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차이 가운데 하나는 신체에 대한 사고방식이다. 서양은 몸과 마음, 신체와 영혼을 둘로 나누어 신체를 정신에 종속시킨다. 신체는 영혼이 거처하는 장소로 전락하고, 영혼이 신체의 구속에서 해방되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성(性)의 경우에도 영혼의 해방에 장애물로 등장하며, 멀리해야 할 악마의 유혹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과학의 성립 이후에도 신체는 합리적인 사고와 논리적 명석함을 왜곡시키는 주범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심신일원론적 경향이 지배적이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유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몸과 마음은 영혼과 물질, 남성과 여성과 마찬가지로 우주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는 존재로 이해된다. 따라서 신체의 활동인 성의 활동도 기도와 단식과 마찬가지로 영적 에너지의 매체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힌두교에서 명상과 각성을 위해 성교를 중시하는 것이 단적인 예증이다. 신체를 건강하게 단련하는 것은 정신적 성숙에도 도움이 된다. 무예가 동양에서 발달했다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무예의 정신적 측면은 바로 심신의 통일체인 인간의 자기성숙을 위한 기예(技藝)이다.
정신의 원리로 사회가 구성되었을 경우에 억압된 몸은 질병으로, 특히 정신적 질병으로 나타나며, 질병은 몸과 마음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사회의 증상이다. 원래 인간의 신체라는게 완벽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의 오랜 결과 불완전한 적응태세를 갖추게 된 역사적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정신의 산물은 특화되어 인간정신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정신은 자연의 물질대사와 무관하게 완벽함을 추구한다. 따라서 신체는 곧잘 정신에 의해 억압되곤 한다. 완벽하지 못한 신체가 신체의 부산물인 정신의 완벽함에 의해 억압당할 때 신체는 무의식적으로 이에 저항하게 되며, 이것은 질병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건강을 질병의 무화(無化)로서 보는 것은 근시안적이다. 건강이란 일종의 환상이다. 병도 몸의 일부이며, 병과 교섭하는 건강이야말로 몸의 본래 모습이다. 질병까지도 포섭하는 신체가 건강한 신체이다. 이런 측면에서 마음의 병도 마음의 일부이다. 아파하고 기뻐하고 포용하는 마음과, 병세포를 포섭하는 신체조직은 불완전하며, 그렇기 때문에 병까지도 신진대사의 일환으로 삼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통일적 치유를 나타내 주는 좋은 본보기가 바로 무예이다. 무예는 신체의 유연과 민첩을 길러주고 동시에 직관력을 증진시킨다. 또한 몸 그 자체가 정신 혹은 의식이 밖으로 나타난 형태이다. 예컨대 얼굴 표정이나 몸의 자세는 의식상태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신체부위의 크기나 형태에 의해 사람을 판단하는 사상(四象)의학의 경우도 물질적 조합체인 인간신체의 형태를 통해 기관의 내면을 보려는 노력이다.
몸은 관찰대상이 아니라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내면적 현실이며, 외계와 호응하여 항상 변화하는 감정과 감각의 복합체이다. 또한 몸은 타자의 이해에서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다른 사람의 몸도 유기체이자 무기체로서 경험할 수 있다. 이런 복합적 관계를 펼쳐 보이는 것이 무협적 세계관이다.
