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광조(趙光祖)를 오늘날 개혁(改革)의 화신(化身)이라고 한다. 개혁(改革)은 문자 그대로 피부를 가르는 아픔을 동반(同伴)한다. 혁명(革命)은 밭을 갈아 엎듯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개혁(改革)은 판을 깨지 않고 가는 길이다. 그래서 혁명보다 개혁이 더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광조의 이상국가(理想國家) 건설을 향한 꿈은 좌절되었다.
38세의 짧은 삶을 마감한 지 꼭 50년만인 1568년(선조 1년), 조광조는 그가 제시한 방향을 충실히 따른 후배 사림(士林)에 의해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고, 이듬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음으로써 다시 역사에 복권되었다.
비록 훈구파(勳舊派)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의하여 그의 개혁(改革)은 실패하였지만, 그로 말미암아 선비들의 학문이 지향할 바를 알게 되고 나라의 다스림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1610년(광해군 2년)에는 학자의 최고 영예인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조광조(趙光祖. 1482 음력 8월 10일 ~ 1519년 음력 12월 20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김종직(金宗直)의 학풍을 이어받은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柳崇祖)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중종(中宗)의 훈구파(勳舊派)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성리학적 도학정치(道學政治)이념을 구현하려 하였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조광조는 1482년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감찰 '조원강(趙元綱)'이 아들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생질인 '양절공 조온'의 4대손으로, 고조부 '조온(趙溫)'은 조선(朝鮮)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기도 하였다. 그의 가계(家系)는 조선의 개국공신 가문(家門)인 훈구(勳舊) 가문이었으나, 스승 김굉필(金宏弼)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조원강(趙元綱)으로부터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라났다. 그는일찍부터 학문의 뜻이 컸으며, 고서적과 옛 학문을 좋아하고 세상 일을 개탄하면서 학문의 뜻은 출세(出世)에 있는 것은 아니라며, 과거(科擧)를 보기 위한 글은 하지 않았는데, 부형(父兄)과 친척들로부터 세속(世俗)과 어긋나게 행동하여 남의 비방을 산다고 꾸짖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꺾을 수 없었다.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의 임지(任地)에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당시 유배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 (寒喧堂 金宏弼)'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어린 소년이었으나 영특한 재능을 알아본 '김굉필'은 그에게 말을 걸었고, 이 인연으로 그는 김굉필의 제자가 된다.
스승 김굉필 그리고 성리학
조광조는 그가 14세 때 성리학자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또는 18세 때 아버지가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가 마침 평안도 희천(熙川)에 귀양 가 있는 김굉필(金宏弼)을 처음 만났다는 의견도 있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을 한번도 만나 본 적은 없었으나, '김굉필'로부터 그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림파(士林派)의 한 사람이 되었다.
조광조는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을 받들어 이를 토대로 하여 경정(經典) 연구에 응용하였으며, 평소에도 의관(衣冠)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言行)도 옛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또한 예의를 갖추어 사람을 대하되 의(義)롭지 못한 자, 불의(不義)와 쉽게 타협하는 자들을 멀리하였고, 항상 스스로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려고 스스로 노력하였다. 이후 스승 김굉필(金宏弼)의 배소(配所)가 옮겨지게 되면서 스승과 이별하였고, 김굉필은 1504년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사사(賜死)되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연이어 터진 직후라, 김굉필의 제자이고 김종직(金宗直)의 말씀과 성리학에 몰두하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기피하였으며,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 '이라고 조롱하거나 '화태(禍胎 ... 화를 잉태하는 근원)라고 조롱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러한 비난과 비아냥,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성리학(性理學)과 사물의 이치 연구에 정진하였다. 성리학에 몰두하게 되면서 친구들과도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연 개의치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남곤(南袞)과 의 인연
스승 김굉필의 친구들 중에는 남곤(南袞)도 있었는데, 남곤(南袞)은 후에 조광조를 공격하는 편에 서게 된다. 짧은 만남 후 스승 김굉필과 이별한 뒤에도 스승의 가르침을 늘 잊지 않고 가슴 속에 새겼으며, 모르는 점이 있으면 답을 얻을 때까지 연구, 독서하였고, 저명한 학자들을 찾아가서 묻거나 선배 사림인사(士林人士)들을 찾아다니곤 하였다. 그 중에 남곤(南袞)이 이었으며, 그는 스승 김굉필의 친구이기도 하였다. 즉 같은 '김종직 학파'이었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남곤(南袞)과 함께 산책하던 길에 조광조(趙光祖)는 지나가던 여인(女人)의 모습을 보고 계속 되돌아 보았고, 한편 남곤(南袞)은 옆으로 고개도 한번 돌리지 않고 앞서갔다. 집에 돌아온 조광조는 어머니 '여흥 민씨 (驪興 閔氏)'에게 산책 시 여인의 모습을 훔쳐 본 것을 보고 자신의 수양이 부족함을 자책(自責)하였으나, 어머니 '여흥 민씨'는 조광조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젊은 사람은 젊은이답게 살아야 된다. 아름다운 처녀가 있는데 젊은 장부의 마음이 어찌 잠잠학ㅆㄴ냐.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나무나 돌 같은 사람이다. 네가 처녀들에게 한 눈 판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철이 들면 분별할 때가 반드시 있다. 남곤(南袞)은 목석 같은 사람이라 젊은이의 피가 끓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그도 처녀들에게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속으로도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南袞)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차갑고 모진 사람인가. 훗날 남곤(南袞)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위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남곤(南袞)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을 피흘리게 하거나 외면할 것이다. 내가 너를 어찌 그런 사람과 사귀게 하겠는가 ?
시대적 배경
조광조(趙光祖)의 생애와 그가 주장하던 개혁정치를 이해하려면, 우선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의 개념을 분명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대립, 갈등과 이합집산(離合集散)은 바로 조선(朝鮮)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1506년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조선 사회는 새로운 분위기를 맞이하였다. 앞선 연산군(燕山君) 대, 임금의 비롯한 집권세력 내에서 자행된 갖가지 잘못된 정치를 일신(一新)하면서 새로운 조선을 재창조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이때 사림(士林)들이 정치에 재진출하여 조정에 '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다. 사림(士林)이란, 후에 율곡(栗谷)이 말한 바와 같이 ' 마음 속으로 옛날의 도(道)를 사모하고, 몸으로는 유자(儒子)의 행동에 힘쓰며, 입으로는 정당한 말을 하면서 공론(公論)을 가지는 자 '들을 말한다.
조광조는 바로 이러한 성향의 사림(士林) 세력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이들과 달리 당대까지 정치와 사회를 주도하던 세력을 우리는 역사상 훈구(勳舊) 세력 또는 훈구파(勳舊派)라 칭하고 있다. 15세기 후반 이후 훈구세력에 의한 권력형 비리(非理)가 여러 곳에서 문제화되었다. 사림세력은 이러한 '훈구세력'의 잘못된 정치 관행과 권력형 비리를 문제시하면서, 새로운 조선(朝鮮) 사회를 창조하려고 하였다.
훈구파 勳舊派
조선(朝鮮)이 건국되면서 먼저 개국공신(開國功臣)들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게 된다. 사림파(士林派)와 대립되는 의미에서의 훈구파(勳舊派)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하는과정엣 공(功)을 세운 세력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후에 형성된 집권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그 이후 몇 차례의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군림하게 되는데, 연산군(燕山君)을 축출하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따른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권력을 유지, 강화시켜 왔던 것이다.
세조(世祖)는 그들의 권력과 재산의 세습(世襲)을 인정하였으며, 그들은 권력을 독점하면서 인사권, 병권(兵權), 토지의 강점(强占) 등을 토하여 부정부패를 일 삼아 경제권(經濟權)까지 확보하였으며, 그들끼리의 통혼(通婚)으로 권력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왕실(王室)과의 혼인으로 외척(外戚)으로서의 지위도 확보한다. 세조(世祖)에 의하여 탄생된 훈구파(勳舊派).. 이들은 세조(世祖)의 후반기에 잠시 위축되지만, 세조(世祖)가 죽은 후 오히려 더욱 그들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즉 중앙정부의 독주(獨走)에 반발한 ' 이시애의 난 (李施愛의난) '을 진압한 남이(南怡)장군 등의 세력이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훈구파'와 본격적으로 대립하지만, 세조(世祖)가 죽고 예종(睿宗)이 즉위하면서, 유자광(柳子光)의 음모로 남이(南怡)를 죽인 이후 그들은 다시 익대공신(翼大功臣)으로 책봉되었고, 예종(睿宗)이 즉위 1년 만에 죽어 나이 어린 성종(成宗)이 즉위하게 되자 그들의 세력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그들은 특정한 벼슬이나 직책이 없어도 정치(政治)에 관여할 수 있는 원상(院相)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권력과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것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 찬탈은 성리학적(性理學的) 명분(名分)을 훼손하였다는 잘못보다도, 그가 원하거나 또는 예측하지 못했어도 결과적으로 조선(朝鮮) 500년을 뒤흔들었던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당쟁(黨爭)의 씨앗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근본적인 과오(過誤)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훈구파(勳舊派)는 성종(成宗) 26년간 그리고 연산군(燕山君) 시절까지 권력의 전횡(專橫)을 일삼다가 스스로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켜 다시 공신(功臣)으로 책봉된다. 바로 이때 조광조(趙光祖)가 등장하는 것이다.
