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파르티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지역 등 저마다 일치하지 않는 전승이 알려지고 있음
도마
바돌로매
빌립과 함께 히에라볼리에서 선교하였으며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목회활동 중 순교한 것으로 추정됨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초대교회 전승에서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혼동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시리아 지방에서 목회함
다대오
종종 예수의 형제 유다와 혼동되었으며 전승은 그가 에데사와 같이 목회한 것으로 관련시킴
셀롯인 시몬
페르시아, 이집트, 카르타고, 영국 등지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되어짐
가롯 유다
예수를 배반한 후 목매어 자살함
2. 초대 기독교의 상징
상징
해설
ALPHA-OMEGA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뜻함
ANCHOR(닻)
신앙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상징물임
BREAD AND WINE (빵과 포도주)
성찬식-그리스도의 희생(죽으심)을 기념함
CHI-RHO
그리스어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첫 두 글자를 말함
CROSS(십자가)
그리스도의 죽으심
DOVE(비둘기)
그리스도의 수세(受洗)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말함
FIRE(불)
오순절날에 임하신 성령의 임재를 가리킴
FISH(물고기)
그리스어 단어 ICHTHUS-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의 머리말 글자로 예수께서 5천명을 먹이신
이적사건과 사람을 낚는 어부를 뜻하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음
LAMB(양)
그리스도의 (참다운) 자기희생을 뜻함
SHEPHERD(목자)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분임을 가리킴
SHIP(선박)
교회(노아의 방주)를 가리킴
VINE(포도나무)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과의 연합도미이나 성찬식에서의 포도주를 뜻함
3. 사도 교부
이름
연대
목회지
저술
주요 사실
로마의 클레멘트
30-100년경
로마
클레멘트 1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제4대 교황으로 추대함
성서에는 빌립보서 4:3에 언급된 것으로 추정함
도미티아누스황제 박해시 순교함
그의 서신은 사도의 계승원칙을 강조함
이그나티우스
117년 사망
시리아 안디옥
에베소 서신
마그네시아 서신
트랄레스 서신
로마 서신
빌라델비아 서신
서머나 서신
폴리갑 서신
그의 서신은 로마에 순교하러 가는 도중에 기록되었으며 그는 순교를 당연한 기쁨의 운명으로 받아들임
주교와 장로직의 구분을 최초 역설함
이단사상인 영지주의를 배격함
트라야누스황제의 박해로 순교함
헤르마스
1세기 말엽
~ 2세기 초엽
로마
목자서(牧者書)
클레멘트와 동시대 인물임
환상과 비유에 관한 많은 저술이 있음
아마도 유대인이었으며 노예 출신의 신분을 지닌 것으로 추정함
알렉산드리아의 바나바
1세기 말엽
~ 2세기 초엽
알렉산드리아
바나바서
알렉산드리아의 법률학자임
필로의 알레고리 방법에 능통함
파피아스
60-130년경
히에라볼리
우리 주의 말씀 강해서
사도 요한과 깊은 친교를 나눈 자임
종말론에서 전천년설을 주장함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어록집에 기초하여 저술되었으며 마태복음은 원래 아랍어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함
폴리갑
69년경-160년
서머나
빌립보 서신
사도 요한과 깊은 교제를 나눈 자임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편집하고 보존함
영지주의자 말시온을 '사단의 맏아들'로 규정함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하에 순교당함
4. 2세기 변증가
이름
연대
목회지
주요 저서
주요 사실
쿠아드라투스
2세기 초
아테네
변증서(전해지지 않음)
아테네 주교임
그의 저서는 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보낸 변증서였음
기독교를 유대교와 이교도의 예배와 대조하여 구별시켜 놓음
아리스티데스
2세기 초
아테네
변증서(전해지지 않음)
그의 저서는 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보낸 변증서로 사도 바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
순교자 저스틴
(유스틴)
100-165년경
팔레스틴
에베소
로마
제1 변증서
제2 변증서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
이교에 대한 비판(전해지지 않음)
말시온 이교 반박서(전해지지 않음)
철학적인 훈련을 받음
순회 평교사로 영지주의자 말시온을 반박하며 로고스(logos) 개념정립을 위해 헌신함
예언, 이적, 윤리의 근본인 기독교에 대한 토론에 열의를 보였고 그후 로마에서 순교함
타티안
110-172
