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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예배의 정황과 우리의 예배
서론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는 천상의 예배 광경이 나타나고 있다. 마운스 같은 이는 이 부분에 대해서 “천상 어전 방에 대한 이상”(throne-room vision) 또는 “천상 궁전에서의 경배”(adoration in the court of heaven)라고 이름 붙인다. 이는, 이제 우리가 살펴 보고 강조하려는 바와 같이, 지금 여기서 하는 구속된 백성들인 우리들의 예배가 천상의 예배와 함께 하는 것이며 우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깊이 있게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 의미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일단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을 정확하게 이해한 터에서(I & II), 그 곳에 나타나고 있는 우주적 예배의 정황을 살펴보고(III), 이것이 우리들의 예배에 주는 함의를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IV).
I. 요한계시록 4장 이해
요한계시록 4장은 1장-3장까지 오고 오는 세대의 교회들에 대한 계시가 주어진 후에(“이 일 후에”, μετὰ ταύτα) 일어난 계시의 내용을 묘사한다. 바로 앞의 3장까지는 이 땅에서의 교회를 중심으로 장차 될 일을 계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처음 말하시던 그 나팔 소리 같은 음성으로(1:10; 4:1) 하늘, 즉 천상에서의 광경에로 요한을 이끌어 들인다: “하늘(οὐρανός)에 열린(ἠνεῳγμένη) 문이 있는데...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4:1). 그러자 그가 "곧 성령에 감동되고"(εὐθέως ἐγενόμην ἐν πνεύματι, immediately being in the Spirit) 그의 눈 앞에는 천상의 광경이 펼쳐진다. 이 때 그가 몸을 가지고 있었는지(즉, 몸과 함께 하늘로 올라간 것인지), 아니면 몸 밖에 있었는지(영혼만 하늘 경험을 한 것인지)는 명확한 제시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다른 곳에서 바울이 아마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말한 바가 여기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전 12:2, 3). 아마 같은 상황이 구약 선지자들의 경험에도 적용되리라고 여겨진다. 이믈라의아들 미가야의 경험이나(왕상 22:19ff.) 또는 예레미아의 이른 바 “여호와의 회의”(הוהי דוֹס)에 참여하는 것이(렘 23:18)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라”(καὶ ἰδοὺ)라는 말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시작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으로 지칭되는 “하늘”(heaven)에 대한 상징적 묘사이다. 이 지상과 대조되는 하늘(天上, heaven) 상황에 대한 요한계시록 4장의 묘사는 매우 비유적이다. (1)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θρόνος ἔκειτο ἐν τῷ ουρανῷ), (2)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a jasper stone)과 홍보석(sardius) 같고, (4)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들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an emerald) 같더라. 이상의 비유적 표현은 모두가 하나님의 지극한 영광을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요한은 그의 이상 가운데서 보좌, 생물들, 어린양 등을 실제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좌가 있는 천상 궁전 이상은 “하늘을 사진 찍듯이 묘사해 주는 것이 아니고, 인간 역사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이라는 마운스의 말을 잘 유념해야 한다. 헨드릭슨도 이 이상 가운데 있는 보좌, 생물들, 어린양 등이 실재적으로 하늘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요한이 보는 다양한 대상들이 그런 물리적, 물질적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중요한 영적 교훈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것이 없는 데 그것의 더 깊은 의미를 찾아 보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것들은 하늘 광경을 보여 주는 상징들인 것임을 유의하면서 해석해야 한다.