무협(武俠)에서 무(武)는 기술적 측면을 나타내며, 협(俠)은 도덕적 측면을 나타낸다. 인간의 형성에서도 기술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이 통일되어 나타나며, 삶에서도 본질과 현상, 내면과 표현이 조화를 이루어야 삶이 풍요로울 수 있다. '어른들의 동화' 무협소설과, 이의 전단계로 할 수 있는 전기(傳記)소설의 경우에도 무(武)와 협(俠)을 모두 융합시키지 못하면 폭력물이나 '새마을' 소설이 되기 십상이다. 이것은 개인적 측면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반해, 무협에는 비밀사회의 형성과 발달도 숨어 있다. 인간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기방어나 자기보호를 위해 애쓰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의타적인 존재, 즉 연대의 심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적 자체는 농민사회를 위한 강령이 아니라 특수한 경우에 처하여 농민사회에서 탈출하기 위한 자기 구제의 한 형태이다. 비적은 개인적인 굴복을 거부한다는 의지와 능력을 빼고는, 자신도 그 일부인 농민층이 품고 있는 관념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단순한 행동자이지 사회조직이나 정치조직에 관해 새로운 비전을 제공할 수 있는 사상가 내지 예언자는 아니다."(홉스봄, 황의방 역, <의적의 사회사>, 한길사, 1982, 2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받는 인간집단이 의리(義理)와 구세(救世)를 축으로 하여 원시적인 연대를 형성한다. 그 가운데 신화가 만들어지고, 민중들 사이에 전승되어 영웅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대부분 황당과 과장을 깔고 있지만, 유토피아를 꿈꾸는 민중의 생활을 역설적으로 반영한다. 투쟁과 전쟁이 없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으므로. 이런 인간형을 협객(俠客)이라 한다. 협객은 무예와 도덕의 화신인 셈이다. 여기에는 일개 도적에서부터 혁명가까지 포함되어 있다.
협객을 주목하는 것은 무예와 무술을 작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담지자인 협객을 통해, 원래 선비 계급이 지녔던 무협성(武俠性)이 삭제된 결과 사라진 몸의 활연(活然)과 세부적인 인간사를 그려내기 위해서이다.
모든 사태에는 표리(表裏)가 존재한다. 특히 인간 역사에서 이면은 표면에 의해 억압되고 무시되어 왔다. 이면의 역사가 없는 표면의 역사는 없다. 연표에서 보듯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 그 중간중간에 스물대고 있는 몸짓이 보이지 않는가. 거대한 역사적 사실의 행간에 숨어 있는, 또 숨을 수밖에 없었던 또다른 역사가. 그 중의 하나가 협객(俠客)의 역사이다. 위대한 장군도 아니고 평범한 범부도 아닌 그/녀들. 전쟁의 전략과 전술이 아니라 무(武)를 나름대로 몸으로 체득한 민간적 형태의 인간형이 그/녀들이다. 그/녀들은 세부와 이면에 주목할 때만 볼 수 있는 이들이다.
협객의 역사는 영웅위주로 기술되어 있는 정사(正史)가 아니다. 역사에 기재된 영웅들의 배경을 이루는데 그치고 있지만, 기실 역사의 영웅이란 협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느 전쟁터에도 병졸은 있게 마련이고,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게 마련이므로, 영웅은 협객의 풍경을 통해 만들어진다.
협객이란 위인은 아니지만 줏대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협객의 또다른 명사인 "유협(游俠)의 경우에는, 그 행위가 반드시 정의에 의거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의 말에는 반드시 신용이 있었고 행동은 과감하였으며 이미 승낙한 일은 반드시 성의를 다하였다. 또한 자신의 몸을 버리고 남의 고난에 뛰어들 때에는 생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고, 그 공덕을 내세우는 것을 오히려 수치로 삼았다. 아마 이밖에도 찬미할 점이 많을 것이다." 협객은 믿음과 의리의 화신이다.
