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비가 연일 내립니다
나의 빈객(賓客) 중의 빈객이신
종원님들 긴 장맛비에 피해 없기를 빕니다
그런데 오늘처럼 궂은 비 내리는 날은
막걸리에 파전이 생각난다 하면서
지루한 탈고 중 술이 나오는
한 대목 올립니다.
1521년 (중종) 16) 10월 11일 왕조실록 4번째 기사
안형. 권전. 안처근이 잡혀 국문을 받는다.
임금이 드디어 사정전에 나오자, 정광필. 남곤.
권균(權鈞). 심정. 윤희인(尹希仁). 조옥곤(趙玉崑)
과 문사관(問事官). 사관(史官)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옥곤이 아뢰기를,
“금부 낭관(郎官)이 시산정(詩山正)을 잡으러
갔다가 잡지 못했으니 의심스러운 데를
수색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이르기를,
“옥사가 크면 혹 대궐 뜰에서 추국(推鞫)하기로
하고 혹 대신과 대간이 의금부로 가서
추국했으니,
이번에는 전문(殿門) 안에서 추국해야겠다.”
하였다.
그러나 그날, 전 봉사(奉事) 안형(안형(安珩).
생원 권전(權磌). 생원 안처근(安處謹)이 국문을
받았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그 하루 뒤 10월 12日 시산정의 종 순이. 안처근.
권전을 심문하고 신석을 잡았다고 의금부 도사
이심(李諶)이 임금께 아뢰었다.
“제가 안처겸(安處謙)을 잡으러 음성(陰城)으로
가는 길에 용인(龍仁)에 들렸다가 안당(安瑭)
부자 등이 구흥역(駒興驛)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듣고 가서 그곳을 수색했더니,
안당과 처함만 있고 처겸은 이미 도망했는데,
처겸 그 겁 많고 나약한 놈이 내가 온다는 것을
듣고 도망해 버렸는데 그 아비 왈 내가 비록
아버지만 그의 마음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음, 수고하였다. 혹시 숨기고 그런 줄도
모르니 철저히 추궁해
하루빨리 명명백백하게 밝히거라.”
“예. 전하, 명심, 명심하겠습니다.”
그날 또 시산정의 종 순이(順伊)를 형장에서
심문했고, 신석(申晳)이
잡혔다고 했다. 그리고 안처근, 권전을 형장에서
심문했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이에 영의정 정광필 등이
아뢰기를 “안처겸과 시산정이 바로 죄악을 저지
른 괴수이고, 그다음은 권전과 처곤입니다.
그리고 ”안처함(安處諴)은 그의 조사가 바로 더러
미진한 점이 있기는 하나, 그의 본뜻이 형과는
같지 않고 또한 형제간의 비밀스러운 일을
기필코 일일이 말하게 할 것은 없는데 어찌
할까요?” 하니 임금이 ’그리하라 했다.
안처함은 그 다음 날인 10월 12일 잡혔는데,
그는 지난 9월 보름부터
아비의 피접(避接)을 돕고
있었다. 그런데 9월 말에
서사촌(庶四寸) 송사련(宋祀連)이 갑자기 찾아
와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다.
그는 워낙 꾀가 많고 간사해 또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기 때문이다.
저 농사짓는 곳에 내려가다가 부친에게 인사
하러 왔다가
우연히 나를 만났다고 하지만 이상스러운 게
한둘이 아니었다.
"자네 시산정의 말을 들었는가?"
"아니, 난 시산정 본지도 쾌 오래고 또한 들은
말도 없네.”
“음, 그런가? 그럼 자네만 알고 옮기면 안 되네.”
하며 사련이 그의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사림(士林)의 화가 장차 다시 일어날 것이네.”
처함이 깜짝 놀라며,
“자네, 무슨 말을 들었는가?”
“들었지.”
“누구에게?”
“시산정에.”
“뭐라 했기에 그리 걱정을 하는가?”
“시산정이 저번의 사림(士林)들 화는 오로지
신무문(神武門)에서 입계(入啓) 했던
재상들의 소위인데, 그 재상들이 권세를
잡으면 국가 사세가 날로 글러질 것이므로
그 재상들을 마땅히 각각 그의 집으로 가서
쳐버린 다음에 계달(啓達) 한다면,
상께서 스스로 의혹을 풀게되실 것일
것입니다.” 했다.
直言也人誅(직언야인주) 옳은 말을 하면 권력이 벌을 주고
曲筆也天誅(곡필야천주) 거짓 글을 쓰면 역사가 벌을 준다.
