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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행복, 자녀와 행복
교사, 이웃, 동료, 부모, 친구, 연인, 아이들, 삼촌, 사촌, 코치, 택시기사, 바텐더, 미용사, 치과의사, 광고주 등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 중 누군가는 우리가 단순히 상상만 해보는 어떤 경험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고, 그 경험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경험, 그리고 상상해볼 수 없는 경험에 대해 이들의 경험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적성 상담원은 우리에게 최상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비평가는 최고의 레스토랑이 어디인지 알려주며, 여행사 직원은 최상의 휴양지가 어디인지 알려주고 친구들은 최상의 여행사가 어디인지 가르쳐준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 상의할 사람들, 역할 모델, 인생의 고수, 인생의 스승, 참견장이, 그리고 친척이 많기 때문에 어디서 살지 직장은 어디로 정할지 누구와 결혼할지 등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우리가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평균적으로 미국인은 평생 동안 여섯 번 이사하고 열 번도 넘게 직업을 바꾸며 한 번 이상 결혼한다.) 그만큼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많이 한다는 증거다. 인류 공동체를 우리가 미래에 어떤 일을 경험했을 때 느끼게 될 감정을 알려주는 정보로 가득 찬 도서관이라고 한다면, 그 도서관을 두고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선택의 실수를 범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수용하는 조언이 틀렸을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조언은 훌륭하지만 우리가 그 조언을 거부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 맞을까? 타인의 틀린 조언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좋은 조언도 무시해버리는 것일까? 두 질문의 해답은 모두 ‘YES’이다.
철학자 Bertrand Russell은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 가운데 가장 사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 가운데 가장 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와 닮은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해 유전자를 퍼뜨리듯, 우리는 우리와 마음이 닮은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념을 퍼뜨린다. 실제로 우리가 남에게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들의 사고를 바꾸려 한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그들의 방식이 우리의 관점과 더욱 비슷해지도록 만든다.(Almost any time we tell anyone anything, we are attempting to change the way their brains operate-attempting to change the way they see the world so that their view of it more closely resembles our own.) 숭고한 주장(“신은 당신을 향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에서부터 평범함 주장(”신호등에서 좌회전해서 2마일 더 가시면 오른편에 던킨도너츠가 보일 거예요”)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주장은 말하는 사람의 신념과 듣는 사람의 신념이 일치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런 시도는 때에 따라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특정한 신념이 우리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성공적으로 전달되게 하는 결정 인자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부정확한 신념이든 정확한 신념이든 의사소통을 증진시킬 수만 있다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만일 어떤 부정확한 신념이 한 사회를 안정된 사회로 만드는 기능을 한다면 그 신념은 계속 전파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 신념이 있는 사람들은 결국 안정된 사회에서 살게 되기 때문이고, 안정된 사회는 다시 그 신념을 전파시킬 수단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False beliefs that happen to promote stable societies tend to propagate because people who hold these beliefs tend to live in stable societies, which provide the means by which false beliefs propagate.)
행복에 관한 우리 사회의 신념 중 일부가 이런 성격을 지닌 부정확한 신념이다. 특히 돈에 관한 신념이 그렇다. (Some of our cultural wisdom about happiness looks suspiciously like a super-replicating false belief. Consider money.)
한 번이라도 무언가를 팔아보려고 시도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 가능한 한 높은 값을 불렀을 것이고, 사려는 사람은 가능한 한 낮은 값을 불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그 거래의 결과로 자신이 적은 돈을 갖게 될 때보다 많은 돈을 갖게 되는 것이 더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신념이 바로 경제활동의 기초다. 그러나 돈과 행복에 대한 이런 신념을 뒷받침해주는 과학적 증거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빈약하다. 수십 년간 부와 행복 사이의 관계를 연구한 경제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의 결론은 ‘절대 빈곤 상태에서 중산층에 이르게 하는 동안에는 부가 행복을 증진시키지만, 그 다음부터는 부가 행복을 증가시키는데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다(Wealth increases human happiness when it lifts people out of abject poverty and into the middle class but that it does little to increase happiness thereafter.)’는 것이다.
