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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봉 열차를 타고
차르에 의한 전제정권이 붕괴되면서 1917년 4월에는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귀국하기 시작했다. 플레하노프, 레닌, 체르노프 등 굵직굵직한 혁명가들이 모두 이 달에 국내로 들어왔다. 레닌이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스위스 취리히에서였다.
2월 하순의 어느 날 저녁식사를 끝마친 그는 다시 도서관으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폴란드인 동지 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며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레닌, 소식을 들었어요?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났어요."
레닌은 곧 신문을 통해 이를 확인하고 즉각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 준비를 하는 동안 레닌은 귀국 후에 실행할 계획안을 준비하느라 머릿속이 분주했다.
"현재 러시아 정부는 이중 구조로 되어있다. 즉 임시정부와 소비에트가 그것이다. 소비에트는 평화, 빵, 자유를 원하는 민중의 대표이고, 임시정부는 부르주아지 계열, 즉 이들의 자유주의적 경향은 로마노프 왕조를 타도하는 데에 국한되어 있다. 따라서 두 집단의 이해관계는 서로 대립될 수밖에 없다. 임시정부에서는 민중의 소원을 풀어줄 수도 없고, 자유 또한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임시정부는 전쟁 수행을 담보로 프랑스와 영국의 보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정부는 민중에게 빵을 줄 능력도 없다. 빵을 주려면 자본가와 지주계급의 재산을 빼앗아 골고루 분배해야 하는데 부르주아 정부란 원래 사유재산 제도를 보호하게 마련인 것이다."
레닌의 머릿속은 이런 생각들로 바빠졌다. 레닌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혁명은 아직도 제1단계의 과도기에 불과하다. 이제는 부르주아지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넘겨주어야 하며 전 러시아의 노동자, 농민, 군인들은 페트로그라드시의 소비에트 영도하에 단결해야 한다.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즉시 휴전하고, 전쟁 수행을 위해 부르주아 정부가 진 10억 달러의 부채는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들여온 돈인 만큼 자본가들이 갚아야 한다고 선언해야 한다."
레닌의 구상 속에는 벌써 실제적인 정치 일정까지 짜여 있었다. 그는 우선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 권력을 볼셰비키가 장악한 후 노동자, 농민에게 그들이 원하는 토지, 빵, 자유를 주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대체적인 생각이 정리되자 레닌은 러시아로 하루 속히 돌아가려 노력하였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단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임시정부가 그의 귀국을 막았다. 그렇다면 레닌은 정부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제3국을 통해 입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통로 역시 영국과 프랑스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귀국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반대하는 러시아 정치 망명객들이 입국하는 것을 강력히 저지했다. 또한 러시아 정부에서도 외무상 밀류코프의 성명이 있었다.
"볼셰비키에게는 절대로 입국 비자를 발급하지 말도록 각 국의 대사들에게 명하시오."
정부는 반전론자인 레닌이 입국하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이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레닌은 스위스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자신을 보호해주던 이곳이 너무 지겹고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악마에게 영혼을 맡기고 하늘을 나는 요술담요를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사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닌이 귀국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3월이 지났고 마침내 마르토프가 묘안을 제시했다.
"영국과 프랑스 말고 또 다른 통로가 있습니다."
"뭐라고, 어디야, 어떤 통로야."
급해진 레닌은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마르토프는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 차분히 그리고 치밀하게 계산된 그의 묘안을 풀어놓았다.
"동맹국이 아닌 적국 독일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음, 독일이라, 가능할까?"
독일 정부에게 독일을 경유해 스칸디나비아를 거쳐 러시아로 입국하겠다고 요청하면 그들은 일단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것이다. 우선 반전 운동가인 러시아 혁명가들이 입국하게 되면 국론이 분열되어 혼란이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국내로 병력이 이동해 그 공백 상태를 이용하면 서부 전선의 연합국을 전면 공세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분으로 약해진 러시아를 쉽게 집어삼킬 수 있다는 심산으로 독일은 이들의 러시아 입국을 도와줄 것이라고 마르토프는 계산했다.
사실상 당시 독일 정부는 러시아가 약화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았다. 러시아의 혁명을 돕기 위해 해외로 망명한 혁명 지도자들을 지원하는가 하면(일부 혁명가들은 독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도 한다) 반정부적인 유인물 반입을 도와주기도 했다. 독일 정부는 마르토프의 이런 제안에 레닌의 입국이 분명 독일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그들을 돕기로 했다. 그런데 독일 정부에서는 방법상의 문제를 놓고 골머리를 앓았다.
"그들은 직업 혁명가이고 영향력도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 중 누군가가 독일 국내로 잠입하거나 우리 국민들 중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접근해 정보라도 흘리게 된다면 큰 일이 아니오."
"그렇소. 그들 중 누군가가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에 끼어든다면 파급 효과도 클 것이오."
그들은 숙의 끝에 러시아 정치 망명객들을 위해 특별열차를 마련하였다. 소위 '밀봉된 열차'였지만 러시아의 혁명가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밀봉 열차에는 볼셰비키 19명, 유대인 동맹회원 6명, 국제주의 멘셰비키 3명 그리고 그 외의 러시아 혁명가들을 포함한 32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밀봉 열차를 타고 독일을 통과한 다음 기선으로 스웨덴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러시아로 들어갔다.