君子行動勤在片石(군자행동근재편석) 군자 행동 돌에 새겨
後後史家(후후사가) 역사의 심판을 기다려라.
조선의 최고 유학자요 중용의 대가인 시산군 이정숙이
간신 모리배들을 몰아내야 한다면 이 말은
직설(直說)일까요? 곡설(曲設)일까요?
그때 처함은, 혹시 그 말을 아버지가 들을까 싶어
부채를 휘저어
중지시키며 안절부절 갈피를 못 잡았다. 사련의 처남
정상(鄭瑺)이 형 안처겸(安處謙)
에게서 듣고 형은 시산정에서 들은 것인데,
사련이 이런 말이 혹시라도 탄로되면 시산정과
사림(士林)들의 화가 몹시 크게 닥칠 될 것이라고 하고
그가 황급히 떠났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처함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아침 일찍 형<처겸>의 집으로 갔다.
“형님, 그간 평안하신지요?”
“이것 보면 모르겠는가.” 하고 마시고 있던
술잔을 자기의 이마 높이로 올렸다. 처함은
대답하지 않았다. 형은 지금 술에 취한
그것으로 생각했다. 처겸이 말했다.
“동생의 눈에는 이것이 술잔으로 보일 테지.
그러나 내게는
간신(奸臣) 심정과 남곤으로 보인다...... 이거야,
바로 이것이 동생과 나의 차이야.
동생이 찾는 세상의 이치(理致)는
안락(安樂)에 있고,
내가 찾는 이치는 이 술잔 속에 있어.
심정, 남곤 소주 급살.”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술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처함의 손이 흔들리면서
달그락 소리를 냈다.
심정, 남곤 소주 급살이라니…. 중종 정권 최고
실세에
소주를 빗댄 것도 참으로 위험한데
거기에 급살을 붙이다니…. 이 말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일 날 말이 아닌가.
처함은 꾹꾹 누르고 있던 말을 더는 참을
수 없어 뱉았다.
“형님, 지난번 사련의 말은 매우 좋지 못하니,
형이 비록 들었다 하더라도 어찌 정상에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음, 내가 정상에게 말한 것이 아니고,
정상이 스스로 시산정에 들은 거라 했지만,
실은 그 말은 내 뜻이기도 하다.”
“이 혁명이 성공한다면 모를까 실패한다면
곧 가문이 멸문
지화를 당하는데도요?”
“안다. 나도 그것을 알기에 이리 고민하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처함은 형의 뜻이 확고하기에 더욱더 놀랐다.
몹시 두려웠다. 떨렸다. 그래 점심 먹고 가라
는 말에 속이 안 좋다는 핑계
를 대고 간신히 형님댁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가야 이 답답함을 풀까 고민, 고민하
다가 형님 집 어귀에 있는 시산정 집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그는 처함이 올 줄 이미 알았다는 듯이 빙그레
미소지으며
“어서 오세요.” 반갑게 맞이하며 술을 권했다.
그도 대낮부터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꼿꼿했다. 비록 술을 마시고 있다고 해도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서 차라리 외로운 등대,
누가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그저
묵묵히 빛을 쏘는 그 눈망울이 웬일인지
몹시도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었다.
왜일까? 이것은 저 눈망울을 지배하는
영혼이 아름답기 때문일까?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원망의 대상이
지금은 무서울 정도로 빛나는 그의 눈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니…….
“빈 잔에요.”
처함은 잔을 거꾸로 들어 보이며 웃었다.
그러자 그는 하하하 하고 고소한 것 같은
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인생, 어차피 빈 잔 아닌가요? 오해는
마십시오. 빈객(賓客) 앞에 문자를 쓰는 건
아니고 실은 내가 빈 잔이라는 말입니다...
... 그래도 밖에 나가면 대나무와 소나무들이
그와 같은 사람들이 따라온다구요, 술인 줄
알고……. 하하하, 빈객은 친구의
술이 된 적 있는가요?
“......”
“무슨 염치로 술을 달라고 한단 말인가.
군자는 술을 달라고 해서는 안 돼,
진실로 군자는 자신이 술이 되어야 하는 거야.”
진실로 불의를 미워하고 불의를 상생으로
만들기 위하여 전력투구, 고뇌하다 보면
저렇게 빛이 날수밖에 없는 것인가. 결코 몸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시산정보다는 낡은 영혼
을 가진 자신이 문득 부끄러웠다.
하지만 비웃는 듯한 그의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