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47호인 천전리 화랑각석은 울산군 두동면 천전리 산 207-8번지에 있다. 두동(斗東), 두서(斗西)지방은 일찌기 신라(薪羅)의 땅으로 사로6촌(斯盧六村) 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이 바로 이 땅이였고, 뒤의 6부중 사량부(沙梁部)가 이 지방이었다고 추정한다.
화랑들의 훈련방식중 명산대천을 찾아가지 아니하는 곳이 없다고 하였으니 두동 천전리와 언양 반구대 일대는 산수가 맑아 화랑들이 즐겨 찾는데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반구대에서 대곡천을 약 1km거슬러 올라가면 두동면 천전리 계곡에 이르는데 여기에 1970년 12월에 발견한 암각화가 있다. 1973년 5월 8일 국보 제147호로 지정된「천전리 각석」이 바로 이것이다. 이 각석은 보는 관점에 따라 몇가지로 갈라질수 있는데 하나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보는 편과 하나는 화랑의 유적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각석의 하중부(下中部)에는 화랑들의 서문(誓文)으로 보이는 300여자의 명문(銘文)이 화랑들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많은 부분이 마멸되고 떨어져 없어졌다. 이 화랑유적은 549년(진흥왕 10년)에서 남북국 신라 때에 음각(陰刻)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하학적 회화와 신라시대의 명문(銘文)들이 조각된 대벽화이다.
한편, 각도를 달리하여 다른 면으로 본다면 이 각암의 암석은 반구대와 마찬가지로 혈암(頁岩), 사암(砂岩), 이암(泥岩), 호층(互層)으로 형성된 퇴적암인데 반구대 암화(岩畵) 보다는 더 사암적(砂岩的)이고 암벽 전면에 금이 가고 판상박락(板狀剝落)이 곳곳에 있다. 이 석각은 우중부(右中部)에는 동심원(同心圓), 와문(渦文), 능형(菱形)등 기하학문으로 새겨졌고, 그 조법(彫法)을 보면 쪼은 것이 아니라 갈아서 패어지게 한 그림들이다. 또 그림중에는 세선각(細線刻)의 배그림도 있고 문양(文樣) 및 사슴등의 동물화가 탁각(탁刻)된 것도 있어 반구대의 것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한다. 석각의 좌부(左部)에는 문양(文樣) 틈에 끼어 눈, 코, 입을 그린 인두(人頭)같은 것이 있고, 그 위 일대에 희미한 그림들이 있어 이 각화가 오랜 시기를 두고 반복하여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이 그림에는 청동기 이전의 것도 들어있을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 석각의 중좌부(中左部)에는 희미한 문양(文樣) 바탕위에 뚜렷하게 동심원(同心圓), 능형(菱形)등이 있는데 능문(菱文)의 윤곽은 2내지 3선이고 이것이 몇개씩 연결되어 있다. 또, 암각(岩刻)의 좌부(左部)를 다시 보면 상하로 연결된 두개의 능형문(菱形文)이 5개가 횡(橫)으로 병렬하여 있는데, 능문(菱文)의 내부에 선을 그어 여자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것도 있다.
각화의 중하부(中下部)에는 고신라(古薪羅)에서 남북국 신라에 걸친 화랑들의 서문 (誓文)으로 된 명문(銘文)이 광곽(匡廓) 안에 있어 석각과 명문(銘文)을 연결시키기도 하나 각화의 문양(文樣)들이 청동기에 나타나는 문양(文樣)들과 같고, 반구대 그림과도 연결점이 있을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의 그림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이렇게 귀중한 문화유적을 가지고 있음은 마음 어느 한 속에 자랑스럽게 생각되며 이 보배들을 알뜰히 보존하고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 반구대의 각화는 지금 물에 잠겨 있어 별문제로 하더라도 천전의 석각 주위에 있는 암벽에는 많은 장난의 흔적이 있음은 심히 유감된 일이다.