협객의 세계관은 첫째 개별적 차원의 수양과, 사회적 차원보다는 협애한 개인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몸과 마음의 일치를 바탕으로 '뜻있는 곳에 칼이 먼저 가 있는(意在劍先)' 신체의 운용을 뜻하며, 개인적 차원의 보수를 제일의 관건으로 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하더라도 신뢰의 인간형으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정의는 집단적이거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운용되는 것이므로, 혼란기에는 제 한몸 지키는 것이 능사이므로, 세계사가 평화로운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이런 형태의 인간은 일반 민중의 사랑을 받음직하다. 게다가 아무리 전쟁의 전략이나 혁명의 전략에서도 이러한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승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동료나 동지를 위한 복수는 그러한 전략 속에 포함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꽃도 없고 이름도 없고 종소리도 없고
눈물도 없고 한숨도 없고 사나이답게
너의 옛 동지들 너의 친척이
너를 흙에 묻었다
순난자여 흙은 너의 영구대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오직 하나의 기도는
동지여 복수다 복수 너를 위해
오직 하나의 기도는
동지여 투쟁이다 투쟁 너를 위해
두번째는 그것이 여성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치장한다(士爲知己者死, 女爲說己者容)'(사마천, <사기열전>, 까치, 1995, 1083-4쪽)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협객은 거창한 대의명분보다는 개별적 관계를 중시한다. 여기서 개별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여성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법과 정의를 매개로 한 간접적인 인간관계는 사회를 구축하는 원리인 반면 정리(情理)를 기반으로 하는 인간관계는 모성적인 직접적인 유대관계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흔히 회자되는 사나이 의리라는 게 있다. 원래 의리라는 것은 정리(情理)적 관계를 바탕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걸 수 있는 관계를 뜻한다. 그러나 대개 사나이의 의리란 자기합리화의 경향이 농후하며, 심지어는 간접적인 관계, 즉 어떤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진행된다. 기실 의리란 여성들간의 관계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역사 속으로 소멸되어야 했던 계층 가운데 여협(女俠)의 존재는 비록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대한 정신적 보상 때문에 생겨났다 하더라도, 기층 대중의 소망을 우회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여협의 존재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협객은 검이나 기예로서 수양을 한 고도의 지적 육체적 존재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완력으로만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여협의 존재는 그만큼 오래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오월춘추에 나오는 최초의 여검객인 월녀(越女) 이야기나 당나라 전기소설(傳奇小說)에 나오는 수많은 여협은 이에 대한 좋은 증거이다.
가부장적 질서가 엄존하던 조선시대에도 '검녀(劍女)'와 같은 설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기존문화와는 이질적인 문화의 존재를 여실히 보여주는 듯하기도 하다. 협객의 역사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비밀사회의 비밀이 정사 이면의 역사를 보여주듯이, 여협의 이야기도 반란의 역사와 함께 저변 민중의 삶을 보여준다.
세번째는 무협의 세계관은 반란과 혁명의 원초적인 형태를 제공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소위 '비밀 사회론'으로 대표되는 그것은 반란의 역사를 수놓고 있다. 비밀사회의 조직화는 주로 농민반란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도시화에 의해 이러한 기풍의 조직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도시 위주의 노동자군의 조직화가 역사적 계기로 등장한다. 허나 수면 아래로 잠적한 비밀사회의 정신적 기풍은 지속되고 있다. 수많은 민간종교와 정전이 아닌 사상체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비밀사회는 역사의 한 시기에 무력을 통해 자신을 표출하기도 하고, 때로는 민간생활을 규제하는 규범을 정립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이 과정은 영웅의 민간화 과정이며, 또한 이념의 현실화나 구체화로도 나타난다. 비밀 사회와 격리된 협객은 개인적 수양으로서 무예를 택하고 있다. 이는 유가, 불가, 도가적 사유와 결합하면서 연단술사나 미륵신앙과 같은 민간에서 전승되는 사유내용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또 그것은 아주 다양하게 민간에 전승되었으며, 각 지역에 따라 상이한 형태를 띠게 된다.
반란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떼도둑을 의미하는 비적(匪賊)으로부터 토적(土討) 혹은 토비(土匪)·유비(流匪)·병비(兵匪)·마적(馬賊)·해적(海賊) 혹은 해도(海盜)·산적(山賊)·수적(水賊)·교비(敎匪)·회비(會匪)·요적(妖賊)·겁도(憩) 등 여러가지이며, 그들의 일부는 녹림(綠林)의 영웅, 즉 의적(義賊)으로 불리기도 한다. 비적 가운데는 약탈만을 직업으로 삼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도 있다.
따라서 반란은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지 어떤 정의나 목적을 위해 의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원초적 반란이 잦게 되면 국가의 존립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으며, 반란이 일정 규모를 갖추고 대의명분을 획득하게 되면 나라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게다가 반란의 지도자는 결혼하지 않은 20대 중반의 남자일 경우가 많다. 별로 얽매일 게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낭만적 환상이 덧칠해진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무협소설은 동시대 민중의 지속적인 창작물이자 지속적인 미화과정의 산물로 나타났다. 무협소설은 당나라 전기소설에서 비롯되었다. 당나라 중기 이후 지방세력인 번진(藩鎭)이 할거하면서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각 번진세력들은 서로 자객을 양성하여 상대방을 위협하고 견제했다. 또한 민중들에 의한 신비화 과정 말고도 신선술의 유행으로 인한 신비주의적 색채가 가중되었다. 혼란한 시기에 민중은 악한 자를 없애고 약자를 도우는 협객들에게 의지하려는 소망을 지니게 되었다. 비범한 협객은 민중들의 영웅이 되어 선호되었다. 이런 상황은 협객들의 활약을 반영한 전기 이야기를 대량생산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후 {삼국지}와 {수호지}는 대표적인 경우로 자리잡았다.
