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우리 문중 류 기상 종친회장님께서 KBS 진품명품에서 고서감정을 받았던 "류 순장 할아버지 (재산) 분재기"을
문화류씨 대종회 류 종현 상임부회장(본 판관공 후손임)께서 직접 우리말로 변역한 것을 다시 류 기상 종친회장님께서
이를 정리하시여 유주춘추에 기고하신 글입니다.
先世 分財記
左相公派 西山公后 判官公宗中會長 柳 奇 相
본고를 투고하게 된 사연을 말씀 드리기에
앞서 외람하지만 저의 선계 및 성장과정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저의 선세(先世) 직계를 대략 말씀 드리건
대, 좌상공(左相公)의 맏 증손이신 서산공(西
山公) 휘 자미(自湄)께서 단종(端宗)의 손위
를 당하여 자정하심에, 그 넷째 아드님 사과
공(司果公) 휘 헌(軒)께서 처향(妻鄕)인 파주
장계(坡州 長溪)로 이거하시어 그로부터 평
양판관(平壤判官) 휘 계선(繼先), 임피현령
(臨陂縣令) 휘 완(琬), 사헌부감찰(司憲府監
察) 휘 순장(順長)까지 4대 동안 파주에 세거
(世居)하다가 감찰공의 배위 남양방씨(南陽房
氏 : 正言 貴溫의 女)께서 부군을 여인 후 명
종(明宗) 을사사화에 즈음하여 자녀들을 거
느리고 친정인 전라도 나주(羅州)로 내려와
정거하시었습니다.
방씨 선조비(先祖妣)께서 맨 먼저 따님을
두고 그 다음 두 아드님을 두어, 따님은 부장
김 관(部將 金 琯)에게 출가하고, 맏아들 휘
범(範)은 1여를 두셨으며, 막내아들 휘 절
(節)은 3남을 두셨습니다. 절의 장남 휘 희영
(希榮)은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차남 휘
희달(希達)은 죽산현감(竹山縣監), 삼남 휘
희배(希培)는 희천군수(熙川郡守)를 지냈으며
특히 그 장 차남이 함께 임진왜란에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책록됨으로
써 그 부친인 절(節)에게 공조참의(工曹參議)
의 증직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 3형제의
후손이 매우 번성하여 현재 1000여 호에 달
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조 대승공(大丞公)의 36세이고 앞
서 이른 사과공의 19대종손으로 좌상공파로
는 전라도에서 가장 오래된 400여 년의 세거
지인 나주군 본양면 덕림리 과우, 지금 광주
광역시 광산구 덕림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우리 류씨가 덕림리에 70여 호, 동호
리에 50여 호, 도합 120여 호가 집단으로 거
주했는데 세대의 원근을 물론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 등 어른들께서“종
손 종손”하며 귀여워하심으로써 어려서부터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품성이 우
둔하여 귀염과 사랑을 받은 만큼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음이
심히 부끄럽습니다.
어려서는 아무 것도 몰랐고 장성해서는 제
先蹟探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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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世分財記(最後面)
나름대로 가정 살림과 자녀의 뒷바라지에 얽
매어 관심을 갖지 못하다가 나이 50이 가까
워지면서 비로소 문중 일이라 할까 종사라
할까 다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본고의 내용을 대략 이르건대, 나주로 내
려오신 남양방씨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
소생 1녀2남이 노비(奴婢), 전답(田畓) 등 재
산을 분배한 기록으로서 년대는 선조(宣祖)
초엽으로 추정됩니다. 옛날 한지에 한자(漢
字)로 적힌 이문서는 세로 45CM, 가로
230CM의 긴 두루마리로 되어 우리 집에 전
래해온 것인데 하도 오래되어 색깔이 새까맣
게 퇴색한 데다 초서로 쓰여져 읽지도 못하
고 방치상태로 있었습니다. 이 밖에 강희(康
熙) 56년, 숙종(肅宗) 43년 정유(丁酉 :
1717)에 나주목사(羅州牧使)의 직인이 찍힌
나의 10대조 휘 두익(斗翼)의 호구장적(戶口
帳籍) 및 가승(家乘) 등 몇 가지 유물이 오랜
세월 우리 집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궁금히 여기던 차, 지난 2008년 7월
15일, KBS 진품명품 광주 순회전시에 이를
지참하고 출연했습니다.
