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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史 金正喜의 「山寺」 읽기
1. 산의 진면목은 어디에 있는가
추사 김정희의 「산사(山寺)」는 산속의 절에서 경험한 세계를 노래한 여덟 구절의 한시이다. 겉으로 보면 산사의 아름다운 풍경과 한가로운 생활을 노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구절씩 읽어 나가면 이 시가 단순히 산속의 평화로운 삶을 찬양하는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에는 한 사람이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세계 속에서 살아오다가 자기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 세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산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이미 산속에 있었다는 사실, 자신이 바라보고 있던 산의 모습 하나하나에 참됨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야기이다. 더 나아가 산을 바라보던 사람이 마침내 산과 더불어 살아가고, 산의 존재에 참여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山寺 — 金正喜
側峯橫嶺箇中眞
枉却從前十丈塵
龕佛見人如欲語
山禽挾子自來親
點烹筧竹冷冷水
供養盆花澹澹春
拭涕工夫誰得了
松風萬壑一嚬申
이를 직역에 가깝게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옆으로 보이는 봉우리, 가로놓인 산등성이, 바로 그 속에 참됨이 있구나.
지나온 시간을 열 길의 세속 먼지 속에서 헛되이 보냈구나.
감실의 부처는 사람을 보고 마치 말을 걸려는 듯하고,
산새는 새끼를 데리고 저절로 다가와 친해지는구나.
대나무 홈통으로 흘러온 차고 맑은 물로 차를 달이고,
화분의 꽃을 공양하니 은은한 봄이 깃들어 있구나.
콧물을 닦는 공부를 누가 다 끝마칠 수 있겠는가.
만 골짜기에 솔바람이 불어오니 한 번 길게 몸을 펴는구나.
이 작품을 이해하려면 우선 첫 구절의 산이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중국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는 여산(廬山)을 유람하고 유명한 시 「제서림벽(題西林壁)」을 남겼다.
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真面目
只緣身在此山中
가로로 보면 산등성이가 되고 옆에서 보면 봉우리가 되니, 멀리서 보거나 가까이서 보거나, 높이서 보거나 낮은 곳에서 보거나 그 모습이 모두 다르다.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다만 내가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다.
소동파는 같은 산이라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처럼 다양한 모습 가운데 어느 하나가 여산의 진면목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산속에 있기 때문에 산의 전체 모습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소동파의 시에는 중요한 인식의 문제가 담겨 있다. 우리는 세상을 언제나 어떤 위치에서 바라본다.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각자의 위치와 경험에 따라 다르게 이해한다. 그렇다면 사물의 진면목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부분적인 모습일 뿐인가?
추사는 바로 이 문제에서 자신의 시를 시작한다.
側峯橫嶺箇中眞
소동파의 ‘橫看成嶺側成峰’을 추사는 ‘側峯橫嶺’으로 압축한다. 어휘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순서도 바꾸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 세 글자 ‘箇中眞’이다.
소동파는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추사는 옆에서 보이는 봉우리와 가로로 놓인 산등성이, 바로 그 각각의 모습 속에 참됨이 있다고 한다.
봉우리는 봉우리대로 참되고, 산등성이는 산등성이대로 참되다는 것이다. 참됨을 발견하기 위하여 여러 모습을 모두 없애고 그 뒤에 숨어 있는 단 하나의 참모습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그 각각의 모습 속에 이미 참됨이 있다.
여기서 추사는 소동파의 세계를 딛고 새로운 세계를 연다. 소동파가 제기한 문제를 소동파의 언어로 다시 이야기하면서도 소동파와는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은 소동파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소동파를 충분히 이해하고 자기 안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추사는 소동파의 언어를 버리지 않는다. 그 언어 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발견한다.