앗시리아
시리아
로마
공관복음서
그리스인들에게 보내는 서신
저스틴의 제자로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르 주장함
그는 최초로 복음서들간의 공통된 기사를 정리하였으나 말년에 영지주의에 심취되고 말았음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켜 '극단적 금욕주의자'로 간주함
아데나고리스
2세기
아테네
변증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플라톤주의자로 고전적인 형태의 저술을 남김
데오필루스
181년 사망
안디옥
아우톨리쿠스 서신
안디옥의 주교로 이교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인 엄격한 변증가임
멜리토
190년 사망
사르디스
약 20여권의 저서(대부분 소설)
시르디스의 주교로 Quartodecimans(14일주의)을지지함
구약성서 가운데 최초로 그리스도인 목록을 작성함
헤게시푸스
2세기
시리아
그리스
로마
연대기(전해지지 않음)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로 초대교회의 순수성과 사도성을 증명하기 위해 각종 문헌정보를 수집하였고 모든 이단사상의
책임을 유대교에 돌림
5. 변증가들의 주요 논쟁점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입장
변증가들의 답변 내용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빗나간 형태의 분파임
유대교의 법은 본래 한시적이었기에 새 계약을 지향하는 것을 표방한 것임
십자가에 달린 목수의 아들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아님
구약성서는 메시야의 영광과 고난을 예언하고 있음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나님의 일체성과 모순되는 것임
구약성서는 삼위일체 안에서 인간의 양면성을 나타내고 있음
변증가들의 유대교에 대한 반박
내용
구약성서의 예언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음
구약성서의 전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
예루설렘의 멸망은 유대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기독교에 대한 입증을 말함
기독교에 대한 이교(異敎)의 입장
변증가들의 답변 내용
부활의 교리는 불합리한 것임
복음서마다 수많은 증거가 있고 제자들에게 끼친 영향이 크며 자연계의 순환 (예를들면, 계절)에도 그 비유가
있음
성서는 모순투성임
타티안의 공관복음서처럼 모순된 내용들이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있음
무신론은 폭넓게 전파되고 있음
플라톤조차도 보이지 않는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음
기독교는 범죄자들의 예배처소임
예수의 의도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함에 있었음
기독교는 흔히 발생하는 종파에 불과함
기독교는 모든 이들의 영생을 준비하고 있으며 모세는 이교 철학자들의 등장을
예견함
기독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함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한 모든 법에 순종함
기독교는 근친상간(近親相姦)관 만행을 저지르는 등 도덕상의 문제가 있었음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자의 정신을 본받고 있듯이 그들의 삶의 방식을 준수할
따름이었음
기독교는 천재로 인한 사회질서 파괴의 주범이었음
자연의 재해는 그릇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
변증가들의 이교(異敎)에 대한 반박
내용
이교 철학작들은 자신들의 주요 이념을 모세와 예언자들로부터 도용한 표절자에 불과함
다신교는 철학의 불합리리성과 비도덕성을 특징으로 삼고 있음
이교 철학자들은 서로들 간에는 물론 그들 자신조차도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음
변증가들의 기독교에 대한 옹호
내용
참된 진리는 이교 철학자들이 기독교에 개종함으로써 입증되었으며 이로써 기독교의 진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되었음
그리스도, 사도들, 그리고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발생된 기적들이 기독교의 진리됨을 증거함
수많은 시련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발전은 그 자체의 진리성을 확증하고 있음
기독교만이 인간 존재의 참된 행복을 발견케하는 종교임
6. 3세기 교부
이름
연대
목회 장소
대표 저서
주요 내용
이레니우스
2세기 후반
서머나
고올
이교에 대한비판
악의 기원과 신(神)의 일체성에 관하여
폴리갑에게 공부한 그는 선교사요 변증가였으며 영지주의에 강력한 반대를 표방하였고 전천년설을 옹호하였으며 리용의
주교로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클레멘트
150-215년경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그리스인들에게 보내는 교훈집
교육론
기질론
철학 수업을 쌓았던 그는 성년에 이르러 개종하였으며 로고스이론을 강조하였고 성서를 은유적 해석방법으로 접근하였다.
