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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금융영업史 각종 신기록… 노하우 고향에 바칠 것" |
강덕균 기자의 출향 전라도人 - 우광옥 재경광양시향우회장 |
입력시간 : 2013. 07.25.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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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서클 총연합회장ㆍ데모 앞장
군 훈련병 때 다쳐 의병제대
직장생활
신한은행때 잇단 '영업신화'
파격승진…곳곳에 스카우트
향우회 활동
만장일치 추대에 회장 맡아
광양인 축제때 1500명 성황
60년대 중반 개발독재가 시작되던 시절, 한일회담 반대 등 대학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우광옥(67) 재경 광양시 향우회장은 젊은 시절 숱한 역경을 극복하고 금융인으로 청춘을 불태웠다.
우 회장은 '발로 뛰는 금융서비스'를 국내에 첫 도입하는 등 한국 은행사에 각종 새로운 기록을 남기면서 우리나라 금융계 산증인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던 우 회장이 '수구초심' 고향 향우들을 위한 일에 뛰어들었다. 지난 주말 그를 만나 금융인으로서 그의 인생 역정과 재경 광양시 향우회 발전 방향 등을 들어보았다.
-대학시절을 회고하면.
△순천고를 졸업하고 중앙대 법대(65학번)에 진학했다. 어릴 적 한때 이도선 전 국회의원으로부터 웅변을 배웠던 나는 순천고 시절 학교대의원회장을 하는 등 활동적이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웅변연구회 회장과 서클(동아리) 총 연합회장을 했고 총학생회장에도 출마했었다. 대학시절 한일회담 반대, 민족적민주주의 반대 등 데모에도 앞장섰다. 당시 선후배였던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이재호 의원 등과 함께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이로 인해 구속되기도 했다. 그런 전력으로 군 입대를 해야 했고 훈련에서 심한 부상을 입어 의병제대(依病除隊)했다. 당시 훈련병으로 의병제대한 경우는 내가 처음 일 것이다. 몸을 추슬러 복학한 이후에는 아주 얌전한 대학생으로 보호(?)를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 은행원으로서 생활은.
△1970년 졸업 이후 진로선택 과정에서 많은 방황을 했다. 운동권 출신으로 꿈을 이루는 길은 고시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시공부를 했는데 유혹이 많았다. 특히 정치권에서 비서관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내 청춘을 그 사람들에게 전부 맡길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은행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은행은 법대와 상대 출신만 시험 볼 자격이 주어졌다. 1970년 10월에 상업은행(현 우리은행)에 입사했다. 은행에 숨어 있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여기서 성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배고픈 수많은 선후배 밥 사주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러던 중 1983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민영화 은행이 탄생했다. 신한은행에서 부르기도 했지만 그곳에 가면 일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금융연수원 국제금융연수원 1기 수료 등 국제금융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신한은행에 입사하면서부터는 국내업무에 전념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전력을 기울였다.
- 은행인으로 승승장구했다는데.
△신한은행 차장시절 서울 구로동지점이 개설됐을 때 구로공단 직원들을 대상으로 각 회사 강단에서 재형저축 강의를 하며 가입을 받기도 했다. 그 결과 기존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의 실적을 뛰어넘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상을 받았다. 본점 영업부 차장 때는 공공기관 거래를 영업부 한곳으로 단일화해 담당 팀장을 맡았다. 약 2000억 원 정도였던 실적을 1년 만에 1조 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로 인해 신한은행 동대문지점 개설준비위원장으로 발령이 났다. 베테랑들이 가는 자리였는데 파격적인 인사였다. 곧바로 동대문지점장이 됐는데 43살 때였다. 4대문 안 금융권 지점장 중 가장 나이가 젊었다.
뛰어다니는 금융을 실현했다. 종업원이 없는 재래식시장의 특성을 살려 은행이 이들의 발 역할을 대신했다. 대학생 아르바이트생 등을 활용해 현장에서 금융서비스를 한 것이다. 일수적금을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나카소네 수상이 한국의 금융을 모델로 하자고 해서 NHK가 촬영해 방송했다. 국내 방송도 취재 보도했다. 이렇게 해서 동대문지점을 신화적인 지점으로 만들어냈다. 이후 은행 내에 신한은행 주부 가요 대학을 만들어 지역밀착형 영업으로 큰 실적을 올렸다. 지점장 때 영업실적 대상을 가장 많이 받았는데 이는 신한은행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다른 직업 선택은.
△신한은행 본부장(현 상무)까지 했다. 이후 현직에 있으면서 은행관리를 받고 있는 삼양식품(삼양라면) 관리단장으로 파견돼 근무했다. 삼양식품이 유지 파동으로 고전을 면치 못할 때였는데 삼양식품을 관리기업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했다. 이런 인연으로 삼양식품(주) 부사장(재세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전선 구리줄을 생산하는 엠비성산에 2006년 감사로 갔다가 금융환란을 맞아 고전할 때 이 회사 대표이사를 맡아 정상화시켰다. 이후 모보라는 회사의 부회장으로 재직하다 지난해 현직에서 물러났다.