2. 소동파라는 거대한 산과 열 길의 먼지
추사에게 소동파는 단순히 존경하는 옛 시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생애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었다. 뛰어난 학문과 예술적 재능을 지녔지만 정치적 갈등에 휘말려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소동파는 황주와 혜주·담주에서 고난을 겪었고, 추사는 제주도와 북청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추사는 소동파의 삶을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았다. 자신의 처지를 소동파의 유배에 빗대어 표현하고, 자신을 소동파와 동일시하는 글을 여러 차례 남겼다. 전가람의 연구에 따르면 추사는 자신을 ‘원우죄인(元祐罪人)’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자신의 거처를 ‘동파계(東坡界)’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소동파는 추사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이자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
그렇다면 추사에게 소동파는 하나의 거대한 산과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산은 추사에게 문학과 예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었다. 추사는 그 산을 바라보며 배우고, 그 산의 길을 따라 걸으며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위대한 산은 때로 그 산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야를 가릴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을 너무나 깊이 존경하고 그의 세계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면, 어느 순간 자신이 보는 세계가 실제로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세계인지, 아니면 그 사람의 눈을 빌려 보고 있는 세계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산사」의 둘째 구절을 새롭게 읽을 수 있다.
枉却從前十丈塵
“지나온 시간을 열 길의 세속 먼지 속에서 헛되이 보냈구나.”
여기서 十丈塵은 일반적으로 세속의 번잡함과 번뇌를 가리킨다. 그러나 첫 구절이 소동파의 시를 뚜렷하게 변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추사가 소동파를 자신의 이상적인 자아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하면, 이 거대한 먼지에는 소동파의 세계도 겹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十丈塵이라는 말의 일반적인 뜻이 소동파라는 말은 아니다. 추사가 소동파를 먼지라고 직접 부른 것도 아니다. 다만 소동파라는 거대한 문학적 권위가 추사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의 구조 속에서 읽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소동파의 세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3. 감실의 부처가 말을 걸어온다
추사가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하자 산사의 풍경은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龕佛見人如欲語
“감실의 부처는 사람을 보고 마치 말을 걸려는 듯하다.”
여기서 주목할 글자는 龕이다. 龕은 불상을 모시는 감실을 뜻한다. 불상은 감실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놓여 있다. 움직이지 않는 불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추사는 그 불상이 자신을 보고 말을 걸려는 듯하다고 느낀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부처를 바라본다. 그러나 여기서는 부처가 사람을 바라본다.
시선의 방향이 뒤집어진 것이다.
부처는 더 이상 일방적으로 관찰하거나 숭배하는 대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시인과 관계를 맺으려는 존재로 나타난다.
여기서 감실의 부처와 추사 자신을 연결해 볼 수 있다.
부처는 감실 안에 있고, 추사는 오랫동안 세속의 먼지 속에 있었다. 더 나아가 추사는 소동파라는 거대한 세계 안에서 자신의 문학적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둘 다 어떤 공간이나 형식 안에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실에 놓여 있다고 해서 부처가 감실에 갇힌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감실 속의 부처는 사람을 보고 말을 걸어온다.
마찬가지로 추사가 소동파의 세계 안에 있다고 해서 그 세계에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실의 부처는 추사에게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존재처럼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부처는 자신과 달리 이미 한정된 공간 안에서도 자유롭게 인간과 교감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부처가 시인을 보고 말을 걸려는 장면은 단순한 의인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전통의 세계가 현재의 시인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소동파라는 거대한 전통 역시 추사가 버려야 하는 과거의 권위가 아니다. 그 전통은 여전히 추사에게 말을 걸어오는 살아 있는 세계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무조건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듣고 응답하는 일이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을 ‘나(我)’라고 부르지 않는다. 불상이 바라보는 존재를 단지 ‘사람(人)’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부처와 마주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4. 새끼를 데리고 다가오는 산새
다음 구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山禽挾子自來親
“산새는 새끼를 데리고 저절로 다가와 친해지는구나.”
산새가 혼자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새끼까지 데리고 온다.
일반적으로 새는 새끼를 보호하려고 한다. 위험한 존재에게 새끼를 데리고 가까이 다가오는 일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데 이 산사의 세계에서는 산새가 새끼를 데리고 스스로 다가온다.
여기에는 두려움과 경계가 사라진 친밀한 관계가 나타난다.
더욱 중요한 것은 自來親의 自이다.
산새는 사람이 불러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에 다가오는 것도 아니다. 저절로 다가온다.
앞의 구절에서는 부처가 사람을 바라보았고, 이번에는 산새가 사람에게 다가온다.
시인은 더 이상 세계를 일방적으로 관찰하는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존재들이 그에게 다가온다.
여기서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세계는 나와 사물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불상은 불상으로 남아 있고, 산새는 산새로 남아 있다. 새끼도 여전히 새끼이며, 사람도 사람이다.
