장이다. 마치 소쿠리 안처럼 되어 있고 1km가 넘는 고운 모래사장과, 백옥같이 맑은 물은 수심이 깊지 않아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다. 특히 원양에 대한 전망이 좋아 모래사장에 앉아 있으면 왕등도의 원경이 그림과 같이 펼쳐진다. 위도해수욕장은 1969년에 개장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수영장이다. (3) 해안도로 - 수려한 해안선을 따라 섬을 한바퀴 돌 수 있는 총 12km 해안일주도로 (왕복 2차로의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나 있어 차를 싣고 들어가면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섬 드라이브를 즐길 수도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7번 국도' 못지 않게 해안 풍경이 그만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산이다. 여느 섬과 달리 병풍처럼 둘러싼 산들로 분지를 이룬다. 온 산을 채운 해송이 바람에 나부끼며 힘에 겨운 듯 서있는 모습이 세상 풍파를 이겨낸 이네들의 삶을 말해주듯이 애처롭다. 서해안 최대의 김양식장을 자랑하듯이 해안절벽너머 보이는 것은 온통 '해태(海苔)' 재배지다. 멀리 법성포 앞바다로 어슴프레 보이는 무인도는 바다풍경과 어우러져 해안도로를 빛낸다. 이 도로의 어디에서도 바다가 보인다. 간혹 지나치는 포구마을의 평화로움 그 자체다. 물빠진 개펄에 얹혀 비스듬히 기운 어선, 개펄에서 바지락을 캐는 여인들, 갯가 원두막에 앉아 수박을 먹는 촌로들, 섬을 뒤덮은 소나무숲들..
7. 위도의 전설 ◈ 대룡샘 전설 대리마을에는 대룡샘 이라는 우물이 있다. 이 샘은 보통의 우물이 아니라, 한마디로 약수터라 할 수 있는데 마을 뒷산 바윗틈에서 솟아나는 이 샘물은 그 양도 많고, 물맛도 좋다. 그런가하면 대룡샘은 어떻게 저런 높은 산기슭의 바위 틈에서 저렇게 많은 샘물이 솟아 나오는지 정말 신비스러울 정도인데, 대리마을 주민들은 이 샘물을 한곳에 모아 식수로 활용하고 있다. 대룡샘 바로 밑에 물저장 탱크를 크게 만들어 물을 한데 모은 다음, 날짜와 시간을 정해 급수를 해왔는데, 이런 식으로 대룡샘의 물을 각 가정에 수돗물로 공급 한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이 대룡샘의 유래가 대리마을에 전해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리마을이 생긴지도 수백년이라 하는데, 이 마을엔 절충 장군이 살았다고 한다. 그 절충장군은 광산 김씨였는데, 어느 날 절충장군은 쇠주랭이를 짊어지고 마을 뒷산에 올라갔다 한다. 절충장군이 산에서 내려오다 쇠주랭이로 땅을 치니 대룡샘이 되었는데, '큰 대(大)'자에, '용 용(龍)'자를 써서 대룡(大龍)샘이라 불렀다 한다. 다시 절충장군은 그 대룡샘에서 쇠주랭이를 질질 끌고 마을로 내려오니, 그것이 바로 대리마을의 작은 도랑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대리마을의 도랑은 대룡샘에서 마을을 관류해서 바닷가까지 이어졌는데, 바닷가 근처엔 통제라는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고 한다. 