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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은 아침 일찍 읍내를 돌았지만 오늘따라 택시를 타는 손님이 별로 없다.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거나 사람들의 생업이 바빠져야 아무래도 택시를 찾는 손님들이 다소 있지만, 방학을 하여 가족들이 읍내바깥으로 빠져나가거나 더위를 피하여 그늘나무 아래서 생업을 잠시 중단하는 시간에는 손님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회사에 내는 사납금은 그 날 꼬박 꼬박 내어야 하니 어떤 날은 사납금을 채우는데도 급급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하루 종일 택시를 운전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직업이 아니다.
처음엔 괜찮지만 몇 시간을 계속해서 택시 안에 앉아 있다 보면 다리가 저려오고 허리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편하게 앉아 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그날은 사납금을 채우기가 어려워진다.
그러한 원인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택시기사들이 사납금제도를 폐지하고 월급제를 시행하자고 시위를 하기도 해 보지만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세상이 결코 아님을 잘 안다.
택시영업이란 직업이 힘들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소위 막장 직업이 되고 말았다. 회사를 다니다가 잘리거나 다른 직업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래도 운전면허증이 있다 보니 마지막으로 찾는 것이 이 직업이 되고 말았다. 자신도 사업을 한답시고 펼쳤다가 결국엔 이 직업을 택하지 않았던가? 물론 회사소속이 아닌 개인택시의 경우는 예외가 되겠지만...
오전시간을 거의 공치다시피 하고 단골집에 들러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그동안의 짖은 비로 인하여 습도가 높아 짜증스러웠다.
청도역 주변을 돌고 있는데 30대 초반의 여인이 손짓을 하였다. 모처럼 한건 하는가 생각되어 급히 다가가 차를 세웠다.
“아저씨! 여기서 표충사가 멀어요?”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겁니다.”
“요금은 어떻게 되는데요?”
“요금은 아가씨가 알아서 주십시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아저씨 이상하시다.”
“4만원 조금 넘게 받는데요. 아가씨가 알아서 주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4만원에서 기분 좋으면 더 드리면 된 다구요?”
“예! 그렇게 하세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타면 되죠?”
“예!”
정석은 손님이 없던 데다 오랜만에 장거리 손님이 걸려 마음속으론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그녀가 기분 좋게 아가씨라고 불러주고서는 기분이 좋으면 목적지에 도착해서 만원이라도 더 얹어주면 하는 마음이었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뒤 좌석에 탄 그녀는 잠에 빠져 들었다. 아마도 말투로 보아서 서울에서 곧장 온 것 같아 보이는 것이 그동안의 여행에 매우 지루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휴가철이 지난 시기라 도로는 한적하였다. 그래도 평소 습관처럼 손님을 태웠다고 생각하니 그녀가 잠에서 깨자않게 조심스레 페달을 밟고 있었다. 에어컨을 켜다가 창문을 조금 열어보지만 후덥지근한 날씨는 영 내키지 않았다.
드디어 1시간을 조금 넘게 달려 단장면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도로 사정이 별로 좋지 않고 급 커버가 자주 나타났다. 그래도 오늘의 사납금을 채울 생각에 마음이 바빠져 엑셀에 힘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맞은편에서 갑자기 시커먼 승용차 한 대가 갑자가 나타났다. 정석은 급히 핸들을 꺾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한동안 핸들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누군가 차문을 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차창 밖에는 검은 티를 입은 건장한 두 청년이 서 있었다. 첫눈에 보기에도 그들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야! 빨랑 내리지 않고 뭐해?”팔에다 문신을 한 사내가 정석의 어깨를 잡아끌며 차 문을 열었다. 밖으로 끌려 나가며 뒤를 보니 아가씨는 놀란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이봐! 기사 아저씨! 도대체 운전을 눈을 감고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차가 너무 빨리 와서...”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우리차가 얼마짜린 줄 알기는 하는 거야?”
“어째든 서로가 잘못해서...”
“뭐라고? 야 이 양반 배짱한번 두둑하구만...이 친구 어째 버릴까?”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고쳐 드리겠습니다.”
“고쳐준다? 암 당연히 고쳐 주어야지. 가진 돈은 얼마나 있어?”
“지금은 없습니다. 영업을 못해서.”
“그럼 어떻게 고쳐 준다는 거야?”
“보험처리 해 드리겠습니다. 회사에 연락을 해서.”
“갈수록 태산이구만, 당신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중 알아? 자 차에 있는 여자는 누구야? 마누라야?”
“아닙니다. 손님입니다.”
“그래? 안 그러면 우리가 잡아 둘까 하였는데...돈도 없다. 이거 모가지 빼라 이거구만...야! 정말 돈 없어?”
“예! 정말 없습니다. 믿어주세요.”