그들의 차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이 장면은 나와 사물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서로의 차이를 없애는 세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각각의 모습으로 존재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첫 구절의 箇中眞과 연결된다.
봉우리는 봉우리대로, 산등성이는 산등성이대로 참되다. 부처는 부처대로, 새는 새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존재한다.
참됨은 모든 존재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각자의 모습으로 존재하면서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데 있다.
부처가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고, 산새가 새끼를 데리고 다가오는 산사의 세계는 바로 그러한 참됨을 보여준다.
5. 차가운 물이 따뜻한 차가 되기까지
이제 시인은 직접 행위하기 시작한다.
點烹筧竹冷冷水
“대나무 홈통으로 흘러온 차고 맑은 물로 차를 달인다.”
點은 차를 내는 행위와 관련된 글자이고, 烹은 끓인다는 뜻이다. 筧竹은 물을 끌어오는 대나무 홈통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 흥미로운 것은 시어가 배열된 순서이다.
원문에서는 點烹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筧竹이라는 대나무 홈통이 나오며, 마지막에 冷冷水라는 자연의 물이 나온다.
그러나 차가 만들어지는 실제 과정은 그 반대이다.
먼저 산의 차고 맑은 물이 있다. 그 물이 대나무 홈통을 통하여 흘러온다. 사람은 그 물을 끓이고, 차를 낸다.
곧 다음과 같은 순서이다.
冷冷水 → 筧竹 → 烹 → 點
원문의 배열은 이 과정을 거꾸로 따라간다.
이러한 배열을 하나의 시적 구조로 읽으면, 추사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행위에서 출발하여 그 행위가 가능하게 된 자연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눈앞에는 차 한 잔이 있다. 그 차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차를 가능하게 한 것은 대나무 홈통을 따라 흘러온 물이고, 그 물은 본래 산의 자연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한 잔의 차 속에는 산의 자연이 들어 있다.
시인은 차를 만들지만 물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산이 준 물을 받아 끓이고 차를 낼 뿐이다.
이것은 문학과 예술의 창조 과정과도 닮았다.
추사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소동파를 비롯한 오랜 문학적 전통에서 언어와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경험과 행위를 통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었다.
마치 차가운 물을 받아 따뜻한 차를 만드는 것과 같다.
자연의 물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여 한 잔의 차 속에 존재한다.
그렇게 보면 추사가 소동파를 포함하면서 초월한다는 말도 구체적인 의미를 얻는다.
소동파의 세계는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추사의 손을 거쳐 추사 자신의 세계가 된다.
소동파의 세계는 위대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추사 자신의 세계를 대신할 수는 없다.
추사가 헛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소동파를 배우며 살아온 세월 자체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토록 오랫동안 소동파의 세계 속에서 살아오면서도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못했던 일에 대한 반성일 수 있다.
그렇다면 枉却이라는 말에는 단순한 후회 이상의 의미가 담긴다.
참됨은 이미 눈앞에 있었다. 산은 언제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추사는 그것을 다른 사람의 언어를 통하여 이해하려고 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눈으로 산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소동파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추사는 여전히 소동파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언어에 갇혀 있지 않다.
소동파를 초월한다는 것은 소동파를 잊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동파를 자기 안에 포함하면서도 소동파의 눈으로만 세계를 바라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추사가 「산사」의 첫 두 구절에서 경험하는 새로운 발견이라고 볼 수 있다.
6. 화분의 꽃에는 봄이 들어 있다
제6구도 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供養盆花澹澹春
“화분의 꽃을 공양하니 은은한 봄이 깃들어 있구나.”
供養은 공양하는 행위이고, 盆花는 화분의 꽃이며, 澹澹春은 담담하고 은은한 봄이다.
여기에서도 원문의 배열은 인간의 행위에서 시작한다.
供養 → 盆花 → 澹澹春
그러나 그 행위가 가능해진 과정을 거꾸로 생각하면 먼저 봄이 있다. 봄이 왔기 때문에 꽃이 피었다. 그 꽃이 화분에 담기고, 사람은 그 꽃을 부처에게 공양한다.
澹澹春 → 盆花 → 供養
앞의 차 달이는 구절과 완전히 평행한 구조이다.