고전적인 그린스도인 찬양시인 '선한목자'를 저술하였다.
터툴리안
160-220년경
카르타고
이교에 대한 규정
말시온 이교반박서
프락세우스 이교반박서
로마군대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한 그는 중년의 시기에 몬타누스파로 개종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그가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시켰다는 데에 있다.
히폴리투스
170-236년경
로마
철학인간[다수의 주석서가 필요함]
이레니우스에게서 공부한 그는 당대 로마의 주교들에게 배척받았는데 그 이유는 알레고리적인 방법으로 성서를 해석하였기
때문이었다.
후에 사르디니아지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
160-240년경
팔레스틴
연대 사료집
오리겐에서 공부한 그는 천지창조로부터 서기 221년까지 역사적인 자료연구서를 발간하였다.
오리겐
185-254년경
알렉산드리아
가이사랴
6개국어 대역성서
켈수스 이교반박
제1원리(신학)
그의 아버지 레오니다스는 202년에 순교하였고 그는 클레멘트에게서 공부하였다.
203년 클레멘트 사후(死後) 교리문답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성서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주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었으며 극도의 수도생활을 하였고 교회내 반대세력을 피해 망명생활한 후 로마인의 손에 의해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씨프리안
200-258년경
카르타고
교회의 통일성
실수에 대하여
수사학을 공부한 그는 245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247년부터 카르타고의 주교 일을 담당하였고 터툴리안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감독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박해시 배교자들의 문제에 엄격한 입장을 취하였고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시 순교하였다.
그레고리 -타우마 투르고스
213-270년경
팔레스틴
소아시아
신앙선언
오리겐 예찬론
오리겐에게 공부한 후에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만능학자'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신 가이사랴 지방의 주교직을 맡았다.
7. 신약성경의 정경화 과정
시기
특색
연대
중요한 출처
수용대상이 된 책
논의대상이 된 책
사도 교부들
공식적인 논의와 심각한 토론이 아직 본격화되지 않았음
100-140년경
사도교부들의 기록 인용
네 개의 복음서
바울서신(구분없이 하나로)
없음
영지주의자들의 활동
초대교회가 영지주의자 (특히, 발시온)에 의해 제외된 정경화작업을 반박하고 나옴
140-220년경
교부들의 문헌 인용
무라토리안 단편(180년경)
진리의 복음서(영지주의적)
네 개의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13권
베드로전서
요한 1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 2,3서
헤르마스의 목자서
디다케(12사도들의 교훈집)
베드로의 묵시록
정경화 완료작업
4세기 말경 일반적인 합의점을 도출함
220-400년경
오리겐의 구분
네 개의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13권
베드로전서
요한 1서
요한계시록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 2,3서
유다서
헤르마스의 목자서
디다케
유세비우스의 구분
네 개의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14권
베드로전서
요한 1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 2,3서
유다서
헤르마스의 목자서
디다케
아다나시우스의 부활적 회람편지(367년)-동방교회 최종 승인
현재의 신약성서(정경)