4월 3일 그들이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역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였으나 엄청난 인파가 역 주변과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건물에는 볼셰비키의 슬로건들이 곳곳에 걸려있었고, 남녀 노동자들은 붉은 깃발을 흔들어댔다. 많은 병사들이 받들어 총 자세로 군악대와 함께 도열했고 볼셰비키들은 손에 꽃을 들고 기다리고 서 있었다. 이때 소비에트의 의장인 멘셰비키의 츠케이드제가 인파에 밀리면서 겨우 대합실로 들어섰다. 드디어 레닌이 훗날 레닌 모자로 불린 둥근 모자를 쓰고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얼굴은 좀 긴장한 듯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츠케이드제는 레닌에게로 다가서며 인사를 건넸다.
"레닌 동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이름과 전체 혁명의 이름으로 당신의 러시아 귀환을 환영합니다. 우리 혁명적 민주주의의 일차적 과업은 안팎의 어떠한 방해로부터 혁명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민주 세력의 분열이 아니라 더욱 다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 이 목표를 추구하기를 희망합니다."
이때 레닌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절대적 인기와 영향력을 깊이 인식하며, 군중을 향해 외쳤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후에 이 구호는 그의 인기와 영향력을 크게 확대시켰다. 레닌은 그에게로 몰려드는 인파를 뚫고 간신히 역 밖으로 빠져 나왔다. 군중은 환호를 보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레닌 만세!"
그들은 또 프랑스 혁명 때 불렸던 라 마르세예즈를 미친 듯이 불렀다. 병사들이 레닌을 호위하며 볼셰비키 당사로 사용 중인 유명한 발레리나 크셰신스카야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에 도착한 레닌은 발코니로 나가 빽빽이 몰려든 군중을 향해 연설을 시작하였다.
"친애하는 동지들, 병사들 그리고 농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과 함께 러시아 혁명을 맞이하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군대의 전위대로서 맞이합니다. 약탈적 제국주의 전쟁은 유럽 전체의 내란입니다. 전 세계적 사회주의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이제 유럽의 자본주의는 무너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취한 러시아 혁명은 새 기원이 되었으며 그 길을 열었습니다."
그는 가슴 뜨거운 연설을 마친 후에 다시 한 번 혁명을 축하했다.
"사회주의 혁명 만세!"
레닌은 곧바로 저택으로 들어가 동료들과 함께 전쟁과 토지 문제, 또 내분과 기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밤을 지새우며 토론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4월 4일 볼셰비키 간부회의를 소집하고는 '4월 테제'를 발표하였다. 레닌은 이 발표를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다.
세부 사항을 살펴보면 첫째, 전쟁을 종식시키려면 자본주의를 타도해야 한다. 둘째, 우리 당은 현재 상태와 같은 과도기에서는 전술에 신축성을 가져야 한다. 셋째, 임시정부를 더 이상 지원하지 말 것이며, 소비에트의 권력을 확정함과 동시에 소비에트 내에 볼셰비키 세력을 확장시켜야 한다. 넷째, 의회제 공화국을 지지하는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군대, 경찰 및 관료제도는 폐지해야 한다. 다섯째, 모든 토지는 국유화하고, 은행들은 소비에트 통제를 받는 단일 국립은행으로 통합해야 한다. 여섯째, 생산과 분배에 대한 소비에트의 통제를 확대하고 당 대회를 확대하여 당의 강령을 새로운 상황에 맞도록 개정하고, 당의 명칭을 사회민주당에서 공산당으로 바꾸어야 한다. 일곱째, 새로운 혁명적 국제조직을 창설한다.
레닌의 4월 테제가 발표되자 다른 당들뿐만 아니라 당내 우파들도 반기를 들고 난색을 표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모순되었지만, 그중에서도 혁명이 자본주의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노동자, 농민의 국가인 사회주의로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벗어난 것이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빈농이 곧바로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도 무리였다. 레닌은 대중을 이끄는 당의 역할을 강조했고, 멘셰비키의 입장을 무시한 채 볼셰비키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였다. 레닌의 주장은 전반적으로 냉대를 받았으며, 그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던 지노비에프조차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4월 테제를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다른 일체의 이론은 회색이며, 푸르른 것은 영원한 생명의 나무다."
드디어 3주간의 노력 끝에 레닌은 4월 테제를 볼셰비키의 공식 입장으로 만들었다. 레닌의 주장이 관철된 것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가 타협과 합리적인 방안만을 모색하고 있을 때 레닌은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볼셰비키당을 독보적 정당으로 확립시켰다. 이것은 권력 장악의 기회를 볼셰비키 쪽으로 한 걸음 당긴 결과를 가져왔다.
4월 테제가 발표된 후 더욱 무력해진 임시정부는 4월 18일 밀류코프를 통해 연합국의 우려를 풀 각서를 보냈다.
"우리는 승리의 순간까지 연합국에 대한 의무를 완전히 준수할 것이다."