산의 물은 대나무 홈통을 거쳐 차가 되고, 자연의 봄은 화분의 꽃을 거쳐 공양이 된다.
두 구절에서 대나무 홈통과 화분은 자연과 인간을 연결한다.
여기서 화분의 盆과 감실의 龕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감실은 부처를 모시는 공간이고, 화분은 꽃을 담는 공간이다.
두 사물 모두 어떤 존재를 일정한 공간 안에 놓는다.
그런데 감실의 부처는 사람을 보고 말을 걸려 하고, 화분의 꽃에는 봄이 깃들어 있다.
부처는 감실에 있으면서도 감실에 갇히지 않고, 꽃은 화분에 있으면서도 자연의 봄과 단절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추사는 소동파의 세계 안에 있으면서도 그 세계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의 안에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안에서 자신의 참됨을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산속에 있는 것이 산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산속에 있기 때문에 산의 진면목을 직접 경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부처와 산새, 물과 꽃은 모두 첫 구절의 箇中眞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참됨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존재하는 모습과 관계 속에 있다.
7. 시의 한가운데에는 ‘나’가 있다
이 시에는 더욱 흥미로운 구조가 숨어 있다.
여덟 구절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는 대신,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 둘째 구절과 일곱째 구절, 셋째 구절과 여섯째 구절, 넷째 구절과 다섯째 구절을 서로 대응시켜 읽어보면 하나의 교차대칭 구조가 나타난다.
A — 側峯橫嶺箇中眞:새로운 발견
B — 枉却從前十丈塵:지나온 자신의 모습
C — 龕佛見人如欲語:부처가 나를 향하여 옴
D — 山禽挾子自來親:자연의 생명이 나에게 다가옴
<나[我]>
D′ — 點烹筧竹冷冷水:내가 자연을 받아들여 차를 냄
C′ — 供養盆花澹澹春:내가 부처에게 공양함
B′ — 拭涕工夫誰得了:계속되는 자기 성찰
A′ — 松風萬壑一嚬申:새로운 발견 이후의 삶
이것은 전통적인 율시의 대구와는 다른, 작품 전체에 걸친 의미상의 교차대칭 구조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가운데에 놓인 ‘나’이다.
시의 앞부분에서는 불상이 사람을 보고, 산새가 사람에게 다가온다. 외부 세계가 시인을 향하여 움직인다.
그러나 시의 뒤쪽에서는 사람이 차를 달이고 꽃을 공양한다. 이제 시인이 외부 세계에 응답한다.
따라서 제4구와 제5구 사이에서는 행위의 방향이 바뀐다.
그 가운데 시적 주체인 ‘나’가 있다.
그런데 시 전체를 살펴보면 자신을 가리키는 我라는 글자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의 중심에 시인이 있지만 그 시인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 점이 중요하다.
추사는 자신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한다. 그러나 그 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하지 않는다.
그는 불상이 말을 걸어오는 것을 듣고, 산새가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며, 자연의 물로 차를 만들고 꽃을 부처에게 공양한다.
그의 존재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교차대칭의 중심에 있는 ‘나’는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에서는 처음의 A와 마지막의 A′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처음에는 側峯橫嶺이라는 산의 모습을 바라보며 참됨을 발견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松風萬壑이라는 산의 풍경 속에서 몸을 편다.
처음의 산은 소동파의 언어를 통하여 이해한 관념적인 산이다. 마지막의 산은 소나무와 바람과 골짜기가 있는 체험적인 산이다.
처음에는 산을 바라보았지만 마지막에는 산속에서 살아간다.
이 두 장면 사이에 불상과 산새, 물과 꽃이 놓여 있는 것이다.
결국 시의 교차대칭 구조는 세계와 인간이 서로에게 다가오고 응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 있는 ‘나’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모든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
8. 눈물을 닦는 공부는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모든 경험을 했다고 해서 추사가 자신이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拭涕工夫誰得了
“눈물을 닦는 공부를 누가 다 끝마쳤겠는가?”
이 구절에는 중요한 선종의 고사가 담겨 있다.
《벽암록》 제34칙의 평창에는 당나라의 선승 나찬(懶瓚)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찬은 세속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 자신을 부르는데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사신이 그를 보니 콧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신이 콧물을 닦으라고 권하자 나찬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찌 속인들을 위하여 콧물을 닦을 겨를이 있겠는가?”