사림파 士林派
불교 국가이었던 고려(高麗) 말기, 성리학(性理學)을 학문적 배경으로 하는 신진사대부가 등장하면서 사족(士族), 사대부(士大夫), 사인(士人)과 같은 용어와 함께 사림(士林)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지식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러한 그룹들은 조선이 개국(開國)되면서 조선의 관료(官僚)체제에 참여하거나 또는 향촌(鄕村)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士林)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자주 쓰이게 된 것은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신진사류(新進士類)가 15세기 후반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부터이다. 그리고 사림파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성종(成宗) 시절에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이 중앙에 진출하여 활동하기 시작할 때이다.
이들은 근거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와 기호사림파(畿湖士林派)로 나뉜다.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한 비판활동을 제기하면서, 향촌(鄕村)사회에서 세력의 근거지를 마련하려고 노력한다. 예컨데 언론(言論)활동과 유향소(留鄕所) 활동의 복원 및 강화 등이다.
세조((世祖) 이후 훈구파(勳舊派)들은 권력을 독점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 노비(奴婢) 등을 독점하는 등 경제권(經濟權)도 차지하면서 수많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반면 사림파(士林派)들은 하천(河川) 부지 등을 개간하여 자신들의 농지(農地)를 확대하면서. 소농(小農)을 기초로 경제력을 키우고 있었다. 사림파(士林派)들 입장에서는 '훈구파'들의 부정부패 등이 자신들의 경제력 기초(基礎)를 침해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훈구파(勳舊派)들은 권력을 독점하면서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인 성향을 취하는 반면, 사림파들의 정치사상은 수신(修身)에 근거를 두고, 향촌(鄕村)의 자치(自治)를 강조하였다.
조광조(趙光祖)는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관직생화를 하기 전부터 명성(名聲)이 있어, 중종(中宗) 5년인 1510년 11월 15일, 진사(進士)의 신분으로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에서 행하여진 시험의 일종인 강경(講經)에 참여한 바가 있었다. 조광조는 중종 5년인 1510년 3월, 진사시(진사시)에 1등으로 장원(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춘부 춘부
그 후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천거로 별로 높지 않은 벼슬인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로 근무하던 중에, 1515년 중종9중종)이 성균관에 직접 찾아와 치르는 알성시(謁聖試)에서 ' 공자(孔子)의 3년 정국 구상을 논하라 '는 문제에 '춘부 (春賦) '라는 답안지를 제출, 장원(壯元) 급제하였다. 이때 조광조의 나이 33세, 중종의 나이는 27세이었다. 시험장을 주재한 상시관(上試官)과 참시관(參試官) 그리고 감시관(監試官)을 놀라게 한 명문(名文)으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춘부(春賦)'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陰陽錯而四時序 春者天之元也 / 四時自春而始 四端自仁而發 / 無春序不成 無仁端不遂 / 然天無欲 而春行四時成 人有欲 而仁喪端不成
음(陰)과 양(陽)이 갈마들어 사시(四時 .. 사계절)의 순서가 되는데, 봄은 하늘의 으뜸이다. 사시(四時 .. 사계절)는 봄으로 시작되고, 4단(四端 ..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인(仁)에서 발단이 된다. 봄이 없으면 사시(四時)의 질서가 이루어지지 않고, 인(仁)이 없으면 선심(善心 ..4단)의 실마리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러나 하늘은 욕심이 없이 봄을 운행하여 사시(四時)를 이루나, 사람은욕심이 있어서 인(仁)을 상실하며 선심(善心)의 실마리를 확충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 속으로 스스로 슬퍼져서 부(賦)를 짓는다.
사계절이 봄으로 시작해서 운행하듯,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의 4단(四端)도 인(仁)에서 출발한다는 '주역(周易)'과 성리학의 대의(大義)를 서(序)에서 펴고, 본(本)에서는 성리학의 이(理)와 기(氣)를 들고 나와 조광조(趙光祖) 자신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펴나갔다.
惟陰陽之交變兮 음양(陰陽)이 교대로 변함이여
寓理氣之妙要 이기(理氣)의 묘한 요체에 의거함이로다
理乘氣而相感兮 이(理)와 기(氣)를 타고 서로 느낌이여
元福元而不消 원(元)이 원(元)으로 돌아가 소멸치 않는도다
이어서 조광조(趙光祖)는 맑은 선비들이 세상에 나서지 않는 현실을 비유의 문장으로 지적하였다. 하늘의 도(道)는 맑은 샘물처럼 흘러가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흙탕물 같은 무리들에 의하여 인도(人道)가 바르게 펼쳐지지 못하고 현실은 늘 혼란스럽고 혼탁하다는 것이다.
泉渭渭而欲達兮 샘물이 흘러서 끝까지 가려고 함이여
被黃流而不淸 흙탕물이 섞이여 맑을 수가 없도다
上衰天之明命兮 위로 하늘의 밝음을 더럽힘이여
下慢人之倫紀 아래로 사람의 윤리와 기강에 게으르도다
甘下流而不悟兮 즐거이 아래로 흐르면서 깨닫지 못함이여
羌衆惡之小委 수 많은 악(惡)이 쌓이는 바로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는 방편으로 조광조(趙光祖)는 공자(孔子)의 말씀을 수제자 답게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살았던 안자(顔子)의 태도에서 그 해답을 찾는 것으로 춘부(春賦)의 본론을 다음과같이 끝냈다.
昔顔子於尼父兮 옛 적에 공자(孔子)에게 안자(顔子)가 있음이여
問求仁之至方 인(仁)을 구하며 묻는 지극한 방도로다
知四大與五常兮 4대(四大)와 5상(五常)을 앎이여
亦由玆而乃昌 또한 이에서 말미암아 번창해지도다
勤四勿而操存兮 부지런히 사물(四勿)에 힘써서 조촐하게 있음이여
方寸盡無不春 잠깐의 성(聲)함도 봄이 아닌 것이 없도다
위에서 사대(四大)이란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도(道), 천(天), 지(地), 왕(王)을 말하며, 5상(五常)이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의미한다. 또한 4물(四勿)이란 비례물시(非禮勿是),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언(非禮勿言), 지례물동(非禮勿動)을 말한다. 이리하여 '조광조'는 결론에 이르러서 도학(道學)을 권면하는 자신의 의지를 소신껏 발언하는 의문문(疑問文) 형식으로 '춘부(春賦)'의 마지막 문장을 다음과 같이 끝냈다.
在天兮春 하늘에 있어서는 봄이요
在人兮仁 사람에 있어서는 인(仁)이로다
皆本太極 모두가 태극(太極)을 근본으로 하여
異而同鞋 다르면서도 같거니
識此何人 이를 아는 사람 누구인가 ?
혼탁한 세상에 화두(話頭)를 던지 듯 ' 이를 아는 사람 누구인가 ? '하고 끝을 맺은 것은 지금까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것을 당당하게 제기하는 물음이기도 하였다. 하늘의 도(道)를 펼치려면 성리학(性理學), 즉 도학(道學)이 열쇠인데 그 열쇠를 쥔 자가 누구냐..하는 발언이었다.
사림의 영수 士林의 領首
당시 조광조(趙光祖)는 중용(中庸)을 강(講)하여 '약(略)'이라는 성적을 받게 되었는데, 이날 '실록(實錄)'에서는 그를 ' 사림의 영수 (士林의 領首) '로 칭(稱)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나라가 무오사화(戊午士禍)를 겪은 후부터 사림(士林)이 다 죽어 없어지고 경학(經學)이 씻은 듯이 없어지더니, 반정(反正) 뒤에 학자들이 차츰 일어나게 되었다. 조광조는 어릴 적에 '소학의 동자(小學의 童子)'로 일컬어지는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여 성리(性理)를 깊이 연구하고 사문(斯文)을 진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학자들이 추대하여 ' 사림의 영수 (士林의 領首) '가 되었다.