*** 반구대 암각화(盤龜台 岩刻畵)
경남도 지정 지방기념물 제57호로 언양면 대곡리의 암벽에 조각된 그림이다.
옛 사람들 그림 그리는 풍습이 서양에서는 구석기시대 후기부터 있었고, 그 그림들은 채색으로 된 사실적(寫實的) 동물화(動物畵)이며, 대부분 서기전 1천년대나 그 이후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것이라 한다. 특히,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서북러시아 해안에 이르는 암석에 음각한 암각화(岩刻畵)가 유행하여 이 그림에는 사람과, 배, 말, 물개, 새, 뱀과 같은 짐승과 일윤(日輪), 발자국 원문(圓文) 등의 도형(圖形)이 뒤섞여서 그려졌다. 구석기시대의 벽화 성격이 동물 자체가 신격화(神格化) 되는데 비해 후대의 것은 사람이 주격(主格)이 되어 있다한다. 이러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지방의 암각화는 서기전 6백년경을 정점으로 급히 쇠퇴하였으나, 그러한 암각화는 시베리아 동쪽으로 뻗어 예니세이강반(江畔)의 타카르문화나 몽고(蒙古) 알타이 지방에도 존재하고 있다. 타카르 문화는 서기전 7백년에서 2백년까지 계속된 청동문화(靑銅文化)로써 우리나라 청동문화는 여기에 연결되는 것이다.
태화강중류(太和江中流) 사연리(泗淵里)에서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태화강의 지류(지류) 대곡천(大谷川)이 있다. 이 대곡천의 중류에는 산천이 수려하여 예로부터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모여들던 반구대가 있으며 사연제(泗淵堤)의 수위가 여기까지 미치고 있다. 사연제(泗淵堤) 서안에 북면하는 암벽에 암각화(岩刻畵)가 있으니 이것이 반구대암각화(반구대岩刻畵)이다.
이 그림은 1972년 1월의 이상갈수(異常渴水)로 수면위에 잠깐 출현하였던 것으로 암석은 사암(砂岩), 혈암(頁岩), 이암(泥岩), 호층(互層)으로 형성된 퇴적암(堆積岩)이며 매끈거리고 반반한 병풍같은 암면에원(圓), 와(渦), 능형(菱形)등 각종 도안문(圖案文)과 호라이, 거북, 고래, 사슴과 여러 사람이 탄 배의 그림이 있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시작한 시베리아 청동기시대(靑銅器蒔代) 암벽화와 연결을 지우는 결정적인 벽화로 보고있다.
높이는 2m, 폭8m의 암면에 그려진 그림인데 암면 전체에 큰 균열들이 있으나 수식(水蝕)이 없어 반반한 면이고 음각된 선화(線畵)를 그대로 볼 수 있다. 화면의 우단부터 보면 긴꼬리의 호랑이, 반대 방향으로 선 목이긴 사슴, 고양이, 염소, 조그마한 강아지 같은 것이 있다.
여기에 그려진 사슴이나 염소의 배가 부른데 잉태(孕胎)를 나타낸 것으로도 보인다. 그림의 우단하부(右端下部)에 따로 떨어져 있는 면을 보면 몸의 선문(線文)에 있어 호랑이 같기도 하나, 몸이 가늘고 귀가 서고 입이 뾰죽하고 사지(四肢)가 길게 뻗어 늑대를 나타낸 것 같고 아래에 고래가 그려져 있다. 이 고래는 꼬리가 뒤틀리고 수평측면(水平側面)으로 나타나 유영의 형태를 하고 있다. 좌단부(左端部)에는 고래 또는 돌고래가 있어 U자형 목책(木柵) 2개가 있으며, 고래의 모자(母子) 또는 새끼 밴 고래로 보이는 큰 어형(魚形)이 있다. 또 우향한 인물(人物)이 서 있으며 남성의 성기(惺器)가 보이고 인물의 외편에는 사지(四肢) 벌린 거북이 세마리가 있고, 그 아래에 U자형의 어망(漁輞) 같은 것이 보이며 가운데 짐승같은 것이 한마리 있으며 포수용틀 같이 보인다. 이 그물 밑에는 조그마한 배가 있고 거기에 5명 가량의 사람이 타고 있다. 중앙부 상부(上部) 좌측에는 호랑이와 목책(木柵), 반점(班點)이 있는 표범이 있다. 중앙부 상부 우측에는 머리를 수그리고 꼬리를 위로한 짐승이 있고 그 좌상방에는 사슴같은 유각수(有角수)의 머리가 있다. 또 입에서 뱃속으로 식도같은 줄기가 있으며, 몸에도 갈비뼈 같은 줄들이 있는 짐승이 있다.