“믿긴 뭘 믿어? 이걸 패 죽일 수도 없고...할 수 없지. 회사 전화번호 적힌 명함이라도 내놔. 그리고 당신이 일방적으로 잘못 한 거야. 뒤에 다른 소릴 해봐. 회사로 찾아가서 그냥... ”
“아 예! 알겠습니다.”
정석은 무릎을 꿇다시피 하여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차를 둘러보니 앞 범퍼가 반쯤이나 떨어져 나갔다. 하는 수 없이 아가씨에게 양해를 구하니 그녀는 2만원을 주고 내려 버렸다.
정석은 하는 수 없이 회사에다 전화를 하고 차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도 뭔가 더럽게 재수가 없고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에 울화통이 터졌다.
소연은 정형외과 외래에서 20여분을 기다리자 의사가 진찰실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의사는 한동안 필름을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다행이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많이 충격을 받았어요. 한 이틀정도만 입원을 해서 치료를 받으세요.”
“입원을요?”
“지금 움직이면 좋지 않습니다. 한 이틀 정도만 안정을 취하세요.”
“예!”
“김 간호사! 환자 분 입원수속 밟도록 해요.”
“이리 나오셔서 밖에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 참! 신경정신과 장선생님이 오시기로 하였어요. 연락이 왔던데요.”
“예! 장선생님이요?”
“예! 조금 기다리시면 오실 거여요.”
소연은 입원을 하라는 의사의 말에 가뜩이나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편이 장선생과의 사이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터에 이곳에 입원을 하면 장선생과 자연스레 접촉을 하게 될 것이 불을 보 듯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호의를 무턱대고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에게 사실을 털어 놓을 수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의 고민에는 아랑곳없이 10여분이 지나자 어느 새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주열이 달려왔다.
“민수 어머니! 입원하시라고 한다면서요?”
“예! 그렇게 되었어요. 집에 가야하는데...”
“그냥 의사선생님 시키는 대로 하세요. 안 그러심 몸 상해요.”
“큰일이네 갑자기 입원을 하라고 하니.”
“따로 준비 하실 것 없어요. 그냥 입원 수속만 밟으세요. 일단 원무과로 가시죠.”
“아 예! 혜리야! 민수 데리고 가자.”
“애들아! 선생님 따라 가자. 엄마 모시고.”
주열이 가볍게 소연의 등을 밀었다. 소연은 그의 접근을 피하고 싶었지만 입원수속을 받는 절차도 모르고 어떠한 준비물이 필요한지도 알 수가 없어 그의 도움을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소연은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어디에서 택시를 몰고 있을까? 자신이 이 병원에 입원을 하면 또 어떤 구실로 자신을 의심할까? 소연은 그러한 생각을 하니 입원이고 뭐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민수 어머니! 이리로 오세요.”
주열의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애들과 주열은 벌써 입원창구에서 수속을 밟고 있었다. 주열이 나서서 처리하다보니 입원 수속은 간단했다.
“입원실은 2시간쯤 있다가 올라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애들은 어떻게 할까요? 제가 집에 태워다 주면 어떨는지?”
“아 아닙니다. 나중에 애들 아빠에게 연락을 해야지요. 선생님 바쁘실 텐데 이만 가보시면...”
“그럼 민수 아버지 오시기 전까지 조금만 있다 갈게요. 밖에 나무 밑으로 가시죠.”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저 나중에 어딜 좀 가야하는데, 그동안에 시간이 남아서요. 부담 가지지 마세요. 그러고 싶어서요.”
“하지만...”
“애들아! 바깥에 있는 나무 밑으로 가자. 아이스크림 사갈까?”
“예! 선생님.”
“민수 아이스크림 좋다.”
“자 그럼 엄마 모시고 먼저 가라. 아저씨는 마트에 들러서 갈게.”
소연은 혜리와 민수를 데리고 병원의 정원으로 나왔다. 커다란 느티나무에서는 매미들이 못 다한 일을 끝내려는 듯 목청을 다하여 울어대고 있었다.
소연은 아이들을 나란히 자신의 양쪽에 앉게 한 뒤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아이들이 소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무엇인가 말을 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나보다. 드디어 소연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 아빠한테는 우리가 의사선생님 만났다고 이야기하면 절대 안 된다.”
“왜?”
민수가 이상하다는 듯이 소연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혜리가 민수의 말을 받았다.
“바보야! 전번에도 그 선생님이 나를 태워다 주셨다고 엄마하고 싸웠잖아. 아빠는 의사 선생님이 미우신가봐.”
“엄마! 그런 거야?”
“민수야 그건...하여간 아빠한테는 비밀로 해야 된다. 알겠니?”
“알았어. 엄마! 걱정 마! 절대 비밀 지킬 게.”