이 소식은 연합국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었을지는 모르나 국민들에게는 커다란 분노를 샀다. 더욱이 볼셰비키는 '반전론'을 외치며 선동하였으며, 4월 21일에는 약 10여만 명의 노동자·병사들이 종전을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임시정부로서는 이 같은 상황이 4월 테제와 함께 커다란 위험요소로 다가왔다. 그러자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에 연정을 요청하였고, 소비에트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5월 5일 새 정부가 수립되었다. 물론 볼셰비키는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임시정부가 이중 권력 구조를 유지하면서 소비에트와 어깨를 맞대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1905년에 결성되었던 노동자 소비에트의 부활과 함께 군대 소비에트의 창설로 소비에트의 힘이 막강해진 데에 있었다. 이들은 2월 혁명의 초기에 재건되었으며 당시 노동자들은 온건 사회주의자, 멘셰비키, 좌파 사회혁명당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소비에트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나 계획은 임시정부의 의도와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임시정부는 소비에트를 내치고 싶지만, 소비에트에게는 언론조직과 전국의 노동자 계급, 그리고 군대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다. 따라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비에트와 직접 충돌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임시정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비에트의 눈치를 보며 일하는 것이 최상책이었다.
임시정부의 가장 큰 현안은 토지문제였다. 농민들은 혁명 이후 더 이상 기다리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지만 임시정부는 선뜻 해결하지 못하고 미온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농민들은 도처에서 영주들을 기습하여 토지를 몰수하는 등 자신들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농민들은 더 이상 정부의 심의나 음모, 의회의 결정에 개의치 않고 그들 스스로 토지 접수를 준비했다. 이 같은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임시정부는 현실을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농민과 맞서 싸울 것인가에 대해 선뜻 답을 내리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내린 결론은 그저 기다린다는 것뿐이었다.
1917년 6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제1차 러시아 노동자·병사 대표자 소비에트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볼셰비키 105명, 멘셰비키 248명 그리고 농민 쪽에 기반을 둔 사회혁명당이 258명, 그리고 뚜렷한 당적을 나타내지 않은 대의원을 포함하여 1천여 명이 넘게 참석했다. 볼셰비키란 원래 다수파란 뜻이지만 이 대회에서는 그 뜻과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무서운 단결력으로 무장한 반면 다른 세력들은 그 힘을 규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대회의 가장 큰 쟁점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안이었다. 이 대회에 참석한 레닌은 임시정부를 강력하게 부정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우리는 임시정부에 대한 소비에트의 지지를 반대합니다. 볼셰비키는 이제 러시아의 운명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대회에 선출된 소비에트의 중앙집행위원회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로 대부분이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명연설가 케렌스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레닌을 통렬하게 공박하고 나섰다.
"러시아 민주주의의 과업은 혁명의 산물을 공고히 하여 해외로 망명했던 레닌 같은 동지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더 이상 망명 생활을 할 필요가 없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레닌 동지께서는 꼭 어린아이 같은 처방, 즉 체포, 파괴, 처형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사회주의자입니까, 아니면 차르 체제의 비밀경찰입니까?"
레닌은 이 대목에서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었는지 그의 발언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나 명연설가인 케렌스키가 중도에서 멈출 리 없었다.
"레닌 동지는 우리에게 프랑스 대혁명의 전철을 밟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끝내 독재로 마감하였습니다. 동지가 고의는 없으나 반동 세력과 무모한 동맹을 결성하여 우리 임시정부를 파괴한다면 그대는 진정한 독재자를 위해 문을 열어 주는 격이 될 것입니다."
레닌과 케렌스키, 이 두 사람은 이 순간 앙숙처럼 만났지만 이들의 인연은 레닌이 심비르스크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작되었다. 레닌은 고등학교 시절 형이 처형당한 사건으로 아주 차가운 사람이 되었다. 형이 처형된 후 사람들은 그 불운의 집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적대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심비르스크 고등학교 교장 표도로 케렌스키(임시정부 수상인 케렌스키의 아버지)는 황제 암살 미수범인 레닌의 형에게 금메달을 주었다는 이유로 상부로부터 문책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이 다시 수석으로 졸업하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레닌에게 금메달을 주었고 레닌의 장래에 대해서도 진심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그가 카잔 대학에 무난히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장까지 써주었다. 레닌은 어려운 상황에서 그에게 커다란 신세를 진 셈이었다. 그런데 케렌스키와 레닌이 이같이 앙숙처럼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표도로 케렌스키가 보았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연립정부의 전쟁상을 맡고 있던 케렌스키는 임시정부의 지지기반을 넓히려는 생각으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러시아는 비참할 정도로 참패를 당하였고, 7월 6일 이후부터 독일의 반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전선에서 사망자가 늘어나자 후방의 군인들과 노동자들은 반란을 일으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까지 돌진했다. 그들은 소비에트가 강력하게 권력을 잡아줄 것을 원했지만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지도자들은 그들과 담판을 짓지 못하며 시간만 보냈다. 소비에트가 주저하는 이유는 마르크스적 혁명이론의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이었다. 융통성 없는 이들의 완고한 태도는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와 병사들을 흥분시켰다.
"이 멍청이들아, 지지할 때 권력을 잡아."
케렌스키는 이번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정부당국과 미리 약속하고 북부전선의 친정부적 군대를 끌어들였다. 무력 진압으로 약 4백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사태는 수습되는 국면을 보였다. 이와 더불어 임시정부에서는 정국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 꼬투리를 찾아냈다.