대룡샘에서부터 도랑을 따라 흘러내리던 물은 일단 통제에 머문 다음 땅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어 바다로 빠져나갔다. 고작 1㎞ 남짓한 이 도랑의 곳곳은 사시사철 대리마을 사람들의 빨래터로 활용 되었는가하면 여름철이면 여인네들의 노천 목욕탕으로 이용되기도 했단다. 하지만 지금은 도랑이 거의 복개 되었고, 그 옛날의 정취와 낭만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 피동지 전설 대리에서 소리를 거쳐 치도리로 가는 성황당 근처의 벼랑 아래엔 피동지 구멍이라는 작은 동굴이 있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깍아지른 절벽 밑에 자리잡은 이 피동지 구멍은 동굴 입구의 바위가 진홍색 핏빛을 띠고 있는데, 이 동굴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 온다. 옛날옛날 한 옛날에 위도엔 성이 피가요, 벼슬이 동지였던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피동지는 성질이 정말 고약했던 모양이다. 그래 하루는 가마를 타고 길을 가던 참이었는데, 하인들이 짊어진 가마 위에 올라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다. 가마를 짊어지고 가던 하인들은 힘이 들어 낑낑대는 참이었는데 글쎄 피동지는 그 하인들 머리위에 담뱃재를 털었다지 뭔가. 하지만 하인들은 참고 또 참았지만, 계속 피동지의 심술이 고약해지자 인들은 그만 화가 나서 그 벼랑 아래로 피동지가 타고 있던 가마를 내동댕이 치고 말았다 한다. 그러자 벼랑 아래로 떨어진 피동지는 급사했고 그 시체는 점점 구렁이 형태로 변하고 말더라는 것. 사람의 탈을 쓰고 한 세상을 살았던 구렁이가 떨어져 죽은 피동지 구멍 일대는 금새 시뻘건 핏물이 들기 시작했다. 밀물때가 되어 바닷물이 차오르자 구렁이 시체는 바다에 둥둥 떠서 어디론가 떠내려 갔다 한다. 그 구렁이는 변산 쪽으로 떠내려 가서 수성당 귀신이 되었고 그 뒤 수성당 앞을 지나가던 배들은 수성당의 당신이 된 피동지 원혼에게 제사를 올리며 안전항해를 빌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 형제섬 전설 대리라는 마을은 쌍둥이가 끊이지 않고 태어나고 있는데 쌍둥이를 낳으면 한 아이는 바다에 버려야 한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마을 박씨 부인이 쌍둥이를 출산하여 숨겨 놓고 키우던 어느날 박씨부인의 꿈속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너의 아이 둘 다 데려다가 저 동쪽 바다에 섬 두개를 만들어 뱃길의 표적을 삼을 것이다'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은 댓가로 아낙들에게 더 큰 출산의 고통을 주어 쌍둥이가 끊이지 않을 것임을 전해주고 사라졌다 한다. 꿈에서 깨어나 박씨부인은 옆에서 자고 있을 자식들을 확인해 보니 간 곳이 없고 희미하게 먼동이 터오는 동녘을 바라보니 섬 두개가 형제처럼 서 있었다 한다. 지금도 그 이름을 '형제섬'이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한때는 이곳 동생섬을 사격연습장으로 사용하여 지금은 벌거숭이 섬으로 변했고 섬의 절반 정도가 사라졌다. 섬이 되어서도 사라져야 하는 쌍둥이 동생의 운명인가 보다.