먼저 “보좌”(θρόνος)라는 상징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는 요한계시록에서 40회 이상 나타나고 있는, 그리고 4, 5장에서만 17회나 나타나는 상징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즉 “하나님의 엄위와 능력을” 상징한다. 박윤선 목사님도 이는 “하나님의 우주 통치를 가리키는 상징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구약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상징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시 47:8; 사 6:1). 즉, 보링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우주는 혼동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맹목적인 운명에 의해 다스려 지는 것도 아니며, 누군가가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한 계시록에서 12번 언급되고 있는 “보좌에 앉으신 이”, 즉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벽옥(ἰάσπιδι, a jasper stone)과 홍보석(σαρδίῳ, sardius) 같은 보석으로 묘사된 것도 하나님 자신에 대한 묘사일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는 결국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지극한 빛 가운데서 계심을 표현하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시 104:2).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바울이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이시니”라고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딤전 6:16). 이를 아주 표상적인 표현으로 표현한 것이 “벽옥(a jasper stone)과 홍보석(sardius) 같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정확히 어떤 보석을 지칭하는 것인지, 그 이름이 붙어 있는 오늘날의 보석과 같은 것인지도 불명확하다(uncertain). 예를 들어서, 일반적으로 벽옥(a jasper stone)으로 번역되는 것(ἰάσπιδι)을 초록색의 제이드(jade)나 다이아몬드로 보는 이들도 있다. 또한 홍보석도 루비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지극한 영광을 표현하는 표상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 싼 무지개가 에머랄드와 같은 것으로 묘사된 것은 에스겔서에서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을 무지개와 같은 것으로 표현하는 에스겔서 1:28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에스겔서의 본문과 계시록의 본문 모두가 하나님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기보다는 그저 그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를 묘사해 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학자들의 말은 매우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보석들의 의미를 확대하고 성경 다른 곳에 있는 것들과 무리하게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적절하지 않은 알레고리를 시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서, 대제사장의 가슴에 있는 판결 흉배에 각 보석 중 첫째 홍보석(sardis=carnelian)이 루우벤을 상징하고, 마지막 벽옥(碧玉, the jasper)은 베냐민을 상징하며, 네번째 남보석(혹 청보석, emerald)는 유다 지파를 상징하는 것과 하나님의 보좌 상황을 연관시키는 것은 그저 같은 보석이 언급된 것으로부터 지나치게 확대해 가는 것이 되므로 피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벽옥(碧玉, the jasper)은 엄위, 거룩성, 순결성을 상징하고, 홍보석(sardis)은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고 남보석(emerald)는 자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도 피하여야 할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것들과 같이 “각각의 구체적인 것들이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기보다는 그저 전체적 인상을 잔달하는 묘사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는 마운스의 지적이 의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좌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하면서 다음 같은 아돌프 쉴라터의 말을 상기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의 표(sign)는 보좌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보게 될 것이인데, 하나님의 사역은 그가 통치하신다는 사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좌에 둘려 24보좌가 있고, 그 위에 24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다는 것(4절)도 역시 이와 같은 표상적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줄곳 이 24장로들은 네 생물과 함께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계 5:14; 11:16: 19:4). 그들의 입에는 계속적인 찬양과 높임의 노래가 있는 것이다(계 4:11; 5:9-10; 11:17-18; 19:4). 이 24장로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그 동안 다양한 대답이 제시되었었다:
(1) 바빌론 만신전의 24성신(星辰)-신들(stars gods)이 유대 묵시 문학을 통해 변형되어 나타난 것(Zimmern; Gunkel; Moffatt; Bousset; J. Weiss; Holtzmann),
(2) 유대 제사장들의 24 반차를(대상 24:4, 5; 25:9-31) 상징하는 것으로 그들은 천상에서는 온전한 경배를 드리고 있는데, 지상에서의 24 반차의 사역은 천상의 것의 불완전한 모사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는 해석(Vitringa, Eichhorn, Ewaald, Renan, Spitta),
(3) 지상에서의 아론 계열의 제사장적 24 반차와 레위 계열의 24 반차에(대상 24:4, 25:9-13) 상응하는 천상에서의 높여진 천사적 존재들이라는 해석,
(4) 이는 구약과 신약의 교회 전체를 상장하는 것이라는 해석. 이 가운데서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3)과 (4)의 견해일 것이다. 천사로 보는 견해의 큰 난점 중 하나는 천사들을 장로로 부른 예가 없다는 것인데, 이사야 24:23과 관련해서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는 일들이 있다. 또한 마운스는 신구약의 교회의 상징으로 보는 것에 대한 유일한 반론으로 5장에 나타난 24 장로들의 찬양이 자신들을 구속받은 자들과 분리시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마운스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이, 많은 사본들은 9절에서는 “우리를”(ἡμάς)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0절에서는 공인 사본만이 “우리들을”(ἡμάς)을 가진데 반해서, א A 046과 많은 사본이 “그들을”(αὐτούς)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5:9-10의 찬송이 하나님이 행하신 구속의 일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에 “그들을”(αὐτούς)이라고 표현 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이를 너무 강하게 주장할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들이 승리자의 상징인 금 월계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은 승리한 하나님 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필찬 교수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천사들이 보좌에 앉아 면류관을 쓰고 있는 예나 증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24 장로들이 구약 12 지파와 신약의 12 사도를 상기시키는 하나님의 백성인 신구약 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a sea of glass like unto crystal)가 있다고 한다(6절). 고대의 반투명한 유리와는 달리 이것은 수정 같이 맑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유대적이거나 이교적 다른 개념을 붙여 설명하기보다는 하늘 궁정의 굉장한 엄위와 장관을 표현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은 듯하다. 그 누구도 그들 자신의 자격으로는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맑은 바다는 결국 이 광경을 보는 요한과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초월성과 엄위를 더 깊이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보좌 가운데와 주위에 네 생물(ζῷον)이 있다고 했다(6). “가운데와 주위”라는 표현이 좀 모호하기는 하지만 보좌를 둘러싸고 원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는 이들이 천상의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적절한 위치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묘사가(4:8) 이사야 6장에 나타나고 있는 스랍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천사적 존재로 이해될 수 있는 개연성이 매우 높다. 헨드릭슨도 이를 천사적 존재로 보면서 이 존재들은 “사자의 힘을 가졌고(시 103:20 참조), 황소 같이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히 1:14 참조), 사람의 지혜와(눅 15:10 참조), 독수리와 같은 빠름을 가졌다(단 9:21 참조)”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를 모든 생물적 피조 세계(animate creation)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가능성도 있다. 또 그런 피조 세계가 새롭게 된 것을 상징하여 새 창조를 시사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게 보는 이들은 네 생물의 “네 가지 형태는 동물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강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정 빠른 것을 시사한다”고 본다.