임시정부는 현재 혁명 지도자로 활약하는 레닌이 적국인 독일의 자금을 받아 볼셰비키당 자금으로 사용한다고 국민에게 폭로했다. 그리고 레닌이 타고 온 밀봉 열차도 독일과 짜고 정부를 전복한다는 약속하에 받은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 충격적 사건은 볼셰비키를 커다란 위기로 몰아넣었고, 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이 주류를 이루었던 소비에트조차 임시정부에 종속되는 듯 보였다. 7월은 혁명가들이 다시 위기에 처한 시기였다. 케렌스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새 내각을 구성하고 자신이 수상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콜로프체프 장군에게 레닌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레닌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잡아라. 체포가 불가능하면 사살해도 좋다."
위기에 처한 레닌은 다행히 그를 지지하는 군대의 지원을 받아 지하로 잠적하였다. 이 당시 레닌에 대해서는 모두 냉담하였고, 심지어 볼셰비키당에서 탈당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상황이 임시정부에 유리하게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힘은 여전히 약했다. 임시정부는 전쟁을 확실히 종결짓지도 못했고 또 부르주아에게서 등을 돌려 과감히 노동자 계급에게 다가서지도 못했다. 또한 혁명의 대세를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저 양보와 호소만으로 국민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우유부단한 정책만 구사하며 결국 실패로 끝났다.
러시아의 시회주의자들과 케렌스키는 스스로가 역사적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을 위한 싸움만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날아들었던 호기조차 잡지 못하고 실패로 마감하였다.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가까스로 볼셰비키의 공격을 잠재운 임시정부에게 이번에는 우익 반동 세력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계속되는 혼란 속에서 소비에트는 권력 장악을 거부하였고, 임시정부 또한 강력한 행동을 취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상태였다. 또 볼셰비키와 그들을 지지하던 과격한 대중들도 레닌의 잠적으로 침체되어 있었다. 이때 육군 참모총장이던 코사크 출신의 코르닐로프 장군이 쿠데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군부는 분열됐고, 장교들은 2월 혁명 이후 괴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우리 장교들은 러시아를 지켰으며 헌신적인 파수꾼이었다. 죽음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역할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이러한 우리들을 폭군의 하수인으로 여기는 혁명분자들과는 어떠한 타협도 할 수 없다."
당시 군부에서는 군을 통합하여 힘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군의 힘을 회복하는데는 두 가지 방안이 있었다. 하나는 장교들을 통해 군대에 또 하나의 군을 조직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방법은 지원병으로 구성된 돌격대를 각 연대 곳곳에 배치하여 핵심요원으로 활동하게 하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두 번째 방법이 채택되었고, 돌격대에게는 음식과 특별장비가 지급되었다. 그리고 전사시에는 가족들에게 연금이 지급되도록 조치하였다. 이들 특수요원들은 주로 병사위원회에서 해고된 장교나 국가에 대해 충성을 보였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급하게 만들어지는 바람에 이들의 반혁명적 기능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병사위원회는 조직을 해산할 것을 촉구했다. 당시 총사령관 부루실로프는 이번 사건에 대해 군대의 분열을 초래한다는 이유를 들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군부의 계획이 실패하자 그들은 책임을 물어 부루실로프를 제거했다. 부루실로프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잡은 사람이 바로 코르닐로프였다. 그는 사자와 같은 가슴을 가진 사람이란 별명답게 임시정부와 군 최고사령관에게 강력한 전문을 보냈다.
"우리의 바보 같은 군대는 뺑소니만 일삼고 점점 파멸해가고 있다. 이러한 사태에 처해 있는 본관의 임무는 일단 모든 전선에서 공격을 일체 중단하고 해이해진 기강을 확실히 잡아 엄격한 군율을 가진 군대로 재조직하는 것이다."
장교들이나 우익 정당들은 코르닐로프가 이 혼란을 해결할 유일한 인물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반혁명적 분위기가 고조되자 케렌스키는 실추된 임시정부의 위신을 만회하고 혁명으로 인한 무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코르닐로프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당시 코르닐로프의 인기는 대단했고 질서를 원하는 자유주의자들과 우익 정당의 부추김으로 자연스럽게 쿠데타를 감행하게 되었다. 힘을 갖게 된 코르닐로프는 관할지역 내의 토지문제에 대한 권한도 행사하였다. 그는 오합지졸의 군대가 아닌 소수 정예부대로 전쟁을 수행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수백만 명의 군인을 제대시킴과 동시에 그들에게 약 2.5에이커씩 땅을 나누어주고 제대한 장교로 하여금 지지층을 넓혀 후방 전선을 조직하는 복안을 내놓았다.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부르주아의 핵심적 요구사항이었던 국가독점과 정부 개입을 폐지하고자 했다. 그리고 제헌의회를 소집한 뒤 시급한 현안을 조속히 해결한 후 빠른 시일 내에 해산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8월 27일, 그는 볼셰비키가 폭동을 기도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진압한다는 이유를 들어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였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의 덫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케렌스키는 그를 제거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볼셰비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짜리즘을 부활시키려는 반동 세력을 쳐부숩시다."
