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외형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교회가 하나의 제도적인 틀을 다질 수 있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그 해, 최초의 독노회가 결성됨으로써 한국장로교회는 명실상부하게 민족교회로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장로교에 이어 처음부터 한국선교와 민족복음화를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감리교 역시 부흥운동을 통해 놀랍게 성장했다.
미국 남감리교 선교회와 북감리교 선교회는 제각기 독립적으로 선교를 추진하였다. 북감리교 선교회는 이미 1901년 김창식(金昌植)과 김기범(金箕範), 1902년에는 최병헌(崔炳憲), 1903년에 이은승(李殷承)을 목사로 안수하였다. 이들은 한 해에 두 주간씩 공부하는 교역자 단기 양성을 위한 신학반(Theological Class)에서 공부한 이들로, 목회자로서 신앙과 인격을 갖춘 사람에게는 목사 안수를 해 주는 감리교의 전통에 따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8년에 제1회 한국 연회(The First Session of Korean Annual Conference)가 열렸다. 이때부터 북감리교 선교회 산하에 있던 한국 감리교회는 일본 교구와 동등한 위치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1916년까지는 일본 감리교의 감독인 해리스(Bishop Merriman Colbert Harris)가 한국의 감독직을 겸하고 있었다.
북감리교보다 10년 늦게 한국으로 온 남감리교 선교회는 1904년 김흥순(金興順), 1906년에는 정춘수(鄭春洙)와 주한명(朱漢明)에게 전도사 인허를 하였다. 1914년에는 한국 남감리교 선교 연회가 조직되었다. 한국인 목사들도 정회원으로 인준을 받고 외국 선교사들과 동등한 자격을 인정받게 되었다. 연회에 참석한 회원은 한국인이 22명, 선교사가 32명이었다. 그 후 1918년 10월 31일 개성에서 한국 남감리교 연회가 조직되었다. 이와 같이 남북감리교 선교회들은 독립적으로 선교를 추진했으나 1906년부터는 그들의 선교 교회를 다 같이 감리교회라고 불렀다.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교세가 눈에 띄게 성장함에 따라 남북감리교에는 선교지역을 조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장로교 선교지역이던 영변 지역이 1905년에 북감리교로 이관되었고, 공주와 해주 지역의 복음전도도 활발한 전도운동을 전개해 오면서 중국 감리교 선교회의 관할 하에 있던 한국 남감릴교 선교회도 1906년에 중국 선교회로부터 독립하여 한국감리교 선교회를 조직했 다 . 남감리교는 1908년부터 춘천지역의 선교를 맡으면서 선교구가 셋이 되었고, 1910년에는 일곱 개로 늘어났다. 선교구의 확장은 곧 교세의 확장과 복음전파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교세가 놀랍게 신장한 감리교는 늘어나는 교회 성장을 뒷받침 해 줄 교회 지도자의 양성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1905년 6월 21일에 회집된 북감리교 선교회는 한국선교 연회로 기구를 확대하면서 한국교회의 교역자 양성 문제를 중요한 현안으로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북감리교 책임자였던 스크랜턴(W.B. Scranton) 박사는 지금까지 시행되어 오던 이동식 신학반보다는 중앙에 교역자 양성을 위한 영구적인 신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날 모리스(慕理是, C. D. Morris)의 제안에 따라 북감리교 선교회는 스크랜턴, 북지방 감리사 모리스, 서지방 감리교는 케이블(奇怡富, E. M. Cable), 남지방 감리교 스위러(徐元輔, W. C. Swearer) 4인으로 구성된 신학교 설립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지금까지 한 곳에 완전한 형태의 신학교 교사를 갖추지 못한 가운데 서울, 평양, 인천 등의 지역을 이동하면서 신학반이라는 이름으로 단기적으로 교역자를 훈련해 오던 감리교가 새로운 신학교육을 위한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이 발흥한 후 남북 감리교가 놀라운 성장을 계속하면서 해마다 두 주간씩 실시하는 신학회로는 한국교회가 필요로 하는 교역자를 양성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06년 11월부터 남북 감리회 선교회는 신학회를 신학부로 승격하여 신학교육을 연합으로 실시하기로 하고 수강시간을 늘리고 강사진도 대폭 강화함으로 본격적인 신학교육을 할 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1907년 남북 양 감리회가 공동으로 서울에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설립하였다. 중앙의 독립된 학교 체계를 갖춘 협성신학교가 설립되기까지 감리교 신학교육은 초기 단계를 거쳐 신학반 시대(1900-1906), 신학부 시대(1906-1907), 신학교 시대(1907-현재)의 세 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협성신학교에는 존스(趙元時, Dr. G. H. Jones, 1867-1919) 선교사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1911년까지 집무하였다. 1907년 가을 37명의 신입생을 받아 정규신학교를 시작했다. 이들 대부분은 이미 사경반과 학습반에서 기초 신학 수업을 이수한 자들이었다. 당시가 평양대부흥운동을 통과하면서 급신장하는 놀라운 교세에 따른 목회자 수급이 중요한 현안으로 부상되던 때임을 고려할 때 협성신학교 설립은 매우 시의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협성신학교는 1911년 12월 20일에 제1회 졸업생 45명을 배출하였다. 