이 그림들은 모두 선화(線畵)이고 영화적(影畵的)이면서 정확하게 동물들을 관찰하여 동작중의 동물들을 전개시켜 생명의 본체를 추구 또는 상징하는 자기자신(自己自身)들의 우주관을 반영하려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 암화(岩畵)는 고대인의 생활원으로써의 자연환경, 특히 동물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들에 대한 숭앙(崇仰)과 번식희구(繁殖希求)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 반구대가 당시로써는 그들에게 하나의 성스러운 장소였던 것으로 보아진다. 청동기미술(靑銅器美術)에서 언제나 사슴이 나오고 있음은 고신라금관(古薪羅金冠)의 녹각형(鹿角形) 장식과 함께 사슴을 숭앙(崇仰)하는 고대 우리 조상들의 전통을 잘 나타낸 것으로 보아진다. 이 암각화(岩刻畵)의 그려진 연대에 관해서는 결정을 본 바 못되나 화면의 그림들이 청동기에 나타나는 문양이나 화법(畵法)과 성격이 같으며 그림중에 다수인이 탄 배가 있고 신라토기(薪羅土器)에 나타나는 그림과 서로 통하고 있어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것으로 보고 있다.
*** 반구대
언양면 대곡리에 있는 명승지로 반구대산 동단에 위치한 이곳은 산수(山水)가 아름다워 사람들의 찾는 곳이 되어 왔다. 청동기(靑銅器)를 사용하던 부족국가시대(部族國家時代)부터 선인들이 이곳에서 암각화를 새겨 절세의 걸작품을 문화유산으로 남겼고, 신라(薪羅)의 화랑(花郞)들은 명산대천을 순례하면서 이 부근에 그 자취를 남겼다. 고려말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선생은 언양현요도(彦陽縣蓼島)에서 귀양살이 하면서 이곳을 자주 찾은바 있었고, 이조의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선생 및 문목공(文穆公) 정술(鄭述) 선생이 두루 돌아다니며 자연을 즐기기도 하던 곳이다.
두동면 천전(川前)으로부터 흘러오는 반구천의 구곡치는 청수(淸水)가 쉴새없이 흘러 사연제(泗淵堤)에 주입되고 30m가 넘는 반구산의 절벽은 3층대를 이루는 기암이다. 이러한 암하에는 구복형을 이룬 석산등 경치는 장관을 이루어 제2의 금강산이라 속칭하는 곳이다. 이조 숙종 임진년(1712)에 반계서원(蟠溪書院)을 이곳에 세우고 정몽주(鄭夢周, 이언적(李彦迪), 정술(鄭述)의 세 선생 유지를 받드는 수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다가 고종(高宗)때에 이르러 전국의 서원이 폐지되자, 경자년(1900)에 앞의 세 선생의 유허비(遺墟碑)와 비각(碑閣)을 세워 만대에 그 뜻을 전하고 있다.