따라서 연간 5천 만원을 버는 사람은 매년 1천 만원을 버는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 그러나 매년 50억원을 벌어들이는 사람이 매년 1억원을 버는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빈곤한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비교적 부유한 국가에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덜 행복하지만, 그렇다고 비교적 부유한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이 매우 부유한 국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를 두고 경제학자들은 부는 ‘한계효용체감’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굶주리고 춥고 아프고 피곤하고 두려움에 떠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이 상태로부터 벗어나면 그 다음부터 돈은 갈수록 쓸모가 없어지는 종이조각과 같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음식과 돈을 충분히 얻어 더 이상 그것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계속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일까? (If food and money both stop pleasing us once we’ve had enough of them, then why do we continue to stuff our pockets when we would not continue to stuff our faces?)
아담 스미스는 부의 생산이 반드시 개인의 행복의 원천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심각한 경제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경제가 활성화하려면 사람들이 각자가 보유하고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끊임없이 획득하고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물건(재산)을 소유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허기가 있어야 한다. 만일 모든 사람이 자신이 현재 소유한 것에 만족한다면, 그 경제는 점차 소멸되어 결국 정지하고 말 것이다. 이는 심각한 경제문제이긴 하지만. 심각한 개인 문제는 아니다. 경제기획원 장관이야 매일 아침 시장경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욕구와 함께 눈을 뜰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은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려는 욕구와 함께 아침을 맞는다. 다시 말해 활발한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인 욕구와 행복한 개인의 근본적인 욕구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가 아니라 경제 시스템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매일같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동기는 무엇일까? (So what motivates people to work hard every day to do things that will satisfy the economy’s needs but not their own?)
다른 사상가들처럼 스미스도 사람들이 원하는 단 한 가지는 ‘행복’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부의 생산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경제는 꽃이 피고 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이 이처럼 잘못된 신념을 붙들고 있는 경우에만 그들은 생산하고 획득하고 소비하는 일을 충실히 할 것이고 그래야만 경제가 유지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부와 위대함이 주는 즐거움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고귀한 것으로 상상하기 쉽다. 그래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기꺼이 감수하는 고생과 불안도 가치 있어 보인다. 바로 이러한 기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류의 산업은 끊임없이 돌아가고 유지된다. 이 기만은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고 집을 짓고 도시와 국가를 건설하며 모든 과학과 예술을 향상시키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삶을 기품 있고 우아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이것은 전 지구의 모습을 통째로 바꾸어놓고, 거친 숲을 평평하고 비옥한 평원으로 변모시켰으며 불모의 해양을 또 다른 생계 자본이자 지구상 여러 나라 사이의 의사소통의 통로로 탈바꿈시켰다.
요약하자면 부의 생산이 반드시 개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경제 시스템의 필요를 채워주고 또한 안정된 사회의 욕구를 해결해주며, 안정된 사회는 행복과 부의 관계에 대한 근거없는 생각을 전파시키는 네트워크로 작용하게 된다. 다시 말해 개인이 노력할 때만 경제는 성장하는 법인데, 개인은 오직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만 노력하기 때문에 그들이 ‘생산과 소비가 개인적 행복의 필수요소’라는 망상에 빠져야만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Economies thrive when individuals strive, but because individuals will only strive for their own happiness, it is essential that they mistakenly believe that producing and consuming are routes to personal well-being.) 신념이 전파하는 게임에서는 잘못된 신념을 전파시키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가 선량한 대중에게 엄청난 속임수를 쓸 필요는 없다. 비밀 음모 결사단이나 불공평한 법정, 또는 자신들의 교리를 주입하고 선전하기 위해 교묘한 프로그램을 가진 조작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잘못된 신념 그 자체가 ‘초복제자(super-replicator)’가 되어 그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 그것을 전파하는 일을 스스로 하게 만들어버린다.