나찬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의 명령에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 콧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추사의 拭涕工夫는 일차적으로 이 고사를 환기한다.
그런데 《벽암록》 제34칙의 본칙은 앞서 살펴본 여산과 오노봉의 선문답이다. 같은 공안의 본칙에는 여산의 문제가 있고, 평창에는 나찬의 콧물 닦기 고사가 있다.
이 사실은 「산사」의 첫 구절과 마지막 부분을 특별하게 연결한다.
첫 구절은 소동파의 여산 시를 불러오고, 제7구는 여산에 관한 공안의 평창에 나오는 나찬의 고사를 불러온다.
시의 시작과 끝에 여산이라는 공통된 배경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拭涕에는 또 다른 뜻도 있다.
涕는 콧물뿐 아니라 눈물을 뜻한다.
따라서 ‘눈물을 닦는 공부’라고 문자적으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게 읽으면 제7구는 제2구의 十丈塵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먼지는 눈을 가린다. 눈이 흐려지면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인간이 먼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여러 사물과 부딪히며 살아간다. 먼지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이러한 세상의 조건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먼지가 전혀 없는 세계로 떠나는 것이 아니다.
먼지 속에서도 자신의 눈을 계속 맑게 하는 일이다.
눈물이 흐르면 눈물을 닦는다. 눈에 먼지가 들어오면 눈을 씻는다. 시야가 흐려지면 다시 눈을 맑게 하고 세계를 바라본다.
이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오늘 눈을 닦았다고 내일 다시 눈이 흐려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 번 참됨을 발견했다고 앞으로 언제나 참됨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誰得了’라는 물음은 매우 중요하다.
누가 눈물 닦는 공부를 다 마쳤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깨달음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한 번의 완성된 사건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뜻이다.
추사는 이제 소동파의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경험으로 자신이 소동파를 완전히 넘어섰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자신의 눈은 다시 흐려질 수 있다. 자신의 새롭고 독창적인 세계조차 언젠가는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새로운 먼지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을 닦는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고통스럽고 강박적인 수행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답이 마지막 구절에 있다.
9.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
松風萬壑一嚬申
“만 골짜기에 솔바람이 불어오니 한 번 길게 몸을 편다.”
이 구절에는 백거이의 「불출문(不出門)」을 연상시키는 표현이 있다.
백거이는 「불출문」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食飽更拂床
睡覺一嚬伸
“배불리 먹고 침상을 다시 정돈하고, 잠에서 깨어나 한 번 길게 기지개를 켠다.”
백거이는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지내는 모습을 노래했다. 그는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손님이 찾아오지 않아도, 먹고 자고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평범한 삶만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추사의 一嚬申은 백거이의 一嚬伸과 거의 같은 표현이다.
그런데 백거이의 구절에는 추사의 시에 직접 나타나지 않는 중요한 말이 있다.
바로 睡覺, 곧 ‘잠에서 깨어난다’는 말이다.
추사가 백거이의 표현을 의식하고 一嚬申이라고 했다면, 독자는 그 앞에 놓였던 睡覺까지 함께 떠올릴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추사가 마지막에 기지개를 켜는 것은 단순히 몸을 펴는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비로소 깨어나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추사는 무엇에서 깨어나는가?
바로 소동파의 세계 속에서 살아온 자신의 지난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추사는 소동파라는 거대한 산속에서 살아왔다. 소동파의 시를 읽고 그의 사상을 배우며, 자신의 삶까지 소동파의 삶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것은 소동파의 세계를 버리는 일이 아니다.
소동파의 세계 안에서 깨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추사는 一嚬伸이라고 하지 않고 一嚬申이라고 썼다.
伸은 몸을 펴거나 늘이는 뜻을 가진다. 申 역시 몸을 편다는 뜻이 있지만, 말하여 밝히거나 거듭한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물론 申이 고전 한문에서 伸과 통하여 사용될 수 있으므로, 추사가 반드시 반복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글자를 바꾸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申이라는 글자가 가진 더 넓은 의미를 생각하면 마지막 구절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기지개는 한 번 켜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 번 깨어났다고 다시는 잠들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오늘 깨어났어도 내일 다시 잠들 수 있다. 오늘 자신의 시야를 맑게 했어도 다시 먼지가 눈에 들어올 수 있다.