1506년의 중중반정(中宗反正)으로 조선(朝鮮) 사회는 새로운 분위기를 맞이하였다. 앞선 연산군(燕山君) 대 임금을 비롯한 집권세력 내에서 자행된 갖가지 잘못된 정치를 일신(日新)하면서, 새로운 조선(朝鮮)을 재창조(再創造)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동상이몽 同床異夢
반정(反正)에 의하여 연산군(燕山君)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中宗) .. 그는 명색뿐인 왕,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그늘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였다. 심지어 공신(功臣)들은 왕비(王妃)의 아버지 신수근(愼守根)이 연산군 시절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고 하여 왕비의 폐위를 주장, 관철시킨다. 신수근(愼守根)의 동생이 연산군(燕山君)의 왕비이었으며, 그의 딸이 중종(中宗)의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이었다.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득세 속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하던 중종(中宗)은 재위 8년 무렵, 박원종(朴元鍾) 등 반정공신(反正功臣) '3 인방'이 죽으면서, 기존의 훈구세력을 대체할 수 있는 정치적 파트너를 찾게 되었다. 이때 조광조(趙光祖)는 과거(科擧) 초시(初試)에 장원하였고, 5년 후인 1515년에 성균관에서 치룬 알성시(謁聖試)에서도 2등으로 급제하여 중종(中宗)의 주목을 받으면서, 성균관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있었다.
어느날 중종(中宗)은 성균관을 방문하여 '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옛 성인(聖人)의 이상적(理想的)인 정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 '라는 책문(策門)을 던졌고, 이에 조광조(趙光祖)는 ' 성실하게 도(道)를 밝히고 (명도 .. 明道), 항강 삼가하는 태도(신독 .. 愼獨)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마음의 요체로 삼을 것 '을 핵심으로 하는 답안을 내었다.
이 책문을 계기로 가능성만 있던 조광조는 중종(中宗)의 파격적인 신임을 얻어 대사헌(大司憲) 등의 요직에 임명하면서, 중종은 자신의 든든한 후원군으로 삼았다. 자신의 시대를 ' 개혁의 시대 (改革의 時帶) '로 인식한 조광조는 시대의 부정(不正)과 모순을 극복해가는 다양한 정책들을 강력하고도 급진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한편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燕山君) 시절의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는 이른바 ' 유신(儒臣) 정치 '를 추진하였다. 앞서 몇 차례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화(禍)를 당한 사림(士林)의 원한을 풀어 줌과 동시에 연산군 시대에 폐지되었던 조선 유학(儒學)의 상징, 성균관을 다시 원상으로 북구하였다. 이는 유학(儒學)을 진작시키려는 중종(中鐘)의 의지(意志)이었다.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들의 도학정치(道學政治) 사상을 바탕으로 한 급진적인 개혁정책은 연산군(燕山君)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요순시대(堯舜時代)와 같은 이상정치를 실현함으로써 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실행방법이 급진적(急進的)인 것이어서 왕권을 배경으로 한 훈구세력(勳舊勢力)의 반발을 샀고, 결국 개혁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도학정신은 후세에 계승되어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의 유학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사림(士林)에게는 정신적인 표상이 되었으며, 한국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했다. 그러면 그가 추구하였던 도학정치란 무엇인가 ????
조광조(趙光祖)의 정치관은 유교(儒敎)를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체적 실현 방법으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몸소 도학(道學)을 실천궁행(實踐窮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지치주의(至治主義) 도학정치라고 한다.
그는 지치(至治), 즉 이상정치(理想政治)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스림의 근본인 군주(君主)의 마음을 바로 잡지않으면 안 되어, 군주(君主)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政體)가 의지하여 설 수 없고 교화(敎化)가 행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또 뜻의 세움이 크고 높아 시류(時流)에 구애되지 않아야 함을 논하고, ' 조종(祖宗)의 옛 법을 갑자기 고칠 수는 없지만, 만일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역시 변통(變通)이 있어야 한다 '라고 하는 변법주의(變法主義)를 주장하였다. 한편 지난날의 사림(士林)의 참화(慘禍)를 거울 삼아, 임금이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공을 이룸으로써 마음을 밝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해야 이상정치(理想政治)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儒學)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 도학(道學)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여,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 ' 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을 지치(至治)라고 표현하였다.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司馬試)에 제출한 답안인 ' 춘부(春賦) '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確信)이 기초가 된 것이다.
지치주의 至治主義
지치주의(至治主義)의 내용은 인간에 의해 다스려지는 이 세상이 바로 하늘의 뜻이 펼쳐진 이상(이상)세계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성리학(性理學)이 수용되고 정착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한국적 특징의 하나이다. 고려 말에 수입된 성리학이 뿌리를 내린 후 나타난 특징 중의 하나는 ' 천인무간 (天人無間) '의 인간 존재를 자명한 명제로 전제하였다는 것이다.
하늘과 사람들이 하나로 연결된 합일체(合一體)로 보는 이 전제(前題)가, 하늘의 뜻이 인간의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 천리불리인사 (天理不離人事) '의 명제로 발전하여, 사람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세상이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사회(理想社會)가 되지 않으면안 된다는 정치적 당위성(當爲性)이 도출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지치주의(至治主義)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치(至治)란 '서경(西經)' 군진편(君陳篇)의 ' 지치성향 감우신명 (至治聲香 感于神明) '에서 따온 것이다. 잘 다스려진 인간 세계의 향기는 신명(神命)을 감명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지치(至治)가 우리나라에서는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사회(理想社會)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실천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유가(儒家)에서의 이상(理想)사회는 요순(堯舜)시대의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의미한다. 따라서 '지치주의'운동이란 정치적 실천으로 당시의 군민(君民)을 요순(堯舜)시대의 군민(君民)으로 만들어 직접 요순산대(堯舜三代)의 일월(日月)을 눈 앞에 출현시키려는 이상정치(理想政治)의 현실적 실천운동인 것이다. 본래 사람은 하늘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고, 사람의 일은 하늘의 뜻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조광조의 지치주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전제가 되었던 '천리불리인사 (天理不離人事) '는 ' 천인무간 (天人無間) '을 전제로 도출된 명제이다. 그러므로 지치(至治) 실현의 근본은 '천인무간(天人無間)'의 인간 존재를 실천하는 개인적 수양(修養)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는 개인(個人)이 모여서 이루어졌으므로, 수양(修養)으로 하늘과 하나의 존재를 실천하는 개인들이 사회를 구성할 때 지치(至治)의 사회는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광조(趙光祖)는 ' 말(馬)을 사랑하는 것, 화초를 사랑하는 것, 새 기르기를 좋아하는 것 등은 마음을 바깥으로 치닫게 하여 진흙에 빠지게 되므로 진리에 들어갈 수 없다 '라고 하며 개인의 내적(內的) 수양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개인 수양으로 하늘과 하나됨을 실천하는 사람을 유학(儒學)에서는 성인(聖人)이라고 하므로, 개인 수양(個人 修養)의 목표는 결국 성인(聖人)이 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이렇게 볼 때 이상사회(理想社會)를 이룩하는 방법은 사회 구성원인 개인(個人)이 각각 수양을 통하여 성인이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에는 먼저 성인이 된 사람이 정치적 대표자인 왕(王)이 되어 다른 사람을 깨우침으로 다른 사람들도 성인이 되는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정치적 실천을 담당하고 있는 왕(王)이 성인(聖人)이 아닐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서이 해결책으로는 다음의 두 방법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현재의 왕(王)이 수양을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될 경우 신하(臣下)들이 왕을 수양하게 해 성인이 되게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왕(王)이 수양을 하더라도 성인(聖人)이 될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왕을 가능성 있는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대치하는 방법이다. 조광조(趙光祖)는 당시의 군주인 중종(中宗)이 수양을 하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고, 따라서 이상정치(理想政治)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조광조가 경연(經筵)에서 중종(中宗)에게 지성껏 학문을 가르친 것도 바로 중종(中宗)의 수양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지치주의(至治主義) 운동의 이론적 근거로 '조광조'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제시하고, 다시 왕도정치의 실천 원리로 공자(孔子)의 도(道)를 들고 있다.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이 천지만물일체 (天地萬物一體)를 실천하면 모든 사람은 성인에 의해 일체(一體)가 되고, 자연계의 춘하추동과도 일체가 됨으로써 인간 사회와 자연계(自然界)는 혼연일체가 되어 큰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지치주의 운동의 특징은 융평사상(融平思想)을 들 수 있다.