무협지는 현재까지도 '어른의 동화'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복잡한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욕구가 깔려 있을 것이다. 인간에 내재해 있는 야만성은 극한분출을 통해서, 또는 전쟁을 통해서 순화되거나 문명의 조건으로 자리잡기도 한다. 현대사회에서 억압된 야만성은 스포츠의 형태로 분출되기도 하고, 내면적 퇴행을 거치면서 만화나 무협지로 기운다. 동화적 사고를 어른이 되어서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협지이다. 어른의 동화로서 무협지는 이런 퇴행적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협소설이나 무협영화에 대해 일정한 매니아가 생길 정도로 광범위한 대중을 범주로 하는 무협장르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더욱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일반 동화조차도 특정 이데올로기를 전제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른 동화로서의 무협소설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한 사회사적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하여튼 민중들이 어떤 역사적 사실을 왜곡, 확대, 투사하여 전혀 새로운 인간상을 역사적으로 전승시켜 왔던 것이 협객이다. 거기에 표현된 인간상은 바로 인정(人情)과 의리(義理)의 그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유사(儒士)계층, 지금의 선비계급을 형성하는 단초로 작용했지만 유사의 상무정신은 완전히 사라지고 체제순응적인 관료로 굳어져 갔다.
공자의 제자였던 자로(子路)는 대표적인 협객이었다. 자로는 공자를 욕하는 사람들을 곧바로 혼내주곤 했다. 공자도 든든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로가 죽은 뒤 공자는 "내가 유를 얻은 뒤로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험담이 나의 귀에 들리지 않았는데"(<사기열전>, 65쪽)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자로는 자신의 주군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죽어, 그 시체는 육포가 되었다고 한다.
넷째로 이면의 역사로서 역사의 절맥을 환기할 수 잇는 계기로 협객의 역사를 들 수 있다. 협객의 역사는 역사의 이면을 수놓고 있기 때문에 절맥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에게 무예 또한 절맥된 상태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상무정신을 꺾어놓기 위해 분쇄해 버린 분야가 바로 전승되어 온 무예였다. 백범 김구가 옥중에서 들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조선 이후의 '비밀 사회', 즉 도적은 고려 복벽운동으로 시작되었다 한다.
"강원도에 근거를 둔 자들의 기관명의는 목단설이요, 삼남에 있는 기관은 추설이라 하여 왔습니다. 북대라는 것은 우완(愚頑)한 자들이 임시임시 작당하여 가지고 아무 집이나 쳐들어가는 자를 이름한 것인데, 목단설과 추설 두 기관에 속한 도당끼리는 서로 만나면 일면여구(一面如舊)하게 동지로 인정하고 상부상조하나 북대에게 대하여는 두 설에서 동일히 적대시하는 규율을 정하였으므로 북대는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하고 사형(死刑)을 하는 것이외다.