“그 선생님 좋은데...”
“민수야! 그래도 아빠가 또 엄마하고 싸우면 좋겠니?”
“아니. 민수 아니다.”
소연이 병실에 올라 온지 2시간쯤 지나자 뭔가 불만이 가득 찬 모습을 한 남편이 나타났다. 어디가 아프냐? 고 묻지도 않고 씩씩대더니 아이들을 집에다 데려다 놓고 오겠다며 병실을 나선다. 같은 병실에 있는 할머니가 남편이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소연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하고 말았다.
소연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대체로 건강한 편이어서 병원에 입원을 해 본적은 없었다. 남들이 입원을 하면 그저 그렇거니 생각해 왔었는데 막상 자신이 입원을 해보니 모든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통제를 받아야 하고, 자유로이 나다닐 수가 없다는 것이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이곳 병실은 침대가 4개인데 비하여 환자가 많지 않아 할머니와 둘만이 병실을 사용하고 있다. 할머니는 슬하에 아들 한명과 딸 한명을 두었었는데, 젊어서 남편이 죽고 아들이 돈을 벌겠다고 원양어선을 탔다가 북태평양 근처에서 실종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딸은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서 겨우 겨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청도 근처 시골에서 적은 규모의 농사를 짓고 사는데 밭일을 하고 돌라오다 언덕에 굴러 떨어져서 다리를 다치셨단다.
딸은 매일 면회를 오지 못하고 2∼3일에 한 번씩 들리곤 한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병실에 혼자 계시다가 소연이 오니 말동무가 생겨서 좋다고 연신 말을 걸어오신다.
“새댁은 얼굴도 참 곱다. 올해 몇 이시요?”
“할머니 저요? 서른일곱입니다.”
“참 좋을 때다. 애는 두 명이고?”
“예! 할머니.”
“신랑은 뭐 하는 사람이고?”
“택시 운전해요.”
“돈은 잘 벌어 오겠네.”
“아니에요. 할머니 그저 그래요.”
“한창 젊을 땐데 열심히 벌어야지. 나 같은 늙은이야 오갈 데도 없지만...”
“할머니! 왜 그러세요? 따님도 있다면서요?”
“있으면 뭐 한다 노? 제 내들 먹고 살기도 빠득한데.”
“따님이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응! 새댁이랑 비슷 할거여. 올해 몇이더라...”
“됐어요. 할머니! 모르셔도 돼요. 그냥 쉬세요?”
“신랑하고 싸우지 마. 다 없어지고 나면 그땐 눈에 어른거려.”
“제가 싸운 것 같아 보여요?”“신랑 얼굴에 나타나던 데, 제발 그러지 말아.”
“알겠어요. 할머니. 별거 아니에요.”
“암! 잘 지내야지. 그렇고말고...”
“할머니는 혼자 사시니 외로우세요.”
“그럼 그걸 말이라고 해. 제일 힘든 게 사람 그리운 거야.”
“따님 가까운 데로 이사를 가시지요.”
“에이 구! 내가 제 내들 사는데 가서 무슨 짐이 될라고.”
“그래도 따님도 어머니 보고 싶을 거고, 손자들도 보시고 안 그래요?”
“그게 사는 게 힘들어. 너무 힘들어. 새댁은 열심히 잘 살아.”
“예! 할머니 고맙습니다. 이제 밤인데 좀 주무세요.”
“그래 그럴 겨. 새댁도 좀 쉬어.”
“예! 할머니.”
소연은 한숨을 쉬어가며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일찍 가버린 그녀의 남편과 아들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배어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소연은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신의 허리통증 보다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게 젖어오고 있었다.
무엇인가 수레바퀴가 구르는 것 같은 소리에 잠을 깨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6시가 넘고 있었다. 간밤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조금 있다 남편이 돌아 간 뒤에도 한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가슴에서 맴돌며 떠나지 않았고, 아이들과 지금까지 살아 온 과정에 대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었다.
매사에 불성실한 남편과의 일상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 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내내 그녀를 잠들지 못하게 한 요인 이었다.
잠시 흐릿한 머리를 가다듬으려 도리질을 쳐 보았다. 할머니는 아직도 깊게 주무시는지 가벼운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애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민수와 떨어져 있기는 처음인데 잘 적응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였다.
잠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누군가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고개를 돌려보니 다름 아닌 남편이 아닌가?
“벌써 일어난 거야?”
“이 아침에 뭣 하려와요. 애들이나 좀 안 챙기고.”
“혜리가 일찍 일어나서 식탁에 밥 먹을 수 있도록 챙겨 주고 운행 나가는 길에 들렀어. 그냥 있어 내 밖에서 담배한대 피고 갈 테니.”
“그래요. 여긴 신경 쓰지 말고.”