돈과 행복에 대한 신념 뿐 아니라 자녀와 행복에 대한 신념도 이런 종류의 거짓 신념에 해당한다. 모든 인류 문화는 그 구성원에게 자녀가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미래의 자녀든 현재의 자녀든, 사람들이 자녀를 생각할 때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요람에 누워 있는 아이 볼에 얼굴을 대고 얼러주는 것,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잔디밭을 가로질러 뒤뚱뒤뚱 걷는 사랑스러운 모습, 학교 고적대에서 트럼펫과 튜바를 부는 똘똘한 아들과 딸의 예쁜 모습, 좋은 대학을 나와 멋진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훌륭한 직업, 사탕 하나만 주면 그저 좋아서 안기는 마냥 예쁜 손자 손녀들…. 물론 장차 부모가 될 사람들은 기저귀도 갈아주어야 하고, 숙제도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대체로 그들은 부모가 되는 일을 행복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가 되려고 한다. 그리고 부모가 되고 나서 자신이 엄마, 아빠 노릇을 했던 지난날을 뒤돌아볼 때는, 부모가 되기를 학수고대했던 사람들이 기대했던 그 감정을 회상해낸다. 우리 가운데 이렇게 기분 좋은 상상과 회상에 싫증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에게도 36세 된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녀석이 내 삶에서 최대의 즐거움이라고 자신한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누리고 있는 즐거움은 대체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나와 똑같이 자기 자녀들을 가리킬 것이다.
하지만 자녀를 둔 사람들의 실제 만족도를 측정해보면 예상 밖의 결과가 나타난다. 부부는 대개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만족도가 떨어지고, 자녀가 집을 떠날 때쯤이 되어서야 처음에 그들이 누렸던 만족도를 회복한다. 우리가 대중지에서 읽었던 것과 달리, 소위 ‘빈둥지 증후군(성장한 자녀를 모두 떠나 보낸 노부부에게 나타나는 증후군)’에서 발견되는 증후라곤 나날이 웃음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만족도 패턴은 남성보다 여성(대개 자녀를 돌보는 일차 양육자)에게 더 잘 적용된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여성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먹고 운동하고 쇼핑하고 낮잠 자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 아이들을 돌볼 때 그들은 덜 행복하다고 한다. (Careful studies of how women feel as they go about their daily activities show that they are less happy when taking care of their children than when eating, exercising, shopping, napping, or watching television.) 실제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집안일을 하는 것보다 약간 더 즐거운 일일 뿐이다.
사실 이것은 그리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 양육이 엄청나게 고되다는 점을 알고 있다. 물론 부모가 되어 매우 보람 있는 순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엄청 지난 후에나 마지못해 고마운 척하는 아이들을 위해 커다란 자기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부모가 되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인데 왜 우리는 부모가 되는 것을 매우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우리 사회의 주요 구성원인 어머니, 삼촌 그리고 주변인들과 하루 종일 전화로 이야기하고 있고, 그들은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생각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확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널리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그 말을 사실이라고 믿을 뿐이다. 다시 말해 ‘자녀는 행복을 불러온다’는 신념은 ‘초복제자’이다. (“Children bring happiness” is a super-replicator.) 신념-전달 네트워크는 그 메시지를 전달할 사람을 끊임없이 채워 넣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들이 행복의 원천이라는 신념이 우리의 문화적 지혜의 일부가 된 것은 이에 반대되는 신념을 보유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놓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념-전달 게임은 자녀와 돈이 행복을 불러올 것이라고 믿어야만 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는 그런 신념의 진실 여부와는 무관하다. (The belief-transmission game is rigged so that we must believe that children and money bring happiness, regardless of whether such beliefs are true.)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당장 일을 그만두거나 가족을 버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자녀를 기르고 돈을 벌어들인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그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네트워크의 매듭으로서, 개인의 논리가 아닌 사회 네트워크 논리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돈을 벌고 자녀를 낳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일로부터 우리가 기대했던 즐거움을 얻지는 못한다.
우리는 미래를 상상할 때 때로는 없는 정보를 채워넣기도 하고 일부러 어떤 정보를 빠뜨리기도 하며, 미래가 닥쳤을 때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해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When we imagine our futures we tend to fill in, leave our, and take little account of how differently we will think about the future once we actually get there.)
더불어 수많은 개인적인 경험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화적 지혜도 이러한 상상의 단점을 보완해주지는 못한다. 어쩌면 인간의 마음이 지니는 약점, 편견, 오류 그리고 실수를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에 독자들은 대체 누가 실수 한 번 저지르지 않고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의문을 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미래 감정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마 뛸 듯이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있긴 하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사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금 실망하게 될 것이다.