*** 반계서원 유허비(磻溪書院 遺墟碑)
언양면 대곡리 반구대에 잇는 향토문화재로 문충공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언양의 요도(蓼島)에 귀양살이를 할때 이곳 반구대를 즐겨 찾는바 있었고 문목공 정술(鄭述), 문원공, 이언적(李彦迪)선생 또한 놀던 곳이라 숙종(肅宗) 38년(1712)에 서원을 세워 앞의 세 선생을 모셔 그 높고 곧은 뜻을 이어받고 유생들이 학구하여 오다가 영조(英祖) 4년(1728)에 화재(火災)를 입어 이듬해 다시 세웠으나 고종(高宗) 8년(1871)의 서원 폐지령에 따라 문을 닫게됨에 유생들이 이를 만세에 기념하기 위하여 고종(高宗) 광무4년(1900)에 정몽주(鄭夢周), 이언적(李彦迪), 정술(鄭述) 세 선생을 추모하는 유허비와 비각을 세워 지금에 이른다.
*** 두서(斗西) 구량리 은행나무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64호로 1962년 12월에 지정됐으며, 두서면 구량리 360번지의 논 가운데 있다. 수령이 약 500여년 된 이 거대한 은행나무는 한성판윤 이지대(李之帶)가 심은 것이다. 고려때의 익제(益齊), 이제현(李齊賢)의 4대손인 그는 이조 태조때에 경상도 수군만호로 있으면서 왜구(倭寇)가 탄 배 한척을 잡은 공으로 태조 3년(1394) 3월 임금께서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문화(李文和)를 보내어 상으로 술과 비단을 하사(下賜)한 후 누진(累進)하여 한성판윤(漢城判尹)까지 벼슬이 올랐다. 단종원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에 압치하여 군국(軍國)의 일을 독단(獨單)하고 왕위를 찬탈할때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남(落南)해서 구량(九良)에 살았다. 이 은행나무는 이때 손수 심은 것이라 전한다. 은행나무는 중국, 만주, 일본등 널리 분포하는 나무로 은행목(銀杏木), 행자목(杏子木), 공손수(公孫樹), 백과목(白果木) 또는 압각수(鴨脚樹)등의 명칭을 가진다. 용도로는 조각, 기구재, 정자 및 풍치목으로도 이용될 뿐 아니라 그 열매는 식용이나, 약용으로도 쓰이고 근자에는 도시의 가로수로도 각광을 받는 나무이다.
** 다개리 고분군(茶開里 古墳群)
울산군 언양면 다개리에 분포된 향토문화재로 언양면 다개리(茶開里)와 두서면(斗西面) 차리(次里) 경계를 이루는 곳에 하나의 고개가 있는데, 다개리(茶開里) 주민들은 차곡(次谷) 고개라 하고 차리(次里) 사람들은 다개(茶開)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는 고헌산을 등지고 다개 일대와 차리(次里)들(野)이 펼쳐진 곳이다. 다개리(茶開里)의 공동묘지로부터 그 뒷편 일대에 군재해 있던 이 고분군은 큰 봉분이 남은 석곽분이다. 일부 도굴되어 큰 석판(石板), 토기편(土器片)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두서면도 사로육촌(斯蘆六村) 가운데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이었던 땅으로 여기에도 일찍 선민이 정착하여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아진다.
** 언양읍성(彦陽邑城)
사적 제153호로 1966년에 지정되었으며, 언양면 서부리에 있다. 언양읍성(彦陽邑城)은 여러 차례에 걸쳐 그 규모를 확장하여 온 성(城)으로 여러 문헌을 통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는
『읍토성 주회일오칠보 내유정이
邑土城 周回一五七步 內有井二』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지금있는 언양읍성은 연산군 6년에 현감 이담룡(李聃龍)이 석성(石城)으로 개축(改築)한 성(城)이다. 문종(文宗) 1년에는 현북(懸北)의 산성(山城)으로 옮기려 했다가 축성(築城)이 어려울 뿐 아니라 산성을 쌓는다 해도 백성들이 거주하기에는 마땅치 못함으로 그대로 성을 확장하였다. 언양읍성의 특징은 평지에 점(占)한 전형적인 읍서의 하나로 동서와 남북이 각 260m 의 정방형인데 각변에 성문을 두고 성문에는 옹성을 배치하였다. 또 이성은 거대한 바위를 면만 거칠게 다듬은 거석 위에 큰돌을 넣어 큰돌 사이에 많은 잔돌을 끼워 쌓은 견고한 성으로 성기(城基)의 돌출(突出)한 부분은 문지(門址)나 포루(砲樓)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성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것을 1617년(광해군 9년)에 개수(改修)하였다.