융평사상(融平思想)이란 인간 사회를 현재 상태에서 평등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융(融), 즉 높은 상태로 끌어 올려서 평등하게 한다는 사상이다. 지치주의(至治主義)가 지금의 세계(世界)를 요순(堯舜)의 세계, 즉 진리(眞理)가 실현된 세계로 만듦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세계를 이상적(理想的)인 세계로 끌어 오리기 위해서는 비이상적(非理想的) 요소를 개혁(改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융평사상(融平思想)은 곧 개혁사상(改革思想)을 동반한다. 지치주의 운동은 결국 이 융평사상(融平思想)과 개혁(改革) 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조광조(趙光祖)는 정치적 실천 단계에 있어서 실제로 융평(融平)을 이루기 위해 법제(法制) 등 현실적 요소의 개혁(改革)을 내용으로 하는 유신(維新)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조광조가 주창한 이상사회(理想社會)이 근본적인 실현 방법은 한 점의 티끌도 없이 깨끗해진 임금의 마음이 조정과 정사(政事)에 나타남으로써, 그 결과 나라 전체가 순정(純正)한 상태로 돌아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사회의 실현을 의식적으로 시도할 경우에는 순정(純正)하지 않은 현실적 요소들을 개혁하는 유신(維新)을 통해 순정(純正)하게 만들어야 된다고 한다.
그리고 유신(維新)의 내용 중에는 유신(維新)을 반대하거나 저해(沮害)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포함될 수 밖에 없다. 조광조의 유신(維新)운동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예(例)로서, 조광조는 실제로 도교(道敎)의 관서이었던 소격서(昭格署)를 철폐하기 위해 소(疏)를 올린다. 그 뒤 어느날, 동료들과 같이 정원(政院)에 나아가 그들에게 ' 날이 이미 어두워 언관(言官)들이 퇴근한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마땅히 성의를 다해 논열(論烈)하여 왕의 마음을 돌려놓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밤새 계(啓)를 논해 닭이 울 때까지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중종(中宗)이 어쩔 수 없이 소격서(昭格署)의 철폐를 허락하였다.
조광조의 유신(維新)운동을 저지하거나 방해하는 요소는, 학문적으로는 이단(異端)으로 나타났지만, 인간적인 곤점에서는 소인(小人)으로 파악하고 있다. 난초를 기르기 위해 잡초(雜草)를 제거하듯이 소인(小人)은 지치(至治) 실현을 위해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조광조에 의하여 전개된 지치주의(至治主義)운동은 또한여러가지 폐해(弊害)를 가져 왔다. 우선 학문적인 순일화(純一化) 운동은 성리학(性理學) 이외의 모든학문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조선시대 500년 사상계(思想界)가 성리학 일색(一色)으로 점철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뭇사람을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두 종류로 나누어 군자를 정(正), 소인을 사(邪)로 파악하는 데에서 이른바 흑백논리(黑白論理)가 생겨난 것이다. 즉, 군자(君子)는 완전한 선인(善人)이 되고, 소인(小人)은 완전한 악인(惡人)이 됨으로써 소인(小人)은 제거 대상으로 구제의 길이 없어진다. 딸서 소인으로 간주된 자들은 당파(黨派)를 만들어 반발하게 되었다.
조광조(趙光祖). 그는 한 시대를 앞서간 개혁(改革)의 화신(化身)으로 광인(狂人) 또는 화태 (禍胎 .. 화를 낳는 근원)라는 질시(嫉視) 속에서도 현실 개혁을 시도하였고, 미래(未來)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였으며, 종국에는 자기희생(自己犧牲)을 감수하면서 역사 발전에 기여한 이 땅의 ' 창조적 소수 (創造的 少數) '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너무 급진적(急進的)이고 특히 경연(經筵) 때마다 발언이 그치지 않아 중종(中宗)도 그 응대에 지치기 시작했다. 당시 조광조 등에 의해 벽지(僻地)로 좌천된 남곤, 심정 등이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왕도(王道)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이뤄지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자리를 내놓으려 했으나 중종(中宗)은 허락하지 않았다.
거칠 것 없는 개혁
조광조는 중종(中宗)에 의하여 중용되자 거칠 것 없는개혁 행보를 벌였다. 연산군(燕山君) 시절의 어지럽던 정치를 쇄신해 볼 뜻에서 중종은 조광조(趙光祖) 같은 신진사류를 높이 등용하였다. 또한 그들 역시 이 기회에 요순성대(堯舜聖代)의 이상정치((理想政治)를 실현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인습(因習)과 구제(舊制)를 혁파하고 나섰다.
이에 궁중여악(宮中女樂)의 페지나 내수사장리(內需司長利)를 혁파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적 윤리 질서와 통치 질서의 수립을 위한 주자(朱子)의 '가례(가례)'와 '삼강행실(三鋼行實)'의 보급, 기신재(忌晨齋), 소격서(昭格署)의 혁파, 소학(小學) 교육의 장려, 향촌(鄕村) 사회이 지배 기반을 확대, 재정립하려는 목적에서 향약(鄕約)의 보급과 향교(鄕校) 교육의 강화 등 여러 방면에서 많은개혁을 단행하였는데,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도 그 중의 하나이다.
현량과 賢良科
중종의 신임으로 등용된 조광조는 신광한(申光漢), 이희민(李希閔), 안당(安塘) 등의 찬성을 얻어 현량과(賢良科)의 시행을 발의하였으나, 보수파 인물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그러나 사림파 언관(言官)들의 언론 공세와 중종의 결심으로 훈구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1519년, 중국 한(漢)나라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떠 실시하였다.
그들은 종래의 과거(科擧) 제도가 제도 자체의 본질적인 모순으로 과유(科儒)에게 사장(詞章)의 학습만을 일삼게 한 나머지, 성리학의 학리추구와 실천궁행(實踐窮行)을 소홀히 하도록 만든다고 여겼다. 뿐만 아니라, 그 시행 과정에서 여러가지 폐단이 드러났기 때문에, 기존의 제도로는 참다운 인재(人材) 선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재행(才行)을 겸비한 숨은 인재를 발탁하여 관리로 등용하고자 '현량과'를 실시한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울에서는 사관(四館)이 유생(儒生)과 조사(朝士)를 막론하고 후보자를 성균관에 천보(薦報)하면, 성균관은 이를 예조(禮曺)에 전보(轉報)하게 되고, 또 중추부, 육조(六曺), 한성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도 예조(禮曺)에 후보자를 천거(薦擧)할 수 있었다. 지방에서는 유향소(留鄕所)에서 수령에게 천거하면, 수령은 관찰사에, 관찰사는 '예조"에 전보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 다음 '예조'에서는 후보자의 성명, 출생 연도, 자(字), 천거 사항, 즉 성품, 기국(器局),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志操), 생활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 7가지 항목을 종합해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한 뒤. 그들을 전정(殿庭)에 모아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대책으로 시험, 이내를 선발하도록 하였다.
이상과 같은 절차에 따라 1519년 4월 13일 천보(薦報)된 120명의 후보자들을 근정전(勤政殿)에모아 시험하였다. 그 결과, 장령(掌令) 김식(金湜), 지평 박훈(朴薰) 등 28인이 선발되었다. 급제한 28인은 현직 관리 10명, 진사 7명, 생원 5명, 유학(幼學) 4명, 전직 관리 2명 등의 경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천거(薦擧) 사항을 종합하여 보면, 재늘 16명, 학식 23명, 행실과 행적 24명, 지조(志操) 13명, 성품 12명, 기국(器國) 11명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현량과에서는 천부(天賦)의 재능과 학식, 타고난 성품과 가치관에 바탕을 둔 행실 및 과거 행적과 사류(士類)로서의 지조 등을 충족시켜주는 인재를 발탁하고자 하였다.
급제한 28명은 조광조의 추종자들로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의식을 지닌 신진사림파(新進士林派)이었다. 급제 후 그들은 홍문관을 비롯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성균관 등 중요 기관의 요직에 기용되어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당초 '현량과'의 실시는 신진사림파와 대립하고 있던 훈구(勳舊)세력에게는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이 제도가 전통적인 과거의 법규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사림파(士林派) 세력의 강화에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인재(人材) 천거(薦擧)에 공정을 기할 수 없다며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현량과는 신구(新舊) 세력, 즉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을 격화시켜 위훈삭제(僞勳削除) 문제와 더불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유발시킨 원인이 되었다. 결국 조광조 등 사림파가 실각(失脚)하자 현량과는 폐지되고 급제자의 자격마저 박탈되었다. 그 뒤 인종(仁宗) 말년에 급제자의 자격은 잠시 복구되었으나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다시 박탈되었고, 1568년(선조 1) 10월ㅇ 이르러 완전히 회복되었다.