볼셰비키는 반동주의자들의 음모에 대항하자고 호소하였다. 6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반동 세력으로부터 수도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공장 노동자들은 이틀 동안에 100문의 대포를 제공했으며, 코르닐로프의 추종자들인 백군에 대항하여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여 군용열차를 저지하였다. 그리고 크론슈타트 수병 부대가 페트로그라드를 수호함으로써 코르닐로프의 반란은 실패하고 말았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 사이의 갈등을 악화시켜 혁명 세력들의 판도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이때 볼셰비키 세력만이 이익을 누렸으며, 그동안 침체되었던 세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번 사건으로 가장 타격을 입은 세력은 자유주의 성향의 카데츠였다. 사실 카데츠는 쿠데타에 대하여 다소나마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소비에트와 임시정부가 코르닐로프를 거부한다면 쿠데타는 실패하고 내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임시정부 내의 과격한 사회주의 각료들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쿠데타의 실패로 카데츠의 입장은 난처하게 되었다. 아무리 코르닐로프가 군부를 장악했다하더라도 카데츠의 지지 없이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카데츠가 적극적으로 쿠데타에 개입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쿠데타 세력을 고무시켰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웠다. 이후부터 카데츠는 혁명세력으로서의 지도력을 상실했고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였다.
카데츠의 몰락과 함께 임시정부와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세력도 위축되었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를 막은 것은 반혁명 기회를 제공했던 케렌스키가 아니라 소비에트의 군사위원회와 페트로그라드의 병사와 노동자였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권위는 완전히 실추되었다. 그러자 케렌스키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전의 연립내각이 각 세력의 지지와 이익을 반영하려 했다면 이번 내각은 집행위원회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내각은 어떠한 세력에도 지지를 받지 못했으나 단지 볼셰비키에 대해 뚜렷한 대응책이 없었던 온건세력들이 방관하며 임시정부를 끌어갈 뿐이었다.
코르닐로프로부터 배반당했다고 주장한 케렌스키는 사실상 반란 자체보다 카데츠파와 각료들이 사임한 것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 이유는 그래도 자신의 편이었다고 생각했던 카데츠파가 코르닐로프와 충돌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의 충돌 때문에 사임한 까닭이었다. 카데츠는 그동안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주는 역할을 해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때 온건 사회주의 세력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도 자체 내에서 분열이 일기 시작했다. 멘셰비키는 마르크스 이론에 나타난 부르주아 단계를 공격했다. 사회혁명당에도 급격한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는 좌파가 등장하여 볼셰비키에 동조하였다. 결국 볼셰비키는 이러한 세력을 등에 업고 코르닐로프 반란 이후 대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페트로그라드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서도 과격파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력 변화와 함께 사회 상황은 8월 이후 급격히 과격해졌다. 이중 구조의 붕괴는 도시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농민의 폭동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유일하게 농민을 대변했던 사회혁명당도 이제는 농민을 선동할 입장이 아니라 자제를 호소해야 할 처지였다. 사회혁명당은 새로운 입법으로 토지를 무상 분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농민들은 사회혁명당의 미온적 태도에 실망하며 믿지 않았다.
농촌에서의 무질서는 임시정부와 온건 사회주의 세력의 몰락을 예고라도 하듯 10월에 이르러 파국적 현상을 보였다. 그것은 실제 내전상태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케렌스키 정권은 여전히 토지문제를 도외시한 채 국내 개혁을 제헌의회에 위임하여 방치하였다. 그런데다가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한 상태에서는 회의를 개최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시간을 흘려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케렌스키의 정치적 무능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근본 원인은 사회혁명당 자체의 결함이었다. 사회혁명당이 차르의 통치하에 있었을 때는 테러를 비롯하여 전투적인 혁명 정신을 발휘하였지만 혁명 상황에서는 그에 대응할 만한 뚜렷한 계획을 내놓지 못했다. 더구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농촌에 지지기반을 두고 있었던 그들에게 토지에 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케렌스키 정권과 사회혁명당보다는 토지, 빵, 자유를 부르짖는 볼셰비키에게 현실적인 매력을 느꼈다. 또한 러시아군은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점차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혁명의 산지였던 페트로그라드나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북부나 서부의 전선은 붕괴될 정도였다. 반면 혁명의 열기가 약했던 남부 전선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보였다.
패배가 계속되자 병사들은 종전을 열망하였고, 이러한 열망은 코르닐로프 반란 이후 탈영과 독일군과의 친교 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볼셰비키가 소비에트를 장악하자 한 달 사이에 탈영병의 수가 평소의 4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특히 전투 중에 사병들을 가혹하게 징계하거나, 혁명적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대다수 장교들로 인하여 장교와 사병 간의 갈등은 매우 심각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의 평화, 토지, 빵의 구호는 농민 출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 땅을 분배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임시정부로 보낸 한 장교의 전보의 내용을 보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독일의 공세는 혁명 러시아를 파멸로 몰아넣을 것처럼 거세졌으며, 갑작스런 변화가 군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다. 권위와 복종은 간 곳이 없고, 신체가 멀쩡한 낙오병과 탈영병이 속출하고 있다."
한편 노동자들은 코르닐로프 반란 이후 생활조건의 개선을 넘어 정치적인 것을 요구하며 한층 더 과격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요구에 대해 자본가들은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공장폐쇄로 맞섰으며 전쟁으로 인한 침체로 수많은 노동자가 실직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에 맞서 노동자들은 공장 점거와 자율경영을 시도하는 한편 정치적 효과를 노리는 파업 투쟁도 일으켰다. 코르닐로프 반란은 레닌이 의도했던 폭력 혁명의 조건을 훨씬 빠르게 성숙시켰다. 사회의 상황과 조건은 볼셰비키가 의도한 대로 흐르고 있었다.
