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
드라마 한국 104분 2014.11.13 개봉
감독 : 부지영
출연 : 염정아(선희), 문정희(혜미), 김영애(순례여사)
마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인간 관계의 변화에 대하여 말한다. 원래 인간은 [나와 너, Ich und Du]로 존재한다. ‘나’는 ‘너’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나’라는 말 자체가 ‘너’를 포함하고 있다. ‘너’가 없으면 ‘나’라는 말 자체도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성경에서 최초의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은 아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옳지 않아 그의 몸에서 하와를 창조하였다. 아담과 하와, 이렇게 둘이서 인간이라 불린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IMAGO DEI)이라 불렀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복수다. 삼위일체로 존재한다. 하나님이란 말 히브리어 ‘엘로힘’은 단어 자체가 복수다. 레오나르도 보프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고독한 권력이 아니라 사랑 안에 서로 연합하는 무한한 사랑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원래 ‘나’도 아닌 ‘너’도 아닌 ‘나-너’다. 그게 인간이다. ‘너’를 사랑함은 곧 ‘나’를 사랑함이며, ‘너’를 미워함은 곧 ‘나’를 미워함이다.
그런데 부버가 지적하기를,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공업화의 물결이 휩쓸면서 기계가 인간의 삶에 들어오게 되었다. 생산 시스템이 기계화 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기계가 개입되고 인간 조차 원래의 인격을 상실하고 점차 기계화 되었다는 데 있다. 부버는 이것을 가리켜 [ICH UND WAS]라 명한다. ‘나-너’의 관계에서 인격이 배제되고 ‘나-그것’으로 변질되었다. 사람이 사물이 된다. 전통적 농경 사회에선 일이 공동체 중심이었지만, 공업화 사회인 공장에선 인격이 배제되고 모든 것이 수치와 사물이 되어 버린다.
더욱이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쓸고 무한경쟁의 정글사회에선 더욱 그렇다. 경영자와 노동자의 간극이 크다. 규모가 클수록 경영자와 노동자가 만날 가능성은 휘박하다. 달리 말하면 인격적 관계가 배제되고 경영기법에 의한 수치만으로 존재한다. 그러니 정리해고가 가능한 셈이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고 보고서 상의 수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누군지 알지 못하는 종이 상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사회 변화 속에 우리의 주인공들이 놓여 있다. 영화 카트는 이 부분을 파고 든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는다. 것도 단지 문자 전송에 의해서. 참 피도 눈물도 없다. 이유도 없고 변명도 없다. 단지 해고 통보만 있을 뿐이다. 해고 통보를 받은 자들은 경영자의 입장에서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숫자 놀음에 불과하니 이게 가능한 것이다. 청소 노동자로 평생을 근무한 순례의 한 마디가 현실을 대변한다. “뜨신 곳에서 자는 사람들이 한 데서 배고프게 자는 사람들의 맴을 우찌 알겠노?” 그렇다. 그들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아니 실제로 감독이 보여주는 계산원들의 탈의실 역시 관계의 부재공간이다. 각자 자기 일을 할 뿐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누가 누구인지, 무슨 이유로 일 하는 지 그건 사생활의 문제로 치부되며 그들은 계산원으로, 유니폼으로 존재할 뿐이다. 청천벽력과 같은 해고 통보가 이제 이들의 삶을 바꾼다. 같은 운명에 처해져 있기 때문이다. 혜미가 앞장을 선다. 국밥집에 모인 이들의 대처 방안은 단순하다. 회사에 말이라도 해 보자는 것, 자신들은 계약 기간이 남았고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이라도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혜미, 선희, 순례가 대표가 되어 지점상실을 찾지만 묵묵부답이다. 만나주지도 않는다. 감독이 보여주는 현실이다. 경영자는 노동자의 현실에 관심이 없다. 그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고용된 노동자일 뿐이며 회사의 편리에 따라 해고될 수 있는 ‘그것’일 뿐이다.
회사와의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들이 선택한 것은 마트의 점거다. 어설프지만 치열하다. 아니 애처롭다. 마트 바닥에 종이 박스를 깔고 잠을 청하면서 이제 이들은 하나가 된다. 영화에서 참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감독은 이렇게 동지 아닌 동지가 된 사람들의 사생활을 파고든다. 자기소개를 한다. 혜미는 이혼 후 어린 아들을 키워야 하는 절박함이 있다. 유치원을 마친 아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맞춰야하기에 연장근무를 할 수 없다. 선희는 이제 혜미가 이해된다. 혜미도 마찬가지다. 고등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을 공부시켜야 한다. 이들에게 돈은 생존이다. “반찬값 벌기 위해 나오지 않아요. 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거에요.” 혜미의 말대로 이들의 고된 노동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그렇게 제각각 사연이 있고 그 사연들은 대부분 생활과 직결된다. 서로의 사적 소개가 이어지고 공적인 공간에서 그들은 이렇게 인격이 되고 사람이 된다.
이들의 파업이 장기화 되고 조직화 되는 지점에 강대리가 등장한다. 강대리는 이들과 현실이 다르다. 그는 엘리트요 매니저다. 허나 강대리는 어머니처럼 지내던 순례로 인해 마음이 아프다. 상부에서 지시하는 대로 따르면 자기 자리는 보존된다. 허나 이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은 그이기에 매정하게 외면할 수 없다. 혜미가 강대리에게 왜 우리를 돕냐고 묻자 동준은 이렇게 답한다. “왜냐고요? 이건 바로 제 일이기 때문이죠. 저도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 이건 ‘너’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다. 동준은 알아차렸다. 처음엔 계산원 일용직이겠지만, 다음은 자신과 같은 매니저가 해고된다는 것을. 그것이 회사가 밟아나갈 해고의 수순이란 걸 알았다. 물론 치열하게 동료들과 경쟁하며 상부에 잘 보여서 자리 하나 차지할 수 있겠지만 그건 같이 살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연대했고 함께 했다. 감독은 그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들이 성공하고 못하고는 감독의 관심이 아니다.
감독은 이제 우리에게 묻는다. ‘이들은 누구냐?’ 묻는다. 관객들인 우리들에게 ‘영화 속 인물은 전적 타자인가? 나의 또 다른 모습인가? 그들이 당한 해고는 남의 일인가? 나의 일인가?’ 고 따져 묻는다. 이제 우리가 답해야 할 때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연대라 말했다. 가슴이 시리다. 여전히 이들은 현재 진행형이라 그렇다. 쌍차 파업건이 대법에서 뒤집히고 노동자들은 다시 거리로 내몰렸다. 지금은 그들의 일이겠지만 곧 내 일이 될 것이다. 노동자 25명이 죽음을 선택했다. 너무나 괴로웠기에 힘들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요 공동체의 실패’라 했다.
지금 여기서 계속되고 있는 그들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가져올 시점이다. 스스로 비인격을 걷어내고 마음을 열어 끌어안아야 할 때다. ‘그들’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그들’과 ‘우리’는 별개가 아니라 ‘그들’이 곧 ‘우리’인 ‘그들-우리’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렇기 때문이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 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 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태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신부 /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