이 두 가지 해석 중에 어떤 것을 정확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그러나 요한은 피조계에 대해서 말할 때는 아주 분명한 언어로 그것을 지칭하고 있으므로(예를 들어서 5:13), 이 생물들이 온 피조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헨드릭슨의 말은 매우 설득력 있다.
단지 이레니우스로부터 시작된 이 네 생물과 사복음서를 연관시키는 것은 근거없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가 야생 영역(사자), 길들인 영역(소), 도시와 마을(사람), 그리고 궁중(독수리)에 미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렌스키의 견해도역시 지나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II. 요한계시록 5장 이해
요한계시록 5장은 보좌의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있는 책과 그것을 중심으로 이상이 진행되고 있다. 이는 5장의 내용을 규정할 뿐 아니라, 그 책의 인을 떼어 그 내용을 보여주는 6장-8:1까지(소위 “일곱 인”에 대한 묵시)를 주관하는 것이다. 이 책은 4:1의 말씀(“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ἃ δεί γενέσθαι μετἀ ταύτα]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이나 6장-8:1의 내용을 생각할 때에 앞으로 이 세상에 일어날 일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큠이 잘 말하고 있듯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한 그의 비밀스러운 목적이” 어떻게 도래하게 되려는 지에 관한 것이다. 이는 4:1부터 계속되는 기사의 목적도 그러하고 요한계시록 전체의 목적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계 1:1) 하신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도 분명해 진다. 이렇게 앞으로 될 일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상의 구약적 배경은 아마도 이사야서 29:11(“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에스겔서 2:9-10(“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해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과 시편 139:16(“...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그리고 다니엘 8: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이상이 확실하니 너는 그 이상을 간수하라(seal up the vision).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이니라”)와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작정 내용의 은밀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이 두루마리 책은 일곱 인으로 인봉되어 있다. 일곱 인은 온전함을 말하는 유대적 상징법에 따라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스타우퍼가 시사하는 것과 같이 로마법에서 어떤 문서의 경우에는 그 문서를 일곱 증인이 봉해야만 하던 예를 이와 연관시킬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이는 이 내용이 온전히 인봉되어 있다는 것을 확언한다. 이에 상응하게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고 외친다. 이렇게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는 것은 온 피조계를 향해 도전의 말을 전달하려는 것임을 표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힘있는 자가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닌 자가 있는가를 도전하는 것이다. 이는 그저 인을 떼는 것이 아니라 마운스가 잘 표현하는 바와 같이 “역사를 그 정해진 극치에로 인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 때에 요한이 보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었다(3). 아마도 십계명 2계명의 상을 만들지 말라는 금령의 표현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이런 표현은(계 5:3; 빌 2:10 등) 어떤 특정한 우주론을 반영하는 것이기보다는 이 요청이 보편적으로 전달되었고 그 안에서 누구도 이에 응할 수 없는 자가 없음을 보여 주려는 것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 이런 것을 너무 강조하면서 이는 하늘의 천사도, 땅위의 산 사람들도, 땅 아래 죽은 이들도 이를 감당할 이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옳으나 너무 지나치게 나가는 것이 된다. 이는 그저 온 세상의 그 누구도 이 일을 감당할 자격이 없음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온 피조계에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한 이가 없으므로 요한은 크게 울었다(ἔκλαιον)고 한다(4절). 인봉을 떼는 것은 책의 내용에 대한 계시만이 아니라 그 뜻의 수행과도 연관되므로 하나님의 뜻을 시행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 요한을 울게 한 것이다.
