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야기 | <조선시대>- 제14대 선조, 임진왜란 이전상황 당파전쟁, |
임진왜란 이전상황 당파전쟁, 임진왜란이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국이 조선을 침범한 사건을 말하며, 1차를 임진왜란, 2차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포괄적 의미에서 1, 2차를 합쳐 통상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이 사건 을 일본에서는 '분로 쿠, 케이초의 역'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 의 역'이라고 부른다.
'대륙 정복'이라는 구호를 내건 도요토미는 1589년 대마도주에게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서로 수호할 수 있 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이 조선과 수호하려는 목적 은 서로 힘을 합쳐 명을 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마도주는 가신들 을 보내어 서로 통호할 것을 청하였다. 이 제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선조는 찬탈시역한 나라의 사신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하지만 정2품 이 상의 대신들이 모여 숙의한 결과 관례대로 사신을 받 기로 함에 따라 선조는 일본의 수교문을 받게 되는데, 내용이 오만무례하다는 이유로 보서(사신의 서찰)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을 보류했다. 그리고 이듬 해 수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마도주 가신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후 몇 번에 걸쳐 일본은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요구 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1589년 9월경에 여러 차례 논란 을 거친 끝에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동시에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0월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발생해 이 결정은 다시 지연되었고, 11월 중순 쯤에 겨우 통신사 일행을 선정했는데, 통신정 사는 황윤길, 부사는 김성일, 서장관에는 허성으로 결정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1590년 3월에 일본으로 떠나 이듬해 3월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통신사로 갔다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일본 정세에 대한 견해 차이로 조정은 한동안 동인과 서인 사이에 논박을 벌여야 했다. 서 인인 통신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침 략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 동인인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이 없 었을 뿐 아니라 도요토미는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하였다. 이 때 서장관 허성 은 동인이었으나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 하였고, 김성일 을 수행하였던 황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자당의 인물을 비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전쟁설을 퍼뜨 려 민심을 혼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김성일의 주장 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성을 쌓는 등 전쟁에 대한 방비를 하던 것마저 각 도에 명을 내려 중단시켰다. 이 후 선위사 오억령은 '일 본 이 다음 해에 조선의 땅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하려 한다'는 보고를 하 기도 했지만 묵살당하고 도리어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 왜관에 머무르고 있던 왜인들이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어 왜관이 텅 비게 되자 그때서야 조선 조정은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을 감지하고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 윤선각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 신립을 경기도와 황해도에, 이일을 충청도와 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했 다. 하지만 이것은 때늦은 조치였다. |
|
|
|
|
고맙습니다.
쏠쏠한 재미 좋은글 사랑합시다.
전주향교/鶴田/옮김/한문희총대장 감사합니다.
본래의 마음,자유인 한문희총대장, 백두대간의 전설 자유인 백두대간종주대한문희총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