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山 정약용(丁若鏞)선생의 墓所
가. 茶山 丁若鏞 선생墓 <경기도 기념물 제 7 호>
1 .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ㅡ1
능내리의 다산유적지에 있는 정약용의 묘는 발치 아래 여유당과 마을을 감싸고 돌아 흐르는 두물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한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곡장을 두른 묘 앞에는 비석상과 상석, 그리고 좌우에 망주석이 배열되어 있고, 봉분은 단분이며 숙부인 풍산 홍씨와의 합장묘이다.
茶山에게는 죽은 아이들이 산 애들의 갑절이나 되었다. 그는 모두 6남 3녀를 낳았지만 2남 1녀만 살아남고 나머지 4남 2녀를 잃었다. 그것을 그는 자신이 하늘에게 죄를 얻은 결과라고 여기며 "평생 동안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가슴속에 후회가 가득 쌓이게 되었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고 하니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2 . 形氣論
경기도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된 이곳 옛 生家 자리 뒷동산에 墓所가 있고, 그 아래에 생가, 오른편에 사당,그 앞에 전시관, 바로 앞에 문화관,앞 넓은 공간이 주차장, 외삼문인 정문이라 朝鮮時代 실학의 大家 茶山 丁若鏞선생의 생가터 주변을 茶山 公園으로 아늑한 洞內를 이루고 있다.
다산공원의 主山은 어디서왔는지 살펴보면 한북정맥이 南西로 뻗어 내려와서 楊州를 지나 道峰山을 거쳐 서울의 진산인 三角山을 이루고,한북정맥의 한 지맥이 여려과정을 거쳐 운길산(雲吉山610M)에서 수 많은 지맥을 點地하면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곳까지 달려와 팔당호를 바라보게된다.
산이 멈추고 물과 만나는 자리는 땅의 氣가 흩어지지 아니하고 陰陽이 각각 그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地氣와 충만하다.
<묘앞에서>
다산 유적지 入首龍을 보면 乳血의 땅으로 생각된다.
茶山 墓에서 玄武峰을 보면 한확 묘의 현무봉에서 개장한 청용이 길게 뻗어 한확선생의 묘를 보호하기 위하여 내려가는데 다산 묘의 주룡이된다. 자세히보면 용이 일자로 길게 늘어져 용맥이 힘이 없이 보이며,靑龍 白虎가 墓를향해 감싸주지 못하고,혈을 배반한듯하다.
茶山 生家 역시 경관은 수려하나 주룡이 약하여 생기를 받기 어렵고,청용 백호가 아우리지 못하여 바람과 물의 침범을 받기 쉬우며, 특히 북한강이 生家와 墓所를 향해 直來하는 듯하니 凶한 水殺이 아닐까 생각이든다.
그러나 눈살미 좋은 사람들은 物形論으로 形局을 용마음수형(龍馬飮水形)이라 한다.목마른 짐승이 물을 마시고 싶을 때는 그 생각만 몰두해서 급히 물로 뛰어든다, 바로 이 氣運 때문에 吉地가되고 福이 온다는 것으로, 안온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양지바른 명당이라 할 것이다.
穴證을 보면 前水穴證인데, 主山은 金水山으로 들어오다가 혈장에 와서는 다시 金山이 되는데 陽金形 에 속한다. 이혈장의 坐向은 金穴의 山이므로 金坐인 申,庚,酉,辛,乾이 되거나, 水坐인 壬,子,癸,亥가 되면 理法에 합당하다.
風水에서 形局(物形)은 五星에 의하여 인 (人), 물(物), 금(禽), 수(獸)로 나누는데 설신부정해(雪心賦正解)에 의하면 木성과 火星은 주로 사람의 모양에, 金星은 날짐승 모양에, 土星은 길짐승 모양에 그리고 水星은 용과 뱀무리의 모양에 많이 비유된다.
1). 인형(人形) -ㅡㅡ 여인, 장군, 선인, 승려, 어부, 등
2). 수형(水形)ㅡㅡㅡ 물고기, 게, 지네, 호랑이, 소, 거북, 말, 사자, 개, 나비, 코끼리, 쥐, 누에, 나방, 낙타 소라, 사슴, 믕.
3). 금형(禽形)ㅡㅡㅡ봉황, 닭, 학, 거위, 기러기, 비들기, 제비, 갈가마귀, 꿩 등.
4) 용사형(龍巳形) ㅡㅡㅡ용과 뱀이 주체지만 꽃종류, 나무종류, 배, 달, 거문고, 퉁소, 진주, 비녀,등. 보는 사람에 따라 사(砂),朝案, 명당, 水,의 단독형과 결혈과 보국전체의 복류형으로 구분
3 . 理氣論
風水의 理法은 너무 多樣하여,각자의" 絶對的" 이라는 고집때문에 하나의 學問으로 체계화되지 못하여 아직 인정을 받지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風水의 坐向 배치는 정음정양법(靜陰靜陽法)과 포태법(胞胎法)등에의한 法術로서 그 좌향을 결정함을 주장하기도한다.
入首龍 ㅡ 子龍. 子龍ㅡ靜陽 . 坐 向 ㅡ 子坐午向. 午向 ㅡ陽向. 陽龍陽向 破 口 ㅡ未破. 子坐ㅡ官. 법술에 일치함으로 올바른 좌향이다.
水口法에의하면 左水到右하여 丁未方으로 빠져나가니 木局의 自旺向의 一破가되어 衰方으로 거수해도 좋다는 理法으로 發福發貴하고 장수하여 人丁이 왕성한다는 좋은 吉地라 하겠다.
茶山선생은 풍수지리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背山臨水에 山紫秀麗하고 물이 풍부한 곳을 최고의 吉地로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조화롭개 상부상조하는 이치를 터득한것으로 생활풍수의 최고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나 . 정약용(丁若鏞,1762-1836)선생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 본관 나주(羅州) 시호 문도(文度)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翁) 태수(苔)·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안. 광주(廣州) 출생이다.
정조즉위년(1776) 남인 시파가 등용될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여유당 앞에서>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17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순조 1년(180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이후 오랜 유배생활에 들어가며 조산사회의 현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여러 사상과 학문을 검토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의 유배기간 동안 경서학(經書學)에 전념, 실학의 대가가 되어『목민심서(牧民心書)』48권,『경세유표(經世遺表)』49권,『흠흠신거(欽欽新書)』30권 등을 쓰면서 정치·경제 등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500여 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1818(순조 18)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마현마을 고향집으로 돌아와 저술생활로 평생을 보냈으며 1836년(헌종 2) 75세로 생을 마쳤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그의 대표적인 것이 정조13년(1789) 한강의 배다리(舟橋)설계와 정조16년(1792)화성을 축조하는데 거중기를 사용하도록 한것이라 하겠다.
융희 4년(1910)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茶山 丁若鏞선생은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서, "내가 지은 六經四書로 자기 몸을 닦고 一表二書(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심서)로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으니, 본말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꾸짖는 자가 많으니, 만약 하늘의 명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비록 한 횃불로 태워 버려도 좋다"고 하였다.
세월이 흘려 이곳 문화관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으며, 茶山 관련 강연회와 학술발표회가 열리고 있다. 또한 다산문화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사계절 내내 이곳에서 열리고 있으니 하늘과 땅이 영원하리라. -태극풍수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