이 때 장로 중의 하나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ὁ ἐκ τής φυλής Ἰούδα), 다윗의 뿌리(ἡ ῥίζα Δαυυίδ)가 이기었으니(ἐνίκησεν) 이 책과 그 일곱인을 떼시리라”(5). 아마도 창세기 49:9-10에 나오는 유다 지파의 사자(lion) 개념(ὁ ἐκ τής φυλής Ἰούδα)과 이사야 11:1, 10; 예레미아 23:5에 나오는 ‘이새의 줄기’(ἡ ῥίζα Δαυυίδ)에 나오는 메시아적 희망을 반영하는 이 말은 메시아로 오신 이가 승리하셨으므로(ἐνίκησεν)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능력과 가치가 있다고 알려 주는 기능을 한다(계 22:16 참조). 이 말로 인해 요한이 보좌 근처를 다시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사자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 그렇게는 가장 처음 언급되고 있는) 어린양(ἀρνίον)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그 어린양은 일찍 죽임을 당한 것으로 그리고 다시 산 것으로 보여졌다. “여기서 요한의 상징은 역사적 사실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영속적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일찌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ἀμνος)”을 말하던 세례 요한의 말을 상기하면(요 1:29. cf. 벧전 1:19), 또 그 배경 이 되는 이사야서 53:7이나 유월절 양을 생각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그의 희생제적 죽음과 부활의 지속적인 유익을 시사하며 강조하는 듯하다. 여기서 예수께서 친히 그리하셨던 것처럼 요한에게 주어진 계시에서도 다윗적인 메시아와 이사야가 말하는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 개념이 연결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양이 무엇인가 일을 하려는 것처럼 서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일곱 뿔"(κέρατα ἑπτα)과 “일곱 눈”(ὀΦθαλμους ἑπτα)을 가진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일곱 뿔은 이 어린양의 온전한 권세를 상징하는 듯하며,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진술되어서(6) 아마도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시는 여호와의 눈이라”는 말씀(슥 4:10)에서 기원한 듯한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온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상징하면서, 온 세상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어린양의 사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것으로 시사하는 듯하다. 보큠은 이를 자명한 듯 언급하면서 강조하기를 “일곱 영은 지상 위에 임한 하나님의 권능의 임재로서 어린양의 승리를 온 세상에 실현시킴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초기 기독교회의 일반적 성령 이해임을 잘 설명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현재적으로 계신 신적인 권능으로 보았고, 그것이 곧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세상 가운데 임재하시는 방식이자, 그리스도의 과거 사역이 현재에 있어서 효과 있게 되는 방식으로 이해하였다.” 죤슨은 성령이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보냄받고 세상의 죄를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된 요한복음서(요 14:26; 15:26; 16:7-15)의 사상과의 연관성을 잘 지적한다.
이 어린양이 나아와 보좌의 앉으신 이에게서 책을 취하시니, 네 생물과 24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새 노래를 노래한다. 이로부터 전례 없는 우주적 찬양의 정황이 묘사되기 시작한다. 이 때 그들의 손에는 각각 거문고(harps or lyre)와 향, 곧 성도들의 기도가 가득한 금 대접(Φιάλη)을 가졌다고 했다. 따라서 이 금 대접이 실질적인 것이기보다는 표상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들은 경배하며 새노래를 부르면서 동시에 이 땅의 성도들의 기도를 주께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새 노래”라는 표현은 아마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시 33: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시40:3),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시 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시 98:1) 등과 같은 시편의 표현들과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사 42:10)고 외치는 선지자의 표현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어린양을 중보자로 하는 새언약에 대한 반응인 노래이기에 새노래라는 해석도 견지할만 하다. 이는 새노래를 구속의 노래(the song of redemption)으로 보는 것이며, 어린양이 이루신 구속이 새노래를 가능하게 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이 새 노래의 내용과(9-10), 사람이 셀 수 없는 수많은 천사들의 반응하는 큰 찬양의 내용(12), 그리고 “하늘 위와 땅 위와 땅 아래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 즉 온 피조계의 찬송이 기록되어 있고(13), 이에 대한 네 생물의 “아멘”으로 하는 응답과 24 장로들의 경배 상황으로 5장이 마쳐지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요한계시록 5장은 찬양과 경배로 가득한 것이다.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찬양이 가득한 우주적 찬양과 경배가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서도 다양한 노래가 하나님께 돌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양한 노래가 불려지는 것이다.”
III. 우주적 예배의 정황
우리가 위에서 살핀 요한계시록 4, 5장에 근거해서 우리는 우주적 예배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현존하는 천상의 예배이기도 하며, 결국에는 온 세상이 극치에 이르러서 경배할 그 경배의 상징적 묘사라고 할 수도 있다. 요즈음은 이필찬 교수가 잘 요약하고 있듯이 이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경험하게 될 예배의 예기(foretaste)”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물론 가장 직접적으로는 장차 일어 날 일을 계시하는 정황 앞에 있는 예배의 정황을 묘사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그저 요한에게 계시해 주기 전의 있는 한 번의 예배의 정황만을 보여 주는 것으로보다는 그 장면을 보여 줌으로 우주적이고 보편적 예배의 성격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특히 계시록 4장 9절의 표현 양식에 주의할 때, 우리는 요한이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끊임 없이 경배받으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모리스와 함께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요한 계시록의 예배 장면이 1세기 소아시아 교회들의 예전적 관례를 반영한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아 보인다. 물론 어느 정도의 연관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를 강조하면 이 부분의 계시적이고 천상 장면의 묘사로서의 의미를 격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할 것이다.
