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불교를 만나다.]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상대를 알고 싶은 욕망서 나오는 감정이 사랑
사랑, 알고 싶은 마음
해마다 새로운 학인이 들어오면, 기수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학장으로서 고민이 많다. 그동안 목우회(牧牛會)를 비롯하여
심우회(尋牛會), 견우회(見牛會), 우림회(牛林會) 등의 이름을 지어왔다.
주로 마음을 상징하는 소 우(牛) 자가 많이 들어있는데,
불교대학이 마음 공부하는 도량이라는 의미를 담고 싶어서였다.
올해는 마음 닦는 길을 명쾌하게 제시한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 있는 ‘단지불회(但知不會)’를 기수 이름으로 정했다.
글자 그대로 ‘다만 모른다는 것을 알라’는 뜻이다.
과연 이 말에는 우리의 삶과 불교, 혹은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성은 상대가 마음에 들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백을 받아주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신이 나를 얼마나 안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느냐’며 핀잔을 준다.
여기에는 사랑이란 상대를 충분히 안 상태에서 나오는 감정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인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것이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완전히 알았을 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알고 싶은 욕망에서 나오는 감정이다.
한마디로 알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알고 싶다는 뜻이다.
이름은 무엇인지, 취미는 어떻게 되는지,
어떤 음식과 음악을 좋아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알고 싶은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공부나 수행 역시 알고 싶은 욕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이때 나오는 감정이 바로 오만이다.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공부뿐만 아니라 사람 간의 관계 또한 망치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번에 소개할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는 남녀 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사랑 노래지만,
이를 통해 알고 싶다는 욕구가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성찰하도록 해준다.
1984년 열린 제5회 MBC 강변가요제는 우리 가요의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촌스러운 파마를 하고 무대에 등장한 작은 체구의 여성이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고 가요계의 전설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녀가 바로 ‘J에게’를 불러 전국을 강타한 이선희다.
당시는 4막5장이라는 팀으로 출전했는데,
이선희가 치마를 입고 무대에 오른 보기 드문 장면이다.
항상 바지만을 고집하는 가수,
보이시한 매력으로 여성 팬이 더 많은 언니부대의 원조는 이렇게 탄생했다.
지금 봐도 웃음이 이는 이선희의 파마머리는
당시 가요제에 나가는 것을 부모님께 들킬까봐 하루 전날 급하게 했던 것이라 한다.
그 덕분에 위대한 가수와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의 파마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J에게’가 크게 성공을 거둔 이후 가수 이선희는
모두가 알다시피 히트 제조기라고 불릴 만큼 발표하는 곡마다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
‘아! 옛날이여’를 비롯하여 ‘갈등’, ‘소녀의 기도’, ‘갈바람’, ‘나 항상 그대를’,
‘한바탕 웃음으로’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메가 히트곡을 발표하여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신곡을 발표하면 대중들은
당연히 각종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할 거라 믿었고
이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현실이 되었다.
이번 주제인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는 1986년 발표한 3집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노래 역시 KBS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하고 골든 컵을 차지했으며,
MBC 라디오 음악차트에서는 15주 연속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노래는 1976년 작곡가 김희갑이 만들고
가수 김일우가 부른 ‘가을 나무 사이로’가 원곡이다.
이후 ‘눈동자’, ‘아득히 먼 곳’으로 잘 알려진 이승재가
1984년 같은 제목의 곡을 리메이크했으며, 김희갑의 부인 양인자가
가사를 새롭게 쓴 ‘알고 싶어요’를 이선희가 발표하여 크게 히트한 것이다.
2014년 10월 한국갤럽이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 중
가수 부문에서 이선희는 조용필에 이어 2위를 차지하였다.
그녀가 가요계에서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1절 노랫말이다.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 나의 사랑을 믿나요 /
그대 생각 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모른다는 자각
누군가를 사랑하면 가수가 노래한 것처럼 상대에 대해 많은 것이 궁금해진다.
달 밝은 밤에 누구를 생각하는지, 그대의 일기장에 내 얘기도 있는지,
나를 만나 행복했는지 정말로 알고 싶다.
그 가운데 내가 사랑하는 만큼 상대도 나를 사랑할까 하는 점이 제일 궁금할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가 나를 좋아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궁금증은 내가 상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만약 사랑이 이루어지고 서로를 아주 많이 알게 되면, 이러한 질문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무언가를 알고 싶은 욕구는 철학과 종교의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강조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다니자
누군가 그에게 너는 너 자신을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때 그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흔히 ‘무지(無知)의 지(知)’라고 알려진 이 말을 통해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할 수 있다.
그래야 진정으로 알고 싶다는 마음을 내고 공부다운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눌스님 역시 <수심결>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다만 모른다는 것을 알라(但知不會).”
음미할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글귀다. 그렇다면 왜 모른다는 자각이 중요할까?
반복되는 말이지만,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착각이나 혹은 자만의 감정이 튀어나온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자신의 배로 낳았으므로 자식들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으면 자식이 학교폭력을 당해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자식들 역시 홀로 되신 아버지는 우리들만 있으면 행복할 거라 생각하기 쉽다.
그렇게 믿고 있다면 아버지가 얼마나 외롭고 이성 친구를 원하는지 알 길이 없다.
이 모두 상대를 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런 점에서 지눌스님이 강조한 ‘단지불회(但知不會)’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마음 닦는 (修心) 공부 역시 자신이 모두 안다고 생각하면,
굳이 열심히 수행할 이유가 없게 된다. 공부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이 때 필요한 질문이 바로 ‘이 뭣고(是甚)?’라는 화두다.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내가 진리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자각할 때만 나올 수 있는 문제의식이다.
이 질문을 시작으로 진짜 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지눌스님은 다만 모른다는 것을 알면,
‘이것이 곧 견성(是卽見性)’이라고 강조하였다.
선(禪)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견성이 무지에 대한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흔히 신심(信心), 즉 믿는 마음이 깊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 역시 알고 싶은 마음이 기준이 된다.
불교에서는 붓다(佛)와 가르침(法), 승가(僧) 삼보(三寶)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불교의 모든 의식이 삼귀의(三歸依)부터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붓다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중생들을 위해 어떤 가르침을 펼쳤는지 알려고 했을까?
불자들이 이웃 종교에 비해 불서를 많이 읽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혹여 복을 빌기 위해 절에 다니면서 신심이 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이처럼 신심은 단순한 기복이 아니라 알려고 하는 마음에서 나오며,
이는 곧 모른다는 자각이 전제될 때 가능한 일이다.
지눌스님이 강조한 ‘단지불회’가 공부하는 이들의 지침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불교대학 36기 이름을 단지불회로 지어놓고
어떻게 하면 그 의미를 쉽게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짧은 세 문장으로 압축해보았다.
“너를 잘 몰라. 그런데 알고 싶어. 네가 좋으니까.”
여기에서 ‘너’는 사람이나 진리, 신앙이 될 수 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알고 싶은 것이다.
첫눈에 반한 여인을 좋아하니까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은 것이다.
종교적 진리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궁극적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깨칠 수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한다.
잘 안다는 자만심을 내려놓고 모른다는 겸손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에 대한 겸손, 진짜 공부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혹여 잘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노래를 들으면서 지금의 나 자신을 한번 점검해보자.
2023년 7월 4일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불교신문