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우리 집 이야기(3)
◎ 모래내(남가좌동) 집
대조동 집의 전세보증금과, 우리 두 사람이 1년 동안 벌어 저축한 돈과, 그리고 내가 결혼 전에 모아놓았던 돈을 합해 모래내(남가좌동)에 있는 대지 28평에 건평 18평짜리인(어쩌면 이보다 훨씬 좁았던)집을 매입했다.
처음 장만한 내 집이었으니 무척 신나고 기뻐했을 텐데도, 어떻게 해서 모래내로 가게 되었는지가 지금 내 기억에 없다. 아무 연고도 없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동네로 왜 이사했는지 생각이 안 나서 남편에게 물어봤다. 남편도 대뜸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인지, 기억을 더듬다가 한 참 만에 말했다. 우리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결혼식을 올렸던 직장동료가 그곳에서 살고 있어서 그를 따라 간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아이 돌 때, 그 친구가 왔던 것이 생각나는 걸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이사할 날짜를 몇 달 앞 둔 어느 날,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셨다. 새로 산 집이 지금 집보다 훨씬 좁아 조카들과 함께 지내기가 불편하게 생겼으니, 그 애들이 살 집을 따로 구하시는 게 좋겠다고, 시골 부모님께 말씀 드리라고 하셨다. 나는 그 집을 못 가봤지만 아버지는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세상물정에 서툰 딸자식과 사위가 걱정스러우셨던 아버지의 자상함이 늘 우리의 배경이 되어주셨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뒤에는 ‘정자 집 좀 가 보슈!’하고 채근하시던 엄마가 계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결혼 하면서부터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일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아버님, 기체후일향만강 하시 오며 가내제절이 두루 평안 하시 온지요?”로 시작되는 서두에 이어, 새로 이사 갈 집이 좁아서 생질들과 함께 살기가 불편하게 생겼는데, 어쩌면 좋겠느냐는 말씀을 드렸다.
며칠 후 아버지께서도 바깥사돈께 직접 편지를 보내셨다고 한다. ‘아이들이 장만한 집이 좁으니, 서랑(婿郞)께 말씀하시어, 이참에 아이들을 분가시키시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쓰셨다고 한다.
시부모님께서는 그 편지를 받고 잠시 고민이 되셨다지만, 끝내 그 말을 딸 내외에게 전하지는 못하셨다고 한다. 큰 사위는 너무 어려운 존재였을 뿐 아니라, 외삼촌이 엄연히 있는데 조카들을 딴 데다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그분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새 집에는 방 셋에 마루가 하나 있었다. 모든 방들이 다 위풍이 셌지만, 특히 안방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어서, 북아현동 어머니가 계신 집처럼, 방 한 가운데 연탄난로를 설치하고, 그 위에 커다란 물주전자를 올려놓고 지냈다. 벽에 못을 박고 빨랫줄을 매고 기저귀를 널어 말렸다. 아기가 있는 방에 연탄난로와 펄펄 끓는 물주전자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위험한 일이어서 상상하기조차 싫지만 그만큼 방이 추웠었다.
마루는 냉장고 하나에 밥상 하나 놓으면 꽉 차는 정도의 공간이었다. 거실이라고 하기 보다는 부엌과 건너 방, 그리고 마당으로 나가는 통로였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부엌은 마루와 수평으로 붙어 있고, 동 선이 짧아 편했지만 요리를 할 불이 없었다. 그래서 석유곤로를 들여다 놓고 밥을 지었다.
딸과 연년생인 아들이 태어나고, 둘이 쌍둥이처럼 커갔을 때, 내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고 일어나면 두 아이가 따라서 깼다. 나는 아이들에게 코트와 모자와 목도리 장갑 등으로 무장 시키고 부엌 출입문 양쪽에 세워놓았다. 아이들은 부엌에서 일하는 동안 서로 자리싸움도 해가면서 밥 짓는 엄마를 계속 지켜보았다. 지금 54세, 52세가 된 남매의 사랑스러웠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부엌에 불이 없는 대신 마당에 연탄 화덕을 놓고 국이나 찌개를 끓였다. 마당에는 펌프 우물이 있었다. 화덕 불에 대야를 올려놓고, 기저귀를 삶고 우물물을 퍼서 방망이질을 하며 빨았다. 겨울에는 김이 날 정도로 따듯하고 여름에는 얼음물처럼 차가워서 세수할 때도 빨래 할 때도 요긴하게 사용했다.