로마회의(382년)-서방교회 최종 승인
현재의 신약성서(정경)
카르타고회의(397년)-전체 교회에게 보급됨
현재의 신약성서(정경)
8. 신약성경 정경화에 논란이 된 책
문제의 책
수용하려는 입장
거부하려는 입장
결과
히브리서
동방교회에서는 바울의 저서로 높이 평가함
서방교회에서는 바울 저작성을 의심함
수용됨
야고보서
동방교회에서 온전한 저서로 인정함
서방교회에서 저작성 시비가 대두됨
수용됨
베드로후서
베드로의 저서로 인정함
본문 2장과 유다서의 내용문제로 저자에 이의 제기됨
수용됨
요한 2,3서
요한의 저서로 인정함
초대교회의 문서로 인용에 문제시됨
수용됨
유다서
초대교회의 문서로 인용됨
사도성이 충분히 인정됨
저자에 이의가 제기됨
수용됨
요한계시록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요한의 저서로 인정함
천년왕국설을 반대하는 유세비우스에 의해 제기됨
수용됨
헤르마스의 목자서
하나님께서부터 온 계시를 담고 있는 유익한 교훈서임
비사도적인 기원을 갖고 있는 후대의 저서임
거부됨
디다케
순수한 사도적 전승을 담은 기록임
사도적인 기원이 불분명한 후대의 저서임
거부됨
베드로묵시록
베드로 저적성에 기인하며 요한계시록과 유사함
본문의 출처 근거가 의심스러움
거부됨
9. 니케아회의 이전의 이단종파
이단
지도자
역사적 사실
가르침의 특징
에비온파 (엘케파, 만데파)
1세기 후반 팔레스틴 지방에서 발생한 후 소아시아에 전파되었고 대부분 유대인계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히브리적인 마태복음을 중시하였다.
구원에 필요한 부분인 모세율법의 보편성을 가르쳤으며 바울에 대한 반감을 지니며 예수는 메시야이지만 단지 세례시
성령이 임한 인간일 뿐이라 하였다.
특히 천년왕국의 임박함을 기대한다.
노스틱파 (영지주의)
마술사 시몬
(1세기)
케린투스
(1세기 말엽)
바실리데스
(2세기 초엽)
사투르니누스
(2세기 초엽)
말시온
(160년경 사망)
발렌티누스
(160년경 사망)
타티안
(110-172)
특히 그리스철학인 플라톤철학에 기초하여 동방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일반대중에 대한 포교는 미흡했고
교회지도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제국 전체에 걸쳐 다양한 종교운동형태를 보여주었으며 이들의 가르침 때문에 교회는 신앙과 신약성서 정경화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교회는 진리의 보고(寶庫)로서 사도의 계승원칙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들은 독특하고도 탁월한 '영지'(gnosis)를 지닌 자로서 신성(神性)이 어떤 '영적인'개인들의 몸 안에
주입되었다고 믿는다. 물질적인 것은 악으로 규정하며 영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철저한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Pleroma). 따라서
성(性)과 결혼에 대한 극단적인 금욕주의 현태를 일반적으로 취하여 유대교와 구약성서를 거부하며 성서를 알레고리(은유)적으로 해석하고 세계는
조물주(=여호와)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육체는 한갖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믿는다.
몬타누스파
몬타누스(2세기)
브리스길라(2세기)
막시말라(2세기)
터툴리안
(160-220년경)
브루기아 지방에서 발생하여 후에 로마와 북아프리카에 널리 성행하였다.
금욕적이며 천년왕국을 고대하였고 정통 기독교 교리에 비교적 충실하였으나 그들 자신을 성령의 대변자로 간주하며
예언자적인 계시를 믿고 방언을 하며 신자들의 만인사제직을 주장하였고 어떤 류의 오락 및 여흥도 생활 속에서 배격했었으며 오로지 순교자의 길을
추구하였다.
마니교파
마니
(215-277)
페르시아에서 발생, 배화교의 영향으로 성장하였고 마니는 그의 육체를 벗고 환생했으며 그의 시체는 페르시아 거리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어거스틴이 젊은 시절 심취한 바 있으며 후대 바울학파, 보고밀파, 카타리파, 알비겐파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었다.