1. 경배 받으시는 분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하나님이, 5장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경배의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다. 특히 5:13에서는 어린 양이 하나님과 함께 보좌에 앉으신 것으로 찬양되고 있다. 이를 잘못 강조하면 이위일체적인 방향으로 이해하고 강조하기 쉽다. 그러나 계시록 전체에는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계 1:4; 3:1; 4:5; 5:6). 이 “일곱 영”이라는 표현이 명확하게 무엇이라고 단언하여 말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이를 온전하신 영이신 성령에 대한 표상적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개연성이 아주 높다.
이는 3세기 말의 Victorianus of Pettau로 부터 시작해서 많은 이들의 취한 견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레온 모리스도 이는 “성령님을 지칭하는 아주 특이한 방식일 개연성이 높다”고 한다. 부루스도 이를 일곱 등불(lamps of fire=torches of fire=lampstand, 4:5)과 일곱 눈(5:6)으로 상징된 한 성령님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Beckwith의 견해를 애호하면서 인용하고 있다. 특히 계 1:4ff.의 맥락에서는 이 일곱 영이 성부(4a)와 성자(5) 사이에 언급되어 있고, 은혜와 평강의 원천을 언급되고 있기에 그렇게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박윤선 목사님도 아주 분명하게 “일곱 수는 완전과 성결을 상징하는 듯한데 성령님의 위는 단일하시되, 그의 속성과 권능은 완전하시다는 의미이다”라고 말하신 바 있다.
이 점을 주장할 때 이사야 11:2을 언급하면서 희랍어 역(LXX)에 의하면 그곳에서 여호와의 신이 7중의 성격으로 묘사되었음을 말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이런 해석의 힘을 빼앗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맛소라 사본에서는 개역 성경에서와 같이 지식과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의 6개의 성격만이 언급되어 있고, LXX에서만 시적인 병행법을 깨면서 (동사와 직접 목적어와 함께) “유세베이아스”(εὐσεβείας, godliness)라는 말을 삽입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LXX의 표현에 근거하여 이로부터 성령이 7중의 사역을 한다고 보는 것은 좀 지나친 해석일 것이다. 오히려 영이 시사하듯이 한 가지(여호와의 신)을 양쪽으로 뻗어 나간 3개의 쌍의 가지들로 묘사하는 이스라엘의 촛대를 연관시키는 것이 좀더 의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너무 지나치게 과장하여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일곱 영이라는 어귀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영이신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에 힘을 빼앗는 것이 된다. 이런 무리한 연결을 하지 않아도 계시록 안에 묘사된 일곱 영의 위치와 하는 일, 그리고 유대인들의 7이라는 숫자에 부여하는 일반적 관념 등을 살펴보면 이는 자연스럽게 성령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좌와 관련해 있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경배가 드려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윌리엄 헨드릭슨은 이점을 잘 의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부께만 경배가 드려지는가?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드려지는 것이다. 계 1:4, 5에서와 같이 여기서도(4장) 우리는 성전의 상징법으로 묘사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약 전체의 가르침과 일관성 있는 이해가 될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요한계시록 1:4-5절에 나오는 삼위일체적 축도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 나오고 있는 “그 보좌 앞의 일곱 영”은 분명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것을 전제하면서 4장과 5장에서는 특히 성부와 성자에 대한 강조가 주어진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특히 어린양에게 하나님께 속하는 가치가 돌려지고, 그에게 합당한 경배가 드려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어린양과 함께 이 경배 받으시는 분에 대한 본문의 표현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보좌 위에 앉으신 이”(4:2, 10; 5:1; 5:7; 5:13); “전능하신 이”(4:8);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4:8); “세세토록 사시는 이”(4:9); “거룩하신 분”(4:8). 그러므로 이는 한편으로 성부 하나님께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약 전체의 빛에서 보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대표로 성부께 이런 묘사를 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전능하시며,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이시고, 세세토록 사시는 이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이해에 반(反)하는 이는 결국 반삼위일체론에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2. 경배하는 이유와 근거
계시록 4장에서는 창조 사실이 그 이유로 제시되고 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ἄξιος εἶ) [이는]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 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헨드릭슨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이것은 “창조의 노래”(the song of creation)이다. 그리고 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특히 어린양이 이루신 구속이 그 이유로 제시되고 있다: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ἄξιος εἶ). 일찌기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계 5:9, 10).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ἄξιόν ἐστιν, 계 5:12).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계 5:13).