그러므로 깨어나는 일은 반복되어야 한다.
또한 嚬은 얼굴을 찡그린다는 뜻이고, 申은 편다는 뜻이다. 따라서 嚬申을 하나의 관용적인 표현으로 읽으면 기지개를 켠다는 뜻이지만, 글자들을 나누어 읽으면 얼굴을 찡그렸다가 다시 펴는 모습도 연상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제7구의 눈물 닦기와 제8구의 찡그렸다 펴는 동작이 연결된다.
눈이 흐려지면 닦는다. 눈을 찡그렸다가 다시 편다. 그리고 세계를 새롭게 바라본다.
이 작은 몸짓은 특별한 수행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평범한 행위 속에서 인간은 거듭 깨어난다.
이것이 一嚬申의 중의적인 의미이다.
한편으로는 백거이처럼 세속의 평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기지개를 켜는 동작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눈을 거듭 맑게 하고 잠에서 거듭 깨어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산사」의 마지막은 깨달음의 완성이 아니다.
깨달음을 완성했다고 선언하지 않으면서 거듭 새롭게 살아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10. 산은 더 이상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다
이제 시의 처음과 끝을 다시 비교해 보자.
側峯橫嶺箇中眞
松風萬壑一嚬申
두 구절 모두 산을 묘사한다.
그러나 첫 구절의 산과 마지막 구절의 산은 같은 방식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첫 구절의 側峯橫嶺은 산의 형태를 가리킨다. 봉우리와 산등성이라는 일반적인 지형의 모습이다. 더구나 소동파의 시에서 가져온 언어이므로 이미 문학적으로 해석된 산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마지막 구절의 松風萬壑에는 소나무와 바람과 골짜기가 있다.
바람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귀로 듣고 몸으로 느낀다.
골짜기 사이로 부는 바람이 소나무를 흔들고, 소나무에서 소리가 난다. 그 바람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몸을 편다.
첫 구절에서는 산을 바라보며 참됨을 발견한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산속에서 바람을 느끼고 자신의 몸을 움직인다.
산과 시인의 관계가 달라진 것이다.
처음의 산은 인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의 산은 시인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세계가 된다.
더 나아가 시인은 산의 움직임에 참여한다.
산에서는 바람이 불고, 사람은 몸을 편다.
그 둘은 별개의 사건이면서도 하나의 장면을 이룬다.
여기에는 산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그가 바라보는 산이라는 구별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시인은 산의 바람을 느끼며 자신의 몸을 움직인다. 그의 존재는 이미 산의 존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소동파의 마지막 구절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只緣身在此山中
“다만 내가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다.”
소동파에게 산속에 있다는 사실은 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추사에게 산속에 있다는 사실은 산의 진면목을 직접 경험하는 조건이 된다.
산을 밖에서 바라보아야만 산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의 전체 모습을 하나의 그림처럼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산의 바람을 느낄 수 있고, 산새를 만날 수 있으며, 산의 물로 차를 달일 수 있다.
산의 진면목은 그렇게 산속에서 살아가는 경험 속에 드러난다.
따라서 이 시에서 추사는 산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산이 된다고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사람이 실제로 산이라는 물질로 바뀐다는 뜻은 아니다.
산과 자신을 분리된 두 존재로 바라보던 사람이 자신이 이미 산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시의 제목 「산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11. 산은 절이다
「山寺」라는 제목은 일반적으로 ‘산속의 절’을 뜻한다.
산이 있고 그 안에 절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시 전체를 읽고 나면 이 두 글자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山은 寺이다.
산이 곧 절이라는 것이다.
절은 부처를 모시는 곳이다. 부처가 머무는 처소이며, 수행과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부처가 감실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부처는 사람을 보고 말을 걸려 한다. 산새는 새끼를 데리고 다가온다. 산의 물은 대나무 홈통을 따라 흘러와 차가 되고, 봄은 화분의 꽃이 되어 공양된다. 마지막에는 솔바람이 불고 시인은 몸을 편다.
이 모든 존재가 하나의 산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그렇다면 절은 산의 어느 한 부분에 세워진 건물만을 가리키는 것일까?