위훈삭제 僞勳削除
중종 14년인 1519년 10월 대사헌(大司憲) '조광조'는 대사간(大司諫) '이성동'과 함께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105명이 문란하게 책록되었다며, 부당한 자들을 훈록(勳錄)에서 삭제하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의 소(疏)를 올렸으며, 대신(大臣) 육경(六卿)들도 이를 지지하는 계청을 올렸다.
이에 중종(中宗)은 하는 수 없이 자격이 없다고 평가되는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 전(前) 공신(功臣)의 3/4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 훈적(勳籍)을 박탈하고 공신전(功臣田)과 노비(奴婢)를 몰수하였다. 이 때문에 조광조는 훈록(勳祿)을 깎인 자들로부터 원망을 사게 되었다. 실제로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박원종(朴元鍾) 등의 추천으로 확정된 공신(功臣)은 무려 126명으로 45명의 조선개국공신(開國功臣) 그리고 그 후의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공신(功臣) 53명을 훨씬 뛰어 넘는 숫자인것이다.
주초위왕 走肖爲王
그 후 홍경주(洪景奏)는 그의 딸 희빈(禧嬪)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조광조(趙光祖)에게 기울어졌다고 왕에게 말하게 하고, 심정(沈貞)은 또 '경빈 박씨'의 궁인(宮人)을 통해 조광조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하며, 백성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획책한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게 하였다. 또 꿀물과 과일즙으로 ' 주초위왕 (走肖爲王) '이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 궁인(宮人)의 손을 거쳐 왕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등 중종(中宗)의 뜻을 움직이려고 갖은 방법을 쓰니 왕 또한 뜻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11월 15일 밤, 홍경주(洪景舟), 김전, 남곤(南袞) 등은 신무문(神武門)으로 궐내에 들어가 왕을 알현하고 '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구신(舊臣)을 몰아내고 나라를 뒤집어 놓았으니 그 죄(罪)를 밝혀달라고' 주청하였다. 그리하여 조광조를 비롯하여 김정(金淨), 김식(金湜), 김구(金銶) 등이 체포되었다. 결국 조광조, 김정, 김구, 김식, 윤자임, 박세희, 기준, 박흥 등 8명이 귀양길에 올랐고, 조광조는 능주(綾州 .. 지금의 전남 화순)로 귀양을 갔다.
조광조와 남곤 ... 역사의 라이벌
위 추모비(追慕婢)는 현종 8년인 1667년 당시 능주(綾州)목사(牧使) ' 민영로(민榮魯)'가 세운 것으로, 뒷면에 우암(尤巖)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문(碑文)이 동춘(東春) 송준길(宋浚吉)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그 전문(全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 이곳은 정암(靜庵) 조선생이 귀양와서 별세하신 곳이다. 이제 정암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149년이 되었는데도 기묘학사(己卯學士)와 선비들은 그 학문을 사모하고 백성들과 하급관리들은 그 은혜를 생각함이 오래될수록 더욱 잊지 아니하고,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로 하여금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윤리를 알게 하여 이적(夷敵 .. 오랑케)과 금수(禽獸)가 되는것을 면하게 하는 것은 오직정암(靜庵)의 덕택이라고 하여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엄숙하게 머리 숙여 공경하지 아니한 이가 없으리라. 이는 그 누군가 그렇게 하셔서 하는 것일까. 그 사람은 누구나 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아 ! 저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의 무리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고. 우리나라는 기자(箕子)가 성인의 학문을 밝히고 어진 정치를 한 뒤로 수 천년동안 학문과 정치가 난맥상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포은 정몽주, 한훤당 김굉필 선생 등이 나시어 성인의 학문을 밝히셨으나, 송(宋)나라 성리학자 정호, 정이, 주희선생 등의 학통을 이어받아 요순(堯舜)의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뜻을 두어 뛰어나게 명덕(明德)과 신민으로써 이 학문의 표준을 삼는 자는 정암(靜庵)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선생의 휘(諱 ..이름)은 광조(光祖)요, 자는 효직(孝直)이니 한양(漢陽) 사람이고, 1482년에 출생하여 1510년에 진사장원(進士壯元)하고 151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기묘년 11월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이 밀의(密議)하여 '주초위왕(走肖爲王)'이 왕이 된다는 무근지설(無根之說)을조작하여 변(變)을 일으켜 변고(變告)가 일어나 즉시 이곳 능주(綾州)에 유배되니, 옥주(屋主)는 관노(官奴) '문후종'이다.
다음 달 12월 10일 사약(賜藥)이 내려 돌아가시었다. 그로부터 149년이 지난 1667년(현종 8)에 능주목사(綾州牧使) 민영로(閔榮盧)가 세월이 오래되면 그 유허(遺墟)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하여 그곳에 비(비)를 세워 영원토록 잊지아니하고자 하니 옛날 정부자께서 영락정에 대한 글을 지으시면서, 물은 차마 이를 폐할 수 없고 땅은 차마 이를 버리지 못한다고 하니 아! 이 글을 이 비(碑)에 새김이 합당할지로다. 현종 8년 1667년에 후학 송시열(宋時烈)이 비문(碑文)을 짓고, 송준길(宋浚吉)은 비문(碑문)을 쓰고, 민유중(閔有重)은 전서(篆書)를 쓰다.
조광조의 최후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趙光祖)가 사약(賜藥) 한 사발을 마시고도 죽지 않자, 금부도사(禁府都事)는 군졸로 하여금 목을 졸라 죽이라고 명했다고한다. 바로 그때 '조광조'는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 잠깐 멈춰라 ! 성상께서 나의 목이나마 보존케 하려고 사약을 내리신것인데, 너희들이 어찌 함부로 내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 ? 어서 사약 한 사발을 더 가져오너라 ' 이 소리에 놀란 금부도사는 군졸로 하여금 사약 한 사발을 다시 가져오게 하였고, 조광조는 단숨에 그것을 비우고 피를 쏟으며 절명(絶命)했다고 한다.
얼마 후 정적(政敵)인 훈구파 김전, 남곤(南袞), 이유청 등이 각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임명되자, 조광조는 이들에 의하여 그해 겨울 12월 20일에 사사(賜死)되었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기 전, 중종(中宗)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정좌하고 시(詩)를 한 수(首) 지었다.
애군여애부 愛君如愛父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우국여우가 憂國如憂家 나랏일을 내 집 일같이 걱정했도다
백일임하토 白日臨下土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니
소소조단충 昭昭照丹衷 거짓 없는 이 마음을 환히 비춰주리
그러고는 거느리던 사람들에게 ' 내가 죽거든 관(棺)을 얇게 만들어라. 두껍게 만들면 먼 길을 가기 어렵다 '고 유언(遺言)하였다. 이 해가 기묘년(己卯年)이라 이 사건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 부르고, 세인(世人)들은 '조광조'를 죽인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을 '곤쟁이 젓갈 .. 남곤의 곤, 심정의 정 발음에 빗대 싸잡아 비난한 말 '이라 불렀다. 이후 '곤쟁이 젓갈'은 젓갈 중 최하등급이라는 인식이 널리퍼졌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존경하던 유생(儒生)과 선비는 물론 백성들까지 목놓아 울며 나라를 걱정하였다. 더욱이 조광조(趙光祖)가 죽은 이듬해 봄부터는 비가 내리지 않아 큰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기 때문에 가뭄이 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광조가 죽은 뒤 이렇듯 인심이 흉흉해지니, 조정에서는 조광조에 대한 말을 일체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조광조(趙光祖)가 사약(賜藥)을 받은 이듬해 봄에 선영이 있는 용인(龍仁)의 심곡리로 관(罐)을 옮겨 반장(返葬)을 하였더니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다고 한다.
후일 선조(宣祖) 때 '조광조'는 신원(伸寃)되어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고,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율곡(栗谷)은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 이언적(李彦迪) 등을 가리켜 ' 동방사현 (東方四賢) '이라 불렀다.
순교자 조광조
조광조 등 개혁세력은 위기(危機)가 닥쳐오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대세(大勢)를 뒤엎지는 못하였다. 왕권(王권)에 이존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종(中種)이었다. 인간적 삶이 평탄하지 못했던 왕은 누구든 불신(不信)하였다. 우선 자신을 왕으로 추대한 반정공신(反正功臣)도 믿지 못하였다. 중종(中宗)이 사림파(士林派)를 요직에 임명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림파(士林派)라고 해서 중종(中宗)이 끝까지 믿고 총애할 리는 없었다.