따라서 우리는 창조와 구속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해야 한다. 창조 때문에 모든 피조계가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나 구속함에 동참하지 않은 것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바로 참여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은 예배와 관련해서는 어떤 사람은 예배할 수 있는 이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능력과 힘에 의존해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그의 온전하신 의(義)에 근거해서만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속받은 이들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제사장과 왕이 된 것이다(5:10). 그러므로 그들은 “땅에서 왕노릇”하는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경배하는 일에 어떤 다른 이유가 같이 게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두 장에 나오는 모든 찬양이 모두 강조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므로(ἄξιος εἶ)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이 찬양들은 거의가 다 “당신님은 가치가 있으시다, 합당하시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ἄξιος εἶ -- 4:11, 5:9; ἄξιόν ἐστιν -- 5:12). 그야말로 하나님을 경배(worship)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가치를 인정하고 돌리는 것이다(ascribe worthship). 이 찬송들에서는 우리나 모든 피조물이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강조되어졌다. 모든 경배와 찬송에서는 경배하는 일의 당연함과 마땅함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특히 로마 시대 때에 황제의 도착을 찬미하며 경하드릴 때 쓰던 용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모든 종류의 인간 높임을 정죄하면서 하나님께만 찬양과 경배를 돌려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도 보아야 한다.
3. 경배하는 존재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가 하나님께서 경배받으실 이유라면 하나님으로 부터 창조함을 받은 모든 피조물이 주께 경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계 전체가 하나님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돌려드리는 것이다(계 5:13). 특히 그 가운데서 합리적인 피조물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고, 그 존재 전체를 드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만일에 네 생물을 천사적 존재라고 보면) 그들이 먼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찬양한다(계 4:8). 또한 요한계시록 5장에서는 하늘의 수많은 천사들이 하나님께 큰 음성으로 찬양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더구나 구속함을 받은 이들은 더욱 주께 경배를 드려야 한다. 그래서 본문 가운데서는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와 함께 교회의 찬양과 경배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신구약의 교회를 상징한다고 본 “24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면서”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창조하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찬양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 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또한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 5장 가운데서는 네 생물과 24장로들의 경배와 찬송에(계 5:8-10) 따라 수많은 천사들의 찬송이 나오고(5:12), 이에 응답하는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의 찬송이 나오고(5:13), 이에 대해 찬송을 시작한 네 생물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5:14). 여기 이 우주적 찬양과 경배에 이 모든 것의 절정이 있는 것이다.
이 정황을 24 장로, 즉 신구약의 모든 교회가 구속 받은 자들로서 먼저 하나님께 찬양하고, 그들로 부터 구속의 신비를 가르침을 받은(엡 3:10 참조) 수 많은 천사들이 그 찬양에 동참하고, 이에 피조게 전체가 참여하며, 이에 대해 네 새물이 “아멘”으로 화답하고, 다시 장로들이 엎드려 경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4, 5장에서 예배하는 이들의 모습이 다음과 같은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장)
네 생물의 찬양(4:8) ==> 24 장로들의 찬양(4:10-11)
(5장)
네 생물과 24장로들의 찬양(5:9-10) ==> 천사들의 찬양(5:11-12) ==> 만물의 찬양(5:13) ==> 네 생물의 “아멘” 24 장로들의 경배(5:14)
그러므로 이 우주적인 예배에서는 24 장로로 표상된 신구약의 교회가 피조계와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에 동참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 특히 그들이 경배할 때 그들은 “성도들의 기도로 가득한 금대접”을 가지고 경배하는 것으로 언급하여 천상의 이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예배에 지상의 교회가 기도로 동참하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4. 경배의 태도
경배할 때 24 장로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금 면류관(월계관) - 그 승리의 상징이요 그들의 다스리는 권위의 상징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면서 무릎끓어 경배한다. 면류관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위임된 권위(a delegated authority)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들에게 주어진 영예를 홀로 모든 영예를 받으셔야 할 뿐에게 자원해서 돌려 드리는 것이다”. 이처럼 경배는 하나님 중심적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만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시는 것이고, 경배하는 자들은 다 낮은 자리, 그것도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IV. 우리의 예배에 주는 함의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 4, 5장을 살펴 보며, 그곳에 묘사되어 있는 우주적 예배의 정황을 살펴 본 우리는 이제 어떤 태도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임해야 하는가? 우리의 예배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가?
1.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예배에 동참하는 교회적 행위로서의 공예배
우리는 예배할 때 예배의 보편적, 우주적 성격을 의식하면서 예배해야 한다. 그 보편성이란 참으로 보편적인 것이어서 우리는 요한 계시록 4, 5 장이 묘사하고 시사하는 바와 같이 천상의 예배와 함께 참여 하는 것으로, 즉 하늘의 천사들과 천상의 성도들과 함께 경배하는 일임을 의식하고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진정한 경배는 그저 개인적 경건의 표현이 아니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찬연한 영광을 인정하며 그것을 높이고 기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그 우주적 경배에 우리가 참여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예배에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만이 예배하거나 나만이 예배 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과 함께 피조계 전체와 함께 우리가 예배 한다는 공예배 의식이 의미 있게 나타난야 한다.
