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晉)나라 무제가 이밀(李密)을 태자세마(太子洗馬)로 임명했을 때,
이밀(李密)은 본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사퇴했다.
무제는 그의 효행(孝行)에 탄복하여 노비 두 사람을 하사하고,
군현(郡縣)의 관리에 명령하여 이밀(李密)의 조모(祖母)에게 의식(衣食)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조모(祖母)가 죽은 후에 이밀(李密)은 한중(漢中)의
태수가 되었다.
<참고로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충신(忠臣)이 아니며,
진정표(陳情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효자(孝子)가
아니라고 하였다.> 진정표(陳情表)는 조모(祖母)를 위한 지극한 효행(孝行)이
구절 구절에 스며있다.
저는 불행하게도 일찍이 부모를 잃어, 생후 6개월 된 갓난 아이 때
아버님과 사별하였고, 나이 네 살 때 외삼촌이 수절하려는 어머니의
뜻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조모(祖母) 유씨(劉氏)께서 제가 고아가 되고
몸이 약한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몸소 어루만지며 키워주셨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병이 많아서 아홉 살이 되어도 걷지 못하였고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고생하면서 성인(成人)이 되었습니다.
가문이 쇠퇴하고 박복해서 늦게 서야 자식을 두었으니,
밖으로는 기복(朞服)이나 공복(功服)을 입을만한 가까운 친척도 없고,
안으로는 문 앞에서 손님을 응대할 어린 시동(侍童)하나 없습니다.
홀로 외롭게 살아가면서 내 몸과 그림자가 서로 위로할 따름인데,
조모(祖母) 유씨(劉氏)도 일찍이 병에 걸려 늘 자리에 누워 계셨습니다.
저는 탕약을 달여 올리며 한 번도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의 조정을 받들게 되면서 맑은 교화(敎化)를 온 몸에 입고 있습니다.
전의 태수(太守)인 규(逵)는 저를 효렴(孝廉)으로서 발탁하였고,
후에 자사(刺史)인 영(榮)은 저를 수재(秀才)로 천거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모의 공양을 맡아줄 사람이 없어서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마침 조서(詔書)가 특별히 내려져서 저를 낭중(郎中)으로 임명하였고,
얼마 안 있어 나라의 은혜를 입어 저에게 세마(洗馬)의 벼슬이 내려졌습니다.
외람 되게도 미천한 몸으로 동궁(東宮)을 모시게되니,
제가 목을 바친다해도 그 은혜를 다 보답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사정을 모두 아뢰는 표(表)를 올리고,사퇴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조서(詔書)를 내리시어 절실하고도 준엄하게 제가 책임을 회피하고
태만함을 책망하고, 군(郡)과 현(縣)에서는 다그쳐서 제가 길을 떠나도록
재촉하며, 주(州)의 관리들도 문 앞에 와서는 성화같이 서두르고 있습니다.
제가 조서(詔書)를 받들어 빨리 달려가고 싶지만, 조모 유씨의 병환이 날로
위독하고, 구차하게 사사로운 정을 따르고자 하소연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제가 벼슬길에 나아가야 하는지 물러가야 하는지 참으로 낭패(狼狽)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지금의 조정은 효도로서 천하를 다스려서
모든 노인들이 동정을 받아 양육되고 있습니다.
하물며 저는 외롭고 고달픔이 남보다 더욱 심하니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한 저는 젊었을 때, 위조(僞朝)인 촉(蜀)나라를 섬겨 낭서(郎署)에서
근무하였습니다. 본래 출세하기를 바랐을 뿐, 명예나 절개도 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는 망국의 천한 포로로서, 지극히 미천하고
지극히 비루한데도 과분하게 발탁되니,
어찌 감히 주저하며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조모 유씨가 마치 해가 서산에 지려는 것처럼 숨이 끊어지려고 하여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아침에 저녁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조모가 없었더라면 오늘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며, 조모께서는
제가 없으면 여생을 마칠 수 없을 터이니, 조모와 손자 두 사람이
서로 목숨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臣) 밀(密)은 금년에 나이 44세이고,
조모 유씨는 금년에 연세가 96세입니다.
