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9. 4. 12. 22:02
■ 개성 죽림당 유허비 - 북한 보존 유적 제1154호
북한의 개성시 자남산(子男山) 동쪽 기슭에 익재공 께서 생전에 사셨던 옛 집터를 죽림당(竹林堂)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북한이 전후 남측 인사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곳이지만 이재정(李在禎) 제33대 통일부 장관이 취임하면서 공의 산소와 함께 이곳 죽림당을 2008년 2월 13일 문중인사 213명에께 첫 공개한 곳입니다.
아울러 남북 교류가 잘 이루어져 향후 후손들이 자유로히 답사할 수 있기를 고대하며 본 유허 비문은 2007년 봄 북측으로부터 탁본 문을 전달받아 그해 처음으로 국역을 해서 필자의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바 있습니다.
본 유허 비문은 찬인 덕봉 이진택 선생의 문집인 덕봉집 3책(冊) 중 2책 38면에 ‘선조 익재 선생 유허비문’ 이라는 제(題)로 본문이 수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고려 시중 익재 이선생 유허지’ 라고 쓰여 있다.[2008. 1. 24(목)
[전면]
高麗侍中益齋李先生遺址.
(고려시중익재이선생유지)
[후면]
先生諱齊賢字中思仕高麗歷事五朝
(선생휘제현자중사사고려역사오조)
官至門下侍中鷄林府院君諡文忠公
(관지문하시중계림부원군시문충공)
嗚呼先生德業文章煊炳一世而八年攝國
(오호선생덕업문장훤병일세이팔년섭국)
上下賴安昭載國乘播人耳目宜其百世之下人之不能忘也
(상하뢰안소재국승파인이목의기백세지하인지불능망야 )
遺址在松京子男山東世所稱竹林堂舊基是也
(유지재송경자남산동세소칭죽림당구기시야)
迄今四百餘年村人野老猶爲指點況在後昆安得無桑梓之感乎
(흘금사백여년촌인야노유위지점황재후곤안득무상재지감호)
不肖適尹玆士謹竪石以標之府南水鐵洞又有遺址見於地誌
(불초적윤자사근수석이표지부남수철동우유유지견어지지)
而今無以的知其處玆庸附識于此云
(이금무이적지기처자용부직우차운)
崇禎紀元後三戊午六月日行經歷鎭宅謹記
(숭정기원후삼무오육월일행경력진택근기)
後學生員淸州韓宗樂謹書
(후학생원청주한종락근서)
[국역]
고려시중익재이선생유지
선생의 휘(諱)는 제현(齊賢)이요. 자(字)는 중사(中思) 고려의 다섯 왕조에 걸쳐 벼슬하였는데, 관직이 문하시중 계림부원군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이라고 하였다.
아! 선생의 덕업(德業)과 문장(文章)은 세상에 빛났다.
8년 동안 나라의 정사(政事)를 다스렸는데, 상하가 모두 편안하게 나라를 밝고 태평케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눈과 귀로 널리 전파되니 마땅히 100대(代) 후에도 사람들은 잊어버리지 않을것이다.
선생이 살던 집터는 송도(松都) 자남산(子男山) 동쪽에 있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죽림당(竹林堂) 옛터가 이곳이다. 지금까지 400여년 동안 시골 노인들은 아직도 이곳을 가리켜서 후손들이 고향처럼 살고 있는 곳이다.
제[윤자사(尹玆士)]가 때 마침 이 땅(개성부)을 다스리게 되어 삼가 비(碑)를 세워 이곳을 표시한다.
개성시내 남쪽 수철동(水鐵洞)에도 또 유지(遺址 : 익재 진당)가 있다고 지방지에 기록이 보이는데, 그 정확한 장소는 알 길이 없으니 여기에 첨부하여 기록한다.
1798년(정조 22) 음력 6월 일
15대손 경력(經歷) 벼슬에 있는 진택(鎭宅)이 삼가 기록하고
후학 생원 청주 한종락(韓宗樂)이 삼가 글씨를 쓰다. <끝>
재훈 중앙화수회 감사
[註記]
목은시고(牧隱詩藁) 제15권 <詩>편에 목은께서 개성 철동(鐵洞)에 있는 익재공 진당에 참배하다의 詩를 보면 익재 선생은 젊은시절엔 동암공과 함께 죽림당에 세거하셨고 노후엔 개성 철동에 세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