이는 무엇보다 먼저 각각의 지교회(肢敎會)의 공예배에서 깊이 의식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만이 제대로 예배한다거나 하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다.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예배에 동참하는 예배를 하는 것임을 의식한다면 우리가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로서 모일 때 이 땅에 있는 모든 바른 교회들과 함께 우리 교회도 다 같이 경배해야 한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신 가르침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와 성령님께 의존해서 예배해야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예배하는 교회도 그러하고,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공예배로 드려지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천상의 교회를 포함한 보편의 교회와 함께 온 세상의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참여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공예배 뿐 아니라, 가정 예배나 개인의 기도 시간과 찬송 시간에도 그런 의식이 우리를 지배해야 한다. 이는 사적인 예배 행위도 그저 우리의 경건의 표현이거나 이 예배 행위를 이용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때때로 예배를 자주 여러 번 드림으로써 무엇인가를 하나님으로부터 더 잘 얻어 보려고 하는 의식이 작용하는 일들이 있다. 옛날 천주 교회에서 죽은 이들이 연옥에 있는 기간을 단축하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미사를 드리는 일이 있던 것이 그런 예이며, 개신교회에서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람들이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정하거나 될 수 있는대로 많이 예배를 드림으로 유익을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결국 예배의 목적이 다른 것으로 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해서 그 영광과 능력의 나타나심 대한 감사와 그를 인정한 자들의 경배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는 신지어 예배의 결과로 우리가 은혜 받는 것을 중심으로 드려서도 안된다. 그러니 예배가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으로 드려진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2. 하나님의 창조 때문에 당연히 드려야 하는 예배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깊은 인식 가운데서 경배에 임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경배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하나님의 창조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의 작정이 실현된 최초의 일이 창조이기에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감사와 인정은 당연히 창조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나타나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창조에 대한 감사를 잊고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창조 때문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의식의 회복이 요청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본적인 생활의 활동과 그 생명력의 발휘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 - 그것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가장 귀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계가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같이 참여해야 함을 의식하는 것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든 이가 다 같이 경배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애통과 안타까움이 우리에게 있어야 함을 시사해 준다.
3. 하나님의 구속에 근거한 하나님 백성의 당연한 행위로서의 예배
우리들은 죄를 극복해 내신 구속에 근거한 행위이고, 따라서 우리는 깊은 죄의식과 그로부터 우리를 구하신 구속에 대한 감사와 감격 가운데서 예배에 임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근본적으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행위이다. 어린양이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고 우리로 나라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기에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한편으로는 이 점에 있어서는 비교적 상당히 바른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깊은 죄 의식과 구속에 대한 감격에서 예배에 참여하는 일에 대한 강조가 충분치 않은 점도 있다. 깊은 죄의식이 없이는 참된 예배가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구속에 대한 인식과 감사가 없이는 하나님께 대한 바른 예배가 있다. 이를 생각하면 성경적 의미의 죄 의식이 없는 이, 즉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와 그 십자가의 공로에 의지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께 예배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그런 이들은 비록 예배식에 참여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최선을 다해 주께 드리면 주께서 그것을 받음직[加納]할만 한 것이 된다고 누가 감히 생각할 수 있는가? 참된 경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와 구속 사역에 근거해서만 주께 드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의존하지 않는 경배는 주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에는 우리 자신의 그 어떤 공로 의식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할 수도 없고 우리가 경배를 드린다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할 수 잇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로 우리에게 존재와 생명을 허락해 주셨기 때문이며, 그의 구속으로 우리가 십자가의 구속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도록 그래서 주께 드리면 받으실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요즈음에 전세계적으로, 그에 따라서 특히 우리 나라에서 유행하는 소위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라는 것이 기독교적으로는 어불성설(語不成說)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예배가 무엇인지 성경적으로 기독교적으로 깊이 성찰하지 않은 데서 나오는 발상이다. 이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과 교회와 예배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으며, 얼마나 얕은 이해를 가지고 종교적인 것에 접근하고 있는 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인간 중심적 이해에서 나온 것이며, 이렇게 해서라도 복음을 많이 전하여 가면 결국 좋지 않겠느냐는 사고 방식의 만연의 한 예이다.