감정위원들의 감정이 끝난 후 고서감정 전
문위원 김영복씨가 말씀하기를“이는 조선
중기의 희귀한 분재기입니다. 만약 보관상태
가 양호하다면 4, 5천만원 상당의 귀중한 문
서인데 제대로 보관하지 못하여 2천만원 정
도의 가격을 매기겠습니다.”하였습니다. 이
로서 당일 감정한 여러 귀중품 중에서 최고
가의 가치를 인정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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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1월8일 이 문서를 지참하고 대전으로
취석대부(翠石大父 : 柳淙鉉)님을 찾아갔습
니다. 대부께서는 앞서 이른 죽산현감 휘 희
달(希達)의 후손으로 우리 문중의 원로로서
해박한 식견으로 대종회에서 오랫동안 중임
을 맡아 보신 때문입니다. 인사를 드리고 전
후 사실을 말씀 드린 후 이를 보였더니, 대부
께서 이르시기를“이 문서가 초서로 쓰여져
해득이 어렵겠지만 어쨌든 노력해서 선세의
귀중한 유적을 후손들에게 두루 알리는 것이
우리들의 도리이다.”하시면서 번역을 자임
하셨습니다.
이 문서가 워낙 장문이 되어 그 역문을 모
두 등재할 수는 없고 개요만을 간략히 아래
에 기록하겠습니다.
이 문서를 볼진대 당시는 남녀의 차별이
전혀 없이 출생 순서대로 기록하였으며, 재
산 분배에 있어서도 동등하였습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따님은 출가외인(出嫁外人)으로
친가의 가계(家系)를 이을 수 없지만, 장남
휘 범(範)은 1여를 두고 차남 휘 절(節)은 3
남을 두었는데 장방(長房)에서 계자(系子:養
子)를 들이지 않고, 차방(次房)에서 가계를
이어 봉사(奉祀)에 대한 몫으로 노비와 전답
을 별도로 더 받은 바, 이 또한 조선 후기와
달리 당시 시대상은 종지(宗支)의 개념이 심
하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본 분재기를 작성할 당시, 첫째 따님 류씨
(柳氏)는 당시 과부(寡婦)로서 아들이 없어
그 사위 이희선(李希善)이 대신 참석하였고,
둘째 장남 범(範)이 참석하여 붓을 잡아 쓰
고, 셋째 차남 절(節)이 참석하였으며, 정서
가 끝난 후 모두 수결(手決)하여 사실을 확인
하였습니다. 다만 분재기 상, 하단이 마모되
어 글씨를 분간하기 어려운 곳이 다소 있어
정확도가 95프로 정도임을 밝혀 드립니다.
이에 그 소생 자녀에게 노비 전답 등 재산
을 분배한 내용을 간략히 적어 보겠습니다.
먼저, 첫째 따님의 몫으로 노(奴) 18명, 비
(婢) 10명, 아이 6명이 배정되고, 둘째 장남
의 몫으로 노 17명, 비 13명, 아이 4명이 배
정되었으며, 셋째 차남의 몫으로 노 16명, 비
12명, 아이 5명과 아울러 봉사(奉祀)의 몫으
로 노 2명, 비 5명이 추가 배정되었습니다.
다음, 첫째 따님의 몫으로 남평(南平 : 羅
州 屬縣) 고을에 답(畓) 9필지(筆地) 59두락
(斗落 : 마지기), 전((田) 2필지 7두락과 파
주(坡州) 고을에 답 3필지 13두락, 전 5필지
44두락이 배정되고, 둘째 장남의 몫으로 남
평 고을에 답 8필지 57두락, 전 5필지 21두
락과 파주 고을에 답 5필지 28두락이 배정되
었으며, 셋째 차남의 몫으로 남평 고을에 답
8필지 78두락, 전 3필지 32두락과 파주 고
을에 답 2필지 14두락, 전 2필지 10두락과
나주 고을에 전 3필지 11두락과 이외에 봉사
의 조건으로 파주 고을에 답 3필지 21두락,
전 1필지 10두락이 추가 배정되었습니다.
지금 생각건대 400여년 전 일이라서 상상
도 못할 일이지만 아무튼 선조들께서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아울러 많은 전답을 지니고
행세하신 데 대해서 흠모하는 한편 후손으로
서 자긍심을 갖기도 합니다. 이 문적 또한 선
조 대대로 물려준 유물인 만큼 소중히 보관
하여 후세에 물려줄 것을 다짐하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2011년 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