아버지 말씀대로 방들은 다 좁았다. 아이가 태어나서 여덟 명으로 늘은 식구들이 얼마동안은 헤어지지 않고 그곳에서 비벼대면서 살았다. 시동생은 연세대 경영학과에, 큰 생질은 인하대 도예공학과에 다녔다. 얼마 후 큰 생질이 군대에 가고, 작은 생질도 졸업하여 우리 집에서 나갔다. 생질들이 떠난 후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막내 시뉘가 대신 올라와 같이 살았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나이 70이 된 작은 생질은 한 달에 한 번씩 바리바리 선물을 싸갖고 찾아와, 외삼촌 외숙모에게 밥을 사곤 한다.
72년 2월 19일 아들이 태어났다. 사내아이라서 그랬는지 입덧도 사납지 않았고, 자랄 때도 순했다. 막내딸은 75년 12월 26일, 제 언니와 똑같은 날짜에 태어났다.
8살, 6살까지 살았던 위의 두 아이에게는 모래내 집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남아 있다. 큰 아이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성함도 기억하고 있다. 아들아이는 평생의 친구가 될 아이를 그곳에서 만났다.
우리 집 건너편, 마당이 넓은 집에 동갑내기 아이, 용진이가 살고 있었다. 아들은 그 아이와 노는 것을 정말 재미있어 했다. 그 친구가 이사를 가버리자 맨날 용진이가 보고 싶다고 노래를 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가 신림동으로 이사를 갔더니 용진이네도 한 동네에 와 있어서 재회를 하였고, 지금까지 절친(切親)으로 지내고 있다.
74년, 그 집에서 넷째시뉘가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은행에 다니고 있었는데, 단골 고객 중한분이 자기 남동생을 중매하여 혼사가 이루어졌다.
남동생은 ROTC 장교로 복무한 후 제대하여 자력으로 취업하였다. 이제 한 짐을 덜었다고 좋아 하던 중 어느 날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다. 대학시절에 독서 클럽 회에서 만나 교제 하던 친구였다. 여자 친구가 찾아온 이유는 결혼을 하여야겠다는 것이었다. 그 때 처녀 총각 나이는 26세였고 여자는 중학교 교사였다.
우리생각으로는, 남자 나이 26세는 급하지 않아서, 시동생이 좀 더 돈을 번 후 결혼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난색을 표했다. 그녀의 말인즉 신부인 자기 나이가 과년하여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고, 집에서도 재촉하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혼 하게 되면 시댁에서 얼마나 도와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를 붙잡고 우리 사정을 말하였다. 시댁에서는 농사를 지어도 쌀 한가마를 보태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며, 이 집도 시댁에서 해준 것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장만한 것이라고 했다. 시동생 시뉘도 형님이 가르쳤기 때문에 더 이상의 도움을 줄 여력이 없다고 말해서 보냈다. 그녀는 많이 실망하고 근심하며 집을 나섰다.
장남에다 종손인 사람에게로 시집온 며느리가 고향집에 자주 가뵙지 못하는 것은 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 당시에는 양력설 날은 놀았지만 음력설은 공휴일이 아니었다. 시골에서는 음력설을 쇠셨고, 남편은 직장을 나가니, 나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추석에 내려갔다 온 적이 단 한번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그 때 느꼈던 것은 시골은 도저히 못가겠다는 것이었다. 내려가는 것도 힘들뿐 아니라 밥 짓고, 물 긷고, 불 때는 일도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태어나고 자란 곳이 서울이었다. 잠시라도 농촌을 구경한 것은 1,4 후퇴 때 외가 댁 근처로 잠시 피난 가 있을 때뿐이었다.
‘차라리 합산을 하자.’ 하고 마음을 먹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나는 시아버님께 문안 편지를 쓸 때마다 집을 팔고 올라오시라는 이야기를 했다.
집이 너무 커서 작자가 없다는 회신 만 주시더니 77년 봄에 드디어 집이 팔렸다고 올라오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부모님이 오시면 식구가 열 명이 되고, 살림살이도 많아지기 때문에, 새로운 집이 필요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또 한 번의 이사를 하게 되고, 치열한 삶이 펼쳐지는 신림동 집에서 34년을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