우선 사람들이 왜 상상에 의존하게 되는지를 다시금 되짚어보자. 상상이란 가난한 사람이 부자의 생활을 엿보기 위해 들여다보는 벽면의 작은 구멍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을 앞서가 미래의 우리 모습을 직접 경험해볼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 미래에 가보는 대신 미래를 상상한다. 비록 우리는 시간 차원에서는 여행할 수 없지만 공간 차원에서는 여행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3차원 공간 어딘가에는 우리가 단지 상상만 하고 있는 미래의 어떤 사건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꽤 크다. 분명 우리가 어떤 도시로 이주하면 어떨까, 호텔을 경영해보면 어떨까 혹은 혼외 불륜을 해보면 어떨까 등의 생각을 맨 처음 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실제로 해본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기꺼이 이야기해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그 설악산 얼음물이 그렇게 차갑지는 않더라” 또는 “나는 내 딸을 돌보는 일이 정말 좋아”), 기억의 왜곡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이 현재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 자신의 주관적 상태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말을 한다는 점이다. 사실 ‘행복’을 측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시의 주관적인 상태를 말하도록 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만큼은 제대로 말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미래의 어떤 경험을 통해 느낄 감정을 제대로 예측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을 현재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현재 감정을 물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미래의 우리 감정을 예측하기 위해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감정을 회상하거나 혹은 미래를 상상하는 일을 그만 두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우리의 경험인 것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아마 이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긴 하네요. 내가 지금 상상만 하고 있는 것을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 실제로 경험하고 있겠죠. 그러나 그들의 경험을 마치 내 경험인 것처럼 사용할 수는 없죠.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지문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모두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다른 사람의 느낌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하게 될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죠. 그들이 나의 복제물이 아닌 이상, 그리고 지금껏 내가 겪어 왔던 모든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 한 그들의 반응과 나의 반응은 다를 수밖에 없죠. 나는 걸어 다니고 말하는 개성 있는 독특한 존재랍니다. 따라서 나와 선호, 기호, 그리고 정서적인 경향이 극히 다른 타인의 말에 의지하기보다는 나만의 상상에 의존해 미래를 예측하는 편이 더 낫죠.”
당신이 위 생각에 동의한다면 꽤 설득력이 있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주장에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번거롭지만 두 단계를 밟으려고 한다. 첫째, 당신의 미래 경험을 예측할 때 당신의 상상을 이용하기보다는 무작위로 뽑아낸 한 개인의 실제 경험을 이용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할 것이다. 둘째,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당신에게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설명해 보일 것이다.
상상에는 세 가지 오류가 있다.
첫 번째는 상상의 과정에서 우리가 없는 정보를 채워 넣거나 혹은 있는 정보를 빠뜨린다는 점이다. (Imagination’s first shortcoming is its tendency to fill in and leave out without telling us.) 그 누구도 어떤 미래 사건의 모든 특징과 결과를 상상할 수는 없다. 우리는 최소한 몇 가지는 빠뜨린다. 문제는 이렇게 빠뜨리는 내용 중에 정말로 중요한 것이 있다는 점이다.
상상의 두 번째 오류는 현재를 미래에 투사하는 경향성이다. (Imagination’s second shortcoming is its tendency to project the present onto the future.) 미래를 상상할 때, 사건의 중요한 부분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때, 상상은 ‘현재’로부터 그런 부분을 끌어와 채워 넣는다. 허기진 상태에서 쇼핑을 해본 사람이나 시가 한 대를 막 태우고 나서 담배를 끊겠다고 맹세해본 사람, 그리고 잠시 머문 항구에서 만난 사람에게 청혼을 해본 사람들은 당시의 기분에 의존해 미래의 감정을 예측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잘 알 것이다. 이런 현재주의의 오류 역시 다른 사람의 감정 경험을 이용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다.
상상의 세 번째 오류는, 일단 어떤 일이 발생하고 나면 그 일은 상상할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나쁜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보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데도 이를 예측하지 못한다. (Imagination’s third shortcoming is its failure to recognize that things will look different once they happen-in particular, that bad things will look a whole lot better.) 예를 들어 직장을 잃는 상상을 할 때 우리는 실직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상상하면서도, 우리의 심리적 면역체계가 그 경험의 의미를 변화시켜 줄 것이라는 점은 상상하지 못한다(“지금이야말로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내 진정한 사명인 벤처사업가로서의 삶을 살게 될 좋은 기회야”).