남편은 같이 있는 것이 쑥스러운지 서둘러 밖으로 나가 버린다. 소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의 왕래가 별로 없는 탓으로 주변은 조용하기만 하다. 기지개를 켜려다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느 새 열려진 문으로 들어왔는지 자신의 등 뒤에는 주열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으 응! 자 장선생님!”
“잘 주무셨어요?”
“네에 그런데 아침 시간에 어쩐 일로?”
“어제 늦게 병원에 들어 왔어요. 잘 계시나해서 와 본 거죠.”
“그래도 갑작스레...”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하긴 평소에도 그러 하시지만.”
“전 환자예요. 환자가 무슨...”
“환자 이전에 제가 관심을 많이 갖는 사람이지요. 민수 어머니는.”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제가 민수 어머니께 관심이 많습니다. 오래 전부터요.”
“선생님! 그런 말씀하시면...”
“사람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마음이 끌리는 걸 어떡합니까?”
“감히 제 같은 주제에...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말이 안 돼요? 민수 어머니!”
주열이 갑자기 소연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소연은 깜짝 놀라며 그에게서 손을 빼내며 말한다.
“선생님 이러시면 큰일 나요. 그리고 밖에 애들 아버지가 있어요.”
“예? 아 바깥에 앉아 있던 사람이 민수 아버지?”
“그래요. 선생님이 저희한테 잘 해 주시는 걸 못 마땅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선생님 얼굴도 알고 있어요.”
“원 별 그런 사람이 다 있어. 알았어요. 그렇다고 제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갈게요. 나중에 다시 올 겁니다.”
“그러지 마세요.”
“갑니다.”
“저기 잠깐 나갈 때 할머니한테 문병 오신 것처럼 하세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주열은 여인의 등을 한번 쓰다듬고 이마에다 기습적으로 입술을 대고는 문을 나서며 일부러 큰 소리를 외친다.
“할머니 나중에 또 들릴 게요.”
얼들 결에 다른 사내의 더운 입김이 자신에게 와 닿자 소연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저 평범하게 사람사이에서 생기는 좋은 감정인 줄로만 알았지 그녀의 손을 움켜잡고 키스까지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주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5년 전의 일이다. 부산의 대학병원에서 소견서를 받아 소개를 해 준 이곳 병원에 와서 주열을 찾았다.
신경정신과 외래에서 기다리는데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성격의 주열이 나타났다. 누가 보다도 호남 형이고 마음이 끌리는 남자였다. 그러나 상대는 의사이고 소연 자신은 두 아이를 가진 유부녀가 아닌가?
소견서를 보이며 대학병원에서의 진료과정을 이야기 하였더니 자신을 찾아 온 것이 잘 되었다면서 앞으로 민수에 대하여는 부담 없이 진료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연더러는 어디선가 한번 본 듯한 얼굴이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었고, 나이를 따져 보더니 자신이 세 살 아래라고 하면서 마치 친 누님처럼 느껴진다고도 말하였었다.
이후에도 그는 민수에 대하여 정성스레 진료를 해 주었고, 소연에게도 남다른 친절을 베풀어 오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남편이 들어오더니 병실을 한바탕 둘러보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소연은 주열이 평상복 차람으로 오긴 하였지만 자세히 보았다면 분명 얼굴을 알아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남편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으로 입원까지 하게 된데 대한 미안한 감정 때문이지, 아니면 다음 기회로 미루어 놓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남편이 나가자 할머니가 잠에서 깨어나셨다. 주변을 둘러보시더니 나지막하게 말을 건넨다.
“새댁! 누가 아침에 다녀간 거여?”
“예! 애들 아빠가 다녀갔어요.”
“아! 그랬구나. 그나마 다행이네 암! 그래야지.”
“그런데 잘 주무셨어요?”
“음 내가 평소엔 잠이 적은데 병원에 오니 잠이 많아지네.”
“그게 좋은 거여요. 안 그러면 지루하시잖아요.”
“그건 그려. 새댁은 많아 안 잤어?”
“예! 전 조금 밖에 못 잤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러면 쓰나. 많이 자야지.”
소연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통증부위에 연고를 발라주고 진통제를 먹는 것 정도였다. 다만 의사가 입원을 권유하는 것은 그대로 집으로 가서 자칫 움직이기라도 하면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낮 동안에도 주열이 두 차례나 다녀갔었지만 소연은 그가 오는 낌새를 알아채고 자는 척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면 그는 소연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고 손등으로 그녀의 얼굴을 문지르고 아쉬운 듯 병실을 나갔다.
저녁엔 그녀의 남편이 다녀갔지만 별다른 이야기는 없이 애들 이야기로 대신하고 말았다. 소연은 남편이 아무래도 주열이 다녀 간 사실을 알고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