8월 3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개최되었을 때 볼셰비키는 279대 115로 다수를 획득하였다. 츠케이드제 의장을 비롯해 멘셰비키파의 간부가 퇴진하고 케렌스키에 의해 체포되었던 트로츠키가 볼셰비키를 대표하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로서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역할이 막강했기 때문에 그 의장직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였다. 트로츠키는 원래 멘셰비키로 출발하였으며 지금까지는 볼셰비키로 대표되는 레닌과 여러 차례 노선의 차이를 보인 바 있었다. 그러던 트로츠키가 우유부단하고 타협적인 소비에트 노선에 반기를 들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레닌이 취하는 노선을 적극 지지했으며, 레닌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을 때 이에 항의하다가 구속되기까지 했다.
당시 케렌스키는 우익 쿠데타 이후 자신의 정부를 지지해줄 사회주의자들의 협력을 구하고자 트로츠키를 석방한 것이다. 그런데 트로츠키는 풀려나자마자 케렌스키의 의도와는 달리 레닌을 대신하여 볼셰비키를 이끌었다. 드디어 레닌과 트로츠키가 손을 잡은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역사학자인 도이처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다른 과정을 겪은 것은 현재의 일치를 향해 움직인 과정인 것이다."
9월 5일에는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도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또한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같은 반란에 대비하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10월 9일 막강한 힘을 지닌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군부의 음모에 대처하였다. 이 새로운 조직은 적위대의 활동을 관장하였고 트로츠키의 열성적 지휘에 힘입어 수도 경비대마저 볼셰비키 쪽으로 기울어졌다. 군부 내에서도 병사 소비에트의 90퍼센트가 볼셰비키를 지지하였다.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된 트로츠키는 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에 소비에트 대회를 개최하고 그 대회에 일체의 권력을 부여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제 소비에트는 볼셰비키의 손에 완전히 장악된 것이다. 또한 트로츠키는 의장 자격으로 볼셰비키 집권을 위한 분위기를 선동하였다. 이제 볼셰비키는 트로츠키의 합류와 소비에트를 완전 장악하여 제1당이 되었다.
힘을 갖게 된 볼셰비키는 케렌스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레닌의 체포명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우리의 동지, 레닌의 체포명령을 철회하라."
이때 레닌은 체포명령을 피해 핀란드로 가있었다. 레닌은 국내에서 잠적했을 때나 핀란드로 도피해서도 계속해서 혁명 활동을 지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은 《국가의 혁명》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종래와는 좀 다른 이론을 전개했다. 이전까지 그는 대중은 볼셰비키당의 지도 없이는 혁명을 이룩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이 책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의 새로운 사회에서 대중이 담당하고 행할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일 뿐이었으며 현실과는 엄청난 차이를 나타냈다. 도피 중인 레닌은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트로츠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만세! 트로츠키 동지."
그해 9월 레닌은 핀란드의 도피처로부터 또는 페트로그라드의 은신처에서 드디어 거사의 시기가 도래했음과 무장 봉기할 것을 주장하는 수많은 편지를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에 계속 발송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서 각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 그리고 점점 거세어지는 무장 농민층의 불만, 정부의 페트로그라드 포기 소문, 그리고 국제적 측면에서는 독일의 발트 함대 폭동 등을 열거했다.
레닌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출범시키자마자 이 위원회를 권력 장악을 위한 최적의 기구로 단정지었다. 실제로 중앙위원회의 동료들을 설득하여 열망하던 '거사'건을 의제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군사혁명위원회 창설 다음날인 10월 10일이었다.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조금씩 준비를 했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당 내에 있었다. 당시 볼셰비키당의 최고 참모 격인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등은 권력장악과 봉기를 연관짓는 것을 거부했고, 폭력적 방식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소비에트에 기초하여 다른 사회주의 정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제의했다. 그리고 현재 볼셰비키 세력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농민·노동자·병사가 모두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있다. 앞으로 볼셰비키 세력이 소비에트나 제헌의회에서도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할 수 있을 텐데, 왜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이냐?"
이러한 차이는 결코 방법론의 이견이 아닌 관념적 차이가 그 저변에 깔려 있었다. 사실 레닌에게 볼셰비키란 '인민' 자체를 구현한 것이었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인민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을 뜻했다. 반면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현실적인 정치인으로서 권력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고 작용하는가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10월 10일 레닌은 당 중앙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변장하고 핀란드에서 귀국하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강력하게 거사를 종용하였고,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종전의 입장을 고수하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당 중앙위원회에 참석한 위원 12명 중 10명이 거사에 찬성하자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레닌의 무장봉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며 멘셰비키가 발행하는 신문에 그들의 봉기계획을 폭로하며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로드지앙코와 케렌스키에게도 이 사실을 폭로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레닌은 크게 화를 냈다.
"쥐새끼 같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우리의 당에서 축출합시다."
다행히 이 사건은 스탈린의 중재로 두 사람이 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직만을 사퇴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한편 볼셰비키당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군사혁명위원회를 중심으로 적위군의 핵심인 2만 3천 명의 무장 노동자와 수비대 병사 15만 명, 그리고 8만 명의 발트 함대 수병들을 준비했다.