목단과 추 양설의 최고 수령은 노사장(老師丈)이요, 그 아래의 총사무는 유사(有司)라 하고 각지방을 주관하는 자도 유사라 합니다. 양설에서 공동대회를 갖는 것을 '대(大)장 부른다' 하고, 각기 단독으로 부하를 소집하는 것을 '장 부른다' 하는 것이외다. 대장은 종전에는 매년 1회씩을 부르나 지금은 재알이―왜놈을 지칭―가 하도 심하게 구는 탓으로 사라졌습니다. 종전에 대장을 부른 뒤에는 어느 고을을 털든지 큰 시장을 치는 운동이 생긴 것이외다. 대장을 부르는 본의가 도적질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설의 공사(公事)를 처리하는 것인데, 그때에 대시위적(大示威的)으로 한 차례 [고을이나 시장 털이를] 하는 것이외다."(김구, <백범일지>, 학민사, 1997, 231쪽)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에는 '도적의 보학(普學)'이 나온다. "장내기는 장꾼을 치는 것이구 뜨내기는 예사 행인을 떠는 것이구 또 집뒤짐이란 것은 남의 집에 가서 재물을 뒤지는 것인데, 주인 시켜 뒤져 내는 것이 원뒤짐이구 주인 몰래 뒤져 오는 것이 까막뒤짐이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도적의 의미를 가진 장내기니 뜨내기니 하는 말들은 백범과 벽초만이 사용한 말이다. 이런 식의 추적은 역사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지길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다섯째 인류의 역사는 대내외적 투쟁―계급투쟁과 대외전쟁―으로 점철되어 왔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어떤 집단이 자체 방위력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무장력이라는 정치력을 담보하고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무예는 전투수단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당나라 군대부터 주한미군까지 외국군 주둔의 역사에 볼 때, 우리에게 상시적인 상무(尙武)는 지속적으로 검토해야 할 문제이다.
현대에는 무예가 스포츠로 전화되어 평화적이고 문화적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 스포츠는 비정치적인 것이지만 정치 이상의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 정치력으로서의 무예는 완력의 행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기예를 뽐내는 것과도 다르다. {장자}에는 검(劍)에 대한 고사가 있다. 검은 천자의 검, 제후의 검, 서인(庶人)의 검으로 나눌 수 있는데, 투계와 같이 싸움만 일삼는 서인의 검과는 달리 천하에 의지하여 덕으로 다스리는 천자의 검이나 제후의 검을 지향해야 한다면서 검술을 희롱하는 왕을 설득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통치의 이념이 나타나는데, 덕으로써―무예의 측면에서 보자면 무덕(武德)― 다스려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예전에는 무력으로서 정치력은 종교적 교의와 신비주의에 경도되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때때로 여기에는 상무정신이 첨가되기도 한다. 우리 역사에서 이것은 고구려의 경당이나 신라의 화랑의 경우가 그것이다.
"최치원이 난랑비문 서문에 말하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술)이 있는데 풍류라 한다. 그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실로 삼교를 포함한 것과 같다. 군생을 접하여 교화하고, 또한 집에 들면 부모에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나라 공자의 가르친 뜻과 같고, 행하지 않음의 일에 처하고 말할 수 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가름침과 같고, 악행을 행하지 않고 선행을 봉행하는 것은 석가의 가르침과 같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만물과 하나되는 정신(接化群生)은 티끌과 미물과도 평등한 관계를 맺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 자연은 물론이고 인간조차도 일체 평등한 섬김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무사라면 칼과 하나되어 무심(無心)의 상태에서 심신을 연마한다. 또한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완성이자 시작의 경계를 사유한다. 몸은 파마(破魔)의 칼날이 되고, 마음은 공검(空劍)을 거닌다.
칼날 위를 걸어서 간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피는 나지 않는다
눈이 내린다
보라 칼날과 칼날 사이로
겨울이 지나가고
개미가 지나간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
우리는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 수 있다
(정호승, <칼날>)
이런 경지라면 영화에서 각색된 황비홍과 같이 눈빛 또한 온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경각을 다투는 무예인이라면 눈빛이 예리하게 빛날 것이다. 그러나 무(武)란 본디 몸의 강직과 매서운 눈빛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술(術)이 깊어지면 유(柔)해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미 자신이 칼날이 되어 버린다면 눈빛이 날카로울 것도 섬광이 번뜩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무예의 종교적 신비주의에 상무정신의 예술적으로 결합해 있다는 우리의 무예 정신은 중국과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 보아도 뚜렷이 드러난다. 무술을 기술의 일종으로 보는 중국이나, 그것을 아예 무도(武道)로 격상시켜 보는 일본과는 다르게 한반도에서는 그것을 예술의 차원에서 무예(武藝)로 취급했다. 게다가 일본의 경우 사무라이 제도라는 독특한 전문 무사 집단의 운용 때문에 무도의 세계는 비대해졌다.