◈ 칠산바다의 전설 칠산바다는 원래 일곱 고을이 있던 육지였다. 이곳에 서씨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지사(地師) 한 분이 찾아들자 그를 후히 대접해 주었다. 그 지사는 떠나면서 서노인에게서 후대받은 공을 갚기 위해 한 마디 일러주었다. 이곳은 얼마 안가서 바다가 될 것이니 이곳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은 서노인은 그러면 언제쯤 바다가 되느냐고 물었다. 저 앞에 있는 큰 부처의 귀에서 피가 흐르게 되면 바닷물이 들어온다고 하고는 지사는 가 버렸다. 그날부터 서노인은 날마다 아침이면 부처의 귀를 보러 나갔다. 하도 지성스럽게 부처를 보러 다니자 왜 그렇게 날이면 날마다 부처를 보러 다니냐고 동네사람들이 물었다. 서노인은 부처의 귀에서 피가 흐르면 바닷물이 들어와 동네가 물에 잠기게 된다며 지사가 남기고 간 말을 했다. 동네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영감이 미쳤다며 조롱했다. 그 중에 개백정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날 개잡던 피묻은 손으로 가만히 밤에 가서 부처의 귀에 피를 바르고 왔다. 이튿날 아침 이를 본 서노인은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여기가 곧 바다가 될테니 어서 피하라' 하고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서노인의 말을 듣고 따라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고을의 육방관속들이 원님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는데 원님이 관상을 잘 보던 사람이었던지 '어찌 너희들의 얼굴이 다 죽을상이 되어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관속들이 서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어젯밤 한 개백정이 서노인을 놀려보려고 부처의 귀에 피를 바르자 서노인이 산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원님은 '노인의 말이 옳다. 우리도 어서 산으로 피하자.' 하며 관속들을 끌고 산으로 향했다. 서 노인이 산으로 올라 한참을 가는데 어디만큼 오니 소금장수가 소금지게를 작대기에 받쳐놓고 앉아 쉬고 있었다. 소금장수는 서노인에게 어찌 그리 급히 오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여기가 이제 곧 바다가 될 것이기에 급히 피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자 소금장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바다가 된다 해도 이 지게 작대기 밑에까지만 물이 찰 것이니 더 이상 올라갈 것 없다고 했다. 그러자 땅이 요동을 치며 가라앉더니 칠산 고을은 순식간에 물에 잠기고 바닷물은 과연 소금장수가 말한 대로 소금짐 밑에까지 찼다.
◈ 심청설화와 율도국의 무대인 임수도 작년(2000) 여름에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팀이 전남 곡성군의 관음사 연기설화의 고증 과정에서 위도 인근에 있는 임수도가 심청이 빠진 인당수라는 주장을 했다. 발굴 과정에서 백제시대 석실분과 고려시대의 유물, 송대(宋代)의 동전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는데 이를 근거로 하여 위도는 고려시대에 중국과 성행하던 해상교역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말해주고 위도의 부속 도서인 임수도 해역이 바로 심청전의 인당수라는 주장을 제기 하였다. 옆집에 사시는 분의 화단 한 모퉁이에는 예전에 사람 대신에 물속에 제물로 바쳐졌다는 문인상이 있는데 문인상의 재료는 우리나라에서는 나오지 않는 돌이라고 한다. 또한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이상향 율도국의 실제 모델이 위도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
8. 위도띠뱃놀이(풍어제) 띠뱃놀이는 아침 일찍부터 해질 무렵까지 진행되는 부락 축제(祝祭)로서 마을 사람들이 혼열일체가 돼 부락신과 바다의 용왕에게 정성들여 제사를 올리는 굿의 일종으로 1978년 제19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대한민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전수관과 전시관이 들어서 있는 대리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그 띠뱃굿, 띠뱃놀이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띠뱃놀이의 기본 내용는 산에서의 당굿과 바닷가에서의 용왕굿이 주를 이루는데요 당굿은 배에서 1년 동안 모시게 될 뱃신의 서낭을 내림받고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이고 용왕굿은 마을의 모든 액을 떨쳐버리고 바다에서 죽은 어부들의 원귀를 달래는 한편,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이다.
이 용왕굿의 가장 큰 특색은 굿의 주도자가 부녀자라는점이 특색입니다. 제의 순서는 마을사람들이 오폭기를 앞세우고 바닷가 산의 절벽위에 수호신을 모신 원당에 올라가 제를 지내고 농악을 치며 마을로 내려와 마을 광장에 모여 주산돌기(지신밟기)를 한 후, 바닷가로 내려와 용왕제를 지낸다. 그런 후 띠배에 짚으로 만든 인형과 또 마을의 온갖 재액과 풍어를 비는 마음을 실어 바다에 띄워 칠산(七山) 바다 깊은 바다속에 가라 앉히고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