중종(中宗)은 4년간의 정치적 밀월(蜜月) 끝에 조광조(趙光祖)를 배신하였다. 처음부터 중종(中宗)에게는 이상정치(理想政治)의 구현이라는 바람이 없었다. ' 왕은 경연(經筵)에서 몸이 피로하고 괴로워서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고쳐 앉기도 하고, 때로는 용상(龍床)에서 퉁 하는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 등은 중종(中宗)의 속셈을 알고 있었다. 결국 중종(中宗)이 소인(小人)들에게 쏠리는 날이 올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특히 조광조는 자신들이 붕당(朋黨)을 만든 죄로 일망타진될 것을 내다보았다. 이러한 위험(危險)을 짐작하고서도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길을 계속 걸어갔으니, 그들은 이상(理想)을 위하여 순교(殉敎)한 것이다.
죽음 ... 실록의 기록
조광조의 죽음에 관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37권, 14년 (1519. 기묘 / 명 정덕(正德) 14년) 12월 16일 병자 2번 째 기사. 조광조의 일을 전교(典敎 ... 임금이 내린 명령)하다.
전교(典敎)하였다 .... 저번에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 등이 서로 붕비(朋比 ..붕당을 지어서 자기 편을 두둔함)가 되어 자기에게 붙는 자를 천거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로 서로 의지하고 권세있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서 후진을 이끌어 궤격(詭激 .. 과격하거나 격렬함)이 버릇되게 하여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朝政)이 날로 글러가게 하였으나, 조정에 있는 신하가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했으니, 그 죄가 크다. 왕법(왕법)으로 논하면 본디 안율(按律)하여 죄를 다스려야 하겠으나, 특별히 말감(末減)하며 혹시 안치(安置)하거나 부처(付處)한다. 대저 죄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는데 벌(罰)은 경중(輕重)이 없이 한 과조(科條)로 죄를 주는것은 법에 어그러지므로 대신들과 경중(輕重)을 상의하여 조광조는 사사(賜死)하고, 김정, 김식, 김구는 절도(絶島)에 안치하고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은 극변(極邊)에 안치(安置)하라.
사신(史臣)은 논한다. 대간(大諫)이 조광조의 무리를 논하되 마치 물이 더욱 깊어가듯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일을 날마다 드러내어 사사(賜死)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즉위한 뒤로는 대간이 사람의 죄를 논하여 혹 가혹하게 벌주려 하여도 임금은 반드시 유난하고 평반(平反 .. 되풀이 신문하여 죄를 공평히 함)하였으며, 임금의 뜻으로 죽인 자가 없었는데, 시의(時議 .. 당시 남곤, 심정 등의 간신배가 득세하던 형국을 말함)의 실재가 무엇이지를 짐작해서, 이렇게 분부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번 씩 뵈었으니 정(情)이 부자(父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두텁게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바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또 사신(史臣)은 논한다. 조광조의 죽음은 정광필(鄭光弼)이 가잠 상심(傷心)하여 마지 않았으며, 남곤(南袞)까지도 매우 슬퍼하였다. 남곤(南袞)은 원래 문재(文才)도 있어 조광조와 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조광조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성세창(成世昌)의 꿈에 조광조가 살아 있을 때처럼 나타나서 시(詩)를 지어 '성세창'에게 주었는데 ' 해가 져서 하늘은 먹 같고. 산이 깊어 골짜기는 구름 같구나. 군신(君臣)의 의리는 천년토록 변치 않는 것, 섭섭하다. 이 외로운 무덤이여 ! 日落天如墨 山深谷似雪 君臣卑載義.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 가엽이 여겼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논의는성세창이 경솔하게 퍼트린 것을 옳지 않다고 하였다. 조광조는 온아(溫雅)하고 조용하였으므로 적소(謫所 ..유배지)에 있을 때 하인들까지도 모두 정서으로 대접하였으며, 분개하는 말을 한적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다 공경하고 아꼈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유엄(柳淹)이 사사(賜死)의 명을 가지고 이르니, 조광조가 '유엄'에게 가서 스스로 ' 나는 참으로 죄인이오 '하고, 땅에 앉아서 묻기를 ' 사사(賜死)의 명만 있고 사사(賜死)의 글은 없소 ? '하고 물으매, 유엄(柳淹)이 글을 적은 쪽지를 보이니, 조광조가 ' 내가 전에 대부(大夫) 줄에 있다가 이제 사사받게 되었는데 어찌 다만 쪽지를 만들어 도사에게 부쳐서 신표로 삼아 죽이게 하겠소 ? 도사(都事)의 말이 아니었다면 믿을 수 없을 뻔하였소 '하였다. 아마도 '유엄'이 속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조광조의 뜻은, 임금이 모르는 일인데 조광조를 미워하는 자가 중간에서 마음대로 만든 일이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따라서 누가 정승(政丞)이 되었고, 심정(沈貞)이 지금 어느 벼슬에있는가를 물으매 '유엄'이 사실대로 말하니, 조광조가 ' 그렇다면 내 죽음은 틀림없소 '라고 하였다.
아마도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다 당로에 있으므로 틀림없이 죽일 것이라는 뜻이겠다. 또 묻기를 ' 조정에서 우리를 어떻게 말하오 ? '하매, 유엄이 ' 왕망(王莽)의 일에 비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고 하니, 조광조가 웃으며 ' 왕망(王莽)은 사사로운 일을 위해서 한 자요. 죽으라는 명이 계신데도 한 참 동안 지체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 아니겠소 ? 그러나 오늘 안으로만 죽으면 되지 않겠소 ? 내가 글을 써서 집에 보내려 하며 분부해서 조처할 일도 있으니, 처치가 끝나고 나서 죽는 것이 어떻겠소 ? '하기에 유엄이 하락하였다.
조광조가 곧 들어가 조용히 뜻을 모두글에 쓰고 또 회포를 썼느데 '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랫세상을 굽어보니 충정을 밝게 비추리 ...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하였다. 또 거느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 내가 죽거든 관(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말아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 '고 하였다. 자주 창문 틈으로 밖을 엿보았는데, 아마도 형편을 살폈을 것이다. 글을 쓰고 분부하는 일을 끝내고, 드디어 거듭 내려서 독하게 만든 술을 가져다가 많이 마시고 죽으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 당초에 능성(綾城)에 가자 고을 수령이 관동(官董)의 수인을 보내서 쇄소(灑掃)의 일에 이바지하게 하였는데, 조광조가 죽을 때에 이들에게 각각 은근한 뜻을 보였다.
또 주인을 불러 말하기를 ' 내가 네 집에 묵었으므로 마침내 보답하려 했으나, 보답은 못하고 도리어 너에게 흉변(凶變)을 보이고 네 집을 더럽히니 죽어도 한이 남는다 '하였다. 관동과 집 주인은 스스로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눈물이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고, 오래도록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지금도 조광조의 말을 하게 되면 문득 눈물을 흘린다.
또 사신(史臣)은 논한다. 당시의 언론으로서는 정해진 의논이 있어 이의가 없었으나,혹 평반(平反)하자는 논의가 있고, 심정(沈貞)의 무리들도 더욱 심하게하지는 않을 뜻을 보여 가혹한 의논이 없을 듯하였는데, 아부하는 자들이 위의 뜻을 맞추려고 팔을 겉어붙이고 나서서 날마다 새로운 의논을 내어 반드시 조광조를 죽이고야 말게 하였다. 조침(趙琛)은 조광조 등이 패하기 전에 서로 허여하지는 않았으나 불화(不和)하지도 않았는데, 정언(正言)이 된 뒤에 마치 원수(怨讐)의 집처럼 논치(論治)하여 숨은 흠을 찾아내어 죄를 빠트린 것은 심정(沈貞) 등도 너무 심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드날릴 계제가 되는 길을 열었다. 당초에 경세인(慶世仁)이 조침(趙琛)의 이웃에 새들어 살았는데, 조침(趙琛)은 경세인이 당시 사람들에게 추중(推重)되는 것을알고 드디어 사귀어 그 환심을 샀다. 경세인(慶世仁)도 자기에게 후하게 대하는 것을 달갑게 여겨 '조침'을 칭찬하였으므로 머지않아 이름이 드러날 뻔하였는데 이윽고 이 변(變)이 일어났으니 이 반복이 이처럼 말 할 수 없었다.