한반도와 일본의 경우 불교 종파와도 관계가 깊다. 우리는 임제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일본은 규율이 엄격한 조동종이 주류를 이루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무도는 대체적으로 선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원광법사가 세속오계를 지어 화랑도를 규율했듯이, 일본에서도 타쿠앙(澤菴宗彭, 1573-1645)이라는 선승(禪僧)이 야규우 무네노리(柳生宗矩)라는 검술가에게 검선일치(劍禪一致)의 경지를 나타낸 {부동지신묘록(不動智神妙錄)}이라는 검법책을 써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무사로 꼽히는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4-1645)가 실제로 저술했던 {오륜서(五倫書)}와 대비된다. 우리의 경우 불교 선사들에 전해 내려오는 선무도(禪武道)라는 무술도 있다.
무예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므로 지역적 환경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중국 회화의 경우 남송화와 북송화가 지역적 특성에 의해 좌우되었듯이, 소위 남권과 북권의 경우에도, 북쪽 지역인 중원에서는 말을 교통수단으로 하는 생활패턴으로 인해 발의 힘이 강해져 발차기가 특징을 이루고 있으며, 화남은 양자강으로 인해 배를 교통수단으로 하는 생활패턴 때문에 손의 힘이 강해져 권법이 발달했다.
무예는 기원이 불분명하지만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한다. 아마도 이것은 달마대사가 소림권을 창안했다는 전설에 유래한 것 같다. 물론 수행의 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토착적 사유와 불가나 도가적 사유와 결합하면서 학문적 전통은 말할 것도 없고 무예의 전통도 확립되었던 것 같다. 원광대사도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난 후 토속적 사유의 상징인 삼기산(三岐山)의 신과 타협하는 과정을 {삼국유사}에서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적 금기를 깨고 세속오계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예는 현대생활에서도 유익한 점이 많다. "무예수련을 고도화하면 신체적으로 반사적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정신은 동중정(動中靜)을 얻는 것이고, 평상심으로 고도의 동적 균형을 이룬다. 따라서 예민한 감각, 정확한 판단력, 민첩한 동작, 비범한 기억력을 갖게 된다. 특히 편리한 현대 문명생활, 도시생활로 현대인은 야생력을 상실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현대인은 멧돼지에서 집돼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무예의 수련은 야생력을 회복하기 위한 자연으로의 회귀운동이기도 하다. 야생적인 체력에 현대적인 두뇌, 그것만이 인류의 문명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주는 비결인 것이다."(임동규, <무예사 연구>, 학민사, 1994, 235쪽)
녹림전설은 계곡의 메아리가 되고
협객은 강물의 섬광을 내뿜고
흘러간다. 無心의 세월을.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풍경이 피어나는 순간
安心은 이리도 적멸하건만
누런 땅 녹두는 다시 싹을 틔우고
發心! 눈부신 노을과 함께.
협객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信)이다. 믿음은 사람의 말이다. 말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말은 표출과 표현의 문제이다. 사랑과 믿음. 협사 지백은 그 뜻을 표현했으므로 그에 대해 협객 예양은 죽음을 표했다. 뜻과 말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뜻을 개인이 아니라 나라에 적용시키면 아름다운 풍경이 연출될 것이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나라"로서 조선의 독립이 이루어지길 바랬던 김구 또한 협객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협객의 삶은 법적으로 초월해 있기도 하고, 현실을 폭력적으로 타개하려는 측면도 있다. 예컨대 일제 강점기의 조선에서는 무력이 중요한 수단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일면적으로 타당하기도 한 일이다. 허나 일본에서 무력은 정신적 수단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현재까지도 현실적 무력과 직접적으로 일치시키려는 노력도 보인다. 사무라이의 정신적 근원을 밝힌 대부분의 사람은 군국주의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며, 이들이 해외에 사무라이 정신으로 일본을 소개하는 바람에, 서구에서는 일본을 무사도 정신으로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군국주의화로 치달은 일본은 초법적 예법으로 사무라이 정신을 신비화하였으며, 이들 주체들을 현재 일본의 건국공신으로 치켜 세우고 있다. 동북아 아시아에 최초로 서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일본은 서구 자본주의의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 정신 대신에 사무라이 정신을 자본주의의 겉옷에 입혀 놓았다. 이런 부분을 세심하게 고찰하지 못하면 일본을 보는 우리의 시각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마저도 상무정신과 대륙정신이라는 신비적인 사유에 휩쓸릴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