물론 아직 믿지 않는 이들, 아직 확신이 없는 이들, 참으로 구도자들(seekers)을 모아 집회를 할 수 있고, 그런 집회를 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그런 집회가 많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예배로 보다는 전도 집회, 초청 모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때 기도도 할 수 있고, 찬양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예배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런 모임이 많아지고 그 가운데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또한 그로부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인간의 연약성은 항상 자신들이 익숙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서 전도 집회 양식의 모임에서만 하나님을 참으로 경배하는 듯하고 은혜를 받는 듯이 느끼는 일종의 관성의 영향을 받기 쉬운 것이다. 그 결과 세월이 지나면 모든 예배가 결국 전도 집회 형식의 예배로 화해 나갈 위험성이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참으로 경배하는 이들은 예배에 대해서는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원리를 중심으로 경배해야 한다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를 좀더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를 무시하는 이들은 예전에 예배에 도움이 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나 다 사용해서 예배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삶, 특히 하나님과 특별히 관계하는 행위인 예배를 규장하는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면서 그 뜻이 구현될 수 있도록 예배해야 한다는 원리를 세웠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이를 너무 지나친 요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얘배가 좀더 성경이 가르친 원칙에 근거한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무분별하게 번져 가고 있는 소위 “열린 예배”라는 명목하에 나타나는 현상이나, 사람들의 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금지 선언이 내려져야 할 것이다. 예배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존하지 않고서 감히 하나님의 엄위 앞에 접근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4. 역사 의식을 지닌 예배
그러므로 예배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이루신 구속의 과정에 근거한 것이므로 그 구속 역사의 역사적 진전을 염두에 두면서 경배해야 한다. 이 점이 영지주위적 구원자 예배와 역사적 기독교 교회의 하나님 예배와의 차이 점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 중심의 예배는 그가 이 땅 가운데서 하시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는 때에야 바르게 드려질 수 있는 것이다. 헨드릭슨이 잘 지적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모든 것을 생각하며 바라 볼 때에, “보좌의 관점에서 볼 때에야, 우리는 역사에 대한 바른 통찰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는 보좌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바른 역사 철학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의 역사 철학이요 우리의 경배의 바른 토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중심으로 하여 이 모든 역사적 과정을 깊이 의식하면서 하나님께 경배해야만 한다.
따라서 계시록 4, 5장에 나타난 우주적 예배의 정황에 우리가 함께 관여해 가는 것도 한편으로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그런 우주적 예배의 한 과정임을 보여 주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구속 과정을 온전히 이루셔서 구속 받은 모든 백성들과 천사들과 온 피조계가 하나님께 경배할 때를 바라 보면서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시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예배도 구속사 안에 있는 것이며 궁극적 예배의 극치를 향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구속사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그 구속사가 극치에 이르기를 위해 기도하면서 온전해진 예배를 지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 가운데서는 항상 이전의 구속사와 함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에게 대한 찬양과 감사에 대한 표현과 그에 대한 의존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해를 가질 때 교회가 당할 모든 핍박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회는 두려워 하지 않고 찬양하며 경배하며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힘은 악에게 있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인정하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요한 시대의 교회는 더한 핍박과 환란 가운데 있는 교회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악이 실재적이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그래도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 이 하늘 예배의 정황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하나이다. 이 땅의 연약한 교회는 이 사실을 깊이 의식하면서 주께 경배하고, 그렇게 경배한 자로 사명을 이루면서 살아 가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을 중심한 역사 의식을 가진 교회만이 제대로 경배하며 경배한 자로서 어려움과 시련을 잘 견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5.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예배
우리도 바른 경배의 태도를 가지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영예와 권위도 하나님께만 돌려드리는 24장로들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돌려드리는 태도로 예배에 임해야 한다. 다른 삶의 영역에서도 그렇지만 예배의 정황에서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고,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다. 모두가 죄인이요 구속 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평등화는 예배 후의 서로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 참으로 경배한 이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며 평등하게 대하는 이이다. 사람에 대한 차별은 예배와 교회의 맥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입으로는 다 같이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 경배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의식과 예배의 구체적인 과정에 스며들어 온 인간 중심적 태도가 너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성하여 우리들의 예배 속에 있는 인간 중심적 모든 요소를 불식하는 데 힘을 써야 한다. 예배가 여흥과 쇼(entertainment)적 성격을 지닌 것이라는 인상을 주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예배가 인간 중심적인 것으로 화(化)하는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예배가 인간 중심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만이 찬송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또한 요한계시록 4장의 처음 찬양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3번이나 반복되며 강조된 것을 주의해 보아야만 한다. 그는 피조계와 구별된 분이시므로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그의 거룩성이 드러나는 예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바로 삼위일체적 존재로 당신님을 계시하시고 그런 존재로서 경배를 받으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 예배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예배는 기독교의 예배가 아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인들이 연합하여 가지는 모임을 예배라고 해서도 안되고 기도회라고 해도 안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요한 계시록 4장과 5장에 나타난 우주적 예배를 중심으로 우리의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논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는 기독교적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고 계시된 대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역사 가운데서 아주 구체적인 구속의 일을 행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에게 합당한 태도와 그가 정하신 방식에 따라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바른 태도로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성도들과 함께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경배에 동참하여 경배하는 일이
기독교적 예배(Christian Worship)이다.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 설립 제20주년 기념세미나 강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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