상황이 급박스럽게 돌아가자 임시정부는 혁명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카자크 부대를 집결시켰다. 그리고 비밀경찰들의 레닌 체포작전이 도시 전체에서 펼쳐졌다.
원래 거사일은 전 러시아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는 10월 20일로 정해졌으나, 대회 집행부를 장악하던 멘셰비키는 대회를 5일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촉박했던 볼셰비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거사 날짜는 트로츠키의 제안에 따라 10월 25일로 정해졌다. 그러자 페트로그라드 수비 연대의 소비에트 대표들은 군사혁명위원회에 수비대의 지휘권을 넘겨주었고, 트로츠키는 모든 부대에 정치위원을 임명함으로써 사실상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사태가 급진전되자 임시정부는 10월 24일 아침 일찍부터 당시 스탈린이 편집을 담당했던 볼셰비키 신문을 폐간하고 반정부 선동죄로 체포하려 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재빠른 행동으로 신문은 불과 몇 시간 후 다시 거리에 뿌려졌다. 임시정부의 이러한 조처는 오히려 봉기를 위해서는 더없이 좋은 구실이 되어 버렸다.
혁명이 시작되자 군사혁명위원회의 대원들은 교통 요충지와 주요 철도역을 점거하는 한편 다음날에는 전신국과 일부 정부기관도 접수했다. 은신처에서 나온 레닌은 군사혁명위원회 본부로 사용하던 스몰리로 자리를 옮겼다. 혁명이 일어나자 레닌은 일단 임시정부에 방어적 태도를 보였으나 얼마 후 임시정부의 각료들을 체포하는 등 강력하게 대처했다.
혁명군은 러시아의 모든 기관을 순조롭게 점령했으나 임시정부가 있는 동궁에서만 약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동궁에는 사관생도와 카자크 부대 그리고 여군 결사대 등 1천 8백 명 정도의 병력이 장갑차 4대, 대포 6문, 그리고 약간의 기관총으로 방어했다. 그들은 나무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그 뒤에 몸을 숨긴 채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수상 케렌스키는 정권을 지킬 수 없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볼셰비키의 순양함 오로라호가 네바 강에서 동궁을 압박하자 임시정부는 더 이상의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10월 26일 저녁 임시정부는 항복하였고 대부분의 각료는 체포되었다.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케렌스키는 미국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페트로그라드를 탈출하였다. 한편 25일 밤에는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사회혁명당의 일부 위원들은 무력의 위협 때문에 더 이상 대회를 진행할 수 없다며 퇴장해 버렸다. 당시 대부분의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들은 볼셰비키의 음모와 쿠데타를 맹렬히 비난했지만 그들에게는 볼셰비키를 저지할 만한 특별한 방법이 없었다.
10월의 혁명은 레닌과 그의 주변의 소수가 주도했다. 즉 정권 장악을 주저하던 다른 당파들과는 달리 권력에 대한 집요한 야심과 조직력을 갖춘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볼셰비키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러시아의 왕조는 무능했던 니콜라이 2세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퇴위를 선언하고 황궁에서 쫓겨난 니콜라이 2세는 퇴위 이튿날 일기에 일상과 감상을 적어놓았다.
"푹 잘 쉬었다. 햇볕이 비치고 서리가 희다. 시저의 책을 읽는다."
그는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은 조금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러한 순간을 즐기는 듯했다. 니콜라이에게 1917년 봄부터 여름까지의 생활은 황제였을 때보다도 훨씬 행복했다. 그는 통나무를 패고 잔디와 채소밭을 일구는 등 조용한 농촌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떠나버린 민심은 니콜라이 일가를 시사만평이나 만화에 우스꽝스럽게 등장시키며 조롱했다. 예를 들면 알렉산드라 황후가 피로 가득 찬 욕조에서 미소를 머금고 즐거운 목소리로 한 마디 한다.
"니콜라이가 혁명가를 몇 명만 더 죽이면 나는 이런 목욕을 자주 할 수 있을 텐데."
검열이 없어진 언론은 복수의 칼날을 잔뜩 세우고 황제부처에 대한 증오심을 발산했다.
"그들 부처는 러시아를 독일에 은밀히 팔아 넘겼다가 이제 와서 되찾으려고 한다."
니콜라이는 정치적 역량은 모자랐지만 마지막까지 러시아가 독일을 패망시키길 바랐다. 어쨌든 니콜라이 일가는 최악의 상황에 처했고, 소비에트는 로마노프 왕조의 학정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일부 과격파는 니콜라이 일족의 처형을 들고 나왔고 소비에트는 그들을 감금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의 실권을 갖고 있던 케렌스키는 선언적인 말을 하며 모든 주장을 일축했다.
"러시아 혁명은 복수를 행하지 않는다."
적어도 케렌스키가 건재하는 한 로마노프 일가는 안전했다. 그러나 레닌과 트로츠키가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오고 실질적인 혁명이 진행되자 케렌스키는 니콜라이에게 경고의 말을 전했다.
"볼셰비키는 지금은 나를 노리고 있지만 다음에는 당신을 노릴 것이오."