** 청송사지 삼층석탑
울산군 청량면 율리 1202번지 청송사지(靑松寺址)에 있으며, 보물 제382호로 1961년 2월에 지정되었다. 울산지방의 문화재 가운데 국가가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것이 11점이 있으나 탑으로써는 오직 이것 뿐이다.
이 탑은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며, 상하 기단에는 모두 하나의 탱주(撑柱)로 구분하였고, 탑신은 3개 모두 우주(隅柱)를 나타내고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3개층이 5단의 옥개받침의 수법을 취했고, 상륜부(相輪部)는 결실되고 없다.
탑의 특징은 1층탑신이 너무 크고 옥개석(屋蓋石)의 옥개처마가 짧은 편이다. 1962년에 해체하여 다시 복원한 것이나 서편에서 볼때는 직립(直立)한 감을 잃고 있다. 탑의 높이는 5.5m나 되는 큰 것이며, 남북국시대때 신라에서 축조한 우수한 탑이다. 근래에 와서 탑의 주위환경을 다듬어서 보물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1962년에 해체 복원할 때 윗층의 기단부에서 지름 15.8m, 높이 10.5cm의 청동제 유개사리완(靑銅製 有蓋舍利완, 완:주발 완)이 나왔다. 이 사발 속에는 30여점의 유물이 들어 있었는데 전체 높이 9.1cm, 입상높이 8cm의 청동여래입상(靑銅如來立像)도 들어 있었다. 이 청동제입상의 광배(光背)는 없고 좌대(坐臺)는 결실되었다. 또 여러개를 엮은 염주옥(念珠玉), 유리환관옥(琉璃환菅玉), 반구형옥(半球形玉), 유리염주 환석광석(琉璃念珠 丸石鑛石)등도 같이 나왔으나 사리(舍利)는 볼 수 없었다.
울산지방에 현존하는 탑은 많으나 탑 속에서 유물이 나온것은 청송사 탑 뿐이다. 동유개완(靑銅有蓋완, 완:사발 완)은 오래되어서 뚜껑의 부식이 심한 상태이다. 여기서 나온 유물은 지금 국립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환 : 둥글 환
** 망해사지 석조부도
보물 제173호로 1938년 5월에 지정되었고, 소재지는 청량면 율리 망해사지이다. 만들어진 시기는 남북국시대 후기이며, 부도의 높이는 약4m로 같은 규모의 부도가 동서 2기가 양립하고 있는데, 1960년 11월에 지금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부도의 각부 구조수법이나 조각됨이 다소 연약하고 형식화된 감도 없지 않으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기본양식(基本樣式)을 가진 가작(佳作)이다. 방형(方形)으로된 기단위에 놓인 하대석(下대石)은 팔각각면(八角各面)에 안상(眼像)을 음각(陰刻)하고 상측복엽(上側複葉) 8판(瓣)의 복연각판단(伏蓮各瓣端)에는 귀꽃이 있다. 중대석(中大石)은 각우각(各隅刻)에 주형(柱形)이 조각되어 있고, 상대석은 3단의 각형(角形)위에 단엽연화(單葉蓮花)가 6판식으로 2중 조각되어있다. 각 우각(隅角)에 주형(柱形)을 각(刻)한 탑신(塔身)의 전후좌우 사면에는 호부(戶部)를 각출(刻出)하였고 옥개석(屋蓋石) 위의 상윤부(相輪部)는 망실(亡失)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