이러한 연구를 모두 종합해보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실제 경험을 사용하여 자신의 미래 감정을 예측하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내일’ 어떻게 느낄지 가장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오늘’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The best way to predict our feelings tomorrow is to see how others are feeling today.) 해결책이 이처럼 간단하고 효과적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방식을 탈피하여 이 방법을 사용할 것이라고 기대해 봄직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고? 당신도 다른 사람처럼 자신이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지금까지 ‘평균적인 인간’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자신을 평균적인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The average person doesn’t see herself as average)’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학생은 자신이 보통 학생보다 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영인은 자신이 평균적인 경영인보다 훨씬 더 유능하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운전자 가운데 90퍼센트의 사람은 자신이 평균적인 운전자보다 더 안전하게 운전한다고 생각하며, 대학 교수 가운데 94퍼센트는 자신이 평균 이상이라고 착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객관적으로 세상을 본다고 생각한다. 한 연구 팀의 결론처럼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보통 사람보다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더 운동신경이 좋고 지적이며 조직적이고 윤리적이며 논리적이고 재미있으며 공명정대하고 건강하다고 믿는다.
남보다 나를 더 낫게 생각하는 이러한 경향은, 사실 ‘자신이 남과 다르다’라고 믿는, 보다 더 일반적인 경향성의 표출이다. 때로는 남보다 낫고 때로는 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나와 남은 다르다고 믿는 것이다. (This tendency to think of ourselves as better than others is not necessarily a manifestation of our unfettered narcissism but may instead be as instance of a more general tendency to think of ourselves as different form others-often for better but sometimes for worse.)
예를 들어 자신이 얼마나 관대한 사람인지 물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남보다 더 많은 관용을 베푼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물으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이기적인 행동을 한다고 말한다. 운전하기나 자전거타기와 같은 비교적 쉬운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을 물어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잘한다고 평가하지만, 축구나 바둑 게임 같은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을 물어보면 자신이 남보다 더 못한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늘 자신을 남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항상 스스로를 남과 다른 독특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남들이 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남과 다른 어떤 독특한 이유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선택은 그 사람의 특성에 원인을 두지만(용준이가 문학 수업을 선택한 이유는 원래 문학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는 그 선택 대상의 특징에 원인을 둔다(“하지만 나는 문학이 경제학보다 더 쉽기 때문에 문학 수업을 선택한 거야.”). 또한 우리는 우리의 결정이 사회적 규범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은 인식하면서도(“수업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수업 시간에 손을 들어 물어보는 게 창피해서 그냥 앉아 있었어.”) 다른 사람도 사회적 규범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다른 사람은 수업 내용을 다 이해했기 때문에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구나”).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뭔가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다른 것을 싫어해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내가 노무현에게 표를 준 건 이회창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야”), 다른 사람의 선택은 늘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반영한다고 믿어버린다(“용준이가 노무현한테 표를 줬다니, 그 사람을 정말로 좋아하는 모양이군.”).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연구 사례는 끝없이 많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굉장히 독특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무엇이 스스로를 이렇게 독특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What makes us think we’re so darned special?) 우리는 왜 타인이 실제 경험한 사실도 믿지 못하는 것일까?