1917년 8월 니콜라이 일가는 로마노프의 정적들이 걸어야 했던 것처럼 시베리아의 토볼리스크로 떠나야만 했다. 사실 임시정부는 니콜라이 가족을 영국으로 망명시키려고 생각했다. 영국은 이전부터 친교를 맺고 있었고 국왕 조지 5세는 니콜라이와 사촌이었다. 니콜라이 일가의 망명에 대해 양국의 외상들의 접촉이 있었고, 독일 정부에서도 니콜라이 일가가 탄 배를 보호하겠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소비에트가 이를 거부하며 감옥에 수감할 것을 요구했다. 뒤늦게 이들의 망명 계획을 전해들은 성난 병사들은 요승 라스푸친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과 관까지 태워버리는 참극을 저질렀다. 러시아 국내 상황이 악화되자 영국은 망명지를 제공할 뜻을 즉각 철회했다. 이제 니콜라이 일가는 시베리아의 상업도시인 토볼리스크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레닌이 권력을 장악하자 황제 일가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었다. 게다가 과격파의 압력과 근거 없는 탈출계획이 나돌자 우랄산 부근의 에카체린부르크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명령에 니콜라이는 두려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우랄로만은 가고 싶지 않아. 지방 신문을 보니 그곳 노동자들은 나를 매우 미워하는 것 같던데···."
황제 일가가 에카체린부르크로 떠나자 그들에 대한 소식은 끊기고 소문만이 무성했다. 그 소문들을 모아 보면 황제 일가의 생활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고, 감시병들의 조롱과 음담 속에서 괴로운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황제 일가가 총살되었다는 소문도 들렸으나 정치적 천재인 레닌은 그들을 쉽게 처리하지 않았다. 레닌은 니콜라이 2세가 대관식을 올렸던 궁정에 앉아 니콜라이 2세의 부왕을 암살하려다 처형된 형을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니콜라이, 당신 일가는 복잡한 외교 포커 게임의 패요. 이제는 그 패를 내가 잡았으니 솜씨를 한번 구경해 보겠소?"
1917년 10월 레닌이 정권을 잡았을 때 니콜라이는 이미 지난 시대의 정치유물로 시베리아에 유형당해 있었다. 트로츠키는 그들을 이용하여 민심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레닌에게 권했다.
"그들의 공개재판 광경을 라디오로 방송한다면 민심을 수습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하지만 레닌은 이를 거부했다.
"지금 그보다 시급한 과제는 우리 볼셰비키의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것과 독일과의 전쟁에서 러시아를 구해내는 것이오."
전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과 볼셰비키의 대표는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회담을 열었다. 군사적으로 막강했던 독일은 러시아의 생사를 쥐고 흔들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정권 교체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독일과의 강화를 통해 하루빨리 정치를 안정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걸었던 공약 중 종전의 공약을 이행해야 했다. 레닌은 당초 러시아에서 혁명이 이루어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유럽 국가, 특히 독일에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는 제국주의 독일과의 협상이 아닌 사회주의 독일과 협상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유리했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을 거두고 수개월이 지나도 다른 국가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레닌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 선출된 외무대표 트로츠키를 내세워 공개외교를 시도했다. 트로츠키는 독일 정부를 거치지 않고 독일 국민에게 직접 뛰어들어 명연설을 펼쳐보았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결국 볼셰비키는 실질적 패권에 역점을 두어 1918년 3월 3일 독일과 강화를 맺었다. 이 강화로 러시아는 농토의 3분의 1, 인구의 3분의 1, 탄광의 90퍼센트, 중공업의 50퍼센트를 점유한 광대한 서부 영토를 독일에 내줘야만 했다. 독일은 동부 전선의 모든 전력을 서부 전선으로 이동시켜 연합군을 분쇄하고 그와 동시에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새 영토를 보급원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의 신문들은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을 '이해와 화해의 강화'라고 평했지만 러시아에게는 전면적인 패배이며 전례 없는 굴욕이었다. 득을 본 사람은 오직 레닌으로 그에게 필요한 것, 즉 반동 세력에 대항할 볼셰비즘을 강화시킬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그리고 독일은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보다 압도적인 힘을 지녔음을 세계에 알렸다.
독일은 보다 유리한 조약을 맺기 위해 밀실에서 여러 가지 거래를 준비했다. 특히 러시아의 혁명가들에게 밀봉 열차를 제공했던 독일은 이번에는 니콜라이 황제의 부활을 지원해주겠다는 은밀한 제의를 했다. 독일 정부는 러시아 내부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볼셰비키를 지원했으나 상황이 바뀌자 다시 로마노프 왕조를 부활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이 어떠한 조건에 있든 독일과 흥정을 한다는 것을 불명예로 여기며 그들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결국 냉혹한 외교 흥정에서 레닌은 일당 통치를 확립했지만, 사회주의 혁명당원 좌파와 공산주의 좌파 세력은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을 매국행위로 간주하며 정부를 떠났다.
조약이 마무리되자 니콜라이 2세는 처형되었고 황후와 황녀들 또한 처형되었다. 하지만 황녀 아나스타샤만은 여러 가지 소문을 무성하게 남겼다. 특히 황제의 일가가 모두 처형된지 40년 뒤인 1958년 독일의 위스바덴에서 "혁명으로 피살된 니콜라이 2세의 딸 아나스타샤는 바로 납니다. 나에게는 로마노프의 재산을 상속할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앤더슨 부인이라는 사람이 제소해 화제가 되었다. 훗날 영화 〈추상(追想)〉은 이 사건을 테마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