엄격한 계급조직에 의해 형성되었다.
창조의 이원론적(빛과 어두움) 견해를 지니며 그리스도는 빛으로, 사단은 어둠으로 묘사한다.
이들에 의하면 사도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 것이며 마니가 올바른 가르침을 주도록 계시받은 자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추종세력들은 극도의 금욕생활을 표방하였다.
10. 로마제국의 10대 기독교 박해사건
연도
황제
박해의 유형 및 범위
대표적인 순교자
64
네로
로마와 근교 부근에서 박해를 가했다.
로마시 대화재의 혐의를 재난의 원인을 그리스도인에게 전가시켰다.
네로의 궁전을 밝히기 위한 소위 '인간횃불'로서 그리스도인을 화형에 처하는 광란(狂亂)을 벌였다.
바울
베드로
90년경 -96년
도미티아누스
로마와 소아시아 지역에서 일시적이고도 산발적인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의 황제숭배 거부로 비롯되었다.
로마의 클레멘트
사도요한(밧모섬에 유배)
98-117
트라야누스
점차 박해가 강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비애국적인 집단으로 규정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발견 즉시
처형되었다.
이그나티우스
시므온
조시므스
루프스
117-138
하드리아누스
황제 숭배는 계속되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하는 자는 처벌되었다.
텔레스포루스
161-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독교를 사상적으로 배격한 스토아주의자인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연재해의 장본인으로 규정하였다.
순교자 저스틴
포티누스
블란디나
202-211
셉티무스
세베루스
기독교로의 개종을 금지시켰다.
레오니다스
이레니우스
페르페투아
235-236
트라키아의
막시미누스
기독교 성직자를 처단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황제가 암살한 전임황제를지지하였다는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우르술라
히폴리투스
249-251
데키우스
최초로 제국전체에 박해의 손길을 펼친 그는 황제숭배의 향기로운 제물을 요구하였고 기독교의 완전한 파멸과 더불어
이교신앙으로 복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파비아누스
예루살렘의 알렉산더
257-260
발레리아누스
그리스도인의 재산을 몰수하며 그들의 공민권(公民權)을 박탈하였다.
오리겐
씨프리아
식스투스 2세
303-311
디오클레티아누스
갈레리우스
가장 혹독한 박해로서 교회는 파괴되었고 성서는 불태워졌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박탈위기에 처했으며
로마신들에 대한 숭배가 강요되었다.
마우리티우스
알바누스
11. 니케아회의 이후의 교부들
이름
연도
목회지
대표 저서
주요 사실
락탄티우스
240년경
-320년
이탈리아
고올(프랑스)
신학 강요
그의 아버지는 이교도였으며 성년기에 개종하였고 콘스탄티누스 황제 아들의 가정교사로 활동하였다.
유세비우스
263-339년경
가이사랴
교회사
연대기
콘스탄티누스 전기
교회사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가이사랴의 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그곳에서 감독직을 수행한 후 안디옥의 감독 요청을
사양하였다.
아리우스 논쟁에서 타협점을 모색하였지만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견해를 모두 동조하지 않았으며 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자문역으로 활약한 그는 천년왕국설에 완고하게 반대입장을 견지하였다.
힐라리
291년경
-371년
포아티에
삼위일체론
생애 말년에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아리안주의에 서방측 반대론자로 활동하였으며 350년 포아티에 지역 감독일을 맡아
보게 되었다.
아다나시우스
296년경
-373년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의 성육신론
아리안주의 반박서
아폴리나리우스 반박서
정통 삼위일체론자의 대표적인 변증가로 알렉산더 주교의 비서일을 보면서 니케아회의에 참석하였다.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된 후 다섯 차례의 망명생활과 철저한 금욕생활을 하였다.
바질
329년경
-379년
갑바도키아
에우노미우스 전집(5권)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여 아테네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금욕생활로 일관한 그는 갑바도키아지역 가이사랴의 감독이 된
후 아리안주의와 논쟁을 벌였으며 나병환자 진료소를 세웠다.