첫째, 우리가 스스로를 아는 방식이 특별하다. (First, even if we aren’t special, the way we know ourselves is.) 이 세상에서 우리를 ‘내면적으로부터’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경험해도, 다른 사람이 그들의 생각과 느낌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은 그저 추론해낼 뿐이다. 다른 사람도 눈과 뇌를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주관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는 점을 신뢰하지만, 그 신뢰는 어디까지나 ‘신념’의 일부일 뿐 우리가 우리의 주관적 경험을 직접 경험하는 것 같은 직접 경험은 결코 아닌 것이다. 실제로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에 대한 책을 읽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듯, 우리가 주관적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다른 사람의 주관적 세계를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처럼 우리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아는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접하게 되는 정보의 종류나 양도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매순간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적인 생각과 감정을 직접 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오직 그들이 겉으로 하는 말과 행동만 볼 뿐이며, 이것도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만 관찰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자신을 아는 방식이 다른 사람을 아는 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둘째, 우리는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고 보려는 동기를 지니고 있다. (The second reason is that we enjoy thinking of ourselves as special.) 우리 대부분은 주변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만 지나치게 어울려 그 속에 묻히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싶어 한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고 느껴지면, 기분이 나빠지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려 노력한다고 한다. 당신이 파티에 갔는데 누군가가 당신이 입고 있는 것과 똑 같은 드레스와 넥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의 독특성을 과대 지각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셋째, 우리는 꼭 우리 자신이 아니더라도 사람들 개개인의 독특성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람들이 실제로 더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The third reason why we tend to overestimate our uniqueness is that we tend to overestimate everyone’s uniqueness-that is, we tend to think of people as more different from one another than they actually are.)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서로 비슷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서로 다르다. 인간 행동의 보편적인 법칙을 찾고자 노력하는 심리학자, 생물학자, 경제학자 그리고 사회학자 들은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의 유사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주로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에 관심을 보인다.
사회생활의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는 누구를 성적 파트너로 삼을지, 누구와 골프를 칠지 등 특별한 개인들을 선택하는 문제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어떤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주는 특징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 그들이 공유하는 공통점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홍보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야구를 좋아한다는 말은 해도 산소를 좋아한다는 식의 말은 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이 호흡에 대한 본능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땅 위에서 사는 이유, 높은 고도에 이르면 아픈 이유, 폐가 있는 이유, 질식에 저항하는 이유,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 등 여러 가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 산소를 좋아한다는 것은 야구를 좋아한다는 것보다 전반적인 인간 행동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어떤 한 개인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시켜주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개인이 공유하는 유사성은 굉장히 많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일, 즉 용준이를 영식이를 창수 와 구별하는 등의 일을 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유사성에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유사성은 눈에 띄지 않는 배경 역할을 하고 상대적으로 사소한 개인적인 차이점이 두드러지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점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기억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배경으로 깔려 있는 사람들 사이의 유사성의 강도와 빈도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제보다 훨씬 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게 된다.
당신이 포도를 놓고 서로 다른 모양과 색깔 그리고 종자대로 분류하느라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당신은 아마 포도가 줄 수 있는 끝없는 맛의 차이점과 촉감의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짜증나는 포도 박사가 되고 말 것이다. 더불어 포도는 엄청나게 다양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포도와 관련된 정보 가운데 정말로 중요한 정보는 그것이 포도라는 정보다. 사람들을 다양하다고 여기고 자기 자신을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은 감정 영역에서 특히 강력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은 직접 느낄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의 감정은 표정이나 목소리에 근거해 추론해야만 하기 때문에, 종종 다른 사람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 동일한 강도의 감정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지 못할 때도 그들은 우리의 감정을 파악할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자기 감정의 독특성을 믿는 것은 일찍부터 나타난다. 유치원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상황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낄지 말해 보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남과 다른 독특한 감정을 경험할 것이라고 예상했고(“성주는 슬플 테지만 저는 그렇지 않을 거예요”), 그에 대한 독특한 이유도 제공했다(“저는 그 앵무새가 하늘나라로 갔다고 말해줄 테지만, 성주는 그저 울기만 하겠죠.”). 성인에게 이와 동일한 종류의 예측을 해보라고 하면, 그들도 정확히 똑 같은 대답을 한다.
개인이 지니는 다양성과 독특성에 대한 사람들의 강한 믿음이 우리가 타인을 우리 경험의 대리인으로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주요 요인이다. 다른 사람의 실제 경험을 우리의 미래 경험에 대한 대용물로 사용하려면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사람의 반응과 우리의 반응이 대략 비슷할 거라고 믿어야만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감정적 경험이 매우 다양하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대용한다는 것이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결국 다른 사람의 경험이야말로 우리의 미래 감정을 예측하는 데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우리가 서로 얼마나 비슷한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믿을 만한 방법을 거부하고 대신, 흠도 많고 오류도 많은 우리의 상상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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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생명과 재물과 권력이 아니다. 생명과 재물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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