산 전체가 부처의 세계가 드러나는 처소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부처의 세계를 특정한 건축물 안에만 가두지 않는다면 산의 모든 존재가 그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새와 새끼, 물과 꽃, 바람과 사람은 각각 서로 다른 존재이다. 그러나 모두 하나의 산속에 있으며 그곳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산은 단순히 모든 존재가 들어 있는 커다란 공간이 아니다.
산은 그 존재들이 살아가고 움직이며 서로 관계를 맺는 세계 자체이다.
산에서 새가 날고 물이 흐르며 꽃이 피고 바람이 분다는 것은 단순히 산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모든 사건이 바로 이 시에서의 산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山寺를 ‘산속에 절이 있다’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산 전체가 절이고, 절은 산 전체의 존재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물론 山寺라는 두 글자가 문법적으로 반드시 ‘산은 절이다’라는 명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의미는 여전히 산속의 절이다. 그러나 시 전체를 다 읽은 뒤 그 제목을 다시 생각하면 두 글자 사이에 존재론적인 동일성이 드러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산과 절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지만, 이 시에서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산은 절의 처소이고, 절은 산의 참됨이 드러나는 자리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처음부터 그 세계 안에 있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12. 완성을 주장하지 않지만 완성의 지평은 존재한다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생긴다.
추사는 제7구에서 눈물을 닦는 공부를 누가 다 끝마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 말은 수행이 끝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인간은 여전히 먼지 속에서 살아가며, 자신의 시야를 계속 새롭게 해야 한다. 한 번 깨어났다고 다시는 잠들지 않는 것이 아니므로 거듭 깨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은 끝없이 반복되는 미완성의 삶일 뿐인가?
완성이란 전혀 없는 것인가?
만일 아무런 도달점도 없고 참됨 자체도 없다면, 눈을 닦는 공부는 단순히 끝없이 반복되는 행위에 머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는 이미 완성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바로 제목 山寺이다.
산은 이미 절이다.
추사가 어떤 수행을 완성한 뒤에야 비로소 산이 절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참됨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에도 산은 이미 절의 세계로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추사는 그것을 온전히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수행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완성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참됨을 거듭 알아보는 일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수행의 미완결성과 존재의 완성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시인은 자신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이미 참됨이 있다.
그 참됨은 눈앞의 봉우리와 산등성이에 있고, 감실의 부처와 산새에 있으며, 대나무 홈통의 물과 화분의 꽃에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만 골짜기의 솔바람 속에 있다.
따라서 시인은 완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현재의 삶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현재의 삶 속에서 이미 주어진 참됨을 거듭 발견해야 한다.
이것은 완성을 소유하려는 태도와 다르다.
완성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어느 순간 자신의 수행이 끝났다고 선언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완성의 가능성이 이미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소유했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
그저 살아가면서 다시 보고, 다시 듣고, 다시 깨어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의 一嚬申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기지개를 켜는 것은 거창한 수행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은 동작 속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시인은 절대적인 무심의 경지를 성취했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다만 자연스럽게 몸을 편다.
그것은 무심의 완성을 자랑하는 행위가 아니라, 완성을 의식적으로 소유하려는 마음에서도 벗어난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다.
13. 제목은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오는 背音배음이다
이제 제목 「山寺」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보자.
시의 첫 구절에서는 산의 참됨을 발견한다. 둘째 구절에서는 지나온 삶을 반성한다. 셋째와 넷째 구절에서는 불상과 산새가 다가온다. 다섯째와 여섯째 구절에서는 물을 끓여 차를 내고 꽃을 공양한다. 일곱째 구절에서는 수행의 완성을 묻고, 마지막 구절에서는 솔바람 속에서 몸을 편다.
여덟 구절 어디에서도 ‘산은 절이다’라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제목에는 이미 山寺라는 두 글자가 놓여 있다.
처음에는 산속에 있는 절이라는 뜻으로 보였던 말이 시를 다 읽고 나면 산 자체가 절이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제목의 의미가 작품 전체를 읽는 과정에서 점차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음악의 배음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의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그 소리를 이루는 모든 성분을 각각 구별하여 듣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성분들은 함께 울리면서 소리 전체의 성격을 형성한다.
「산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산은 절이다’라는 존재론적 의미는 어느 한 구절에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의 모든 장면을 통하여 조금씩 울려 나온다.