닛사의 그레고리
330-394년경
갑바도키아
에우노미우스 반박서
아폴리나리우스 반박서
성자와 성령에 대하여
바질의 동생으로 오리겐의 영향으로 은유론자가 되면서 결혼후에도 철저한 금욕생활을 추구하였다.
372년 권유에 못이겨 닛사의 감독이 되었고 아리안주의와 싸웠으며 삼위일체론 가운데 본체와 위격의 구분을 최초로
주장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회의에 참석하였다.
낫시안수스의 그레고리
330-390년경
갑바도키아
콘스탄티노플
신학개론
낫시안수스감독의 아들로 바질과 함께 그리스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철저한 금욕주의자로 374년 낫시안수스의 감독이
된 후에 381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일도 보았으나 곧 사임하였으며 아리안주의에 반대한 당대의 웅변가요 시인이었다.
암브로시우스
340년경
-397년
밀라노
신앙론
성령론
성찬론
고올(프랑스)지방 총독의 아들로 태어나 관료가 되려고 준비중에 북이탈리아의 집정관에 오른 그는 374년 밀라노의
감독직을 맡았으며 그후 금욕생활을 표방하였으며 아리안파와 논쟁을 벌였고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데살로니가인을 학살하자 여기에 맞서 싸웠으며 그의
설교는 어거스틴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요한 크리소스톰
374년경
-407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설교학
목회학
그의 별명은 '달변가'로 고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였으며 그의 설교는 윤리적인 실천에 큰 비중을 두었고 로마
관료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사학을 공부하였으며 수도생활을 자청하였다.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직에 올랐으나 여황제 에우독시아에 의해 추방되어 망명지에서 여생을 마쳤다.
제롬
345년경
-420년
로마
안디옥
베들레헴
라틴어성서(Vulgate)
저자목록 색인[다수의 주석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수사학을 배웠고 수도원운동의 주창자로 대부분의 생애를 사막에서 운둔생활로 보냈으며
당대에 히브리어에 능통한 극소수의 사람으로서 로마의 감독 다마수스의 비서일을 담당하였다.
그의 영향으로 수많은 로마여성들이 금욕주의에 호응하였으며 그의 후반 생애의 35년간은 베들레헴에서 보냈고 그의
불후의 역작인 라틴어성서(Vulgate)는 가톨릭교회의 공식성서로 인정되었다.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르
350년경
-428년
안디옥 몹수에스티아
소예언서 주석
은유론자 반박서
원죄 옹호론자 반박서
안디옥 신학파의 대부로 크리소스톰의 친구였던 그는 금욕생활을 청산하고 결혼하였고 392년 몹수에스티아의 감독이 된
후 성서해석을 위해 문법적, 역사적 자료의 활용을 주장하였다. 성서의 은유적 해석에 반대하였고 네스토리우스(경교)의 지도자가 된후 제2차
콘스탄티노플회의로 파문당했다.
어거스틴
354-430
북아프리카
고백록
명상록
신(神)의 도성
신학개요
재고록
그리스도인 어머니와 이교도인 아버지에게서 출생한 그는 카르타고에서 공부한 후 젊은 시절 마니교에 심취하였으나
386년 개종하여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에게 강화를 받았다.
395년 히포의 감독이 된 후 수도원생활을 동경하였다.
마니교, 도나투스파, 펠라기안주의자들을 배격했으며 기독교 역사철학에 초석을 마련하였고 그의 저서는 거의 중세
신학논쟁의 모든 부분에서 폭넓게 수용되었다.
씨릴
376-444
알렉산드리아
네스토리우스 반박서
배교자 율리아누스 반박서
알렉산드리아 신학파의 거장으로 412년경 감독직에 추대되었고 그를 적대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표리부동하게
처신하였으며 크리소스톰, 데오도르, 네스토리우스를 배척하였고 마리아 숭배를 옹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