소쇄원 瀟灑園
조광조(趙光祖)의 급진적인개혁 정책이 반반을 사는데, 조광조는 전남 화순 능주(綾州)로 귀양을가게 되고 그의 제자이었던 양산보(梁山甫)는 이곳으로 낙향(落鄕)하여 더 이상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않고 10여 년에 걸쳐 소쇄원(瀟灑園)을 꾸미는데, 이곳에 머물며 자연을 감상하고 사람 만나기를 즐겼다고 한다. 이곳을 드나든 사람은 송순, 송강 정철, 송시열 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조선 중기 문인(文人)들로 가사(歌詞)문학의 대가들이다.
양산보(梁山甫)는 죽을 때 유언(遺言)을 남겼는데, 남에게 팔지말 것이며,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할 것, 어리석은 후손에게는 물려주지 말라고 했으니 그의 뜻대로 지금껏 보존되어 왔다. 이곳은 1520년 후반에 만들어진 정원으로 자연(自然)과 어우러진 우리 정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조광조(趙光祖)가 죽었다. 그 후 소격서(昭格署 .. 도교의 일월성신에게 대한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는 부활하였고, 현량과(賢良科)는 페지되었으며, 위훈삭제(僞勳削除)는 최소되었다. 도덕을 바탕으로 세상을 평정하려 했던 젊은 개혁 사상가 (改革 思想家)는 좌절했다. 하늘의 뜻을 백성에게 펼치려 했던 개혁 정치가는 실패하였다. 올곧은 마음으로 국가를 경영하려 했던 선비는 한사람을 경세(經世)하지 못하여 무너졌다.
죄인의 시신(屍身)을 거두는 일은 동률(同律)로 처벌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릎쓰고 ' 학포 양팽손 (學圃 梁彭孫) '은 조광조의 시신(屍身)을 수습하여 향리(鄕里)에 가매장(假埋葬)하였다가 이듬 해 용인(龍仁) 선영으로 이장(移葬)하였다. 또한 그의 제자 ' 소쇄 양산보 (瀟灑 梁山甫) '는 홍문관 관직을 벗어던지고 향리(향리)에 내려와 흙담을 쌓고 집을 지으며 스승 '조광조'를 기렸다. 그것이 오늘날의 '소쇄원 (瀟灑園)'이다.
수린신사상궁조 誰燐身似傷弓鳥 누가 활 맞은 새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자소심동실마옹 自笑心同失馬翁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웃을 짓네
원학정진오불반 猿鶴定嗔吾不返 벗이 된 원숭이와 학(鶴)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개지난출복분중 豈知難出覆盆中 독 안에 들어있어 빠져나오지 어려운 줄을
누가 알리오
위 글은 조광조(趙光祖)가 능주(綾州)로 유배당하여 온 후로 그 일파로 몰려 귀향(歸鄕)하였던 '학포 양팽손 (學圃 梁彭孫)'에게 전하여 주었던 것으로 알려진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시(詩)이다. 조광조는 자신을 활 맞아 비적거리는 한 마리의 새(鳥)로 비유하고 사림(士林)의 영수(領首)이었던 그가 훈구파(勳舊派)의 모함을 받아 중종(中宗)의 미움으로 벼슬을 잃었고, 사림(士林)의 동지를 만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자신이 중원(中原)을 달리다가 잠시 쉬는 동안 말(馬)을 잃고 있는것으로 표현하여 낡은정치에 대항하여 단행한 개혁(改革)의 정당성을 생각하면서 축생(畜生)과 같은 그들의 야만성(野蠻性)에 대하여 이제 쓴웃음을 짓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퇴계와 율곡의 평가
그는 자질이 참으로 아름다웠으나, 학력이 충실하지 못하여 그 실행한 바가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고 결국은 실패를 초래하고 말았다. 만일 학력이 넉넉하고 덕기(德器)가 이루어진 뒤에 나와서 나랏일을 담당했던들 그 성취를 이루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군민(君民)이 요순(堯舜)시대의 군민과 같고 또 비록 군자(君子)의 뜻이 있다 하더라도 때와 힘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기묘(己卯)의 실패는 여기에 있었다.
위의 글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퇴계집(退溪集)에서 조광조에 대하여 적은 내용이다. 조광조는 누구인가 ? 소학동자(小學童子)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한 뒤 성리학(性理學)으로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원을 삼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군주(君主)도 신하와 마찬가지로 치인(治人)을 위한 수기(修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고 중종(中宗)에게 철저한 수양을 요구하는 철인군주론(哲人君主論)의 도학정치를 추구하였다.
그는 미신(迷信)을 타파하고 불교(佛敎)와 도교(道敎) 행사를 페지하여 유교적 사회질서를 바로잡으려 했고, 폐단이 많은 과거(科擧)제도 대신 사림(士林)을 무시험(無試驗)으로 등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해 참신한 성리학적 인재를 정치에 참여시키며 유교적 이상국가(理想國家)를 조선에 실현하려 하였다. 이처럼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신진 변혁주체들이 기성세력을 축출하고 새로운정치질서를 수립하려 했으나, 결국 보수(保守)의 벽을 허물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말았다. 그들 대부분이 젊고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 지나치게 급진적(急進的)이고 과격한 개혁 드라이브를 구사해 노련한 훈구(勳舊) 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학문이 채 이뤄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王)의 잘못을 시정(是正)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舊勢力)의 비방(誹謗)도 막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도학(道學)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王道)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였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誹謗)의 입이 한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
불안한 동거(同居)
중종(中宗)과 조광조(趙光祖) ... 두 사람은 서로 이용하면서도 서로 견제하고, 갈등하는 위치에 있었다. 중종(中宗)은 반정공신(反正功臣)들에 의하여 위축된 자신의 입지(立地)를 성리학적(性理學的) 이념으로 무장한 조광조(趙光祖)의 발탁을 통하여 상당한 정치적 이익(利益)을 얻었다. 그러나 비록 반정(反正)에 의하여 추대된 왕(王)이었지만, 중종(中宗)도 점차 왕권(王權)을 강화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상론(理想論)에 입각하여 왕권을 견제하려는 조광조의 입장에 선뜻 동의하기 힘든 불편한 관계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광조(趙光祖)는 단순한 중종(中宗)의 최측근은 아니었다. 그는 '중종'도 연산군(燕山君)이나 세조(世祖) 처럼 극단의 길을 가는 왕(王)이 되지말라는 보장이 없다고 믿었다. 끊임없이 왕의 도덕정치를 강조하고, 경연(經筵)을 통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중종(中宗)에게 강하게 권유한 것도, 군주독재(君主獨裁)의 위험성을 사전에 방지하고, 개혁세력인 사림파(士林派)가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추가하는 정치적 길이 달랐기 때문에 동반자(同伴者)이면서도, 어떠한 계기가 생기면 철저히 대립(對立)할 수도 있는 ' 위험한 동반자 (危險한 同伴者) '이었다. 아무리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신하라 하더라도, 왕(王)의 입장과 신하(臣下)의 입장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조광조(趙光祖)는 .. 신하(臣下)는 왕(王)에게 충성해야 마땅하지만, 그 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조선(朝鮮)이 추구해야 하는 성리학(性理學) 이념이라고 판단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확신범(確信犯)인 것이다. 세조(世祖)나 연산군(燕山君)의 정치는 결국 왕(王)이 성리학(性理學) 이념위에 군림(君臨)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인식하고, 중종(中宗)도 얼마든지 전처을 밟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반정공신(反正功臣)들과 훈구파(勳舊派)들의 견제를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조광조(趙光祖)를 파격적으로 기용하였던 중종(中宗) 또한 자신의 기반을 어느 정도 강하하자, 이제 더 이상 '조광조'에게 휘둘릴 나약한 왕(王)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조광조와 노무현
노무현(盧武鉉)을 조광조(趙光祖)에 비교하는 것은 그럴 듯 하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지향(志向)하고, 지키려 하는 가치(價値)와 원칙(原則)이 있었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몸을 던지며 노력하였다. 논리를 단순화시켜 살펴 보면, 어떠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기득권(旣得權) 세력은 있는 것이고, 기존의 질서와 그에 대한 반작용(反作用)으로의 변화(變化) 욕구는 항상 변존(倂存)하는 것... 조광조는 살아서 광자(狂者), 화태(禍胎 .. 무슨 일이건 화를 부르고야 마는)라 부리었고, 노무현(盧武鉉)은 살아서 '바보'로 불리었다.