감실의 부처가 말을 걸려 할 때에도, 산새가 새끼를 데리고 다가올 때에도, 물이 흘러와 차가 되고 꽃이 공양될 때에도 山寺라는 의미가 배음처럼 울린다.
마지막에 솔바람이 불고 시인이 기지개를 켤 때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시인은 산의 바깥에 있는 관찰자가 아니다. 산을 지배하거나 소유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산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산은 이미 절이다.
따라서 山寺라는 제목은 시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한 이름이 아니다.
작품 전체의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인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주어져 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 깊은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14. 소동파의 산에서 깨어나 자기 자신의 산이 되다
이제 시 전체를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자.
추사는 소동파의 언어로 산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側峯橫嶺.
그러나 소동파처럼 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다.
그 각각의 모습 속에 참됨이 있다고 선언한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살아온 세계를 돌아본다.
枉却從前十丈塵.
지나온 시간을 열 길의 먼지 속에서 헛되이 보냈다고 생각한다.
그 먼지는 세속의 번잡함일 수도 있고, 자신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던 위대한 문학적 전범의 영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추사는 그 먼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소동파의 언어로 시를 쓴다. 다만 그 언어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부처가 말을 걸어오고 산새가 새끼를 데리고 다가온다.
추사는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
산의 물을 받아 차를 만들고, 봄의 꽃을 부처에게 공양한다.
이 모든 행위는 아주 평범하다.
그러나 그 평범한 행위 속에서 추사는 다른 사람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살아가는 세계를 경험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拭涕工夫誰得了.
눈물을 닦는 공부를 누가 다 끝마쳤다고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시야는 언제든지 다시 흐려질 수 있다.
소동파의 세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가 또 하나의 새로운 먼지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눈을 닦는 공부는 계속된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스러운 의무만은 아니다.
松風萬壑一嚬申.
만 골짜기에 솔바람이 불어온다.
시인은 한 번 길게 기지개를 켠다.
백거이의 시를 떠올린다면 그것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의 기지개이다.
그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소동파라는 산에서 도망쳐 나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산속에서 자신의 눈으로 산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에 이르면 산을 바라보는 일조차 넘어선다.
그는 산의 바람 속에서 몸을 움직인다.
산은 더 이상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살아가는 세계이고, 그 자신의 존재가 이루어지는 자리이다.
그렇게 시인은 산이 된다.
그것은 자신의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다른 존재들과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이미 山寺이다.
맺음말 — 산은 이미 절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산사」는 산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시로 시작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진면목 가운데 살아가는 삶을 보여준다.
처음에 추사는 소동파의 언어로 산을 바라본다. 그러나 소동파가 알지 못한다고 했던 진면목을 산의 각각 다른 모습 속에서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소동파의 세계 속에서 살아왔음을 돌아본다. 그 세계는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길러 준 위대한 세계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눈을 가리는 먼지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추사는 소동파를 버리지 않는다.
그를 포함하면서 넘어선다.
그러한 과정에서 추사는 부처와 산새, 물과 꽃을 만난다. 세계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고 자신과 관계를 맺는 존재들의 세계로 나타난다.
그리고 시인은 그 세계에 응답한다.
이러한 경험의 중심에는 ‘나’가 있지만 시인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 자신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런데 그 세계를 발견했다고 해서 수행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먼지를 피할 수 없다. 자신의 시야가 다시 흐려질 수 있고, 한 번 깨어난 뒤에도 다시 잠들 수 있다.
그러므로 눈을 닦는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완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다.
참됨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산은 처음부터 절이었다.
시인은 자신이 그 산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수행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참됨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참됨을 거듭 발견하는 일이다.
이러한 삶에는 특별한 완성의 선언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눈이 흐려질 때 다시 닦고, 잠들었을 때 다시 깨어나면 된다.
그리고 솔바람이 불어오면 기지개를 켠다.
「산사」의 시작에서 추사는 산의 진면목을 발견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더 이상 산의 진면목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이미 산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처음에는 소동파의 언어가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추사 자신의 몸이 있다.
소동파의 산은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이제 그 산에는 추사 자신의 솔바람이 불고 있다.
그 바람 속에서 추사는 다시 깨어난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산은 이미 절이었다.
시인은 처음부터 그 산속에 있었다.
그는 이제 그 사실을 깨닫고 산과 더불어 살아가기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