- 재경 광양 향우회와 인연은.
△광양은 분리통합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지역적으로 화합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중 향우들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우연한 기회에 나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처음 고사를 했다. 이제 좀 쉬려고 했다. 외유를 떠났다. 돌아와 보니 만장일치로 나를 추대해 놓고 있었다. 부담감이 많았다. 맡으면 잘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마지막으로 고향에 받는 것을 10분의 1이라도 돌려주자는 것이었다.
올 1월 취임했다. 재경 광양시 향우회 사무실을 마련하고 장학회 등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겠다고 다짐했다. 향우회 재건의 첫 행사로 지난 6월22일 국회 잔디구장에서 광양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광양인 가족 한마음 축제 및 광양농산물 직거래 장터 개설 행사'를 가졌다. 1500여 명의 향우들이 참가했다. 광양에서도 버스만 7대가 올라왔다. 모든 비용은 향우회에서 부담했다.
이날 90대 노 선배 한 분은 얼마나 기분이 좋으셨는지 당일 회비 외에 향우회 발전을 위해 따로 상당액을 현장에서 쾌척했다. 또 재경순천중고 회장을 맡고 있는 후배 한 명은 사무실 마련비 10%를 내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번 행사는 재경 광양향우회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대장정의 시작에 불과하다.
향우회 회장을 맡은 것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아내도 이날 행사를 지켜본 뒤 '이만하면 합격점'이라고 칭찬을 해 줘 한시름 놓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광양시행정동우회, 광양문화원과도 자매결연을 맺었다. 또 신한은행 동우회(수석이사)도 버스 두대를 빌려 1박2일 일정으로 내고향 광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 향우회 운영 계획은.
△사무실을 마련해 오프라인에서 향우들의 정거장 역할을 하도록 하고 싶고 서울에 직거래장터 공간을 마련해 고향에서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모금에도 앞장설 계획이다. 고달프기는 하지만 향우회 회장을 하면서 나를 돌아보는 기회도 됐다. 나에게 권력이나 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선후배들이 도와주는 것을 보고 그동안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생각한다.
-좌우명이 있다면.
△목적을 위해서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목표와 목적은 다르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서울역 구두닦이에서 청와대 고위직 사람까지 한결같이 대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 고향에 대해 한 마디 한다면.
△부모님 산소가 광양에 있다. 올 한식 때도 다녀왔다. 광양이 산업화 도시가 됐지만 이제 광양도 백운산을 중심으로 자연환경을 잘 지켜나가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곳으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우광옥 회장은
광양읍 읍내리 출신
은행 취업뒤 승승장구
향우회장 왕성한 활동
우광옥(禹光鈺) 재경 광양시 향우회장은 1946년 광양읍 읍내리에서 3남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우 회장은 광양서초등(46회), 광양중(16회), 순천고(14회)를 거쳐 중앙대 법학과(65학번)를 졸업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구속되기도 했던 우 회장은 대학 졸업 직후 정치권에서 비서관(현 보좌관)으로 와 달라는 많은 부탁을 뿌리치고 1970년 10월 상업은행에 입사했다.
국제금융업에 관심이 많았던 우 회장은 상업은행 시절 금융연수원 국제금융업무과정(1기)을 수료하고 서울대 등 각 대학 국제금융 관련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1983년 첫 국내 민영화은행인 신한은행으로 직장을 옮겨 이후 신화적일 정도의 업무 실적을 올리며 승승장구한 우 회장은 2000년 신한은행 개인고객본부 영업본부장(상무)으로 승진했다.
이후 삼양식품(주) 관리단장을 맡아 정상화시켰고 그 인연으로 2005년 삼양식품(주) 부사장(재세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6년 (주)엠비성산 감사가 된 우 회장은 IMF 환란 과정에서 회사를 정상화시키면서 2009년 대표이사를 맡았다. 이후 2011년 모보 부회장을 역임하던 중 2012년 퇴임했으며 현재는 (주)대한엠앤씨 감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3년 1월 만장일치로 재경 광양시 향우회장에 추대된 우 회장은 지난 6월22일 광양시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에서 '광양인 가족 한마음 축제 및 광양농산물 직거래 장터 개설 행사'를 여는 등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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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젊은시절 숱한 역경을 겪어내셨던 회장님..를 보냅니다...
향우회의 발전을 위해 애쓰시는 회장님께 뜨거운
열정적인 회장님!
신나는 회장님!
에너지가 넘치셔서 가시는 곳마다 신바람나게 하시네요.^^
포에버!! 팟팅입니다!!♥
부끄럽습니다.여러분들이 계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