그러니 제가 폐하께 충성을 다 할 날은 길고,
유씨께 은혜를 보답할 날은 짧습니다.
까마귀가 어미 새의 은혜를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조모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만이라도 봉양하게 해 주십시오.
저의 괴로움은 촉(蜀)의 인사(人士)들만이 아니라,
양주(梁州)와 익주(益州) 두 주(州)의 장관들도 훤히 아는 것이며,
천지신명께서 실로 모두 보고 있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어리석은 저의 정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저의 작은 뜻을 들어주십시오. 제가 바라는 것은 조모 유씨께서
다행히 여생을 끝까지 보존하게 된다면, 제가 살아서는 목숨을 바쳐 충성하고,
죽어서는 결초보은(結草報恩)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삼가 절하며 표(表)를 올려 아룁니다.
중국인들이 국가 배신의 차원의 인물 중에 글이나 예술이 아까워 매도하지 않는 인물이 몇 있죠. 바로 위의 진정표를 쓴 이밀과 명필 조맹부등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죠. 그러나 그들의 행적 때문에 그들의 글이나 예술을 입에 올려도 인간 이밀이나 조맹부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가 불문율로 되어 있죠.
그런 사고도 참 좋게 생각될 때가 있죠. 왕안석을 격렬하게 미워하면서도 당송팔대가에 열입하고 명문장가로 남게 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조광조가 받들려지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 남곤등은 글자 한자 안남고 박살 나버렸죠. 물론 남곤 같은 경우는 자신이 죽기전에 불태워버리기도 했지만. 이래저래 저쪽이 잡으면
이쪽을, 이쪽이 잡으면 저쪽을 박살내는 역사의 악순환. 그게 결국 역사의 빈곤을 불렀죠. 지금도 그짓을 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심지어 일제 잔재라면서 일제와 관계된 자료라면 어쨋든 박살내는 것을 보면. 일제 때 만든 비석이라 하더라도 그걸 놔두고 역사의 거울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폭파시
첫댓글 과연 명문장입니다. 그런데 옛날 녹을 먹었던 蜀을 가짜 조정이라 하매, 더더욱 가슴이 아프군요.ㅠㅠ
蜀漢을 僞朝라고 쓴것은 옥의티죠 先儒들의 非難을 받는바이지요 차라리 蜀漢이라고 바로쓴것이 좋을뻔 했습니다ㅎㅎㅎ 감사합니다
제목이 陣으로 되어 있군요. 陳으로 고쳐 놓아야할 듯.
감사합니다
중국인들이 국가 배신의 차원의 인물 중에 글이나 예술이 아까워 매도하지 않는 인물이 몇 있죠. 바로 위의 진정표를 쓴 이밀과 명필 조맹부등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죠. 그러나 그들의 행적 때문에 그들의 글이나 예술을 입에 올려도 인간 이밀이나 조맹부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가 불문율로 되어 있죠.
그런 사고도 참 좋게 생각될 때가 있죠. 왕안석을 격렬하게 미워하면서도 당송팔대가에 열입하고 명문장가로 남게 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조광조가 받들려지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 남곤등은 글자 한자 안남고 박살 나버렸죠. 물론 남곤 같은 경우는 자신이 죽기전에 불태워버리기도 했지만. 이래저래 저쪽이 잡으면
이쪽을, 이쪽이 잡으면 저쪽을 박살내는 역사의 악순환. 그게 결국 역사의 빈곤을 불렀죠. 지금도 그짓을 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심지어 일제 잔재라면서 일제와 관계된 자료라면 어쨋든 박살내는 것을 보면. 일제 때 만든 비석이라 하더라도 그걸 놔두고 역사의 거울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폭파시
일장일단이 있는것이고 역사란 항상 승자가 기록하고 결정하는 것이기에 그잣대가 樞矩(추구)가 되지 못한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