1910년에는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학교 부지를 6천불에 구입하고, 1915년에는 본관과 기숙사와 부속 건물 등 세 동과 교수 사택도 한식으로 지어 신학교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남북 감리교가 연합으로 협성신학교를 설립한 것은 몇 가지 점에서 한국교회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그 동안 부흥운동을 통해 놀라운 성장을 이룩한 감리교회가 교역자 양성을 통한 제도적인 틀을 다졌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전의 신학반과 신학부 시기를 거쳐 정착된 협성신학교를 통해 교과과정의 형식을 갖춘 신학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존스가 교장을 맡고 있는 동안 협성신학교는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 1911년 12월 20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협성신학교는 계속해서 우수한 감리교의 교역자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1915년에는 미국 밴더빌드대학과 예일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양주삼목사가 교수로 취임하여 한국인에 의한 신학교육이 강회되었는데, 당시 교수진은 교장 하리영(河鯉泳, R. A. Hardie)을 비롯해 도이명(都伊明, C. S. Deming), 기이부(奇怡富, Elmer M.Cable), 전요섭(全約燮, J. L. Gerdine), 노태인(魯泰仁, B. R.Lawton), 양주삼, 장락도, 나이야마(新仙仁太浪) 등이었다. 이들은 “성경과 신학의 과정을 준비할 뿐”아니라“그 높은 직분의 실행을 위하여 교육함”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교과과정에 신학 관련 과목 외에도 음악, 국어를 거의 매 학기 필수과목에 포함시켰다. 학교 발전 과정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은 스크랜턴 선교사와 존스 박사였으며, 그 외에도 2대 하디, 3대 노블, 4대 왓슨(A. W. Wasson), 5대 도이명, 그리고 6대 케이블(E. M. Cable)에 이르는 교장들의 탁월한 리더십은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버금가는 좋은 신학교로 끌어올리는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셋째, 남북 감리교회가 신학교육을 연합으로 실시함으로써 기왕의 협력 분위가가 지속되어 장차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하나의 감리교회로 통합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나아가 남감리교와 북감리교가 협력하여 하나의 신학교를 운영함으로써 남북 감리교의 우수한 선교사를 교수진으로 확보하여 양질의 신학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협성신학교의 설립은 한국 감리교 신학의 틀을 다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916년부터 협성신학교에서 신학지「신학세계(神學世界)」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장로교보다도 2년 앞선 것으로서 특히 처음부터 한국인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15년 동안 협성신학교는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평양장로회신학교와 더불어 한국교회 목회자 양성을 주도하는 중심 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1916년「신학세계」가 창간되고 1930년 남북 감리교가 합동을 이룩하기까지 이 기간 동안 감리교 안에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하나는 남감리교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다. 1915년 남감리교에서는 처음으로 김흥순(金興順), 정춘수(鄭春洙), 양주삼(梁柱三) 세 사람이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18년 10월 31일부터 11월 4일까지 송도에서 처음으로 남감리교 연회가 열렸다. 1920년 남감리교 연회는 정재덕 목사를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그 해 12월 6일에는 서울 종교교회 예배당에서 조선 여선교회 연회를 조직하였고, 1922년에는 미국에서 열리는 남감리교 총회에 한국 대표를 처음으로 파송하기에 이르렀으며, 1926년에는 양주삼 목사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철원지방 남감리교 감리사로 임명받았다.
이 시기에 일어난 또 다른 감리교회의 변화는 신학교가 신학적으로 좀 더 열린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서구적인 사고방식과 열린 신학을 소유한 양주삼이 1915년 협성신학교 교수진에 합류한 후 신학교육뿐 아니라 그가 속한 남감리교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전체적인 교단 정서와 비교할 때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던 양주삼은 신학교육과 연합활동 측면에서 초기 남감리교 선교사들보다 진보적이었다. 이 기간 신학교는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면서도 신학과 여성 안수에 있어 서서히 문호를 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협성신학교는 이전까지 견지해 오던 남감리교의 보수적인 전통은 물론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에 의해 주도된 초기 북감리교의 웨슬리 복음주의 전통에서 떠나 서서히 현대주의 신학사상을 수용하기 시작하여 1920년대를 지나면서 남북 감리교는 단일 신학교육을 통해 신학적 개방성에 있어서 공동의 보조를 취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