노무현(盧武鉉)이 지향하는 바를 지지하는 세력들에게도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같은, 조금은 다른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그의 가치(價値)와 원칙(原則)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 싫다고,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훈구파(勳舊派)들이 조광조(趙光祖)를 태생적으로 싫어하듯이, 조광조(趙光祖)는 사약(賜藥)을 마시고 처형되었고, 노무현(盧武鉉)은 스스로 몸을 던져 자살(自殺)하였지만 사약(賜藥)을 받은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조광조(趙光祖)의 사약(賜藥)은 중종(中宗)이 홀로 내린 것이 아니라 훈구(勳舊) 세력과 흥정한 결과이고, 노무현(盧武鉉)의 사약은 검찰이나 이명박(李明博)이 아니라, 그들이 어리석은 국민과 시민들을 이용한 것이다.
당시의 유교(儒敎) 질서에서 '조광조'의 개혁(改革)에 후원자는 왕, 중종(中宗)이어야 하였고, 중종(中宗)이 그 단초를 제공하여 시작하였지만, 중중(中宗)은 그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 들이고 나중에는 사약을 내렸다. 오늘날 노무현(盧武鉉)의 개혁에 후원자는 국민이어야 했고, 그렇게 시작하였지만 국민들은 그에 대한 신뢰를 또한 거두어 들인다.
아무리 유교(儒敎)의 가치(價値)가 있고, 왕권(王權)과 대립하는 신권(臣權)이 있다고 하더라도 엄연한 군주국가(君主國家)에서 왕의 지지와 후원이 없으면 개혁(改革)은 없다. 오늘날 민주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왕(王) 대신 국민이, 시민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야 하는데, 우리 시민은 그릇이 작고,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중종(中宗)에 다름 아니다. 옛날의 왕(王)이 지금은 국민 아닌가 ? 그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
노무현과 조광조가 지향하는 가치(價値)는 일시적으로 왕(王)에게, 국민(國民)에게 영합하려는 술책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닮았다. 다만 조광조(趙光祖)는 끝까지 신념과 행동에서 타협하지 않았지만, 노무현(盧武現)은 그의 신념(信念)은 타협하지 않았더라도, 그 행동(行動)에는 타협의 흔적이 있다. 서투름, 조급함 .. 그러한 비판은 비겁하다. 오만(傲慢)과 독선(獨善) .. 그것도 치졸한 변명이다.
그들의 원칙과 가치를 알고 있다면, 개혁(改革)은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가치(價値)는 원칙(原則)이 되고,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래서 노무현(盧武鉉)의 개혁은 영원한 실패로 잊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장렬한 죽음은 다시 조광조(趙光祖)를 생각하게 한다. 실패(失敗)라고 하더라도 장렬(壯烈)한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성공한 개혁이다. 개혁의 불씨를 남겨 주었기 때문에.......
조광조(趙光祖)가 진사회시(進士會試)와 알성시(謁聖試)에 장원 급제하고 조정의 각광을 받으면서 33세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발탁되어 언로(言路)를 통한 개혁을 추진했을 때 이미 폭풍은 잉태되어 있었다. 그의 말을 빌어 그 시대를 표현하면, 왕(王.. 중종)이 즉위한 지 이미 오래이나 선치(善治)의 공효(功效)를 보지 못하여 빈번하게 재변(災變)이 나타나고, 선비의 뜻과 행실이 날로 무너졌다 ..고 하였던 그러한 시대이었다.
무모한 도전 그리고 오만
이러한 난세에 '조광조'가 대사헌(大司憲)의 중책을 맡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국가의 기강(紀綱)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소명감(召命感)에 사로 잡혀 있었다. 이러한 취지에서 개혁(改革)을 추진했던 '조광조'의 진심을 의심하는 역사적 시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혁은 실패(失敗)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광조의 개혁은 왜 실패하였을까 ?
첫째로, 조광조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이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개혁은 개혁가의 의지(意志)와 지혜(智慧)의 상승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상(理想)만으로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자학적(朱子學的) 명리(名利)에 지나치리 만큼 집착하였다. 그는 맨 먼저 소격서(昭格署 .. 왕실에서 일월성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관청)의 혁파를 주장했다. 유학자인 그로서는 노장(老莊)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소격서'를 폐지하지 않고서는 유학(儒學)이 바로 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간 중종 5년(1510)부터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1519년의 9년 동안에 '조광조'가 소격서를 페지하라는 상소(上疏)를 265회나 올렸다는 사실은 당시 그가 이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였으며, 그 선악(善惡)과 공과(功過)를 떠나 전통과 구습(舊習)이 개혁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고려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둘째로, 조광조는 공자(孔子), 맹자(孟子)의 ' 군자.소인(君子.小人) '의 단순 논리로써 세상을 읽으려 했다. 이러한 그의 인식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인재를 특채(特採)할 것을 요구한 점이다. 그는 왕이 정치적 위업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른 인재(人材)를 등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초야(草野)에 묻혀 있는 사림(士林)을 특채해야 한다고 왕에게 주청(奏請)하였다. 그의 주장은 관철되어 28명의 현량과(賢良科) 급제자가 배출되었다. 그가 기성(旣成) 세력의 안주(安住)를 혐오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현량과'를 요구한 것은 또 다른 특권층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저항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셋째로, 여기에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그의 개혁이 지나치게 질주(疾走)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공자(孔子)의 말을 빌어 ' 나도 3년이면 묵은 폐단을 척결할 수 있다 '고 공언했다. 그는 너무 조급하였다. 대개의 경우 혁명(革命)의 질주(疾走)는 인간적인 교만(驕慢)과 독선(獨善)에서 온다. 격변기의 격앙된 정서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의 다그침은 주군(主君)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국민 정서를 지나치게 앞지르고 있다. 주군의 총애를 받을수록 그는 더욱 겸손(謙遜)하고 신중했어야 했다. 그는 아마도 조정 대신 중 절반이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 받았을 수도 있다.
조광조의 비현실적(非現實的) 상황 인식에서 비롯된 오만(傲慢)과 무모함은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주도한 정국공신(靖國功臣) 76명의 훈작(勳爵)을 삭탈하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무모한 도전이었고, 반대파로부터 생사를 건 저항을 받았다. 그는 반정(反正)공신들을 무식하고 간교한 소인(小人)이라고 몰아붙였다. 혁명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과속(過速)이다. 과격한 혁명은 많은 사람들을 공포(恐怖)의 도가니로 몰아 넣음으로써 불필요한 적을 만들게 마련이다. 자신의 힘이 비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급하게 기득권 세력을 공격한 것은 그 동기가 아무리 훌륭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혜롭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 擧世皆濁 我獨淸 ... 세상은 다 썪었는데 나만은 깨끗하다 '는 인식은 그 자신이 이미 특권과 선민(善民)의식에 빠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책임자를 파직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1515년 1년 동안 7차례 올렸고, 그가 예조정랑에 올라 대사헌(大司憲)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던 1515년부터 1519년까지의 4년 동안 개혁상소(改革上疏)를 300번이나 올림으로써 그의 주군(主君)을 피곤하게 하였다. 그가 아마도 이 시대에 살았다면, 그는 자신의 그와 같은 자신의 개혁을 ' 역사 바로 세우기 '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3, 4일에 한번 꼴로 상소(上疏)를 받아든 중종(中宗)이 끝내는 조광조에 대하여 넌덜머리를 느꼈다는 것은 세속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넷째로, 위와 같은 개혁 작업의 진행 과정에서 조광조는 살아 남는 지혜(智慧)를 갖추지 못했다. 그는 선의(善意)의 야망에 걸맞은 경류을 갖추지 못했기에 37세의 젊은 나이에 꿈도 이루어보지도 못한 채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는 비극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그는 성급하고 경솔한 사람이었다. 그가 진실로 공자(孔子)의 뜻을 관철하고 싶었다면 그는 차라리 ' 無道則隱 ... 무도한 사회에서는 몸을 숨기라 ' 는 공자의 말씀을 따랐어야 했다. 그가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한 날로부터 4일이 지나 ' 기묘사화(己卯士禍) '가 일어났고, 이 옥사(獄事)를 통해 95명이 화(禍)를 입었다는 사실은 결국 그가 불과 4일 앞도 내다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개혁가라고 해서 절의(節義)와 죽음만이 최고의 가치요, 미덕일 수는 없다.
누구보다도 조광조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인물은 아마도 이율곡(李栗谷)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광조가 그 높은 지조와 행실에도 불구하고 위로는 왕을 설득하지 못했고, 아래로는 비방(誹謗)으로부터 자신을 보전하지 못함으로써 후세의 지탄을 면치 못한 것을 탓한 것을 보면, 율곡도 그를 높이 평가한 것 같지는 않다. 이럴 경우 그의 죽음이 그의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혁명가(革命家)에게 죽음이 욕(辱)된 것은 아니지만,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죽지 않아도 될 자리에서 죽는 것은 결코 칭송 받을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